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하지 마라.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글의 우물' - 난 그곳에서 노오란 민들레와 함께 서성인다. 서성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래도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싶기도 했다. 서성이면 서성일수록 우울과 낙담과 절망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평을 해내는 것보다 직면하기가 더 어렵고 곤란하다는 사실만이 곧추 나를 쳐다본다. 글의 우물에 꽃잎이 서린다. 우박처럼 내렸다. 동심원처럼 퍼지는 것은 무엇일까. 객관과 이성이 없는 나는 마음을 쳐다본다. 어쩔 줄 모를 수밖에....소장학자의 마음이 일렁인다. 돌아봐야 하는가. 아직인가. 글쎄. 어쩌면 안다는 것이 자만일지도...손목에는 4*16의 구슬이 맴돈다.

 

 

 

볕뉘. 저자는 촛불부터 일련의 흐름을 되묻고 있다. 국가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접어라.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다. 주체를 다시 호명하고 불러세워야 한다. 그 주체는 노동자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실업자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노동권을 불러들여라. 자본론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실업에 대한 글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을 인용한다. 모두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다. 아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타샤 2015-04-1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머니에 넣기 좋은 크기라..한동안 넣고 다니며 읽은 기억이 나네요..

여울 2015-04-16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다시보기 좋은 책이기도 하구요^^
 

1. 기술 technics이라는 영어 단어의 경우 최근에 사용된 것으로, 아직도 사람드은 종종 프랑스어처럼 ‘technique’라고 쓰고 거기에 매우 상이한 뜻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통 ‘technology’라는 단어를 실용적 기술 분야와 그 작용 및 생산품의 체계적 연구라는 두 가지를 말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저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술이란 말을, 인간이 작업 과정을 강력하게 조직화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지시하는 활동의 한 분야라는 의미로만 사용하겠습니다.

 

2. 예술을 기술에서 분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예술은 처음부터 인간의 영역입니다. 즉 예술의 목적은 그것과 결부될 수 있는 다양한 부수적인 기술적 기능과는 무관하게 인간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여러 가지의 감정, 정서, 태도, 가치를 특정한 개인이나 특정한 문화에서 생겨나는 특별한 개별적 형식 속에서, 그 힘과 뜻을 모두 다른 개인과 문화에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감과 감정 이입은 예술의 특유한 방식입니다. 타인의 내면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거기에 동화되는 감정입니다. 예술 작품은 경험이라는 내면의 깊은 수원을 누구든지 나누는 데서 나오는, 눈에 보이고 마실 수 있는 샘입니다. 예술은 인간이 단순히 동물로 살아남기에 필요한 조건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위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요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요구란, 인간의 손아귀에서 너무나 빨리 벗어나 버리거나, 무의식 속으로 너무나도 깊이 침전될 수 있는 그 경험의 소중한 부분들을 더욱 영속적인 형태로 만들고 강렬하게 하며 투사하고자 하는 요구입니다. 그 기원과 목적으로 인해 예술의 의미는 과학과 기술의 조작적 의미와는 다른 질서의 것이 됩니다. 즉 예술은 외부적인 수단과 결과가 아니라 내부적인 변모와 관련되며, 이러한 내부적 변모가 일어나지 않는 한, 예술 작품은 피상적이거나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3. 상징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면, 세계를 주관화하고 개인화할 때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은 삶과 예술 모두의 소재인 정서, 감정, 욕망, 동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인격 부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4.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술의 3단계들은 일종의 성적 사랑의 패러다임입니다. 즉 성적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발전은 유년기나 청소년기에는 조숙한 발달 정지나 고착이라는 위험을 가집니다. 또한 방종함과 무모한 쾌락으로부터, 자손의 생산과 양육을 포함한 모든 의무가 따르는 충실한 성적 결합의 완전한 책임으로 이행할 때와 같은 어려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힘의 기술과 기술의 힘을 무모하고 과도하게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발달 정지와 거부의 표지를 많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술이 많이 손상되어 왔습니다. 전문가가 많아지면서 지나친 노동의 분화는 전인에 대한 필요성에 냉담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틀에 박힌 삶으 그렇게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경멸의 조소를 띠며 예술가의 비밀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용적인 것에만 사로잡힌 예술가가 단순한 자기 과시만으로 주목을 받고자 하거나, 최악의 경우 남에게 폐를 끼쳐 하찮은 주목을 받고자 할 때 예술가를 경멸합니다.

 

5. 인간의 꿈과 희망, 정서와 감정은 인간 삶의 본질적 부분이지만, 확실히 그 일부에 불과합니다...과정과 기능에 대한 균형감각있는 존중은 인간에게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주술적 의사소통에 의해 자연의 힘을 처리하거나, 사물의 제 기능을 발휘하게 하고자 하면, 자신의 분노나 노여움을 충분히 극복하여 물이 새는 구멍을 막거나 잘못 짠 광주리를 수선해야 했을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이러한 겸손, 기능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지적 발전과 정서적 발전 모두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사물의 비인격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성공적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심지어 그 자신과 타협하게 만든 토대입니다. 문화가 계승되고 인격이 발달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81

 

6. 어떤 종류의 질서도 인간에게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즉 인간을 불안과 공포에 젖게 하는 것은 변하기 쉽고 예상할 수 없으며 제멋대로인 것들, 달리 말하면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거나, 자신의 창조력이 불충분한 것으로 보이거나, 상징성이 혼란과 모순을 낳을 때면 언제나 맹목적인 운명에서 도피처를 발견하거나, 그 자신의 주관적 관심사를 직접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그러한 과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정신 의학자들은 최근 옷감 짜기와 같은 기계적 과정이 순수한 치유적 가치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옷감 짜기느 거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전형적인 기계적 질서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날줄 위에 씨줄을 던지는 것에는 최소한의 자유만이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작업의 질서정영한 과정을 따르는 것은, 기술이 린류에게 부여한 적지 않은 은혜였습니다.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리석은 믿음 없이 자연의 힘과 재됴들을 다루려는 자발성과 함게, 비인격적 질서(그중에서도 규칙성과 반복성)와 정밀한 표준화를 스스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83

 

7. 수공업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예술가와 기술자는 그들의 역할이 동일인에게 맡겨졌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행복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가정에 의한면 예술가는 제작과 작업이라고 하는 기술적 조건을 위해 스스로를 훈련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동료들과 함께 농담하고 노래하는 기회를 갖는 직업적 동료 의식과 작업 수행시의 단결과 상호 협조입니다. 둘째는 기술 과정의 최후 단계에 대한 애정어린 배려를 지속하고 능률적이고 실용적인 형식을 의미 있는 상징적 형식으로 변형시키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여분의 노력, 여분의 사랑과 미적 기량이 발휘되면 어떤 건축물도 보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징 자체가 admlal하게 될 때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체취를 갖는 예술 작품을 존중하고 가능한 한 부패와 파괴를 막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87-88

 

8. 모든 삶이 의존하는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예술과 기술의 균형에서보다 진실이었던 경우는 없습니다. 심미적 상징주의는 오랫동안 지식이나 힘에 이르는 지름길이거나 그 적절한 대용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미적 상징주의를 그 방법에 의해 적절하게 창조되거나 형성될 수 있었던 것 시와 예술 작품, 수학과 같은 개념적 지식, 또는 법과 관습 같은 패턴 에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 환경과 자연의 힘에도 적용했습니다. 즉 사람들은 비를 부르거나 출산을 증대하기 위해 어리석게도 예술과 의례에 호소했습니다 그것들과 균형을 이루는 기술에 대한 흥미와 방법이 없었다면, 그런 상징이 점차 현실로 대체되고 결국은 인간으로부터 물리적 생존을 위한 능력을 빼앗아 사람들을 미치게 했을 것입니다. 생존의 어떤 지점에서 인간은 반드시 그의 내면세계를 떠나 외부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반드시 그의 내면세계를 떠나 외부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반드시 잠에서 깨어나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구는 객관성을, 또는 제 옛 스승인 소스타인 베블런이 말했던 사실성을 낳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객관성은 건정한 정신의 조건입니다. 89

 

9. 14세기 서유럽은 기독교 교회에 의해 촉진된 교리, 철학, 의례, 일상의 행동 양식 안에 당당당한 상징적 구조를 창조했습니다 중세 문명은 그 약점 때문이 아니라 그 성취에 의해 정복됐습니다. 상징화에 대한 이러한 노력이 너무나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실과 사건을 기독교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습관이 너무나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내면의의미의 과다함이 모든 자연적 사건과 모든 단순한 행동을 덮어 버렸습니다. 즉 어떤 것도 그 자체가 되지 못하고 그 자체의 권리로 존재하지 못해, 항상 궁극의 본거지를 다른 세계에 둔 무언가를 위한 판단 기준에 그치게 됐습니다. 정신의 가장 단순한 작용마저도 완전히 쓸모없는 종류의 상징적인 장황한 말들에 의해 어지러워졌습니다. 따라서 분별력을 갖기 위해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질서와 추상인 기계적 질서, 숫자, 규칙성, 훈련 속에서 도피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양인은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그가 찾는 대상을 잊어버렸습니다. 성가시게만 하는 다른 세계를 제거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제거해 버렸습니다. 95

 

10. 내면생활의 제어할 수 없는 면을 안정시키는 것을 종종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정서나 욕망의 억제나 대상에 대한 존중을 참된 객관성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객관성이란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함해야 하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측면인 주체 자체를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객관적일 때,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아니라, 또한 반대로 사물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우리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도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기술이 전인격 속에 흡수된다고 하더라도, 기술의 어떤 질서와 규칙성과 중립성이 통합된 인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더 의미 있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93 에머슨은 삶이란 단지 재주를 부리는 것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술도 여기저기서 많은 발명품들만을 내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력과 대등하게 만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더 합리적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간성을 창조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행동이 비참할 정도로 기계적이 되면, 기술은 이러한 목적에 이바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계적 과정이라고 하는 더 작은 객관성이 인격 발전이라는 더욱더 큰 객관성에 흡수되면 종종 인간적 내용을 결여한 것처럼 보이는 기계적 발달이 인간 정신 자체에 대한 하나의 은혜임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술의 인간적 부분은 기술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권력이나 부의 증대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94

 

11. 기계를 인간화하거나, 또는 기계를 우리가 인간적 예술이라고 지금까지 표현해 온 인간성 부분의 장점으로 전환하는 데, 외부적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기계에 꽃을 그린다고 해서 기계를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은 감상적인 난센스에 불과합니다. 즉 기계 에술의 규범은 본질적 요소에 대한 정확성, 경제성, 원활성, 엄밀성, 제한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규범이 부적절한 장식의 응용이나 부적절한 형식의 포장에 의해 침해될 때, 그 결과는 기계의 인간화가 아니라 기계의 비속화입니다..가치란 적절한 미적 표현에 의해 질서를 표현하거나 동력에 보탬이 되는 정도로 최소한의 인간적 적합성을 갖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인간의 대용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합리적이고 조작적인 부분의 확대가 되지만, 그것에 속하지 않는 영역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118

 

12. 기술의 진로를 지속적 상승으로 보는 견해는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능력이 없고, 우리가 창조한 기계를 지배하고 그것을 제자리에 둘 능력도 없고, 우리가 창조한 기계를 지배하고 그것을 제자리에 둘 능력도 없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그것은 우리가 기게에 사로잡혀 초래한 열광과 강제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따라서 철학과 종교와 예술은 인간에게 다시금 전인적인 삶의 전망을 열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다시는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지 못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우리 자신을 더욱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면, 기계에 속하는 것은 오로지 기계에게로 돌리고, 삶에 속하는 것인 주도권, 선택능력, 자기 관리, 요컨대 자유와 창조성은 삶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기계가 우수한 원형으로서의 힘과 경제성을 성취하게 되면, 기계의 창조자가 자신을 기계적 피조물 수준 이상으로 다시금 올려놓기 전까지 기계는 정지돼야 한다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것입니다.

 

13. 참된 예술 작품은 우리의 완전한 주의력, 완벽한 참여, 가장 개성적이고 재창조적인 반응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적나라한 선정주의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예술가가 방어적으로 점차 할 말을 잃어 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선정주의가 의미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술가는 거대 광고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되는 묘기와 유사한 과장과 왜곡이라고 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강요당합니다. 따라서 더욱 빨리, 더욱더 빨리라는 수량화의 원리는 더둑 시끄럽게, 더욱더 시끄럽게라는 선정주의를 유도하게 되고, 이어서 예술가가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쳐 더욱 공허하게, 더욱더 공허하게로 나아갑니다. 이는 대량 생산과 그것과 경쟁하는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무서운 대가입니다. 137 복제 과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람들은 예술의 본질적 성격인 독창성을 잊고 있습니다. 모든 활동의 배후에는 일종의 질서와 형식이 지배적이어야 하는 한, 자극과 의미의 강도를 촉진하는 심미적 관심은 필연적으로 그 존속 기간이 짧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동화 능력에 따라, 반복의 시간, , 기간, 빈도를 통제하기까지, 지금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미지와 소리의 홍수를 제한하는 법을 배워야만 예술의 복제 장치는 인간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145 지난 몇 세기 동안 의 엄청난 기계의 팽창은 과거에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어서 가르칠 필요가 없었던 교훈을 인류에게 주었습니다 즉 유일한 것, 독창적인 것, 귀중한 것, 참으로 개성적인 것이라는 가치입니다. 삶에는 귀족주의적인 원리가 민주주의적인 원리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예술의 철저한 개성주의가 기술의 몰개성주의, 나아가 따라서 기술의 피상성을 중화시켜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볕뉘.

 

1. 꽃들이 꽃멀리를 불러일으키는 때 꽃한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마무리 흔적을 남겨둡니다. 천양희의 숨은꽃 마지막구절처럼  숨긴 그를 이렇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전합니다.

 

"꽃이라고 다 꽃답게 꽃피우는 건 아닐 겁니다.

숨어서 피는 꽃이 있다면 그 꽃 속은 더 환할 것입니다.

비밀의 꽃장이란 얼마나 넘기고 싶은 페이지입니까.

지금 누가 그걸 읽는 중일까요.

누가 그를 어디에다 숨긴 것일까요."  천양희 숨은 꽃에서

 

2. 저자의 호흡을 따라 바보처럼 *번을 읽습니다. 쓰는 단어들이 조금씩 이어지는 듯, 말과 말 사이가 어긋나지 않는 듯싶습니다. 동학사 법고소리가 은은하게 마음 속에 퍼질 무렵, 세심정에서 마지막 장을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꽃숭어리는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터질 듯, 거리의 상춘객들도 꽃으로 가득입니다.

 

3. 이만 책장을 덮습니다. 밤이 깊었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축에서 상징과 기능

 

건축은 기능이라는 측면 외에 표현이라는 전반적 영역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더욱더 경건함을 느끼게 하며, 대학에서는 더욱더 학구적인 느낌을 갖게 합니다. 사무실에서는 더욱더 사업적이고 능률적인 느낌을 갖게 하며, 도시를 돌아보고 그 다양한 삶에 참여하면 더욱더 시민답고 협조적이며 책임감을 갖게 하고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를 더욱더 자랑스럽게 여기게 합니다. 건축은 배우들에게 완벽한 도움을 주어 그 사회적 드라마가 연기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의 지속적인 무대 장치입니다. 152

 

건축 작품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쇠퇴가 기술적 쇠퇴보다 더욱더 치명적입니다. 하나의 건물이 무의미하게 되면, 여전히 서 있다고 해도, 시야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현대 건축은 사람들이 낡은 상징주의 양식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말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반대로 기계가 낳은 새로운 기능이 현대인에게 말할 특별한 것을 가졌음을 깨달은 순간 나타났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새로운 진실을 현실화하는 행위 속에서 기계적 기능은 표현을 흡수하는 경향에 빠지거나, 더욱더 광신적인 사람들은 표현의 필요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경향에 빠졌습니다. 153

 

그런데 우리의 기술공정이 아무리 빨리 변한다고 해도, 표현에 대한 요구는 모든 문화에 언제나 남기 마련입니다. 표현 없이는 삶의 드라마가 진행될 수 없고, 줄거리 자체가 중심 없이 공허해집니다. 삶이란 반드시 의미, 가치,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고 맙니다. 즉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나 장님이고, 귀가 뚫려 있으나 귀머거리이며, 입술을 움직이지만 벙어리인, 발로 서 있는 죽은 송장이 됩니다...각 시대는 그 자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60

 

인간의 개성을 낮게 평가한 사람들은, 특히 감각과 정서를 순수한 지성에 종속시킨 사람들은, 기계에 대한 과대평가로 그들의 잘못을 보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계만이 감각과 물리적 힘이라고 하는 무의미한 세계에서 삶의 목적을 표상합니다. 그 결과 기계는 인간이 이용해야할 도구가 아니라, 숙고해야 할 상징으로 변하게 되고, 현대 생활 전체와 동일시됐습니다. 162

 

현대인의 다원적 세계에서는, 주관적 관심과 가치, 정서와 감각이 객관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즉 삶을 성장시키는 것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권력과 표준화된 상품의 성장보다도 더욱더 중요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163

 

모든 건물은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필요성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이고 인간적인 목적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유기적인 기능주의는, 기계적이고 생리적인 해결만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하원의사당을 재건축할 때, 윈스턴 처칠이 평상시의 의원들이 참가하는 상태에서 토론의 긴밀성과 친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좌석수를 의원수보다 상당히 적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르코르뷔지에와 함께 기계화와 비인격화가 현대 건축의 만능적 요소로 간주된 1920년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상당히 부당한 비방을 받아야했습니다. 라이트의 작품에서는 주관적이고 상징적인 요소가 기계적 요건과 마찬가지로 중요했습니다....매튜 노비츠키는 모든 건물은 말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물리적 기반에서도 엄격했던 노비츠키의 건축은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성과 개성이라는 차원으로까지 올라갔습니다. 겸양과 인간적 공감을 통해서, 삶의 모든 순수한 표현에 대한 존경을 통해서, 그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건축가에게도 없던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지역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추상적-합리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을 더욱더 완전하게 화해시키는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164-5, 170

 

예술, 기술, 문화적 통합

 

기본적인 가정은 우리의 삶이 점차 서로 무관하게 구획으로 나누어지고 있고, 그 구획 속의 질서와 상호 관계의 형태만이 실제로 우리의 일상 실존을 지배하는 자동적 조직과 메커니즘에 적합한 것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개인의 기본적 능력, 즉 자신의 목적에 따라 ’, ‘아니오를 말하여 결단을 내릴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기술의 높은 발전을 통해 우리의 힘을 엄청나게 증대시켰음에도, 그런 힘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치유책은 질병 자체의 징후를 더욱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됐습니다. 175

 

우리 시대에서 살펴보고자 애쓴 상태는 본래 인간 사회에 나타난 예술과 기술의 상태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인간은 상징을 주술적 힘으로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언어든 이미지든 간에 상징은 인간됨의 핵심 그 자체였고, 순수하게 본능적인 동물의 지능을 뛰어넘는 탈출을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상징은 인간을 건방지게 만들었고 상징이 촉진하는 도구와 과정을 저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바로 그 반대의 조건이 지배적입니다. 우리는 상징에 대한 비굴한 의혹과 신랄한 냉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모든 상징의 가치를 저평가한 시대가, 기계 자체를 보편적 상징으로, 즉 숭배해야 할 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술도 기술도 건강한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176-7

 

에술가는 예술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 있고, 내 속에서 삶은 하나의 형식을 취합니다. 나의 삶은 내가 그 의미와 가치를 완전하게 습득하기 전까지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상상한 것은, 나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하기에 나는 상징과 형식이라는 공통 언어를 통해, 표현 그 자체의 행위를 통해, 나 자신 속에서 절정으로 끌고 간 어떤 집중과 열정적인 환희를 가지고, 내가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상상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예술의 힘을 빌려 나는 여러분에게, 현존하는 생애의 경험을, 생애의 수많은 가능태를 드립니다. 이러한 미적 계기들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런 새로운 의미는 다른 미적 계기와 함께 삶을 고양합니다.” 177

 

예술 속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창조성이라는 비슷한 반응과 비슷한 행위를 고취하면서, 본래 그 안에 살았던 생물체보다 더 오래 남는 껍질을 만듭니다. 그 결과, 세계의 모든 부분에는 결국 인간 개성의 어떤 흔적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정의된 예술은, 과학과 기술에 반목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기술도 인간적 감정과 인간적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반대는 무감각, 몰개성, 창조성의 결여, 공허한 반복, 무의미한 일상이며 벙어리 같고, 무표정하며, 형식이 없고, 무질서하며, 실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삶입니다. 178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문화발전을 인도적이고 유기적 단계와 무미건조한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기계 문명의 지배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한 사람들이 기업 활동을 위해 서정시를 포기하고, 기술 공학을 위해 그림과 음악을 포기할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인간의 자살은 삶에 대한 더욱더 전반적인 과소평가와 허무주의와 자기소멸을 낳습니다. 180

 

오늘의 삶이라는 위대한 드라마를 위한 가장 호소력 있는 표현의 근원은, 분열과 해체를 극복하는 노력,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은둔이 아니라 참여에 의해, 도피가 아니라 삶을 위협하는 힘을 정복함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주도권의 회복에 실패한 것, 내면의 평정을 회복하고 우리의 숨은 욕망을 확인하며 침몰된 희망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상징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절망의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낼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은 모두 예술에만 특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거의 대부분의 다른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87

 

우리는 기계의 죄수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기계의 죄수라고 해도 우리가 감옥을 만들었고, 우리 스스로 감옥의 규칙을 만들었으며, 우리 스스로 자신을 간수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스스로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이 음침한 감옥에 자신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기계 신도들이 그렇게 믿도록 스스로를 속여 온 것처럼, 그 감옥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험의 특수한 측면에 집중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벽은 인간의 정신이 나팔을 불고 물질이 아닌 인간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면 예리코의 성벽처럼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195

 

더욱더 냉정하고 강제적인 형식 속에서의 기계가 더욱더 지배한다는 점이 아니라, 삶의 재생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를 위한 첫걸음은 주도권을 쥐고, 삶을 위한 우리 자신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판에 박힌 일상생활로부터 충분하게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사물을 장악해야 합니다 그 규모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예술이 한쪽으로 치우친 기술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창조나 재창조로서의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의 상태와 구조 속에 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멈추어 서서, 침묵하고 우리의 눈을 닫고서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95

 

 

볕뉘.

 

 1. 왜 (로)봇의 도덕인가라는 책은 최근 연구동향을 반영하면서 철학, 윤리, 문화, 기술 전반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다. 말미 인공지능의 출현이나 종합적인 노력에 긍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두고있긴 하다. 반면에 빅퀘스천은 칼럼 글을 옮기었으며 유명세와 달리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책이었다. 잘나가는 평균이상 저자의 책을 읽지 마라는 충고가 책장을 덮자마자 밀려왔다.

 

2. 꽃잎도 떨어지고 한산한 동네 도서관에서 예술과 기술의 책장을 마저 덮었다. 기계의 죄수, 기계의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우리라는 표현에서 루쉰과 베버의 쇠감옥이 다시 떠올랐다. 삶의 재생, 객관화를 가장한 주관의 포기, 이성을 빌미로 한 감성과 감각의 포기. 삶이라는 표현은 추상인 것일까? 온전한 것일까? 객관과 주관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것일까?

 

3.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이 표현은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의 안개에 대한 묘사이다. '삶'은 그런 것일까?

 

4. 저자는 기독교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순간 로마가 육교, 상하수도, 도로포장 토목사업을 멈추고 교회와 수도원을 짓기시작하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근본적인 변화라고 그것은 가능할 것이라고 말이다. 삶의 재생, 우리의 상상력이 멈추어 선 지점은 어디일까? 60년전의 이야기라 너무 구태연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세기 이래 그림은 벽화나 유화의 형식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판화라는 값싼 매체로 가정에 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성을 상실한 대가로 친근성과 다양성, 광범한 보급성을 얻게 됐습니다. 수준 높은 예술에 여전히 좋은 작품들이 풍부했을 때에는, 이러한 통속적 복제품도 원화가 갖는 많은 장점을 간직했습니다....그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하는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 이 명제는 정치에서 제창되기 오래전에 예술에서 성취됐습니다. 127

 

사진의 참된 승리는 사진가의 매체에 대한 존중, 자기 앞에 있는 사물에 대한 관심, 그날의 시각과 빛의 성질 및 움직임, 감광판이나 필름의 감도, 렌즈 윤곽의 영향을 받는 눈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이미지 중 아나를 선택하는 능력과 같은 요인들이 자신의 의도와 합치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는 사진을 찍는 시점에 생길 수도 있고, 수없이 인화를 해 본 뒤에 생길 수도 있는 인간적 개성이 다시 작동하게 됩니다. 즉 그 순간, 오직 그 순간, 인간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이유에서 기계제품은 진정한 예술작품이 됩니다. 132

 

과거에는 그림이 희소한 종류의 상징이었고, 주의 깊은 집중을 요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는 실제의 경험이 희소하게 되었고 그림은 어디에나 있게 됐습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를 참가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 반면 텔레비전으로 그 경기를 보는 사람은 수천 명이듯이,....우리의 세계를 2개의 계급으로 급속히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복제 과정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수이고, 다른 하나는 삶 전체를 이러한 복제 과정의 수동적 감상자나 자발적 희생자로 낭비하는 다수입니다. 135

 

너무나도 지속적이고 끈질기며 집요하여 우리 자신의 모든 목적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내면적 충동이나 자주적인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미지들입니다. 이 전반적인 기계적 과정의 결과로, 우리는 더 이상 다차원의 현실 세계, 즉 앙상한 골격으로부터 가장 부드러운 정서에 이르는 인간성의 모든 측면이 활동하는 세계에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대체로 시각적 상징물의 대량 생산을 통해 실제로 음향의 재생과 증폭이 선동하는 모든 사람이 간접적이고 파생적인 삶을 사는 간접적 세계, 유령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실제 존재의 이 창백한 환영을 히데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그림자 왕국이 우리의 기계적이고 황금만능 문화의 궁극적 목적지여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36

 

에술가는 거대 광고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되는 묘기와 유사한 과장과 왜곡이라고 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강요당합니다. 따라서 더욱 빨리, 더욱더 빨리라는 수량화의 원리는 더욱 시끄럽게, 더욱더 시끄럽게라는 선정주의를 유도하게 되고, 이어서 예술가가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쳐 더욱 공허하게, 더욱더 공허하게나아갑니다. 이는 대량 생산과 그것과 경쟁하는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무거운 대가입니다. 138

 

토크빌이 지난 7세기 통안의 본질적인 명제로 설명한 과정인 평등화라는 전반적인 민주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기계화는 상향적인 것이든 하향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방향에서 참된 평등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경우 그 실제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비선택성이라고 우리의 뿌리 깊은 습관으로 인해 그 결과는 상상하듯이 그렇게 다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140

 

좋은 것도 너무 많이 가지면 지나칠 수 있다로 표현했는데 그 잠언의 배후에는 인류의 오랜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것도 많이 가지면 지나친 일은 실제로도 있습니다. 사실 강렬한 경험일수록 그만큼 가치가 있고, 많을수록 지속은 더 짧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나 잦은 축복은 저주가 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기계의 선물인 규칙성과 반복성은 신체의 반사 조직에 해당하는 삶의 그런 측면에 한정돼야 합니다. 141

 

미술관의 위대한 예술 작품은 볼 때마다 새로움을 주는 충격과 환희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한 작품은 그 의미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즉 너무 자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험의 희소성이야말로 환희를 위한 필수적 준비입니다. 리듬과 간격이 없다면 오로지 포만과 권태가 있을 뿐입니다. 143

 

복제 과정을 그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람들은 예술의 본질적 성격인 독창성을 잊고 있습니다. 모든 활동의 배후에는 일종의 질서와 형식이 지배적이어야 하는한, 자극과 의미의 강도를 촉진하는 심미적 관심은 필연적으로 그 존속 기간이 짧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동화 능력에 따라, 반복의 시간, , 기간, 빈도를 통제하기까지, 지금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미지와 소리의 홍수를 제한하는 법을 배워야만 예술의 복제 장치는 인간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145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엄청난 기계의 팽창은, 과거에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어서 가르칠 필요가 없었던 교훈을 인류에게 주었습니다. 즉 유일한 것, 독창적인 것, 귀중한 것, 참으로 개성적인 것이라는 가치입니다. 삶에는 귀족주의적 원리가 민주주의적인 원리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예술의 철저한 개성주의가 기술의 몰개성주의, 나아가 따라서 기술의 피상성을 중화시켜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한 방울을 주기 위해 포도주에 물을 무한정으로 타서 나누어주면 누구에게도 아무런 봉사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147

 

이러한 결론은 예술과 윤리, 선과 진 사이에 너무나도 오래 존재한 갈등을 어느 정도 수정해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대량 생산의 시대에 예술의 환벽성과 환희를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한 인간만이 감각적이고 반응적이듯이, 인간이라는 유기체 전체가 최고로 활기있고, 감각적이고 반응적으로 고양돼 있어야 합니다....고도의 도덕적 민감성과 의식의 통제도 필요합니다. 이는 결국, 자신이 갖는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베푸는 우정의 축복과 같이, 순수한 예술 작품이 부여하는 최고의 선을 위해 그보다 못한 선을 거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148

 

볕뉘

 

대량생산과 복제, 표준화는 왕이 누리던 것을 누구나 누릴 수 있게해주었다.  평등과 민주주의의 원리가 작동하는 듯이 보인다. 어떤 면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는 삶의 독창성과 유한한 존재인 사람에게 좋은 것만이 아니다. 선택을 하지못하고, 그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중독의 지점에서 일상, 삶은 살아지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이 범람을 제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말이다. 삶의 귀족주의 원리를 대상에 구현하는 법을 배워야하는 과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는 '선택이 창조다'라는 니체의 말로 [표준화, 복제, 선택]이라는 강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진은 내향 세대를 옹호하는 근거를 헤겔의 지평을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한번 깊게 내향적이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깥으로 향할 수 없다.” 자기 내면으로 가는 것은 헤겔식으로 말하면, 자기 안에서 대립을 만들고 그 대립을 자기의 한 계기로 지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외면화와 내면화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고진에게 내면화는 외면화의 기반이며, 철저한 주체성은 철저한 타자 관계성을 의식하고 있다. 이에 기초하여 그는 자신의 좌익적 체계를 주체로서 좌익적 문학으로 개념화한다. 이것은 전공투 세대를 겨냥한 것이면서 전공투 세대에게 비판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445

 

고진이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면서 칸트와 맑스를 연결할 때, 연결 속에서 등장하는 세 항은 서로 독자적이지만, 긴밀하게 연결된다. 세 항들의 이중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맑스와 칸트를 도입하는 고진의 주장을 살펴보자. 나는 최초에 소위 네이션=스테이트란 자본=네이션=국가라고 서술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시민사회=시장경제(감성)와 국가(오성)가 네이션(상상력)에 의해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말하지면 보로메오의 매듭입니다. 즉 어느 하나를 없애면 무너지는 매듭입니다.” “칸트의 인식 기능으로 번역하면, “네이션은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라는 서로 다른 교환 원리에 서는 것을 상상적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환양식논의와 분리할 수 없으며, 동시에 어소시에이션을 실현하는 부단한 과정과 맞물려 있다.“ 457

 

고진의 반복강박은 천체의 반복처럼 자본의 확장대의제의 불완전함에서도 드러난다.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대표제의 불완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 간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논지를 설파한다. 맑스가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은 유권자의 손에 의해 뽑힌 대표자가 선거 이후에 유권자의 의지를 저버리는 현상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선거 이후가 아니라 선거 이전의 문제이다. 유권자는 투표할 때, 자신과 동일한 당파성이나 이해관계를 견지한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대표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투표하며, 뽑힌 대표자를 자신의 당파성과 배치되는 방식으로 지지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불완전함이다.“ 474

 

고진은 세계공화국에서 인류 전체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세 과제를 제시하면서 글을 맺는다. , ‘전쟁환경파괴경제적 격차로서 인류 문제를 제시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공히 집약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착하게 된다. 고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처럼 국제연합을 고려하면서 각 국가는 장기적 안목에서 국제연합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양도하는 구조, 그래서 점차로 확장된 국제연합을 구성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확장된 국제연합의 최종 이념은 세계공화국이다. ‘세계공화국은 현실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제적 이념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만약 이념을 포기한다면, 지향점이 사라질뿐만 아니라 노력을 위한 추동력도 사라질 것이다. 고진은 그럴 경우 미래를 위한 상상력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래로부터의 노력위로부터의 노력이 동시에 요구되는데 어소시에이션세계공화국은 그 양면이다. ‘확장된 국제연합실현 가능한 구성적 이념이며, 우리 모두가 위로부터강화해나가야 할 요소이다. 그러면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478

 

볕뉘.

 

1. 재독하거나, 지나쳐버린 흔적들을 다시 쫓고 있다.  기억을 상기시켜주고 잊혀진 것들이 이어지는 느낌이 좋다.  쓰는 개념들이 다르긴 하지만 맑스에 고정점을 두고 다시 고민과 삶, 사상의 결을 반추하게 해주어서 고맙다.  읽고 스치고 안개같이 몽롬함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비교적 가까운 용어를 써야할 사실을 대비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2.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라클라우, 무페, 그리고 고진을 다시 본다. 윤여일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서동민의 '두제곱의 사유', 지금 말하고 있는 '외면화와 내면화'는 타자와 관계성 확장을 위한 철저함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국가, 정치, 경제, 주체, 윤리라는 문제들을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구획짓고 객관화하는데만 익숙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볼 줄 아는 것, 정녕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되물을 수 있을까? 맑스이전의 사고, 맑스에 멈추어선 사고이후 우리는 스스로의 허상을 얼마나 허물 수 있을까?  무너지는 만큼 다시 설 수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을까. 치열한 고민과 시선과 사유를 따라갈 필요는 없을까? 과거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얼마나 재사유화, 재삶화하느냐에 따라 다가올 미래는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은 아닐까

 

3. 어쩌면 다 무용한지 모르지만, 내면화의 과정을 겪는 것과 겪지 않는 것의 지평은 다를 것이다. 자본을 너머서려면 노동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에 천착해야 하며, 정치의 공황을 너머서려면 프랑스혁명의 지점에 다시서야 한다는 점들.  어쩌면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들에 다시 논의를 불붙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환경파괴를 너머 경제적 격차를 함께 아우르지 않으면 우리의 상상력도 멈출 수밖에 없다는 고진의 말과 정치철학자의 외침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4. 오랜만의 푸념이다. 삼독을 하려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4-0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세계공화국과 피케티의 글로벌자본세는 의의면에서는 상통하는 것 같네요. 둘다 실현불가능한 규제성이라는 지적을 받는 것까지. 그 기반의 맑스 또한.

푸념이라 생각되지도 않지만 게의치 않습니다. 사람인데! 늘 좋은 글, 사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울 2015-04-06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 다듬지 않는 글 잘 봐주셔서 고마워요. 봄이 아까운 시간들이네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