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무라 고타로 - 촉각의 세계

나는 조각가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나에게 세상은 촉각이다. 촉각은 가장 유치한 감각이라고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가장 근원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각은 가장 근원적인 예술이다. 나의 약지 안쪽은 매끈매끈한 거울 표면에서도 요철을 느낀다. 이건 최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유리에도 가로세로가 있다. 눈을 감고 평범한 유리의 표면을 어루만져보면, 흡사 나뭇결이 살아 있는 오동나무 나막신 같은 무늬가 느껴진다. 잘 닦인 거울 표면 같은 경우는 나막신까진 아니지만, 겨우 15센티도 안 되는 너비에 두 개가량의 물결무늬가 있다는 걸 손끝은 알고 있다. 약지에는 경사를 느끼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거울 표면의 파동을 느낄 땐 흡사 배가 파도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약간 기분 좋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볕뉘.

0. 다카무라 고타로는 ‘촉각의 세계‘란 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감을 이렇게 촉각으로 하나 하나 결을 다시 음미하고, 그리고 여섯번째 위치감각을 말한다.

1. 처음 읽으면서 글쓴이가 그저 작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각가다라고 시작하지만 어쩌면 이리 상상력이 생생할까 싶은 의구심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지금 그 글의 말미 뒷장 그 이력을 보니 이렇게 씌여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 (1883-1956): 조각가. 시인. 목조 조각가 다카무라 고운의 장남으로 뛰어난 조각가다. 시집 [치에코 이야기] 등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문학사에도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이 시집에는 그의 아내이자 영원한 사랑인 치에코를 처녀시절부터 죽기까지 30년에 걸쳐 곁에서 지켜보며 쓴 시와 산문이 수록돼 있다.˝

2. 그리고 탁자 위의 유리를 약지로 느껴보았다. 수직의 결이 몇가닥 들어왔다.

3. 지난 주말에 백석을 읽고 나누었다. 읽다보니 순수한 사춘기 소년소녀가 느껴졌다. 선명하게 과거의 서정을 기억하는 그 결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신형철평론가는 장석남의 시를 읽으며 서정성을 이야기했다. 몸이 안고 있는 서정성.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정을 찾는 것일까. 왜 이리 늘 갈증에 허덕이는 걸까. 세상이 그만큼 각박하다는 얘기겠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언제나 퍽퍽하거나 팍팍해서, 사람들은 늘 마음의 근원이나 원형을 찾으려고 애쓴다고....굶주림이나 고향이나 어머니가 그 원형이라고 김현은 이야기했지만, 달라진 시대는 거기에서 원형을 구걸할 수 없다고....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사람이다.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그가 쓰는 시어들은 평안도 사투리이긴 하지만 고어들이나 우리말에서 애써 가져왔다고 한다. 윤동주가 그리 갖고 싶어했던 초판본 [사슴]을 읽었다. 노천명을 사슴도 백석을 가르킨다는 말을 좌장은 전했다.

4. 백석은 비와 바람과 햇살, 산, 하늘....을 나누고 나누었다. 고기부위와 산해진미만 나눌 줄 아는 이들에게서 볕과 바람과 시와 구름의 가지가지를 나눌 수 없다. 하지만 그들도 서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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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 ] 감각의 깊이 - 전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감각의 깊이. 그 속에 빠져 헤매다가, 어느 순간 다시 튀어오르는 공처럼 현실 속으로 튀어나올 때, 감각의 공터, 아니 패인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1987. 12. 26 김현일기

[ ] 피부에서 가장 예민한 부위로 밝혀진 곳은 손가락 끝, 특히 엄지다. 이 부위에서는 바늘이 2mm만 떨어져도 별개로 인식한다. 그래서 한글이나 영어 점자에서 점의 크기나 점과의 간격은 2mm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인 점자는 브라유문자라고도 하는데, 이 문자에 숙련된 사람은 분당 100단어의 속도로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일반인의 평균적인 독서 속도인 분당 250-300단어보다는 느리지만 소리 내면서 읽는 속도와 엇비슷하다. 175 피부감각 점자를 읽을 정도로 예민한 대조적으로 팔이나 다리의 피부는 이보다 20배인 40mm 간격으로 자극이 주어져야 별개로 인식한다. 176 우리몸사전

[ ] 피부는 귀보다는 못하지만 시간을 판단할 수 있고, 눈보다는 못하지만 공간을 측정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적 차원과 시간적 차원을 조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부뿐이다. 피부는 멀어지는 소리로부터 우리의 양쪽 귀가 거리를 측정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의 표면으로부터 어떤 물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 22 피부자아


볕뉘

0. 지난 년말이 다 가기 전 지인이 찾아왔다. 그녀를 배웅하고 마중을 하고 나서야 이력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며칠이 더 지난 뒤에서야 ... ...

1. 명문대 출신이라고 다른 것이 있겠는가만은 경향으로 보자면 장자컴플렉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혼자 해결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지나친 의식. 콤플렉스라고 써야하나. 어쨌든 그것은 원활하지 못해 서로의 활동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연대와 고대출신은 그래도 서로 연대해 조직생활을 그나마 잘해간다는 되먹은 이야기도 듣긴 했다. 서울대생들은 혼자 답을 구하거나 혼자 할 수 있어서 굳이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그런 것들이 경향으로 굳는다고 말이다. 카이스트생은 어떤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끝이 없을 것이다. 조금 낫다고 한다는 인간들은 기댈줄도 기대는 법도 모른다고 그래서 늘 일을 그르친다고 말해도 될까. 엘리트 컴플렉스라고... ...

2. 지인은 측은 한 표정과 귀여운 표정의 여러 장 반려견 사진을 건넸다. 그러면서 며칠 전 교육토론회에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반려견에 대한 집안의 교육기조도 통일되지 않았는데 어떻게....농담같았다. 그런데 그 말에 지금까지 끙끙거리고 있다.

3. 며칠 뒤 티브이를 우연히 봤다. 반려견 행동전문가는 크런치인지 연예인의 반려견이 친구들에게 돌발행동을 자주해 문의를 했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죽을 상이었다. 전문가는 개를 개로 대하면 실수한다고, 개를 사람으로 대하는 과정과 실습을 병행했다. 개는 학습기를 통해 우울해진다. 그 우울을 극복하는 과정의 적응기를 실습해내었다. 좌절한 개는 수영이라는 적응기를 통해 날아갈 것처럼 기뻐하는 충만한 개가 되었다.

4. 사람은 동물이다.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이기전에 사회적 동물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교육토론회가 더욱 궁금해졌다. 수십년 반복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교육의 질과 삶의 질. 어쩌면 동물에게 되물어야 하는 건 아닌가. 우울마저 사육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일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 교육에서 우선은 무엇일까. 교육 교육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울타리 안으로 가두는 우리 교육은 무엇이란 말인가. 긴장 긴장 긴장 스트레스에 사슬을 칭칭 감아 공부라면 어떻게 질릴까 경주하는 부모들....성과 성과 성과.....

5. 사회의 쳇바퀴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저 다른 색깔을 입혀 돌아가기만 할 뿐.......<1987>이라는 영화를 보고 궁금해졌다. 회고의 영화가 아니라면 7,8월 노동자대투쟁을 말했어야 했다. 노동적폐가 가장 큰 문제라고....하루 4시간만 일해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30년 무엇이 나아졌는가....제도와 체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고...그러는 순간 그 쳇바퀴 역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돌아가기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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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이 생각나 나섰다. 달은 어제보다 차가웠고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며 설 것 처럼 한쪽이 타원이 되었다. 원은 중심에 머리 하나를 갖고 있지만 타원은 머리와 가슴의 두 개의 중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따스한 달을 보려면 조금 늦게 해가 찰랑찰랑할 때 나서야했다. 또 다른 하나의 중심이 있는 알같은 무엇이 있는 ㆍ 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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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어제보니 달이 무척 크더군요.여울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2018-01-04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각하는 피부

[ ] 피부는 단순한 자루도 중추를 섬기는 말단도 아니다. 피부와 뇌는 계층적인 관계가 아닌 기하학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피부는 종속적이지 않다. 피부를 뇌의 확장으로서, 뇌를 개켜놓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본질은 피부에 있다. 따라서 촉각문화가 중요시되는 것은 현실의 존재가 아닌 현실의 생성에서다. 24

[ ] 보스니아 비극: 비전투원의 대량학살도 처음부터 설정된 목적이다. 이 전쟁의 특징인 교회나 학교, 도서관의 조직적인 파괴는 모두 공생의 기억을 말살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공생을 부정한 곳에서 증식의 이미지는 과장된다. 모든 파시즘의 알이 부화하는 조건이다. 63

[ ] 피복생활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피부가 본래의 촉각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불용기관의 능력은 일반적으로 후퇴한다. 살아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옷을 입고 지내는 우리 피부의 감도가 얼마만큼 둔화되어 있을지 적잖이 걱정된다. 149

[ ] 묘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자유스런 선의 리듬은 그들의 다성음악과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 발성법과 호흡법, 그것을 살려내는 신체의 움직임이 선이 되고 면이 된다. 숲의 정령에게 바치는 노래의 파동을 그려 넣는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이 그렇듯이 고도로 세련된 감각의 기보법이자 진정으로 자유스런 피부감각을 낳을 수 있는 가장 섬세한 세계의 약도다. 이러한 세계에 산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거미줄의 작은 떨림을 느끼듯 정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감각에는 우리가 여섯 번째에 두고 가버린 감각의 종잡을 수 없음이나 애매함은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생존이 어려운 정글에서 생과 사를 나누는 것은 그 감각이기 때문이다. 163

[ ] 부정할 수 없이 촉감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감각이다. 결국 미적 인식은 타자의 통증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반응은 곧 책임이라는 레비나스의 성찰 또한 몸이 드러내는 감정, 즉 얼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82

볕뉘.

0. 손을 그리고 싶다. 그런다고 손을 잘 그릴 수는 없다. 손으로 손을 그려야만 손의 뇌는 두터워진다. 손이 기억할 때까지 그려내야만 하는 것이다. 손은 몸이다. 그래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1. 현대미술관의 균열이란 주제의 전시가 떠올랐다. 몸에 대한 소장작품들이 제법 되었고 강렬한 작품들도 많았다. 마지막 민정기화가의 풍경이 아니라서 더욱 더 놀라기도 하였다.

2. 촉각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생성이라고 한다. 미술관의 전시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아방가르드였다. 재현이 아니라 재발견을 응시한 것이었는데, 그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전시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3. 느낌을 만드려는 이들이 적다. 소비의 관성이 이리도 지리멸렬을 조장하는가 보다. 그래도 손의 힘과 뭔가 만드려는 꼼지락의 기운은 자주 느껴진다. 몸과 머리의 총량은 일정한 것은 아닐까? 그 몸과 마음이 가는 곳을 의식과 비의식이 머무는 자리라고 해보자. 어느 한 곳이 과잉이라면 우리는 시간의 지쳐버리고 악몽에 시달린다. 보는 것에 익숙해버린 우리라면 하는 것에 친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우리일 것이다. 우리는 꼼지락대며 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노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유행의 순환이 아닌 삶의 자장으로 다르게 번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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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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