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과 소통의 대립

[ ] 언표가 표현하는 것은 항상, 결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재생산되지 않은 것, 그리고 항상 가치(진, 선, 미)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177 차이를 창조하는 것은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창조하고 다성악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표현의 존재방식을 바흐친은 복수언어주의라고 부른다. 그와 반대로 정보와 소통의 실천은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는 힘들로부터 성립한다. 그 힘들은 발화, 언어, 의미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파괴하는데, 바흐친은 그와 같은 존재방식을 단일언어주의라고 부른다....바흐친은 거의 모든 철학과 언어학이 무시해 왔던 힘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힘들이란 ‘탈중심화하는 원심적인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 우리들은 저항과 투쟁, 창조와 만난다. 그리고 바로 이 원심적인 흐름안에서야말로 언어적 다양성이 구축되는 것이다. 178, 179

[1 ] 대화는 매우 미세한 현상이지만 끊임없이 넓어지는 활동이고, 사회의 모든 형성과 변형의 원인이다. 즉 대화가 야기하는 것은 언어적인 변형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심미적, 도덕적인 변형인 것이다. 이를테면 산호 벌레가 산호초를 만들어 가는 것과 같은 대화 과정의 이러한 중요성은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사회적 변형의 뿌리) 182 대화는 바로 경제학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고, 글자도 쓰지 않으며, 인쇄물도 전보도 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관계 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3 말한다는 행위는 타자의 말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일종의 대화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의미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현과 억양, 목소리에 의해 시작된다. 184 우리의 말 안에는 모든 목소리들이 반향하고 있다...타자의 말과 관계를 맺는 일은 항상 사건과의 만남이어서 단순한 (언어학적인) 교환이나 (간주관적인) 인식인 것은 아니다. 185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화는 적어도 그 반은 타자가 발화한 말로부터 성립한다. 사람들이 전하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논의하는 것은 ˝타자들이 말하는 언어와 여론, 주장, 정보인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반대하기도 하고, 납득하기도 하며 참조하기도 한다. 186 정보와 소통에 관한 현대의 여러 이론들은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론들은 언어의 교환을 대화적인 사건으로서, 또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의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으로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

[ ] 여론은 욕망과 믿음을 형성하고 변형하는 무한소의 힘을 수반하며, 그 힘에 의해 다양화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그 다양성에서 모든 잠재성을 탈취하여 단일 언어를 강조하는 수단이나 정보 소통을 전달하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가능세계의 공통적인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역능 모두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187 철도, 여행...상업... 사람들의 행위 사이에, 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유대(이는 비인간적인 유대여서, 공동체와는 관계가 없다)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유대에서 생겨났던 공중은 이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도, 식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존 듀이 188 시간의 테크놀로지 장치는 통제사회에 특유한 동력이다. 그것은 왕권사회의 기계적인 동력과 규율훈련사회의 열역학적 동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장치는 떨어진 장소에 있는 다양한 정신적 습관과 그 구성요소인 욕망과 믿음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198 시장이 가져온 ‘무한‘의 선택은 그러한 정치적 양자택일(선인가 악인가)이 협소한 틈 안에 있다. 왜냐하면 시장도 또한 동일한 전략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가능성의 창조를 착취하고, 문제를 구성할 능력과 사회적 힘들을 분리하며, 미리 준비된 해결책을 강요하는 전략이다. 201

[ ]지적소유권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인클로저를 시도하고 있다. 신경제의 시도는 독점하여 계층화와 중앙집권화를 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상성의 논리가 희소성의 논리와 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5 네트워크가 현실화하는지 어떤지는, 타르드의 낙관주의에 의하면 배치와 결합을 조금씩 만들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 망의 구성은 이미 언급한 두 개의 축, 즉 네트워크와 패치워크에 의해 조직된다. 거기에서 모나드들은 기호와 소리, 이미지의 흐름에 편입된다. 그 흐름은 분기하는 것도 있다면(발명), 그대로 넓어져 가는 것도 있다(반복) 206 개인을 ‘분할가능한 것‘으로 변환하고 공통재를 시장화하려고하는 계획을 그 눈앞에서 가로막는 것은, 특이성을 만들어 내고 세계를 분기시키며 가능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원심적 힘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매우 단순한다. 그것은 모나들이 고객이 아니라 협력자로서 활동한다는 전략이다..바로 협동 그 자체에 수반되는 역동성이다. 협동은 이제 에고이즘의 균형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며, 공감과 우애, 슬픔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업 논리를 밀어붙인다는 것은 뇌의 협동을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체성에 있어서 활동한다는 것이란 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209

[ ]권위주의적 발화 (종교적 발화, 도덕적 발화, 성인의 발화, 교수의 발화...그 발화들은 이른바 ‘아버지들‘의 발화이다...)는 우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자유로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수렴하거나 발산하고, 다가가거나 떨어져 나오기도 하는 유희는 ˝여기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211 설득적 발화의 방법은 ˝타자의 발화가 최대의 상호 작용을 발휘하는 장소를 만들어 낸다. 그곳은 문맥을 통해 대화가 쌍방에 영향을 주는 장이고, ‘낯선‘ 발화가 자유로이 창조적인 혁명을 가져오는 장이며, 이행이 단계적으로 행해지는 장, 경계와 유희하는 장이다. 212 기도할 때에는 교회의 언어를, 영주와 말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의 언어를,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 말할 때에는 또한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각각 닫혀 있었고, 상호 교환도 없었으며, 주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추어 주지도 않았다. 215 바흐친은 자본주의의 힘이 당시의 다양체를 자본/노동의 이항대립으로 환원했다는 점만을 보지 않았다. 그는 또한 그 파괴적 과정이 자본주의 이전 러시아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세계와 충돌하면서 차이의 거대한 에너지와 잠재성을 해방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현대는 비서구적인 다양한 세계를 자본주의에 의한 통일화와 중앙집권화, 단일언어화로 향하게 하려는 의지가 관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216

[ ] 바흐친에게 자기와 타자의 관계는 다양한 가능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의 관계로, 또는 언표에서의 다양한 가능성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결국 발화에는 의미내용으로서의 측면(개념으로서 발화)과 표현으로서의 측면(이미지로서의 발화), 그리고 그 감정-의지의 양상을 전달하는 측면(발화의 어조)이 있다. 222 세계와 지각, 정동, 사고, 객관성에 구조가 부여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의 출현에 의해서다. ˝타자만이 유일하게, 나에 대해 타자를 맞이하는 기쁨, 타자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슬픔, 타자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준다. 의지와 감정에 관한 가치는 모두, 어떤 타자와 관계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가치들은 나만의 삶에서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의 중첩을 타자의 삶에 부여한다. 이러한 사건이 가진 성질은 나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시간 안에서 타자의 존재를 품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나와 타자 사이에는 원리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사건적 또는 가치론적 질서에서 유래한다...그래서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나도 아니고 고유의 의미에서의 타자도 아니며 나와 타자 양쪽에 앞서 존재하고 있는 사건적 관계인 것이다. 223

[ ]바흐친은 언어학과 철학이 무시하고 있었던 존재의 새로운 잉여, 즉 그가 ‘대화성‘이라고 부른 영역을 구출한다. 이 영역에서 관계는 의미 관계이다. 의미는 언어와 기호에 의해 표현되지만 언어와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다...감정, 가치판단, 표현은 언어에서의 어구와는 많은 점에서 관계가 없고, 구체적인 언표에서 살아있는 사용의 과정에서밖에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흐친에 의하면 존재의 영역은 ‘응답과 물음‘의 영역이고, 그것들은 ˝동일한 논리적 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하나의 동일한 의식 그대로 정지해 있지 않는다. 모든 응답은 새로운 질문을 산출한다. 224 의미는 물리적 물질적 현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것을 바랄 수도 없다. 의미는 물질적 힘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의미는 물질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는 어떠한 힘보다도 강한 힘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실존적인) 요소를 털끝조차도 변화시키지 않지만 사건과 현실의 의미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면서도 완전하게 별개의 의미를 손에 넣는 것이다.(존재에서의 의미 변형) 226

[ ] 바흐친은 외부(잠재성)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즉 ˝모순어법을 이용하여 ‘로부터의-외부‘의 장소를 내부의 장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바로 삶으로부터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삶의 내부에 있는 삶(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인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삶을 그 외부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부에서는, 삶은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삶은 외부를 향하며, 삶 그 자체의 외부와 의미의 외부에 있는 활동을 요구한다. 이 외부의 삶에 다다르는 수단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작업인 것이다.˝ 227

볕뉘

0. 2시간이 넘는 녹취를 풀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놓는다. 하지만 나눈 얘기의 감정의 고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거나 응어리진 대목의 호흡은 역시 기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면서 그가 옮겨 놓고 싶은 감정과 대목, 그 호흡을 이미 알고 있다. 활자화된 녹취록에서는 그 감정의 결을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그 녹취는 그 감정의 진도, 그 매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재서술될 수 있다. 그러니 여러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 바흐친이 궁금해졌다. 이 친구가 읽는 모습도 그러하지만, 좀더 달리 다른 언중을 느끼고 싶기도 한가 보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 대한 대목과 달리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타자에 대한 개념도 레비나스와 달리 손에 쥐어질 듯하다 싶다. 물론 오독일 것이지만 몹시 궁급해졌다.

2. 정보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정작 대화가 무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넘어가다 걸린 가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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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과 신모나돌로지 (소통, 소비, 광고, 가능성의 생산,창조, 자본주의): 저 광고 메시지를 텔레비전 시청자에게 수용시키려면 그들 뇌를 활동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방송은 사람들의 뇌를 활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107 기업은 모나드 (소비자와 노동자)와 세계(기업) 사이의 상응과 조합, 교착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109 통제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실효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그 조건에 다라서 가치창출을 행한다...자본주의란 생산양식이 아니라 (양식으로서의) 세계의 생산이라고, 결국 자본주의란 일종의 마니에리즘manierisme이다. 110 소비라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우선 어떤 세계에의 소속과 가맹을 의미한다....그것은 어떤 종류의 장식이고 자세이며, 식사법, 소통 방식, 사는 방식, 이동 방식, 태도 방식, 화술 등을 장려하고 요청하는 것이다. 111 오늘날 표현기계에 대한 투자액은 ‘고용‘과 ‘생활수단‘에의 투자액을 크게 상회한다. 113 비신체적 변형이 생산하고 있는 것은 (혹은 생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각의 변화이고 가치관의 변화이다. ...광고의 표현은 세계와 우리의 실존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중합시킨다. 다만 그 ‘가능성‘은 광고에 의해 어느 정도 유혹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명령인 것이다..광고는 우리 마음 안에 마치 음악의 변주 주제와 후렴처럼 반향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새 광고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에 놀라는 것이다. 114, 115 사람들 사이에는 극단적인 두 개의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주체성 내부에 정신과 신체의 변조가 명확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변조는 이미 우리가 말했던 논리, 즉 ‘사치스러운 주체성‘과 ‘쓰레기 같은 주체성‘이라는 두 개의 문법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인류의 4분의 3이 비신체적 변형에 용이하게 액세스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체적 변형에서 배제되고 있다.

[ ]현대 자본주의는 공장에 의해 넓혀지는 것이 아니다. 공장은 현대 자본주의에 종속만 되어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선 언어와 기호, 이미지에 의해 확장된다. 그리고 오늘날 표현기게가 선도하는 것은 이제 공장이 아니라 전쟁이다. 117 현대 자본주의는 수목 모양의 여러 분기점을 수반하고 있다. 상상도 불가능한 다양한 세계가, 현실 세계와 함께 세계 안에서 주름을 펴나가듯이 전개되고 있다....존재하는 것은 차이화하는 것이다. 117 자본주의는 (단수형의) 주체도 객체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산하는 것은 변조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관리되고 끊임없는 변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복수형의) 주체와 객체이다....자본주의가 다양한 주체와 객체의 끊임없는 변용 (뇌의 변조, 즉 기억과 주의력의 포획)을 통해 그 모두를 실행하고 있다....텔레비전이 사람들을 변형시키는 것은 규율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델의 부여에 의해서이고,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방에 의해서라고 말이다. 텔레비전이 부여하고 있는 것은 몸짓의 몸짓이고, 가능한 행위에 관한 행위이다. 118, 119 기업에 의해 표준화된 ‘세계‘를 표현할 ‘가능성‘(상품 혹은 서비스)은 미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와 노동자, 소비자는 사건에 앞서서 존재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들은 사건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120

[ ]규율훈련이 우선인 곳에서는 사건은 부정적인 것으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예측과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노동의 표준화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기업 활동이 고객과 직접 결부되면, 그 활동은 이제 예측과 계량에 완전히 따르게 될 수 없게 된다. 121 통제란 불확실성과 변화에 관해 이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불안정성에 직면한 활동인 것이며, 모든 것을 ‘소통적‘인 몸짓으로 행하는 것이다....현재 우리는 조작operation의 시대를 지나 작용의 시대로, 집단노동의 시대를 지나 네트워크 활동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122 모든 생산은 서비스 생산이 되었다. 결국 생산은 ˝고객과 이용자와 공중이 장래 어떠한 활동의 성질과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정하는 조건˝의 생산으로 변형되었다. 그 궁극 목적은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123 기업은 소비자를 위한 세계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세계도 창조해야 한다. 현대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속한다는 것, 즉 그 욕망과 믿음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124 샐러리맨은 자유로이 고무줄을 늘일 수 있다. 이제 그는 갇혀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좋을 대로, 자신의 기량에 따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돌아다니며 일하고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무줄이 그를 끌어당긴다. 그를 정기적으로 되돌리는 힘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야 한다....일정표와 마감의 압력이 예전의 타임 테이블에 의한 단순 노동 관리를 대신한다...샐러리맨은 그 통제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결국 그 통제는 밤낮으로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127 우리가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단 한 종류의 여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항상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여론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거기에는 항상 복수의 힘이, 복수의 모나드가 존재하고 있다. 131 시장은 공중과 고객을 포섭하는 장, 또는 구성하는 장이라고 생각해도 지장이 없다. 132

[ ] 모든 활동은 그 일부에 발명을 포함하며 또한 재생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활동이라는 개념이다. 어떠한 활동도 이제 도구적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건의 논리에 따르게 되었다. 139 프리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는 협동의 힘은 그 ‘협력자들‘의 활동에 수반한 인지적 성질보다도 발명의 시공간을 여는 능력에 더 관련된다. 141 기업은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착취를 행한다. 그것을 위해 사회를 위계화하고 공중과 고객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만들어 내고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가능성의 힘을 사회로부터 탈취하려고 한다. 142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비물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그 활동의 윤리적 정치적 형식이고 그 조직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는 사실은, 포스트사회주의 운동에서 단순히 아니야라고 답해서 끝나는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들은 우리가 (제도와 경제, 소통에 관계하는) 발명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인지적이며 비물질적인 노동에 의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145 상황의 특수성에서 출발할 때, 실험은 다양한 권력관계로부터 이루어진 전체를 횡단하여 질문하고 그 외부로 열리는 행위가 된다...(제약산업)..노동운동의 논리가 이미 실효성을 잃은 것은, 그 운동이 고전적인 조합정치와 그 코드화된 관계들로부터 탈주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맑스의 관점이라면 부의 새로운 기반으로서 ‘노동 그 자체‘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과 테크놀로지의 진보, ‘사회적인 협동과 유통‘의 발전, 요컨데 ‘사회적인 개인의 발전‘을 생각해야만 한다. 요컨대 ˝교환가치에 기반한 생산은 붕괴했다˝는 것이다. 148

[ ]서로 협동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뇌의 협동의 구성과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관계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대립의 논리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질적인 힘을 결합하고 공통으로 생산하고 공통으로 적합하게 만드는 능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다양한 힘이 공통으로 새로운 관계의 변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재성의 새로운 평면을 형성하여 ‘서로 이용 가능하기 위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길‘을 발견하는 것에 의해서다. 150, 151 반복에 의한 발명은, 경제학자와 맑스주의자들이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기쁨은 슬픔과 구별되어야 한다..그것은 규격화되는 반복의 비참으로부터 탈주하고, 발명의 기쁨을 증대시켜 노동의 필요성을 줄이며, 협동의 자유를 증대시키기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와 같은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 또는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뇌의 협동은 스미스적인 또는 맑스적인 공장에서의 협동과는 달리, 공통재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공통재란 인식과 언어, 과학, 예술, 서비스, 정보 등을 말한다..예술작품은 그 반은 예술가의 활동의 결과이지만 다른 반은 공중(감상자, 독자, 청중)의 활동의 결과이다. 153

[ ]공통재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에 의한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의 결과이다. 그것은 ˝무상임과 동시에 끝없이 분할 불가능한 것˝이다...(희소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확산되고 공유되면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153, 154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신앙을 소비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유명한 예술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술작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가? 모든 공통재의 소비는 그대로 새로운 지식과 예술작품의 창조와 연결된다. 이러한 소비는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라 별도의 새로운 지식과 예술작품을 산출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155 프리 소프트웨어에서 무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도 원코드의 입수, 수정, 배포와 소프트웨어의 개작의 자유를 가져오는 여러 가능성이 중요하다... 프리 소프트웨어의 창조와 배치, 협동은 고객이라는 틀을 파괴하고 활발한 조직생성을 위한 조건의 창조를 커뮤니티에 가져온다.(이것은 뇌의 협동에 의한 논리다) 그와 같은 방식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고객을 구축하려는 기업의 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의 전략을 만들어 낸다...부가 무료라는 것은 그 부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의 측정과 분배의 원칙이 경제학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결국 희소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58 공통재(문화, 교육, 연구)의 창조와 실현의 본질과 그 창조와 실현에 참여하고 있는 공중(학생, 관객, 환자, 소비자 등)의 협동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문제 삼았다. 결국 그 투쟁들은 (공통적인) 부의 창조와 분배, 그 융자, 새로운 협동에 여러 주체성이 참여하는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그것에 필요한 제도적 테크놀로지적 장치를 문제시했던 것이다 162 활동은 발명과 재생산, 창조자와 이용자,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지적 소유권이라는 제도가 만들어 낸 벽을 파괴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뇌의 협동을 확대하고, 거기에 참가한 다양한 주체를 새로운 민주주의 개념 안으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새로운 민주주의는 고객과 이용자, 실업자라는 기존의 틀을 비국가적인 새로운 공공영역에서의 정치적 활동자라는 틀로 변형해야 할 것이다. 164

[ ]기억은 이제 습관도 아니고 무의식의 자동운동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기억이며, 이질적인 것을 모으고 발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로부터 타르드는 ˝노동과 발명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67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행위가 노동과 구별되는 이유는, 전자가 감각에 관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간에 관계된 힘으로서의 차이의 활동(발명)과 반복, 재생산활동(모방)을 혼합하면서 배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기억에 의한 행위는 새로운 것(이미지, 감각, 관념)을 창조할 능력과 함께 그것을 무한하게 반복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그것은 ˝이미지와 감각, 관념의 한없는 연쇄이다˝) 168 자본주의는 일종의 반-생산의 힘이며, 뇌의 협동과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들 - 생물학적 조건도 포함한다-을 파괴하는 힘이 명확해진다. 무엇보다도 우선, 개인적 집단적 특이성을 만들어 내는 재생산의 역능을 파괴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에 의한 차이와 반복이 구성 과정을 계속 측정하기 때문이다...그 상태들은 집단화한 뇌의 협동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 수단은 주체성의 조건인 차이와 반복의 사회적 과정을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172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욕망과 믿음의 방식을 자본가의 가치관이 명하는 주체화 형식에 따르도록 하여 사람들의 주체성을 빈약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74

볕뉘.

0. 한 밤의 내장을 뒤흔드는 지진의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행여 면이나 리단위의 지진여파가 궁금하여 검색하다가 다행이다 싶었는데, 여진이 잘개부서져 오지 않고 뜸하다고 했더니, 굵은 여진이 퉁퉁 내장을 두드리고 간다. 구술 녹취를 푸느라 바빴고, 미진한 몸을 가누느라 힘든 여정을 보내다나니 무척 뜸했다 싶다. 읽어놓고 늦게 남기게 된다. 1, 2장은 다음에...이 책의 3장이다.

1. 자본-노동의 관계에 국한시키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와 기업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그 한계를 잘 설명해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짚으면서 창조의 사회적 개인의 발랄함을 얘기하는 것이 압축되면서도 고루하지 않다. 다른 노트와 함께 보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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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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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18: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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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해러웨이

빛낱말: 공의존관계, 실매듭으로서 삶, 상황적 지식, 겸손한 목격자, 사이보그, 질병과 죽음

[ ] 믹소트리카 파라독사(Mixotricha paradoxa) 흰개미의 장 속에 서식하며 상호의존적인 다섯 종류의 박테리아가 공생하는 생물체로서, 흰개미가 먹은 나무 조각을 소화시켜 흰개미에게 영양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중요한 것은 숙주라 불리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와 여기에 기생하는 박테리아들이 서로 독립해서는 살지 못하는 공의존관계라는 사실이다. 95

[ ] 해러웨이는 자신의 ‘가르치는 일‘을 ‘실뜨기의 놀이 경험의 구현‘으로 설명한다. 생활 속에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연속적으로 맞물려지는 매듭들 속에 연루되는 경험이다...새로운 시간과 교차하는 만남에 계속 귀 기울이고 그들과 엮이며 생산하는 한, 그들과 함께 있는 한 106

[ ] 서양과학의 전반이 남성적 원칙에 기초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서구 인본주의 즉 이성중심주의는 정신과 육체를 이분화해 이성과 정신을 ‘남성적 원칙‘의 기초로, 감성과 육체를 ‘여성적 원칙‘의 기초로 삼았고 후자를 비이성적인 것, 문화활동에 저해가 되는 것으로 금기시해왔다. 107

[ 1 ] 상황적 지식: 서구 과학의 이런 남성중심주의를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 dead white european males˝이라는 표현으로 풍자하고..이것이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되었다로 폭로한다. ‘상황적 지식‘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자연의 실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은 구별할 수 있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의 물질적 분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적 분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한다. 108

[ 2 ] 겸손한 목격자: 상황적 지식이란, 겸손한 목격자의 지식이다. ‘목격‘이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를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목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고, 틀리기 쉬우며,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욕구들과 두려움들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 지식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목격자는 자신의 영향력, 권력 한계를 인식한다....이때 겸손은 자기 소모적인 낮춤이나 무능력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오히려 하나의 특정한 재주인데, 그것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목격 상황이 그 자체로 어떤 유산이자 복합적 구성물임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위치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09

[ ] 여성주의의 지향이 소위 ‘정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는 데 머무르는 한, 여성주의적 성찰은 가부장제의 반담론에 불과하게 된다. 111

[3 ] 사이보그: 사이보그는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비자연적 인공인지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사이보그는 동물과 기계의 합동적 혈연관계를 주장하고 본질적 정체성을 부인한다...111.. 정말 ‘여성‘으로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젠더, 인종, 계급같은 단일한 정체성은 가부장제, 모순된 사회 현실들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성취다.....사이보그에게 묶임이 있다면 이주노동자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일 것이다...페미니스트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려 노력하고 이 붕괴를 포용해야 한다. 사이보그를 페미니즘의 중요한 성찰로 가져갈 때, 가부장제가 뿌리리박은 불평들을 무너뜨릴 수 있고, 이질적인 것들의 연결과 접합이라는 자산을 얻을 수 있다.....112,113

[ ] 새로운 생산: 이원론의 설화를 전복하고 시작되는 새로운 신화는 이제 타락 이전 순수의 시절을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생산‘을 여는 신화다...생성과 소멸로, 다신 생산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지향한다...사이보고는 부활을 원하지 않고, 총체성보다는 우리의 경계를 구성하고 다시 해체하는 친밀한 경험 속에서 재생을 희망한다...사이보그의 말은 이교도의 말이자, 이질적이고 다양한 각기 다른 언어로, 복수적으로 복합적으로 다중적으로 말하는 말들이다. 113

[4 ] 질병은 관계다.: 우리가 직면한 사실은 인간은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며, 우리가 병들고 노쇠하는 존재, 생명의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죽음의 긍정이 절대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며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장은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유대관계를 드러낸다....질병의 위협은 건강의 주요 구성요소들 중 하나다. 115 질병을 관계 맺음으로 이해했을 때, 면역체계는 몸속에서 중요한 세포 체계 간의 의사소통 공간으로 작동한다. 세포 간에도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 맺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질병은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117 질병과 싸운다라는 표현 자체의 정치 은유가 문제다.

볕뉘

0. 묵혀 두고 읽지 못한 책인데, 다시 눈에 들어온다. 다른 인물을 모두 읽거나 파고 있는분들이기도 한데, 이 분이 생소해서 펼쳐보았다. 출판 번역된 책은 네 다섯권 정도..그 책들을 살핀 것이다.

1. 건강이 생의 주요한 척도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죽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죽음과 질병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만이 예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회와 닮고, 각박한 세상의 복제품임을 증명해내고 있다. 질병에는 죽음을 스며들어 있다. 그런면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해내고 정상만을 탐하는 사회에 다른 시야와 시선을 가질 수 없다. 죽음과 체념을 통해 그 관계들을 다시 생각해내는 지혜를 통해 삶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나도 병들고 나도 죽기 때문이다. 그 모든 관계들은 삶의 그물에서 출렁이고 서로 매듭으로 맺어지며 살아가야 한다. 서로의 마음과 몸의 시선과 시야 속에 녹아들어야 더 자유롭고 넓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부족하였는데 이렇게 상기시켜주니 다행이다 싶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만남들의 출발점을 공유할 수 없음이 늘 안타까웠다.

3. 강박처럼 총체성에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이원론과 이분법을 녹아내리게 하는 방편으로 좀더 깊은 읽기를 해보아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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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성의 미학

1.

[1 ]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분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르는 수행성의 미학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주어진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문지방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계의 재마법화에 대한 시도로 간주할 수 있다. 450

[ 2 ] 경계가 법과 연관된다면, 문지방은 마력과 연관된다. 경계가 다른 것을 배척하는 분계선으로 여겨진다면, 문지방은 모든 가능한 것이 발생하는 사이 공간으로 생각된다. 경게가 분리 작업을 진행하는 반면 문지방은 가능성, 권력, 그리고 변신의 장소를 드러낸다.....공연에서 창출되는 자동 형성적 피드백 고리는 무대와 객석, 행위자와 관객, 개인과 공동체, 예술과 삶 사이에 놓인 경계를 문지방으로 변화시킨다. 452

[ 3 ]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변환 과정에 존재하며, 경계선을 넘는 존재로 인식했다....이분법적 개념에 의존해 세계를 기술하고 지배하는 계몽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또한 인간을 체화된 정신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수행성의 미학 그 자체가 ‘새로운 계몽‘임을 입증했다...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 및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 456

[ ] 예술과 삶: 일반적으로 공연이 예술이라는 제도 하에서 일어나면 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공연이 정치나 스포츠, 법, 종교 등의 영역에서 일어나면 비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예술적 공연이냐 비예술적 공연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제도적 틀이다. 445 공연은 삶 자체일 뿐 아니라, 삶의 모델로 볼 수 있다. 공연이 삶 자체라는 말은 공연이 참여자, 곧 행위자와 관객이 자신의 삶의 시간을 실제로 같이 보내고,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창출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453

2.

[ ] 연극의 근본적 의미는 연극이 사회적 놀이였다는 데 있다. 연극은 모든 이를 위한 모든 이의 놀이다. 그것은 무대 위의 참여자와 관객 모두 참여자인 놀이다. 관객은 놀의 한 구성 요소로 참여한다....연극에는 항상 사회적 집단이 존재한다..62..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이란 오히려 공동 주체의 관계다. 63 헤르만의 공연 개념은 작품 개념이 포함하지 않는다. 공연의 예술성 - 즉 미학성- 은 작품에 근거해서 생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수행되는 사건에 근거한다. .공연에서는 일회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대부분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치거나 조정 가능한 상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관객이 ˝배우의 연기를 다시 한 번 희미하게나마 모사해봄으로써, 표정을 지각할 뿐 아니라 몸의 느낌을 수용함으로써, 같은 동작을 하고 싶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비밀스런 욕구 속에서˝ ‘창조적‘ 행위성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71 공연을 재현 혹은 그 이전의 것이나 주어진 것의 표현으로 규정하지 않고, 순수한 구성 능력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헤르만의 공연 개념은 수행적이라는 개념과 맞아떨어진다. 73

3.

[ 1 ] 버틀러는 젠더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구성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젠더란 인습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 제도적 정체성이다...이러한 행위를 버틀러는 ‘수행적‘이라고 명명하고, ˝수행성은 그 자체로 극적인 것과 비지시적인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수행적인 육체의 행위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 그 자체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육체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이 부단하고 지속적으로 물질화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짧게 이야기하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다....버틀러에게 ‘수행‘의 의미는 오스틴이 말한 ‘현실 구성적‘이며 ‘자기 지시적‘인 것과 결국 같은 것이다....메를로 퐁티는 육체를 특정한 문화와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상징화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버틀러는 정체성의 수행적 생산 과정을 체현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체현 과정이란 ˝행동 양식이며, 역사적 상황을 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방법˝이라고 규정한다. 49,50, 51

[2 ] 수행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행위하다에서 비롯되었다. 즉 ‘행위를 ‘이행‘하다‘라는 뜻이다...이 발견이란 언어가 사실관계를 묘사하거나 한 가지 사실을 주장할 뿐 아니라 행위를 이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참과 거짓을 표현할 뿐 아니라 수행적 기능도 한다....발화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변환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수행적 성공을 위해서는 언어적 조건뿐 아니라 무엇보다 제도적,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44,45

[ 3] 문학 낭독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읽기와 듣기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데 있다. 일리아스의 1만 8천줄을 교대해가면서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낭독했다. 낭독자가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저마다의 목소리가 개성을 드러냈고,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든 청중에게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이 공연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했다. 22시간이라는 오랜 시간은 참여자들의 지각 상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무엇봐 이러한 지각의 변화를 의식하게 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지각의 조건으로, 무엇보다 변화의 조건으로 의식하게 된 것이다. 34,35

볕뉘

0. 우리는 말이 필요하다. 권력의 기울기에 바투 올라야 하는 자는 권력을 가진자의 말을 빌려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언어는 행위를 이행한다.(3.2) 언어는 수행적 기능을 갖는다고 하면 우리 말의 대기가 이분법의 개념쌍을 가진 언어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1.1) 그래서 힘이 없는 자는 힘있는 자의 이런 말을 쓰다가 결국 스텝이 꼬이고, 자기 말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 김수영의 애정지둔을 낭독하는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한 편의 시를 열한두분이 자신의 음색과 속도롤 읽어내는 것은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시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3.3) 무려 22시간을 낭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낭독을 하게 되면 언어가 품고 있는 박자를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며, 때로는 호와 흡을 반복하며...사람마다 그 시를 품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오기도 한다. 낭독은 언어가 자신과 글 속에 갇혀 있다가 친구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다. 말로 변화하며, 그 말은 서로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말로 쓴 글은 언어에 갇힌 글과 미묘하면서도 무척 다르기도 하다.

2. 우리가 이분법의 말에 갇혀있다고 해보자. 선악, 좋다나쁘다로 무의식중에 구별하는 습관들. 이분법의 개념쌍....좋다나쁘다에서 나쁘다만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습관들이라고 해보자. 그렇게 남은 말들을 대부분 권력의 자장을 갖고 있는 것일 것이고, 약자를 제대로 표현하는 말들은 없거나 죽어버렸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에서 ˝이것 뿐만 아니라 저것도˝라고 가정을 해본다면 조금씩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의식하거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의식하게 된다. 싫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좋은 장소, 나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장소, 더 좋은 장소로 파악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것, 싫은 것이 아니라 배경에 있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같이 마음 속에 들어오도록 해보는 것이다. (1.4)

3. 새로운 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말은 나의 상황, 주변을 둘러싼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행정 용어나 남자의 말들로 둘러싸여 있기게 새로운 숙어를 발견해내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적확한 말을 찾는 것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 생생해야 한다. 내 존재를 온전하게 나타내는 말을 없다라고 가정해보자. 어쩌면 이것은 나의 존재를 바꾸어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새로운 말이 가슴을 져미고 들어와서 익숙해지고, 그 표현을 나누어 가질 때 우리는 이미 전과 달라져 있는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하고, 힘에 밀려 경계에 있는 처지의 말을 명확히 듣도록, 들릴 수 있도록 귀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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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 ] 지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자질은 지적 소명을 받는 것이며, 지능이나 총명함은 부차적인 자질에 지나지 않는다...지적인 일이 소명이라는 것은 곧 지성인에게 공부가 삶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14,15

[ ] 많이 읽지 마라: 우리는 지적으로 읽어야지 결코 격정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건강과 현명한 소비 규칙에 따라 그날 먹을거리를 미리 정한 주부가 시장에 갈 때처럼 책에 다가가야 한다.213 시류에 휩쓸려 공부 역량을 소진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때로 시류는 당신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막는다...다른 이들이 이미 걸어간 길을 따르지 말고 당신 자신의 길을 가라. 214

[ ] 단 한 가지만이 진짜 휴식을 준다. 바로 기쁨이다. 225

[ 1 ] 삶과 맞닿아 있기: 공부는 삶의 활동이어야 하고, 삶에 이바지해야 하며, 삶으로 충만해야 한다. 무언가를 알려고 애쓰는 사람과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 이 두 부류 가운데는 후자가 낫다. 우리가 아는 것은 시작이자 밑그림인 반면, 삶은 완성작이기 때문이다. 233 공부의 목표는 우리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다. 공부가 우리를 좁히는 것으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 예술이 자연에 인간을 더한 것이라면, 학문은 인간에 자연을 더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 334 공부하는 소명에 자신을 바치려는 당신은 공부를 위해 삶의 나머지 영역에 등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간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포기하지 마라. 가장 무거운 것 쪽으로 나머지 모두가 쏠리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라. 339 지성인은 전공 공부를 철저히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보충하는 넓고 다양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의 정신은 일과를 할 때나 명상을 할 때나 똑같다. 그는 신 앞에서나 동료 앞에서나 하녀 앞에서나 한결같다. 그는 관념과 감정의 세계를 책과 논문에만 적어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내보이고 삶의 길잡이로 삼는다. 340

[ ] 쉬는 요령 알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면서 얻는 기쁨이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이 실은 상대방보다 사랑 그 자체를 더 사랑하는 것과 같다. 343 정신 그 자체는 지치지 않지만, 신체 안에 있는 정신은 지친다....쉬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는 없다. 343 휴식을 거부하는 것은 간접적인 나태인데, 쉬어야 다시 노력할 수 있거니와 과로가 노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휴식을 거부하는 것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나태다...우리가 여가라 부르는 것은 실은 에너지 전환과정이다. 당신 자신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공부와 휴식을 배분하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주 짧게 쉬는 편이 가장 이로울 것이다. 347 집단을 이루게 되면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배려하라. 절대 장난치지 않는 사람, 농담을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뢰한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웃의 짐이다. 348

[2 ] 시련: 가치는 스스로 변호한다. 저술 때문에 호들갑을 떨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신에게 해롭다. 침묵하고, 신 앞에서 겸손하고, 당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잘못을 바로잡아라.....당신의 평온이 흔하디흔한 성공보다 가치가 높다. 353 시기는 영광, 탁월함, 공부라는 수입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공부는 공부하는 이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공부하는 이는 불평하지 말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354 진리는 조금씩 드러난다. 그늘에서 진리를 꺼낸 사람들이라해도, 진리에게 자신을 위해 후광을 만들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진리를 섬긴다는 것, 그것으로 족한다. 356

볕뉘

0. 우리는 스스로를 형성하고 누군가가 되려고 읽는다. 우리는 특정한 과제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 우리는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고 선한 것에 관한 사랑을 얻으려고 읽는다. 우리는 휴식하려고 읽는다 220

1. 그럴 것이라고 읽었지만, 새겨둘 것들이나 지나친 것들이 있다. 단 한 가지만 휴식을 준다. 바로 기쁨이라고 한다. 쪽 쪽 여기저기 살피면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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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2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214쪽 내용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책에 의존하는 글을 써왔거든요. 책 속에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힘들겠지만, 책 속에 다른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따르는 방식을 줄어야겠어요.

여울 2017-11-02 21:06   좋아요 0 | URL
저도 부끄러운 대목이 많네요. 같이 줄여나가요.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