[ ] 운동이야말로 부동성에 선행하는 것이며, 위치와 변위와의 사이에는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의 관계는 가능한 여러 가지의 관점과 사물의 실재적인 불가분성의 관계인 것이다.
[ ] 절대는 직관 안에서만 주어지며, 다른 나머지는 모두 분석과 관련이 있다. 직관이란 분석을 통해서 대상의 내부로 옮겨가 그 대상 안에 있는 유일하고, 표현될 수 없는 것과 합치하는 공감이다.
[ ] 직관이란 말하자면 실재의 더욱 내부적인 것과의 공감인 것이다....형이상학적 직관은 그런 종합과는 판연히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경험의 일반화와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지만 총괄적 경험이라고 정의될 수 있으리라.

[ ] 회색을 본 경험이 없으면 나는 흰색과 흑색이 어떻게 혼합되는가를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일단 회색을 보고 난 후면 회색을 흰색의 관점과 흑색의 관점에서 어떻게 고찰할 수 있는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 ] 문학상의 작품 구성에 성공해본 사람이라면 다음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후 모든 재료를 수집하고 모든 주석을 취했어도, 그 구성 자체의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에 주제의 핵심에 자리 잡으려는 노력, 그리하여 그런 다음에는 스스로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충동을 가능한 한 깊숙이 추구하려는, 때로는 어렵기조차 한 노력이다. 일단 이 충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의 정신은 자신이 수집했던 정보들이나 그밖의 세목을 재발견하게 되는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 충동은 스스로 전개하며, 열거하게 되면 한없이 늘어설 용어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분석한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이 용어들은 더 많이 발견된다.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게 된다....이 무언의 것은 사물이 아니라 운동에의 격려이며, 그것은 무한히 확장될 수는 있지만 단순성 그 자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직관이란 이런 종류의 것인듯 생각된다.

[ ] 음악의 멜로디: 우리는 움직이는 것에 부착되지 않은 운동, 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지니지 않은 변화를 명확히 지각하지 않는가?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충분한다. 그것은 사물 자체이다. 설령 그것이 시간을 요하더라도 여전히 분할될 수는 없다.
[ ]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 이 멜로디는 우리의 의식적 존재의 처음부터 끝까지 분할됨이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개성이다. 이렇게 불가분적인 변화의 연속성이 바로 참된 지속을 구성하는 것이다.....이 지속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겠다. 실재적 지속은우리가 언제나 시간이라 부르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분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지각되는 시간이다.

[ ] 우리는 철학하기 전에 우선 삶을 살아야 한다.

[ ] 변화의 문제: 이 문제는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고, 만일 사람들이 변화의 실재성을 확신하고서 그것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단순화되어, 극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철학적 난점들마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만일 감각과 의식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지각 기능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방향으로 무한히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추리할 필요도 개념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 모든 사물을 지속의 상하로 보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자. 그 즉시 우리의 지각은 전기오르듯 활기를 띄며, 이 지각 속에서는 정돈되어 있던 것이 이완되고, 졸고 있던 것이 잠을 깨며, 죽어있던 것이 생명을 찾게 된다. 만일 이렇게 이해된다면 철학은, 에술이 천성과 행운을 타고난 사람에게만 그것도 아주 드물게 부여하는 만족감을 우리 모두에게 부여해 줄 것이다./ 과학의 응용은 단지 존재의 편의만을 목표로 삼으므로, 이런 과학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은 복지 또는 기껏해야 쾌락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미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다.

[ ] 데카르트 철학 및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같은 장중한 형체 뒤에 있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직관이다. 아무리 단순한 공식일지라도 이 직관을 표현하는 데 충분할 만큼 단순하지 못하다. 비교적 근사한 표현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우리 정신이 진리를 완전히 인식하는 행위와 신이 진리를 발생케 하는 작용 사이의 합치감정이다.

[ ] 인간정신의 구조는 새것을 낡은 것에 관련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취하기 이전에는, 그 새로운 것을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 ] 이 상의 우선적인 특징은 이 상이 지니고 있는 부정의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기억해보자....직관은 제지한다. 널리 인정되어온 관념들, 명백하다고 생각되어온 명제들, 이때까지 과학적이라고 지나쳐온 주장들에 직면해서 직관은 철학자의 귀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속삭인다.
[ ] 지금까지 잘못 제기되어온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실제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창조를 제작으로 전치하는 데서 발생한다. 실재는 전체적이어서 불가분적인 성장이며, 점진적인 발명, 요컨대 지속이다. 실재는 매 순간 기대되지 않던 형태를 띠면서 점차로 부풀어 오르는 고무풍선과도 같다./구체적 공간은 사물들에서 추출된다. 사물들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 사물들 안에 있다.

[ ] 작가의 영감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작품을 거기에 합당한 억양과 음성으로 크게 읽는 법을 배워하는 것이다...뉘앙스와 색조는 언제나 지성보다 미리 형성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지성 이전에 먼저 구조 및 운동에 대한 지각이 존재한다....구조와 리듬을 지시해주는 것, 또한 구절의 여러 문장들간에 있는 박자관게와 각 문장의 여러 단어들 간에 있는 박자관계를 고려하며, 사유와 정감의 상승을 끊임없이 따라가서 그 절정에 있는 음악적인 음표에 이르는 것 - 바로 여기에 화법의 본질이 있다.

[ ] 사회란 생성의 바다 여기저기에 응어리져 있는 수많은 섬들이다.

[ ] 정교한 정신 없이는 사유도 없는데, 정교한 정신은 곧 지성 안에 비친 직관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직관의 이러한 하찮은 부분이 점차 확대되어 시를 낳고 산문을 낳았으며, 처음에는 기호에 불과했던 단어들을 예술의 도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 ] 정확하든 모호하든 간에 지성은 정신이 물질에 쏟는 관심이다. 따라서 정신이 자기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어떻게 정신이 아직도 지성일 수 있단 말인가?/정신은 정신 자신을 사유할 때 반드시 물질과의 접촉에 빠져들었던 습관들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습관들을 일반적으로 지적 경향성이라 부른다./ 직관이란 정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쏟는, 그것도 대상인 물질에 집중하면서 쏟는 관심을 가리킨다.

[ ] 두뇌의 기능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로 하여금 꿈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주는 일이다. 두뇌란 생활에 대한 관심의 기관인 것이다.

[ ] 우리가 진리를 직관적으로 지각하는 순간, 우리의 지성은 자신을 회복하여 자신을 수정하고 자기의 오류를 지성적으로 형성한다. 지성은 제의를 받아들이고 검증을 제공한다.

[ ] 생이 우선한다: 기억, 상상, 이해 및 지각 등, 요컨대 일반화는 그저 쾌락을 위하여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기능들이 현재의 그것들인 이유는 그것들이 유용하며 삶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 기능들의 존재를 설명하고 필요할 때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그런 기능들로의 일상적 분류가 인위적인가 아니면 자연적인가, 다라서 그것을 유지할 것인가 수정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삶의 기본적인 사정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 ] 문제 제기는 단순한 포장 제거가 아니다. 그것은 발명이다. 발견, 즉 포장 제거는 실제로 혹은 잠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과 관계 있다.

[ ] ‘물자체‘에 어떤 명칭을 부여하더라도, 또 그것을 스피노자의 ‘실체‘로 만들건, 피히테의 ‘자아‘로 만들건, 아니면 셸링의 ‘절대‘로 만들건, 헤겔의 ‘이념‘으로 만들건, 또 쇼펜하우어의 ‘의지‘로 만들건 간에, 그 단어가 명확히 정의된 표의를 지니는 일은 별 소용없는 일이다./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고, 세계는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도달된, 미결정 내용을 지닌 개념, 더 정확히 말해서 내용이 결여된 개념, 더는 아무것도 아닌 개념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한 존재는 오직 경험 안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 이 경험은 투시 혹은 접촉이라 불리며, 물적 작용과 관련되었을 때는 직관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는다./ 직관은 밧줄을 타고 올라간다. 그 밧줄이 천상에까지 이르는가, 아니면 지구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서 끝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직관이 할 일이다....직관을 어떻게 보든 간에, 철학은 우리를 인간적 상태 이상으로 올려놓을 것이다.

[ ] 우리는 두 종류의 관념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계속 조명하면서 그 빛을 자신의 조그만 구석구석까지 직접적으로 꿰뚫고 지나가게 하는 관념이며, 다른 하나는 사유의 전 영역을 밝히면서 밝히면서 뻗쳐가는 관념이다... 그것들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을 조명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조명하는 이중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 ] 직관이 갖는 다양한 기능과 측면은 스피노자에 있어서 ‘본질‘과 ‘존재‘라는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이다/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반면 직관은 운동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것을 실재 자체로 가정한다...직관에 있어서 본질은 변화다...직관은 지속, 곧 성장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것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단절되지 않은 연속을 지각한다. 정신이 자기자신이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서부터 끌어낸다는 사실, 정신성이란 바로 이런 점에 있다는 사실, 또 정신 안에 수태된 실재가 곧 창조라는 사실을 직관은 보고 알고 있다.

[ ] 한 컵의 설탕물을 마련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할 필요성은 중요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즉 시간을 단지 자신의 추상물이나 관게 혹은 수로서만 지니고 있는 여러 체계를 우리가 우주에서 떼어낼 수 있을 때, 그 우주 자체는 전혀 다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 ] 자유행위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순수지속 안으로 돌아가 자리 잡아야만 한다...내일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그때까지 살아 지내온 삶의 전부와 아울러, 바로 그 특정 순간이 그 삶에 덧붙여줄 그 어떤 것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심리적 삶을 한 순간으로 수축시킬 때든 항상 그 내용에 변경이 가해지기 때문이다...내적 삶이란 곧 이러한 멜로디인 것이다....실재적인 진화는 조금이라도 가속되거나 감속되기만 하면 내적으로 완전히 수정된다. 진화의 가속이나 감속이 바로 이 내적 수정이다.

[ ] 형이상학이 하는 일은, 하늘하늘 날아다니면서 변화하고 살아 움직이는 나비가 자기의 존재 이유와 완성을 그 껍데기의 불가역성에서 찾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이제 고치를 풀어 번데기를 잠에서 깨워보자. 번데기의 운동성을 운동에, 번데기의 유동성을 변화에, 번데기의 지속을 시간에 되돌려 보내자. 그 때 풀 길 없는 ‘위대한 문제들‘이 껍질에 붙은 채로 떨어져 나간다./지속에 있어서 전개는 바로 이미 완결 자체가 되며, 또한 否定적인 양의 첨가가 된다...숱한 철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시간의 긍정적 속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볕뉘

0. 소개서와 요약서를 몇 권째 보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원문으로 돌아왔다. 뱅뱅도는 기시감에서 벗어나 아 제자리를 찾았구나 싶은 느낌이다. 가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무엇. 맛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맛. 저자로 깊이 들어가 그 맥락을 온전히 느낄 때 얻는 작은 통찰.

1. 베르그송이 말하는 직관은 이런 것에 가깝다. 좀더 명료해지는 무엇이다. 그는 뒤돌아서자 마자 기존의 통념과 헛갈리는 직관을 구해내기 위해 여러 묘사를 하느라 끙끙댄다. 시란 밑줄긋고 설명 백날해봐야 소용없다고 말이다. 시는 그 맛이 그 정신이 들어있다고 그 맛을 봐야한다고 말이다. 그게 직관이라고 거듭 설명한다.

2. 시간이나 지속을 설명해내기 위해서도 안절부절이다. 멜로디라는 것이 분석하고 하나하나 뜯어서 보려고 한다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체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또 뒤돌아서면 다른 개념과 섞여 오리무중이므로 설탕물을 비유한다. 기다려야 하느리라. 기다려야 그게 설탕물이니리라. 너네들은 나비를 아느냐. 번데기는? 고치는? 너희들은 나비를 온전히 보려하지 않고, 늘 고치는 어떻고, 번데기는 어떻고 지랄을 떨지 않았느냐? 그러는 것이 너희들이다. 제대로 보기는 했느냐? 자유를 맛보려면, 온전한 영혼을 맛보려고 해야지, 언제나 늘 그 자리로구나.....이리 가까이 온.....귀를 데어보련....내가 비밀을 한가지 말해주련? 알아듣겠느냐!!

3. 그는 소크라테스의 정령, 다이몬을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아니오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해주는 다이몬. 이것이 직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시의 참맛을 알게 해주고, 모든 사물의 풍요로움에 다가서게 만드는 것 말이다. 존 듀이의 ‘하나의 경험‘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싶다. 우리는 그런 맛도 그런 통찰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지고 있다.

4. 그래, 이원론으로 쪄들어 있는 우리의 일상과 삶은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래 뒤돌아서면 헛갈리고 몽롱하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므로, 쉽기 그지없는 표현들인데도 외롭고 힘들다. 간간히 안개 속에 산줄기를 보여줘서 다행이다 싶다. 철학과 과학은 나눠지지 않았어. 예술도 삶도, 죽음과 삶......등등

5. 그렇다. 그는 간절하게 다르게 사유하기를 강권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듯 같은 강물은 한번도 있은 적이 없다. 변화와 운동이 전부다. 어쩌면 미분 적분, 파동이자 입자, 양자라는 성과도 전부 운동과 변화라는데 까지 성과를 들이밀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알맞는 대유로 생각을 지속시켜보는 것이 또 다른 혜안이자, 자신의 관심사에 다른 발명을 이끌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보자. 제논의 역설에 갇혀 있는 당신의 시간 관념부터 우리에서 탈출시켜보자. 그러면 아마 당신은 당신이라는 생명을 우선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 아마. 오늘 새벽 난 가을맛을 보았다. 꿀꺽 회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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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를 그리고 싶다. 연두에서부터 깊은 푸르름까지 그려내고 싶다. 파도를 골라서 어떤 것이 마음에 들까 염두에 둔다. 거칠게 치는 파도는 자꾸 보니 왜인지 도식적인 느낌이 들어 제외한다. 무엇을 그릴까? 움직임이 조금 거세면 좋을 듯한데, 역동성과 파랑의 경계를 확장해놓은 사진들은 없을까 싶다. 자다가 깨다가 핀에 알람을 연신 챙겨본다. 그래 이게 조금은 낫겠지 싶다. 샘은 그림보다 사진을 추천했다. 그림은 추상적이기에 의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불쑥 시작을 한다. 전 작품의 블루의 경험을 살리면, 전 보다는 빨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면서 거친 파랑을 칠한다. 바탕은 여러 블루를 섞으면서 생각보다 수월한 듯 싶다. 흰 여백은 남겨둔 채 거칠게 칠하는데 색감이 그런대로 살아난다. 주제를 잡고 색감과 디테일을 살려 그리려는데, 예기치 못한 정교함이 앞을 막는다. 색감도 동선도 예민해지지 않으면 주제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물결 안의 색을 상정하고 칠하고 물줄기를 올린다. 쉬워보이던 주제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물줄기도, 흰 물결들도 나이프를 써서 두껍게 올려도 느낌이 살아나질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움직임들 사이의 변화를 눈치채기가 힘들다. 이어진 듯 끊어지는 물줄기는 꽃과 같은 묘사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무턱대고 덤빈 셈이다. 화폭을 대할 때마다 몇 가지 수를 생각해두지만 의도를 벗어난다. 물기가 섞이면 마르자 마자 의도한 색을 벗어나 있다. 위쪽의 물보라도 구름의 결을 그리듯 따라올리지만 주제와 명도가 겹쳐 부드럽게 숨을 죽여야 했다. 가운데 부분의 물결과 색을 칠하려는데 붓의 종류와 물기에 실패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면으로도 그리지 못한 셈이다. 희미한 물결들과 거스르는 물결들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움직임 전체로 파악하려는 연습이 부족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수작업을 해서 조금 살아나지만, 앞 뒤의 입체감이 부족함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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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기가 맑다. 곧 찬기운이라도 섞일 듯하다. 언제부턴가 자판, 아마 마음에 드는 자판이 맞겠다. 그것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잘 맞지 않는 어색한 키보드라면 생각도 엇박자에 잘려 진도를 나갈 수 없다.

이러게 키보드에 마음을 의탁하고 있다니 말이다. 그럴 수 있겟느냐고, 마음을 바르게 먹고 우주의 기운을 생각하면 할 수 있는지 알았다. 의지박약.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장기가 서로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의 순서만 바꾸어보아도 손은 예사롭지 않다.

문득 지난 노트북을 꺼내 이것저것 끄적여보니, 키보드의 날렵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역으로 얼마나 나쁜 글쓰기 환경에서 어좁이가 되어 자라목을 길게 빼며 손가락과 눈을 혹사시킨 것일까 하는 자각이 드는 것이다.

손에 맞는 자판을 제대로 길들여야겠다. 찬바람이 불면 좀 시원한 손맛을 봐야할 것 같다.

볕뉘. 어제부로 항생제와 부대약을 끊고, 이담제만 먹고 한 달에 한 번 진료만 받으면 된다. 걱정했던 조직검사도 양호하니 걱정말라고 한다. 짧은 병상기간이었지만, 소도시의 병원맛, 의사맛, 병동맛을 제대로 느꼈다. 굳이 냉대가 공존하는 중대형도시의 병원을 선호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환자의 한호흡을 품고 대화할 줄 아는 관계자들의 맛이 깊다. 높지만 시끄럽지 않은 소도시의 말맵시에 빠져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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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작품은 제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실험이다.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고 예술을 안전한 것,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시작하는 제로 상태가 미학적 상태, 미학적 자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예술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때문에 실험이다. 그것은 미학적 자유의 상태로부터 작품 창조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이 가능성은 미학적 상태가 해방된 힘의 도취 상태(니체), 무작품성의 상태, 형식 부재의 상태, 작품부재의 상태(푸코)이기 때문에 불가능성이다. 96


볕뉘.

0. 예술의 힘 1부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학적 힘을 다시 요약한 듯한 인상를 받는다. 읽기가 어렵다. 반면에 경험으로 예술은 읽기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1. 멋이란 무엇일까? 맛이란 무엇일까? 빚에 점하나 찍으면 빛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멋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그러면 예술은 무엇인가? 맛은 일상에서 떨어진 것일까? 멋은 일상에서 떨어져야 하나? 예술은 저 멀리 범접할 수 없는 것인가? 소수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인가? 맛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데 왜 예술은 그렇게 일상의 번외로 떨어뜨려 놓은 것일까? 다 한 통속은 아닐까? 잘못된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은 아니었을까? 못된 것은 우리 삶의 패턴은 아닐까?

2. 일은 무엇일까? 점하나 찍어보자. 얼. 얼은 차리고 있는가? 얼과 일이 만나기나 한 것일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는가?

3. 점하나 찍는 일. 상상력이란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고, 창의력이라는 것이 별똥 부대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 일까? 여기저기, 누구나 혈안이 되어 아니면 돈에 매여, 아니면 돈을 향해 올인을 해버리는 것일까?

4. 시인을 좋아해보자. 왜냐고 묻지 마라. 좋아해보자. 왜 시인이 당신과 다르다고 여기는가? 그래 맞다. 반성적 사고 일게다.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족적을 돌아본다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뭔가 다른 것은 바로 잡을 수 없다. 끙끙대고 한 발 거리를 두기도 하고, 더 가까이 다가서기도 해야만, 벙어리같은 자신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표현을 얻게된다. 아주 조금....다듬고 다듬고.....

5. 다듬고 다듬는 과정이 상상력이라고 한다. 일의 다른 기획에 대한 감에서 시작할 수도, 먹고싶은 맛을 향하는 돌진, 원하는 색깔을 입히고자 하는 노력이 다 상상력이자 창의력인게다. 통째로 온전한 경험을 해본 자만이 일에 치이지 않고, 그 맛을 또 보려고 한다. 일상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하는 직관과 멋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6. 자신을 영도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모임도 영도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굳이 단체라는 것을 봐준다면 그도 그러하도록 사유와 행동의 맛을 느낄 줄 아는 자가 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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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속** 내과에 가서 마지막 진단결과를 들었다. 선종이고 조직검사한 것도 가벼운 염증이었던 것 같다고 말이다. 이래저래 속을 차렸다.    수액이 아니라 음식물을 섭취하니 무척 회복 속도도 빠른 듯 싶다. 새벽녘 기침을 했는데 뒤쪽 내장까지 한꺼번에 꿈틀하는 듯싶다.   후장사실주의자들 말이나 내장을 울리는 감동은 질이 다른 것이라고 한다. 우리 대부분은 인스턴트 감정에 절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었 는지도 모른다. 퇴원수속을 밟으며 느낀 가장 인상깊은 것은 후각이었다. 카페와 빵집에서 터져 나오는 향기는 마치 한 가닥 한 가닥씩 다른 향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온몸이 반응할 수 있다는 것, 온몸의 감각을 곧추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한 가닥 한 가닥을 건져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병상에서 본 인상깊은 책은 프랑스 한 조향사의  글이었다. 아니 그의 편안한 사유와 사유방식, 그리고 다른 부문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마음들이었다.


2. 

‘기술편향‘ - 드론 밧데리가 터지고 추락하고 사생활을 침해하는 아침뉴스를 접했다.

100여개의 연구과제에 슬금슬금 1~2개 부작용 연구를 끼워넣는다. 이게 아니라 같은 균형과 비중으로 만일을 생각하는 기술을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건 인공지능이란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안티ㆍ기술‘, ‘반ㆍ기술‘ ‘포월ㆍ기술‘ 멋대로 이름을 붙여본다. 그런다고 달라지는게 있겠냐만 그런게 기술의 진면목이고 멋이지 않을까 싶다. 멋있는 기술이나 멋있는 기획, 멋들어진 예산투자를 보고싶다. 기술맹목의 시대 ‘반기술‘할당제라도 꿈꾸어보면 싶다.

볕뉘. 곁의 대학, 대학원 친구들 얘기를 듣다보면 AI에 학교가 올인한 것은 알겠는데, 학생들의 사고가 저렴해 듣기조차 힘들다. 집단폐사가 염려될 정도다. 아직도 이런 논리다.

˝사람이 뭐 필요해 갈아 끼우면 되지/ 장자가 그랬데 수레바퀴 없애라구. 예전부터 기술을 반대하는 부류는 늘 있었다고 기술이 다 망친다구 ㆍㆍㆍ˝


볕뉘.

0. 아침 뉴스를 보다가 그림자처럼 기술의 몸뚱아리에 붙은 기술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하는 것이 진짜 기술은 아닌가 싶었다. 너무도 쏠림이 커서, 다들 부작용을 연구합네 싶은데, 정작 그 편향과 사후 약방문식의 연구는 이미, 기술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1. 오히려 메인보다 더 큰 메인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의도적으로라도 말이다. 그러니 인문사회-예술-생태의 속성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 주된 기술을 포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도된 자본주의 기술의 속성 상,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 그 기술의 수명주기도 그만큼 단축될 수밖에 없을 듯싶다.

2. 포** 학생들이 자주오는 책방에서 머무르다 보면 가끔 그들의 대화내용이나 속맘을 읽을 수 있는데, 움직이는 방식이나 시스템을 살필 수 있다. 아마 AI가 돈도 되며 가능성이 많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기술을 움켜쥘려고 하지 누가 내놓으려고 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선을 넘는 방법을 살피지 않고 미리 예측하지 않는다면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3. 조향사의 글 역시 예술은 경계가 없으며 잡히지 않는 느낌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노력하는 것임을 잘 묘사해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능도 아니며, 손끝에서 맘끝에서 조금씩 자라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4. 이래저래 책읽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듯하다. 예전과 같은 템포는 아니겠지만, 몸도, 마음도 글도.....조금씩 느낌들에 예민해져가는 가을이 왔으면 한다. 벌써 며칠이 지나면 푸른새벽에 찬 바람을 한공기씩 맛볼 수 있는 입추다. 여름이 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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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1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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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2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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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2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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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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