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 서울행, 이동 중에 읽으려 책이 손에 잡혔지만 오고 가는 길 외려 이 책보다 [생각하는 피부]가 빠르게 읽힌다. 곁의 아주머니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통화에, 화장실에, 수다에 모든 것이 다 읽힐 듯이 일거수 일투족이 밟혔다. 늦은 밤 막차로 내려와 맥주 한캔에 읽다가 다음 날 커피 한잔에 마저 읽고, 또 몇 대목을 다시 읽었다. 몇 번 만난 작가는 말 수가 적었다. 하지만 소설은 적은 말수가 빙산의 일각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 분야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끊임없는 수다쟁이였다. 포르노로 할 말을 다하는 그가 경이롭다. 책이 책 밖을 나와야 하고, 성은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성 밖으로 나와야 그제서야 현실은 꿈쩍거린다. 많은 책과 저자의 은유에 공감한다. 다시 한 번 더 봐야 할 듯 싶다. 이리 소설에 애착을 갖다니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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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법칙

0.

[ ] 모든 과학은 유사, 대조나 대칭, 조화, 말하자면 (1) 반복, (2) 대립, (3) 적응을 밑천으로 삼는다. 133

[ ] 모든 것이 무한소에서 온다는 것은 확실하다. 덧붙여 말하면, 모든 것은 거기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처음이며 끝이다. 135

[ ] 나의 견해는 우주를 무수한 요소들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것으로 본다. 그 각각의 요소는 특징과 야심을 갖고 있으며, 자기 안에 별개의 우주, 그 실현을 꿈꾸는 자기만의 우주를 품고 있다. 138 사물의 현상 밑에 있는 독특성은 사라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펼쳐져서 위로 표출되려고 애쓴다고 가장한다....반복, 대립, 적응이란 세 항 모두가 보편적인 변이를 가장 고상하고 광범위하며 심원한 개성 또는 개인이라는 형태로 개화시키는 데 함께 협력한다. 139

[ ] 반복, 대립, 적응: 이 세 개의 열쇠 중에서 첫 번째 것과 세 번째 것은 두 번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첫 번째 것은 커다란 만능열쇠이다. 세 번째 열쇠는 보다 섬세한데, 이것은 가장 많이 숨겨져 있는 가장 귀중한 보고를 열어 준다. 그 두 열쇠 사이에 있으며 이 둘보다 하위에 있는 두 번째 열쇠는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유용한 충돌과 투쟁을 보여준다...수많은 변화와 완화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부분적으로라도 없어지게 되어 있는 일종의 중간항이다. 13

1.

[ ] 현상의 반복: 한 정신과 다른 정신의 접촉은 실제로 그 각각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하나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나머지 세계와의 그들의 접촉 전체에서 급히 빠져나와, 생리학적 심리학으로는 예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정신상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28 그 관계는 한 인격에 대한 감각, 의욕, 믿음이다. 따라서 지각하는 인격은 그 지각되는 인격에 자신을 반영하기 때문에 자신을 부저알 수 없는 한 그 대상도 부정할 수 없다. 29 그 기이한 관계는 내적인 어떤 것의 전달이다. 이때 이상한 것은 그 정신적인 것이 두 주체 중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되어도, 그 전달하는 주체에게서는 그것이 조금도 없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30 내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심리적 경향의 에너지, 즉 정신적 갈망의 에너지는 내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지적 파악의 에너지, 즉 정신적인 지지나 수축의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동질적이며 연속된 하나의 흐름이다. 31 아무리 혼란스러운 시대라도 정신들 간의 또 의지들 간의 이 세세한 일치가 사회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33 모방관계는 한 개인과 불특정 다수의 인간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는 대부분 나중에 생겨났다. 그 모방관계는 두 개인 사이에만 존재했다. 37 두 정신의 뇌간관계,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반영으로까지 분석을 밀고 올라가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 부분적인 일치, 마음 간의 협력, 정신 간의 교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8 무수한 개인적인 독특성만이 진정한 것으로서 매순간 작용하고 활동하며, 아울러 이웃사회에서 본보기를 끊임없이 빌려오고 또 유익하게 교환해 각각의 사회 한가운데서 그 개인적인 독특성이 계속 발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합적이고 비개인적인 정신은 무수히 많은 개인정신의 함수이지 그 요인이 아니다. 41 과학의 진보는 외적인 유사와 반복을 내적인 유사와 반복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사회학이 지금까지 이미 큰 발전을 했고 앞으로도 더 크게 발전하게 되는 것은 사회와 유기체를 비교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들을 서로 비교해서 이다. 즉 언어, 법, 종교, 산업, 예술, 습속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국민들의 발전 간에 수많은 일치를 찾아내는 것을 통해서이다. 특히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모방에 주목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46 집단이 동질적일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퍼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경향이라는 말에는 신비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어떤 집단에서 새로운 관념을 새로운 말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느껴질 때,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생기있는 표현을 생각해내는 첫 번째 사람은 그 표현을 입 밖에 내기만 하면 된다. 47 이 (모방방사)는 두 개의 관념 사이에서, 두 개의 믿음 사이에서, 두 개의 행동방식 사이에서 망설일 때마다 정신에서는 모방 방사의 간섭이 일어난다...그러한 망설임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하나는 논리적 영향이고, 또 하나는 논리 외적인 영향이다. 이 논리 외적인 영향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논리적이라는 것을 부언하고 싶다.(어쨌든 모방한다는 점에서) 48-49

2.

[ ] 현상의 대립: 현상의 밑바탕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욕망과 믿음의 경쟁이다...진정한 기초적인 사회적 대립은 각각의 사회적 개인의 내면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립은 각각의 사회적 개인이 자신에게 제공되는 새로운 본보기, 즉 새로운 어법, 새로운 의례, 새로운 사상, 새로운 예술유파, 새로운 행동방식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망설일 때마다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설임, 즉 사람들의 생활에서 매순간 수백만 번 재생되는 내면적인 작은 싸움은 무한히 작으면서도 무수히 많은 결실을 맺는 역사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사회학에 조용하면서도 깊은 혁명을 일으킨다. 62 대립물이나 반대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쌍, 즉 이원성을 이룬다...그것들이 대립할 수 있는 것은 경향으로서, 즉 힘으로서이다. 63 모든 진짜 대립은 두 힘, 두 경향, 두 방향 간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64

3.

[ ] 현상의 적응: 발명을 모방될 운명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 창안자의 정신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12 어떤 발명이나 사회적 적응은 다른 발명이나 사회적 적응에 적응하면서 복잡해지고 확대되는 경향이 있고, 또 여기서 생겨나는 적응도 마찬가지로 같은 종류의 다른 만남이나 논리적 결합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종합에 이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일이 계속된다...하나는 모방적 전파를 통해 외연적으로 진전하는 것이고, 또 하나의 발명이 일련의 논리적 결합을 통해 내포적으로 진전하는 것이다. 114 이론적 발견이란 어떤 속성, 말하자면 옛 판단을 새로운 주제와 결합시키는 판단접합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실천적 발견도 어떤 수단, 말하자면 전에는 그 자신이 추구된 목적이었던 것을 새로운 목적과 결합시키는 의지접합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121 모든 것은 개인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소재뿐만 아니라 계획도 개인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세부 계획이든 전체 계획이든 말이다. 모든 것, 심지어는 현재 교양 있는 모든 뇌에 퍼져 있고 또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조차 처음에는 혼자있는 한 뇌의 비밀이었다. 그 뇌에서 흔들리는 희미한 작은 램프가 모순을 뚫고 좁은 영역에서 간신히 퍼져나갔으며, 마침내는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점점 강화되어 눈부신 빛이 되었다. 123 개인은 사회적 사물이라는 매우 오래된 세월에 걸친 유산 속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은 발명을 만들어내는데, 그 자신은 이 유산의 일시적인 보관소이다. 125 역사적인 개인 하나하나는 새로운 인류의 씨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삶, 개인적인 노력 모두는 자신이 지닌 단편적인 보편성을 긍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126 그 새로운 것이 도입되는 것은 강제로가 아니다. 그 새로운 것은 부드러운 설득이나 암시를 통해서만 도입될 수 있다. 127 완전한 적응과 완전한 대립은 무한히 이어지는 한 계열의 양끝이며,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입장이 있다. 어떤 명제가 다른 명제에 의해 절대적으로 확증되는 것과 두 명제가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것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부분적인 모순과 부분적인 확증이 있다....한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 바로 이것이 발명이다......보고 싶은 욕구라는 물음에 대해서 자연에서 대답한 것은 인간의 눈만이 아니다. 곤충의 눈, 새의 눈, 연체동물의 눈도 있다...모든 사회의 기초에는 물음에 대한 크든 작든 다수의 대답이 있으며, 또한 이 대답 자체에서 생겨나는 다수의 새로운 물음이 있다. 128-129

4.

[ ] 정확한 반복, 명확한 대립, 엄밀한 조화 안에서만 보편적인 다양성, 생동감, 무질서의 아주 특징적인 표본, 즉 개체의 특징이 나타난다.....무수한 일상 가운데 순간적인 미묘한 맛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미묘한 맛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화가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다시 살아나게 한 시인이나 소설가도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다....이 거의 포착하기 힘든 것을 붙잡으려는 그들의 노력을 보고 비웃을 권리가 사상가에게는 없다. 개체에 대해서는 과학이 없다. 개체에 대해서는 예술만이 있을 뿐이다 . 학자는 보편적인 삶이란 완전히 사람들의 개성의 개화에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약간 질투 어린 겸손함을 갖고 예술가의 노고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사상의 진정한 존재이유인 미적 가치를 주지 못한다면 그 사상가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131

볕뉘

0. 어제서야 읽기 시작했고, 새벽에 진도나가고, 지금 마무리한다. 물론 사건의 정치에서 자주 언급된 연유로 저자의 책들을 같이 구입했다. 저자는 자신의 전작을 관통하는 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책을 볼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을 다 찾아보라고 하지도 않는다. 짧게 짧게 연루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는 권고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1. 상상력은 어디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말과 만남의 사건에서 받은 느낌에서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고 요동치고 방향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연유된 관심은 전체를 보려는 갈망을 멈추지 않는다. 상상력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이다.

2. 물리학, 생물학과 같이 사회학의 무한소는 비코를 언급하면서 사람이라고 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밖으로 향하는 무한 우주만큼 안으로 향하는 그 깊이도 무한이다. 안과 밖으로 무수한 것들이 연결되고 이어져 있다. 반복, 대립, 적응은 역시 전체를 보려는 노력이다. 이원성이 아니라 그 방향과 경향을 보려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과 믿음으로 이루어진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독특성에 대한 견해와 그 방법에 대해 고개가 돌려지기도 한다.

3. 120년전의 저작이다. 잊혀지다가 들뢰즈의 발굴로 다시 수면위에 떠올랐고, 랏자라또와 브루노 라투르가 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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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기-지식인

[ ] 지라르의 욕망이론이야말로 지식인들에겐 일정한 매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이야말로 책에서 읽은 대로 살려고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애를 쓰고 있으며, 자기가 전범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경쟁자로 변하는 것을 거의 매일 눈앞에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 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중개의 집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경쟁자로 등장하는 날의 절망과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식인으로서는 그 두 체험이 다 같이 고통스러운 체험이며, 피하고 싶은 체험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제자로서 나는 스승을 모방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 안 그러면 그에게 증오심을 느낄 테니까 - 스승으로서의 나는 제자들의 모방이 불가능한 곳에 가 있으려고 애를 쓴다 - 안 그러면 그에게 경쟁심을 느낄 테니까! 끔찍한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 계층의 삶이다. 1987. 3. 19 전문

볕뉘.

어제는 오후부터 밤늦도록 그림을 그리다. 선하나만 긋는 데도 몇 시간을 허비했으니 그리 진도를 많이 나간 것도 아니다. 아크릴화는 빨리 말라 빈틈을 원하는 색과 원하는 질감으로 채우기가 힘들다. 물의 물기를 묽게하면 빈틈을 채울 수 있으나 색을 내기 어렵고, 뻑뻑하게 하면 물감이 쉽게 마르고 캔버스를 맨질맨질하게 색을 입히기 어렵다. 집중하다보면 눈이 쉽게 피로해져서 사실 책보는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기도 하다. 늘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늘 달라질 수 있을까? 직접 대놓고 질문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지나가는 말들은 ‘그게 되겠어요‘나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의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끙끙댔다.

책읽기는 곤란하고, 조심스럽다. 빛이 보이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눈보라가 치고 어둠이 짙게 내린다. 옷자락을 잡았다 싶으면 여지없이 그 옷자락은 너덜너덜해지며 손아귀를 벗어난다. 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걷는다. 걷다가 뒤돌아서면 마음이 지고 핀다. 참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 대목이 좋다. 이렇게라도 남기고 기억하고 싶은 게다. 본디 그런 것이다. 그 삶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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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기

[ ] [바흐친의 목소리들] 부버에 대해서는 ˝내 생각으로는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특히 대화라는 생각에 대하여˝라고 말한 바 있다. (1969-1971년 사이) 103 바흐친의 철학적 사유의 기본은 그리스도의 패러다임이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인간 조건을 수락했으며, 인간의 자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는 차디찬 인간의 자의식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자의식을 심화시켜, 이상적인 인간 조건의 전범이 되었다. 자아와 타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그 매개는 언어이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자아와 신의 관계를 반영한다. ...바흐친의 다성악적 소설 이론에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소설 내의 인물의 절대적 자유가 어떻게 예술 작품의 통일성과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04

[ ]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105도스토옙스키의 재능 중의 하나는 인간이란 두껍고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혼합물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데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인간은 단순하고 명료하지가 않다. 108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 96

[ ] 원초적 경험의 흔적은 책읽기의 흔적으로 전이되어, 해석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 개인적 흔적들을 완전히 지울 수 있다면 객관적인 책읽기가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거의 무망한 바람이다. 그것은 육체에서 삶을 지우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9

[ ] 천일야화나 불경은 현실은 환영이며 감각은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노장은 욕심을 줄이고 자연의 움직임에 맞춰 살라고 권한다. 그 자연으 움직임이 노장에서는 세계의 움직임임에 비해, 논어에서는 인간의 움직임으로 변형되어 있다. ....날으는 양탄자와 달리 표주박 속에 갇힌 마신은 대개 세 가지 소원만을 들어준다. 소원은 한없이 많은데 셋뿐이라니! 그러나 그 셋은 만물을 낳은 모태로서의 삶이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만물을 낳는다. 다시 말해 삶을 낳는다. 113

[ ] 정명환의 학문의 본질은 합리주의이다. 그가 비합리주의적인 모든 것에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때로 그의 생활은 비합리주의적인 것으로 채색된다. 그의 폭음, 폭설...은 그런 면의 표현이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114

[ ] 난 감잡고 있지/ 이 삶에 대해, 감잡고 있지,/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잘 안 맞아 돌아가는 것을..... 김정란 114

[ ]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118

[ ]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이제는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126

[ ] 김훈 -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애정/증오가 그의 글쓰기의 밑바닥에 있음을 알겠다. 그는 깊게 사랑하거나 짙게 미워한다...그의 글은 거침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으나, 그 생각난 대로 씌어진 것들을 훌륭하게 이음새 없이 붙어 있다. 127

[ ] 가난한 사람들은 눈에 금방 띄는 환부이지만, 진짜 아픈 부분은 몸의 다른 곳이다. 그곳을 보지 못하는 한 총체성은 얻어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몸속의 가장 아픈 부분은 정치와 돈이 만나는 자리이다. 86

[ ]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그 작가는, 바다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74

[ ]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42

[ ] 원이 사변 철학의, 즉 자기 자신에만 집착하는 사고의 상징이자 문양이라면, 타원은 감성적 철학, 즉 직관에 입각하는 사고의 상징이다 거기에는 머리와 가슴이라는 두 개의 중심점이 있으므로...28

볕뉘.

0 . 어젠 바람이 요란스럽게 불었다. 유독 대나무가 약한 듯 몸전체를 부르르 떨고, 제 몸의 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이른 잠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을 집어들었다. 1987년 봄이다.

1. 어김없이 어제 읽던 책들이 저자가 고스란히 뒤를 이어간다.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말이 박힌다. 1987년의 관통하는 그의 책읽기는 어김없이 날카롭고 전율스럽기도 하다.

2. 어제는 감정 있습니까?의 수치심편을 읽었다. 그리고 현남오빠에게의 김이설작가의 갱년이 아니라 경년을 읽었고, 프레이야님의 고마워 영화의 유리정원, 아가씨, 캐롤, 시인의 의무를 읽어내려갔다.

3. 김수영 전집 시편을 읽고 있다. 삼분의 이정도를 읽고, 절반쯤은 같이 읽는 이들과 소회를 나누었다. 설움이라는 그의 시의 전편에 흐르는 정서와, 불쑥 불쑥 시간이란 결을 쓰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다시 만나는 김수영은 김일성만세를 외치기 이전이었지만, 작금의 풋풋한 시인들의 목소리를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김수영시라고 밝히지 않으면 신인의 시라고 착각할 만한 시들도 여러 편이었다.

4. 글을 쓰는 일은 고독을 달래는 일이기도 하고, 보지못하는 나의 이미지를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외롭다. 나누고 공유하는 찰라의 만남이 없다면, 이렇게 30년, 50년의 시차를 두고 만나는 일은 내밀한 기록이지만 전혀 내밀하지 않다. 그 아둔하고 부끄럽기만 하던 1987년이 더 부끄럽게 여겨진다. 서러움을 더 깊게 새기지 못하고 버둥거린다. 수치심은 어쩌면 과거를 다시 품에 안고 미래로 다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힘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을 읽고, 그 사이 그 거울에 비친 나를 읽고...그들의 마음 사이를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 그 틈이 고맙다. 그간 그 어려움을 표현하느라 애쓴 작가의 흔적들을 아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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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것이다.˝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외친다. 어떤 세상인데, 왜 그럴 수 있냐고 되묻지 마라.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마라.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것이니 그리 한 숨을 쉬지도 마라. ‘도‘와 ‘모‘만 필요한 윷판인가? 개, 걸, 윷의 목소리는 늘 잊히거나 전체와 관계없는 목소리로 소멸된다. 백색소음이었던 것이다. 백과 흑, 흑백, 검정과 하양을 한 번 경험해본 이를 회색이라고 해보자. 회색이란 사건을 경험한 이만이 흑과 백의 농도를 느끼고 있다.

경주지진에 이어 포항지진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진멀미에 아직도 몸은 여지없이 반응한다. 존 듀이는 국내에 십진법, 실용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은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쓴 인물이다. ˝삶은 아무런 문제없이 물 흐르듯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은 역사적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경험은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며, 경험 특유의 줄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언제나 경험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다.˝ 고 하면서 ˝경험이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접 겪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그러한 (하나의) 경험을 한 적이 있어˝고 말할 때의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고 한다. 물론 여기서 경험은 정서나 감정의 고저를 안고 있다.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관조의 의미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멀미의 여파와 불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건을 보는 것이다. ˝사고를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다양한 성질은 실제 경험 속에서 각각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하나의 경험에서 보면 사고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지각되는 관념들을 일정한 질성이 드러나도록 계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존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1, 89-93 그는 따로따로 떼어놓고 분석하는 사유가 맹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완결과 성숙으로 소소하고 미미한 것들의 역할을 포함해서 전체를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충만함으로서 경험을 유도하며,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하나의 경험‘을 그토록 강조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이 그리 잘못이냐고 물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성과 감성을 나누듯이 육체와 영혼을 나누고, 자연과 사회를 갈라놓고 어른과 아이를 분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나누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임을 유념해두고 가자.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랏자라또는 ˝우리가 가능성을 ‘기존 체제에 의해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 자연/사회, 어른/아이, 정신/육체 등)에 의거하게 된다.˝ 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 지각 역시 그 이항대립의 틀내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양자택일의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6-18 라고 말하면서 이항대립의 문법을 다시 고민할 것을 권면한다. ˝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다. 서로 마주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여러 경험과 사건들이 감정과 관계로 확산될 수 있고, 다른 선택지의 표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는 발명과 삶의 세뇌를 반복하므로 다른 출발을 할 것을 주장한다.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으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32, 150-153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사건의 정치

한편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양자택일 못지 않게 ‘이것이다‘라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다. ‘이것이다‘라는 확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인식의 경계로 불러들여 합리화하는 것으로 한 몫한다. 모든 문제는 ‘남북을 갈라져서야‘, ‘자본/노동의 계급때문이야‘, ‘서울/지방으로 나눠져서야‘, ‘남/여란 가부장제때문이지‘, ‘그래 거봐 생태란 개념이 없어서잖아‘.....그렇게 갈라보는 시선은 끝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긁어모으는 정보는 한계가 없다. 이것이라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종북이나 좌파때문이라는 상황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피셔-리히테가 삶과 예술, 몸과 정신,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사건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경계가 갖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사유해보는 작업은 참고할 만하다.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른다.˝ 라고 한다. 이것이다라는 경계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면서 풍부해질 수는 없을까? ˝ 450-452 ˝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떨어져서 세상을 분석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놓치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은가? 456 이상 에리카 피셔 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마지막은 레비나스다. 제자를 자초한 우치다 타츠루는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며,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의 자유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약함은 타자성 그 자체를 형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일, 그것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며, 타자의 약함에 도움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 레비나스는 스승이 존재의 철학에 머문데 비해 숱한 죽음을 목도하며 삶만이 아니라 죽음의 무한을 철학에 들여왔다. 그런면에서 창조의 베르그송 철학도 존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의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휘어잡는다.˝ 264 -266 나의 시야에서,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타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르게 읽고 다르게 만나는 책과 사랑받는 사람의 다양성의 철학으로 읽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존의 철학과 다른 것은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보와 소통이 넘친다는 0과 1의 디지털시대에 어쩌면 우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이런 낡은 사고습관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눈과 말, 시선과 감정의 느낌을 전유할 수 있는 아날로그의 사유나 사건 부재로부터 나오는 증상은 아닐까? 눈에 드는 물건과 음식처럼 사람도 느낌과 정서의 새로운 공유로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낯선 이를 만나도 환대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전도하기에 급급해 다른 이의 감정과 그 줄기에 붙은 많은 지혜와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경계를 더 튼튼히 하고, 자신을 흔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와 도뿐인 나만의 생각에서, 너로 이어지는 개 윷 걸의 시선으로 겨우 다가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온전한 사유와 삶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빠이거나 까인가? 아니면 꼰대인가? 생각이나 삶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에 기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이것도, 저것도,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뿐만 아니라는 특이함이 있다. 그래서 겨우 전체를 향해가는 사유를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과 저것이 결코 보지 못하는 달의 이면을 같이 볼 수 있는 사유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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