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역사가 인간의 심성과 감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커지는 특유의 소외, 고통, 착취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과거의 언어, 관습, 제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의 배아형태, 즉 진짜 조상이라는 것이다. 역사에 관한 ‘중앙집권주의자’의 시각에 맞설 필요가 있다.“ – 이반 일리히

 

 

 

2.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직접 마주하고,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수된 환경에서 역사를 창조한다.”,“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한다. 하지만 꼭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 칼 맑스

 

 

 

 

3.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의 매 순간순간이 인용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발터 벤야민

 

 

 

 

4.“언제나 역사화하라! 모든 변증법적 사고의 ‘상호역사적’ 혹은 심지어 절대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의무인 이러한 슬로건은, 또한 정치적 무의식의 윤리이기도 하다.” - 프레드릭 제임슨

 

 

 

현 시대상황에서 역사인식과 역사정신이 왜 필요한가요? 어떤 역사정신이 필요한가요? 그 세밀한 결들을 살펴 '지금 여기'에 다른 시선을 스미게 할 수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볕뉘. 책마실을 하다가 걸린 대목들이다. 일리히는 독일의 이혼소송사건을 다루면서 역사가 그 미세한 변화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한다. 발라내서 대문입구에 걸린 역사의식이 아니라 미세한 숨결같은 것을 다뤄야 한다고, 사건들과 현상 이면에 붙어있는 것들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임슨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표상되는 징후로는 총체적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이면에 드러나는 정치적, 지정학적 무의식을 보려면 실제 Real을 들여다보는 목적과 수단으로 언제나 역사화해야 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를 편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용도에 맞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정신,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역사인식과 역사정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금, 지금여기에서 역사의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조금씩 질문을 크게하면서 찾아나가는 수밖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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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말년에 동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네.”라고 고백한 바 있다. 50

 

1845, 마르크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50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적 용어를 제안한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 52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57

 

알튀세르

 

이 도식은 다양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며, 문화나 법률 같은 사회적 측면이 경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직 혹은 구조의 일반적 법칙과 관계된 채 어떻게 준자율적이게 되는지를 보여준다....이러한 구조개념이야말로 이론적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알튀세르주의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영향력과 지위 향상을 이해할 수 있게해준다고 단언한다. 알튀세르주의는 철학에서 정치학, 인류학, 법학, 경제학, 문화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강력하고 도전적인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왔다. 72

 

달의 뒷면을 보게하는변증법

 

마르크스주의와 형식의 아도르노 관련 장에서, 제임슨은 변증법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변증법이란 바로 이처럼 분리된 추상적 부분들보다 구체적인 총체성을 선호하는 방법이다.’

 

변증법적 사유란 제곱된 사유, 즉 사유 자체에 대한 사고로서, 정신은 대상이 되는 자료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 과정도 다루어야 한다.’ 더 나아가 변증법적 방법은 사막처럼 황폐화된 현대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제공한다. 102

 

사유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성 속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유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자신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변증법에대한 정의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런 식으로 정의해볼 수는 있다.’ 104

 

변증법은 자본주의적 삶의 동일성이 우리의 사유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개념의 다른 측면, 즉 달의 뒷면처럼 직접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개념의 바깥 면을 사유하는 것이다.’

 

세상에 신과 같은 의미의 절대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특별한 방도를 가진 사람은 없다. 제임슨과 나, 독자를 포함한 그 어떤 비평가도 자신을 둘러싼 특정한 문화적·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영향은 어떤 식으로든 주어진 쟁점을 그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하는 선입견을 만들어 낸다. 110

 

역사는 일종의 절대적인 것이지만, 절대적 기준이라기보다는 모든 해석을 감싸 안는 수평선 horizon’의 개념에 가깝다.

 

정치적 무의식의 서문은 비평가는 언제나 역사화해야 한다문제와 관련돼 있다. 어떤 비평가도 역사가 동시대의 문학을 틀짓는 방식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다룬 제임슨의 비평이 16세기말 17세기 초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제임슨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실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흥 상인계급이 구체제의 귀족계급의 지위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회적·경제적 권력을 둘러싼 두 계급 사이의 투쟁을 구체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속에 현전한다. 단순희 희곡 속에 등장하는 용어나 표면적 내용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 깊이 숨겨진,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을 통해서 말이다. 113

 

프로이트와 라캉

 

프로이트는 기본적으로 개인에 집중했으며, 특히 어머니·아버지 등 제한적인 관계에 흥미를 보였다. 반면 마르크스는 개인이 사회 전체와 맺는 관계를 연구했다. 120

 

70-80년대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을 잃지 않은 계획을 제임슨이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 제임슨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정치학과 정신분석학을, 집단과 개인을 연결지으려는, 한창 논쟁 중인 이론적 틀을 선보였다...이를 제임슨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주인-서사 master-narratives’가 될 것이다. 123

 

제임슨은 비평가로서 내내 자본주의적 일상의 명백한 표층 밑에 감추어진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에 매혹되었으며, 문화적 텍스트야말로 그처럼 심층에 감추어진 무의식적 실재로 다가가는 가장 확신한 통로라고 확신했다. 128

 

프로이트는 꿈을 꾼 사람이 기억하는 (명시적) 내용과 분석으로써 얻어지는 (내포적) 내용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29

 

억압 개념은 그 단어가 던지는 인상처럼 결코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정신분석 이론에서 인성이 미치는 억압의 기원이나 효과가 무엇이건 간에 그 증상과 기제는 폭력적인 것과는 정반대이며, 단순한 회의, 망각, 무시, 흥미를 잃어버림 등이 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억압은 반영적인데, 의식 내에서 특정한 대상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 억압의 흔적 자체를 억압하려는 의도라는 바로 그 생각 자체를 억압한다. 이것이 바로 좀 전에 제기했듯, 지루함이 유용한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이유이다. 133

 

프로이트의 의식 모델은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것이며, 그러한 치료에 사용되었다....환자들은 종종 악몽, 비합리적 폭력, 신경증적 강박 등의 명백한 신경증적 혹은 정신적 쇠약의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프지 않으며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고 강하게 부인한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보편적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자본주의는 널리 확산되는 가난과 억압, 불행 등 명백한 병리적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즈주의 비평가는 현대사회의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잠재되고 억압된 지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 135

 

라캉에 따르면, 에고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의미화 과정을 거쳐 에고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라캉에게 사람이 되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유사하다. 138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상상계 Imaginary’, ‘상징계 Symbolic’, ‘실재 Real’라고 부른다. 139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아이는 여전히 실재적 세계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만의 개념적 세계 속에 살며 어디서부터가 자신이고 어디서부터가 엄마의 가슴인지를 전혀 분절하지 못하다가, 차츰 경험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캉의 이론에 다르면, 모든 어른의 욕망은 일종의 결핍을 반영하고, 모든 결핍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분절로 일체감의 기쁨이 깨지는 유아기 결핍의 아픔에서 유래한다....거울단계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인간 발달 단계를 일컫는다...나중에 아이가 성장하여 언어를 파악하게 되면, 의식은 다음 단계인 상징계로 이동한다...상징계는 문학 같은 문화가 발생하는 장소이며, 개인적 주체가 라는 자아 의식을 발달시키는 장소이다...궁극적으로 언어가 우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에고의 발달도, 자아 의식도 불가능하다....개인은 타자를 욕망하지만 결코 실제적 만족을 얻을 수 없다...욕망은 고정된 의미(실체)에 대한 추구인데, 그 과정에서 욕망의 대상은 계속해서 특정 개인이나 물질적 소유 등의 기표로 미끄러진다...140-144

 

제임슨 같은 비평가에게 라캉은 주체를 육체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동반 성장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기입되고 재기입되는, 잦은 의미 변환을 겪고 손쉽게 깨질 수 있는 텍스트에 가깝다고 본다는 점이다... 또한 부드러우며 다루기 쉬운 통합적 정체성이라는 관점을 버리고, 대신 의미들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주체를 바라보는 라캉적 견해는 가족·사회·문화 등이 인간을 구성하는힘을 날카롭게 풍요롭게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임슨이 라캉에게 이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실재로서의 역사라는 개념 때문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의 상징적(그리고 아마도 상상적) 표상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역사는 계급투쟁의 즉작적 반영이라고 간주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마르크스주의적 핵심 개념을 더 풍부하고 그럴듯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145

 

이미지를 붙잡으로써만...이러한 방식으로, 상상계의 투명한 개인적 혹은 정신적 경험의 흔적처럼, 그 흔적은 바다의 이미지를 상징게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비평만이 문학 텍스트와 살아있는 해석학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146

 

브레이트, 푸코, 들뢰즈 이러한 비평가들은 상징계를 거의 직접적으로 억압적 힘과 동일시하고, 상상계를 너무 쉽게 혁명적 자유와 동일시 한다. ...제임슨이 좋아하는 접근 방식은 이 문제에 좀 더 마르크스주의적이고 변증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라캉의 실재 개념으로 되돌아오며,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을 적용한다. ‘오직 실재만이 앞서 언급한 라캉의 두 체계가 계속해서 빠져온 함정을 극복하고, 상상계적 저항에 다다를 수 있다.’ 147

 

라캉에게 실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이다. 만일 정신분석가라면 여기서의 역사는 명백히 주체의 개인사에 해당할 것이다...제임슨에게 역사는 모든 올바른 비평이 기반으로 삼아야 할 기준점이다....비평적 분석은 그것이 정신분석학적이든 정치적이든지 간에, 우리 자신의 역사서사들 사이에서 실재를 구별해내는 과정을 거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한 실재는 우리의 서사가, 사선으로 기울어진 점근선적접근으로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그리고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그 무엇을 가리킨다. 148

 

19세기 리얼리즘의 서사 형식 배후에는 산업화의 부흥이 위치하며, 모더니즘의 형식 뒤에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뒤에는 탈산업적 자본주의가 역사적 실재로 자리한다는 것이다. 149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하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하지만, 제임슨이 보기에 그것은 억압받고 상처받은 주체를 단순히 자본주의의 역동성 및 교환 과정이 낳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폐해로 간주하는’, ‘일종의 사회심리학적 보충에 불과하다. 151

 

정치적 무의식

 

제임슨은 텍스트를 신경증 환자처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를 반드시 지시 대상이 되는 중요 사물에 의존하여 해석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표층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과 관련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징후에 주목함으로써 비평가는 무의식적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 ....‘표증에 드러나는 표면적 서사는 역사와 상호관련을 맺으며 텍스트의 무의식적 실재를 매개한다.“ 160-161

 

언제나 역사화하라! 모든 변증법적 사고의 상호역사적혹은 심지어 절대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의무인 이러한 슬로건은, 또한 정치적 무의식의 윤리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연애시가 실제로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텍스트의 표면이 아니라 무의식을 통해 드러나며, 따라서 이는 주의 깊은 비평가가 밝혀야 할 성질의 것이다....제임슨에게 매개는 예술 작품의 형식 분석과 그것의 사회적 기반, 혹은 정치체제의 내적 역동성과 그 경제적 토대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게 해주는 고전적 변증법의 용어를 일컫는 것이다. 163 제임슨의 변증법적 매개는 단순히 특정 문학 텍스트의 독해 방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비평그 자체는, 이미 한편으로 굴절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사회 인식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총체성인 실재 사이를 매개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인 것이다......

 

리얼리즘이 아닌 작품들은 현실도피적이라고 비난받기 십상이었다...표층에서는 명백히 현실도피적이라 하더라도, 무의식 측면에서는 사회적·경제적 실재가 구체적으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와 로망스를 결합시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망스의 지속성과 생명력을 마르크스주의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72-4 마술적 서사:장르비평의 변증법적 활용에서

 

장르는 필연적으로 사회-상징적 메시지다.다시 말해서, 형식은 내재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당연히 이데올로기다.’ 비평가는 주어진 텍스트의 실질과 형식이 그 텍스트의 사회적·경제적 결정 요소들과, 즉 텍스트를 틀짓는 역사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형식이나 내용상의 일탈이 정치적 무의식 내의 불안을 반영하는 방식에도 주목해야 한다. 183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식의 단순 모형이 아니라, 더 알튀세르적 모형화에 가까운,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면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좀 더 복합적인 인식이다..제임슨의 말처럼, ‘모든 방법론은 텍스트의 형식에서 출발하여 텍스트와 실질 간의 상호작용쪽으로 진행되며, 보충적 용어를 통해 자신을 완성한다.’ 187

 

발자크

 

그 시대는 부르주아적 주체 및 거대한 사물화의 전능한 효과가 완전히 구축되기 이전에 위치한다. 그 시대에는 욕망, 탈중심화된 주체, 일종의 열린 역사가 상호 공존했다......‘상상적 관계에는 지역 유지이자 토리당 당원인 발자크 자신의 관점이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귀족 계급 엘리트들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인으로 기능하며 갖게 된 그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담겼다는 것이다. 189-190

 

모더니즘과 우화

 

유토피아적 사고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획일화와 순응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행복을 느끼고, 누구도 튀지 않기 때문에 서로 놀랄 만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으로 간주된다...., 반사회적 사고를 전적으로 몰아낸 세계는 완전한 억압으로 정의되는 세계이다. 219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이전의 이론가들이 포스트모던한 시나 예술 혹은 건축물을 하나의 또는 일련의 스타일로 보았다면, 제임슨은 처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사회정치적인 환경, 즉 역사에 결부시켰다. 226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 특징은 심미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241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 내부에 살기 때문에, 그것을 무턱대고 찬미하는 것이 자족적이거나 퇴폐적인 만큼 그것을 가볍게 부인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은 필수적으로....우리가 만들어낸 가공품들에 대한 판단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까지도 내포한다. 243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공적인 역사와 우리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적인 시간성의 새로운 형태들에도 나타나는 역사성의 빈곤영상이나 환영 등의 아주 새로운 문화와 동시대의 이론에까지 확장된 새로운 형태의 깊이 없음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247

 

포스트모던적 주체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환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후기 자본주의가 점차 구체화되고 파편화되는 양상을 반영했다. 제임슨은 우리가 통합된 자아-구성이라는 의미를 갖는 부르주아적인 자아의 종말을 목격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제 사람들의 고유한 주체성이 탈중심화되거나 탈고정화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처럼 중심화된 주체에서의 해방은 불안에서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느낌에서도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감정을 느낄 자아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48

 

제임슨이 정서의 퇴조라고 부른, 정서적인 내용물이 사라지는 현상이 매우 일반화된 사실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유행처럼 모든 정서에서 이탈하는 아이러니와 냉소주의가 특징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정서를 느끼기에 적합한 종류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폭력적이고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어느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우리는 발화 양식에서도 우리 자신의 감정에서 소외되었다. 움베르트 에코가 말했듯, 이제는 이제는 나를 미치도록 사랑해같은 표현을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나 대신 다른 누군가가 말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혼성모방은 공허한 패러디, 보이지 않은 눈동자를 지닌 동상이 된다.....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지루함이나 깊이 없음, 문자 그대로의 피상성의 출현을 목격한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형식상의 최고 특징일 것이다....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스타일 속에 거주할 뿐, 실제 역사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건축도 용적이나 부피없음을 느끼는 3차원적 경험을 포스트모던 그림과 문학을 설명할 때 사용한 깊이의 억압과 동일한 현상으로 여긴다. , 깊이 없음과 정서의 퇴조가 구체화되어 드러난다는 것이다. 252-262

 

제임슨과 영화 보이는 것의 날인, 지정학적 미학

 

의문에 싸인 총체성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에 대한 부정이다. 278

 

음모적 텍스트는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간에, 은폐와 관료적 비인간성 때문에 우리의 혐오감이 최고조에 달한 20세기 후반에 우리가 직면한 권력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려고 노력하는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280

 

인식의 지도 그리기는 주체가 자신의 존재 조건인 실재와 맺는 상상적 관계라고 하는 알튀세르적(그리고 라캉적) 이데올로기 정의를 이해할 수 잇게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인식의 지도 그리기가 수행하는 작업은 정확히 이러한 작업이다. 281 인식의 지도 그리기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교차점으로 작용한다.’....‘우리는 매일 동료들을 계급용어로 지도화하며, 최근의 사건들은 신화적 서사로써 이해한다...앞으로 내가 할 작업을 지정학적 무의식이라 부르겠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세계 내 존재를 이해하고자 국가적 알레고리를 새로운 개념적 도구로 수정하려는 시도이다. 282-283

 

포스트모더니티 혹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라 불리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지닌 가장 긴급한 책무는, 도전받지 않는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경제 형식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흐름에서는 부차적인 역할에 그쳤던 사물화와 상품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제는 더욱 중요한 지위에 올라, 우리의 분석과 투쟁의 가장 지배적인 책무가 된 것이다. 286

 

볕뉘. 저작을 바로 볼까 망설이다가 소개서를 먼저 본다. 마지막장 부근이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듯싶다.  참고 삼아 텍스트를 번갈아 보고 있다. 총체성과 전체성 여러부분들이 겹쳐 읽힌다. 정리할 시간이 없었는데 이렇게 밑줄의 흔적을 남겨둔다. 밖은 흐리고 추위까지 덤으로 온 듯하다. 사월은 비와 슬픔이다. 잎새의 달이 아니라 애도의 달이라 더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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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이가 거리를 유지하는 힘을 잃지 않은 채 관계적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인식하라
    from 木筆 2015-04-21 16:09 
    ‘차이가 거리를 유지하는 힘을 잃지 않은 채 관계적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인식하라’는 하나의 정언 명령이 됩니다. ..낙인찍힌 개념들의 목록 중 총체성과 총체화라는 단어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65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맑스의 용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범주이자 특히 루카치의 베버적 유산과 본격 맑스주의적 유산의 어떤 종합의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근본적으로 전문화, 노동분업,
 
 
 

농사일은 무슨 일인가? 라는 질문, ‘농사일씨 뿌려 거두는 일이다라는 인간의 자신감 어린 대답, 이들 사이의 대화방식 및 과정’, 이 대화에는 단지 농사일이라는 인식 대상의 이름과 씨뿌려 거두는 일이라는 인식 작용의 결과로 얻은 인식 대상에 관한 지식만이 있다.

 

이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빠져 있다. 첫째, 가문, 해일 등과 같은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일’, 우연이 농사짓는 일에도 늘 개입한다는 점이 빠져 있다. 둘째, 농사짓는 일은 중간태적 작용 과정을 통해 농사일의 존재()’를 찾아서 거기에 이르러 그 일부나마 드러내는 일이라는 점이 빠져 있다. 셋째, 농사짓는 일은 낡은 이름과 고착화된 지식을 버리는, 소위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겸손을 통해서 농사일의 존재()’을 찾아 거기에 다가가고, 농사일의 제모습을 소망하면서 문제를 진단, 처방, 해결해가는 일이라는 점이 빠져 있다. 539

 

정치학의 기존 메타이론이 근대 특유의 인간 자아에 준거하고 있다. 기존 메타이론은 인간 자아의 피부의 경계를 기준으로 자아와 타인을 구별하는 근대 특유의 인간 자아에 준거하고 있다. 어떤 한 인간의 피부의 경계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인간 안의 육체 요소와 정신 요소 간의 내적 관계의 강도는 그와 타인 간의 외적 관계의 강도보다 훨씬 강할 것이라는 가정이 인간 자아의 경계에 관한 가정이다. 기존 메타이론의 연구 대상의 경계에 관한 가정은 이러한 인간 자아의 경계에 관한 가정에 준거하고 있다. 510

 

있음을 언표로도 구별하지 못하는 기존 메타이론은 그 사이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일 수 있는이와 같은 다양한 존재 양상을 알게 모르게 누락시켜놓게 된다. 512

 

기존 인식론적 메타이론이 이러한 결함을 갖게 된 것은 근현대 언어가 단순히 능동태수동태만을 유지하고 있고 중간태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구술과 문자는 물론이고, 사유와 삶에서도,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관여하는 일에서도 중간태를 찾아보기 힘들다. 523

 

이러한 중간태는 오늘날 한국어의 경우 자기 스스로 되어간다.’ ‘자기 절로 말한다.’ ‘일이 저절로 된다.’ ‘일이 제대로 된다등에서 스스로’, ‘절로’, ‘저절로’, ‘제대로등의 부사로 그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영어의 경우에는 This book sells well에서 well과 같은 부사라든지 oneself처럼 재귀용법의 대명사로 그 흔적을 가까스로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525

 

변화-운동에 관한 기존 메타이론도 환원론적이고, 그 안에 지배와 피지배의 틀깊이 내장하고 있다. 526

 

농사짓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문제의 원인을 내인, 외인, 내외양인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추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진단은 단순히 농부 탓이나 씨앗 탓(내인), 혹은 날씨 탓이나 영농자금지원 등의 사회구조 탓(외인), 혹은 그 둘 탓(내외양인)으로 문제를 축소시켜버리기 십상이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진단은 농사짓는 일에 수반되는 수많은 분할선과 분할 과정에서 생겨나는 중대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은폐시켜버릴 수 있다. 530

 

정치학의 기존 방법론들이 정작 인간 자신을 그들의 제반 논의의 최종적인 유일한 근거로 전제하지 않고, 그것과 유사한 다른 것들로 바꿔치기하고, 심지어 바꿔치기한 그것으로 외려 인간 자신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바꿔치기한 그것들의 예는 실증주의의 경우 인간의 오관으로 확인한 사실 fact’, 현상학의 경우 인간의 주관으로 구성한 의미체하는 현상 phemomenon’, 비판적 실재론의 경우 인간의 합리적인 탐구 방법과 절차라는 과학 science’, 유물론의 경우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결합한 역사적 물질 historical matter’ 등이다. 533

 

 

 

안정평등’, ‘자유평등’, ‘조화갈등’,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 기준들 역시 그 각각이 절대 기준일 수 없다. ‘존재()“에 비추어봤을 때, 그리고 제 모습일 좋은모습(좋음)과 여러 상대적 모습의 절대적 기준인 하나에 비추어봤을 때, 그 각각의 가치 기준은 얼마큼 결여된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가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어떤 가치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어떤 방식이든, 그것은 인간과 함께 하나(절대적 기준)의 자리를 독차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들이나 다른 방식들과의 결합과 그 결합 비율을 불가피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542

 

정치의 가능성 또한 지배하는 일에만 함몰된 것이 아니라 지탱하는 일 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물론 사람이 관여하는 일에서 지탱하는 일이 경향, 정도, 범위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유한자 속에서 무한자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지탱이 정치 또한 유한한 현실 속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늘 우연이 개입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기부정의 겸손을 통해서 농사일의 존재()’(제 모습)을 찾아 다가가고 소망하면서 문제를 진단, 처방, 해결해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 것과 마찬가지다. 546

 

 

볕뉘.

 

1. 토요일 오후 가고싶고 보고싶던 바다를 찾는다. 평온함과 함께 낚시꾼들과 정박한 배들, 미역작업을 하는 포구를 걷다. 그리고 도시풍의 한 카페에서 책의 말미를 본다. 서문에서 주관자는 개요를 보려면 뒷장으로 가라는 안내를 따라갔더니 자신의 글이다. 헛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논문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하여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메타정치학이라는 이 논문은 무척 끌렸고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2. 메타비평, 메타방법론, 메타정치학이란 기존 방식의 문제제기에도 마음을 기울이기도 한 연유다. 농사에 대한 비유는 적절하다고 여긴다. 모임에서 일들, 여러 해결해야 할 일들을 살피는데 식물을 키우는 비유가 그래도 과정을 맛보고 함께 나누고 보살핀다는 측면에서도, 과잉애정이 또 다른 결핍을 낳는다는 면에서도 적절하다는 느낌을 갖은 경험때문이기도 하다.

 

3. 조금 더 확대하자면, 주체의 개념때문이기도 한데, 나를 극단으로 몰아 사유한 서구의 학문에 대한 불신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비판으로 평등자유, 주체없는 주체 등등 사유의 확장에 동의하지만 여전히 환원으로 몰고가는 경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4. 보다 낫다고 하는 선민의식, 엘리트 의식은 위에서 언급하는 지배-피지배의 틀을 낫는다. 일상의 모임 역시 대행이나 과정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듯 뿌리가 깊다. 여튼 반가운 흔적이 있어 고맙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5. 과정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중간태를 살리고 다양함을 살리는 그릇된 길이 아니라는 단서를 잡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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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타사유 - 액터 마르티네즈
    from 木筆 2016-05-10 09:09 
    액터 마르티네즈 - 줌인과 줌아웃, 두 감독과 두 배우. 연기인지 실제인지, 감독이 연출을 가장하는 것인지 드나들며 그 경계를 허문다. 몸으로 쉬는 숨의 몇 장면. 도대체 이런 짓한 게 대체 몇번이야라고 액터 마르티네즈의 분노의 말로 정지된 화면도 영화도 끝이 난다. 볕뉘. 1. '메타' 영화이든, 메타정치학이든, 메타철학이든 다른 관점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일 것이다. 기존의 관점이나 시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하기때문에 극단까지 밀어붙이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6

 

세속 풍경을 담아 책으로 완성하는 동안 삶의 평범성이 학문적 보편성의 근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존중하고자 했다. 8

 

쌀은 누룩을 만나야만 술이 된다 했다. 이 책은 이름난 명주가 아닐지라도 잔치를 위해 정성과 관심으로 빚은 술과 같다. 술을 나누는 자리를 우리는 잔치라 하고 서양에서는 심포지엄이란 한다. 이 책은 우리가 함께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과 마주치는 잔치로의 초대장인 셈이다. 11

 

좋은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니다. 좋은 삶이 특별한 삶으로 귀착된다면, 좋은 삶에 대한 그리움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언감생심이 아니겠는가? 특별한 삶은 제로섬게임의 승자에게만 보장도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특별한 삶은 오르지 못할 나무에 불과하다. 특별한 삶과 달리 좋은 삶은 제로섬게임의 관계가 아니라 화수분처럼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호혜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좋은 삶이라는 궁극의 뜻에 가까워진다. 16

 

좋은 삶은 선물 받을 수도 없다. 좋은 삶은 삶의 주인의 오랜 습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좋은 삶은 단지 선한 의지로만 구성되어 있는 빈한한 삶과도, 지혜와 결합하지 못한 영악함으로 구성되어 있는 화려한 삶과도 다르다. 17

 

성공의 비법으로 처세술을 타락시킨다면 우리는 처세술 습득을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하겠지만, 좋은 삶을 향해 가는 비법이라는 의미의 복원된 처세술을 위해서는 자기계발서 대신 세상물정의 이치와 냉정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18

 

세상은 분명 아름답지만 언제나 세상이 아름답지는 않다. 세상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하고, 사람들은 선한 만큼이나 악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도 있는 법이다.....좋은 삶에 대한 기대는 약간은 가슴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통감각을 상실한 애절한 신세타령이 아니라 삶의 보편성에 의한 공명을 지향하는 사회학은 이럴 때 쓸모 있는 학문이다. 20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전문화화된 분과학문으로 한국에 수입되면서, 신을 대신해 감히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설명한다는 사회학적 정신은 사라졌다. “내가 생각한다는 정신과 결합하지 못한 채, 책을 통해 수입된 이른은 세상으로서의 사회세계로서의 사회사이를 중재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사회이론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느낌과는 유리된 자폐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261

 

우리의 공부는 학부생이든 교수든 막론하고 훈고학적 주석 달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다. 책 속에서는 생각했지만, 세속 속에서 내가 생각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책이 없으면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 있던 것이다. 262

 

모범생은 밑줄 쫙!”이 능하다. 모범생은 퀴즈에 단골로 출제할 예상 문제를 잘 정리한다. 그래서 모범생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범생에게서 삶에 대한 성찰의 깊이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기계의 암기하는 책 읽기는 그 순간을 위해 억지로 참아내는 과정이지, 도서의 즐거움이나 깨달음의 황홀함과는 거리가 없다. 263

 

사회학자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학이 사회 이론에 대한 해설의 지위가 아니라 세속을 영위하는 삶의 문제에 대한 탐색의 지위로 옮겨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학자는 세상으로서 사회세계로서의 사회연결하는 중재자 헤르메스가 되어야 한다. 265

 

콜드팩트와 마주했을 때 발샏할 고통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고,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상처받는 삶은 창처받는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힐링 대상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각자가 살고 잇는 사회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죄가 없는 개인들이 죄가 많은 사회에게 불만을 말하는 애처로운 시도다....그 외로운 노래가 합창이 될 때, 상처받는 사회는 비로서 자기 치유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66

 

 

상식

 

감옥에 갇힌 그람시는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대중적인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적 요소는 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대중의 느낌을 장악하지 못하는 한 진보주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도 대중을 얻지 못한다. 30

 

참된 철학적 운동이란 몇몇 제한된 지식인 집단 사이의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치는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형식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조차도 결코 순진한대중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참구하고 해결해야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연관성을 잃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철학은 역사적으로 되며, 한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이 되는 것이다.” 32

 

명품

 

명품은 자본주의가 승자에게 선물하는 훈장이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명품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골을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 39

 

명품계는 돈이 부족한 중산층이 상류층을 따라 하기 위해 고안해 낸 몸부림이다. 아웃렛과 면세점은 중산층의 또 다른 탈출구이다. 40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39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드은 줄어드는 법이다. 41

 

프랜차이즈

 

맥도날드화는 진보처럼 보인다. 합리화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낡은 것들은 목아내리낟. 합리화의 비를 맞고 화려한 꽃들이 활짝 피기를 기대했지만, 합리화 그 이후 펼쳐지는 풍경은 모노톤이다. 도시의 장소감은 사라진다. 프랜차이즈 체인이 장악한 도시의 풍경은 서로가 서로를 복제한 듯 비슷해진다. 가맹점 옆 가맹점 또 그 옆의 가맹점이 연속으로 늘어선 풍경에선 삶의 다채로움이 빚어낸 지역 특색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과 유동만을 읽어낼 수 잇다. 프랜차이즈 체인망은 공간에 축적되어 있는 자본의 모세혈관 밀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다. 50

 

그 속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그 체인망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고작해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합리화의 끝에서 만나는 어이없는 비합리성은 합리화된 대학도 피해갈 수 업삳. 50 하나하나의 합리성이 모여 비합리성을 연축하는 순간 작은 합리적 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성 속에서, 자본의 지배가 확대되면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쇠 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자본은 서로 싸우지 않고 모세혈관을 도시 곳곳에 심어 놓기에 바쁜데, 그 모세혈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련하게도 마주 보고 있는 빵집끼지 서로 경쟁하느라, 나란히 붙어 있는 서로 다른 편의점 덕택게, 마주 보고 있어도 곁에 있어도 서로 이웃일 수 없는 비합리적인 무한의 생존경쟁을 반복하고 있다. 52

 

해외여행

 

우리의 상식 속 나라 사이의 관계는 수능시험 등수처럼,나라별 올림픽 메달 순위처럼 수직적이기만 하다. 수직적 관계만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근거 없이 깔보기 일쑤다. 57

 

슬프게도 우리의 여행은 선진국에서 주눅 들고, 후진국에선 선진구에서 주눅 들었던 감정을 보상받기 위해 돈지랄을 떠는 진자운동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항공사 마일리지 점수가 쌓이고 쌓여도 벗어나지 못하는 유길준의 안경을 쓴 우물 안 개구리 신세, 해마다 휴가철 공항에는 우물 안 개구리의 울음으로 가득하다. 60

 

군중

 

군중을 폄하하지 않고 기다리면, 군중 속에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이 다가온다. 하지만 사람의 떼가 군중이어야만 이득을 얻는 패밀리는 공중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공중은 자신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세력이지만, 군중은 자신들의 악행을 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중에서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리지 낳고, 군중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야 한다. 그는 마피아 집단의 비밀 멤버이거나, 뻣속까지 엘리트주의자이다. 70

 

수치심

 

소비자본주의는 수치심 자극이 그 어떤 판매 기법보다 효과적임을 알아챘다. 궁정의 쿠르투아지가 귀족에게만 수치심을 자극했다면, 소비자본주의는 대중의 수치심을 이용한다. 소비자본주의가 확대될수록, 대중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자극하는 영역은 점점 넓어진다.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마의 주름이 창피해진다.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마의 주름이 창피해진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나서면 망신스럽다. 휴가를 해외로 다녀오지 않았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골프는 쳐야 하고, 등산복의 소재는 최소한 고어텍스여야 한다. 자동차는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커야 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체면이란 관념적 상태가 아니라 소비 수준의 증명이 된다. 142 이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 라이프스타일조차도 단어의 뜻이 바뀌어 소비의 대상이된다. ‘라이프스타일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소비주의의 타깃이 되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더 이상 삶의 방식은 개인의 신조를 따르지 않는다. ‘라이프스타일은 수치심을 느끼지 낳기 위해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142

 

우리가 입 냄새떡진 머리와 같은 사소한 수치심에만 예민해져 있을 때, ‘공금횡력’, ‘불법상속’,‘논문표절’, ‘위장 전입과 같은 짓을 한 후안무치 단어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등장해 속류화된 수치를 가르치고 있다. 속류화된 수치에만 민감해진 문명화된 사회의 지독한 역설이다. 144

 

성공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금력 앞에서 권력도 맥을 못 추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확장되는 사회에서 성공은 인생의 옵션이 아니라 정언명령과도 같다. 121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이란 장르의 규칙에 따르면 이 세상의 사람은 오직 두 종류로 구분이된다. 한편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다른 한편에는 실패한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성공과 실패를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이다. 셋째 자기계발서는 성공을 보장하는 책이 아니라, 심리적 위안을 선물하는 책이다. 역설적으로 자기계발서의 독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뿐이다. 124-6

 

현실의 계급 법칙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나는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계발서를 읽지만, 현실의 원리를 아는 영리한 사람은 자기계발서의 장르 규칙을 파괴하고, 차라리 넓고 깊은 이분법의 양쪽 언덕을 이어 계급 법칙을 완화하는 다리를 짓는다. 동정의 다리에서 한계를 느낀 사람은 두 번째 공감의 다리의 설계도를 들여다 본다. 실업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고 있는 불우이웃을 선의의 감정에 따라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과 달리,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사람을 실패로 몰고 간 실업이 자본주의에 살고 잇는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보편적 위험이라는 인식을 놓치지 않는다. 공감은 동정이라는 따듯한 감정으로 냉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다는 낭만적인 태도와도 거리를 둔다. 동정의 다리 위에선 이따금 불우이웃돕기 모금이나 자선바자회가 열리지만, 공감의 다리 위에선 복지라는 제도의 나무가 자란다. 공감이 복지를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복지는 공감에 제도의 옷을 입힌 것이다. 127

 

역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그가 남긴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구절은 장엄하게만 보이는 역사의 개념에 들어붙어 있는 공허함을 파괴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82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의 매 순간순간이 인용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듯이다.” 87

 

종교

 

종교화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아우라가 상실되는 기술복제 시대의 사상가 벤야민은 그러한 시대를 낳은 자본주의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종교의 숨겨진 놀라운 유사 상동성을 발견했다. 종교의 전제는 근심이다. 근심, 걱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은 종교적 설득에 무덤덤하다. 근심이 없다면,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도 매혹적이지 않은 관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원은 근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약속이다. 104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지 않고서도 삶의 계급 구속력이라는 개념을 어느새 몸으로 익힌다. 삶의 계급 구속성이 몸에 밴 사람의 머릿속에선 걱정이 떠날 틈이 없다. 벤야민의 말처럼 격정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자본주의 속에서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탈출구 없음을 의미한다. 105

 

종교는 사람들의 걱정을 건드리고, ‘걱정을 대신해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현실적 걱정은 많은 경우 자본주의의 법칙에서 유래하는데, ‘걱정의 원천인 자본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구원을 약속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의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106

 

종교에서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달렸다면, 종교가 된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돈에 의해 구원된다는 차이만 있다. 106

 

 

섹스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바라게 된다. 162

 

섹스를 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는 세대, 섹스가 곧 결혼 약속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섹스는 일상적인 요소가 된 것만큼이나 관계의 지속성 불안을 유발하는 근심거리이다. 163

 

노동

 

임금노동이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과도 같은 무게감을 지닌다면, 그 운명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는 임금노동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연대라 한다. 연대가 지배적인 사회에선 거대한 공통분모에 주목하고 복지라는 수단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 임금노동이라는 굴레를 헐겁게 해 주지만, 연대라는 단어를 살해한 사회에선 누구나 자신마늬 예외만을 꿈꾸며 임금노동의 세계로부터 혼자 탈풀할 궁리를 한다. 192

 

사포를 던지는 짜릿한 순간 만큼 복권 당첨이란 짜릿한 백일몽을 꿈꾸게 된다. 이는 징후이고 꿈일 뿐이다. 해결책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복권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세상에는 복권을 사는 사람과 복권을 기대하지 않고 연대라는 죽어 버린 단어에 귀기울이는 임금노동자 두부류가 있다. 193

 

 

게으름

 

게으를 권리를 농담으로 들으면 부지런하지 못한 인간의 자기변명이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인간을 파괴시키는 노동시간을 주리자는 것이지요. 혼자 피우는 게으름은 패악이지만, 사회가 허용하는 게으름은 사람의 목숨까지 살린다오. 일하다가 죽는 과로사를 조장하는 개미들의 사회가 정상이라 할 수 있나요? 202

 

메이 앤 워클리 195

 

인정

 

인공 조미료를 흠뻑 뒤집어쓴 정크푸드화된 인정이란 단어는 성공과 단순 등치된다. 정크푸드의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품위를 훼손당한 사람들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투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 인정이란 사물로부터의 인정에 다름 아니다. 몰고 다니는 자동차의 크기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명절날 선물로 들어오는 갈비세트의 무게와 위스키의 숙성 연도로 인정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 존엄에는 둔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지 않늘 때만 모욕을 느끼는 물신화된 심성을 지니고 있다. 210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을 이해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인정투쟁을 벌이는 시위대를 보고도 아니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그만이지 인정이라니 웬 지랄들이래?”라고 말을 뱉어 낼 주제들이다. 212

 

 

개인

 

상품을 통한 개인 회복의 한계는 분명하다. 개인의 구원은 상품소비에 의한 개성 회복이 아니라, 개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문제삼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개인 구원의 최종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책임을 개인을 둘러싼 사회에 물어야 한다. 집단적 통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이기심을 부추긴다고 협박하지만,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최종 책임의 담지자인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219

 

침해받을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르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오히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무명씨로 강요하는 악행의 근원일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경제적 개인주의로 후퇴한다. 221

 

개인에 대한 관심은 나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 반복되는 사회라는 커다란 단위에 대한 생각이다...자기 속에서 사회를 발견하는 사람은 개인을 언급할수록 품이 넓어진다. 222

 

가족

 

성인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담는 그릇이다. 229

 

 

편안함은 집의 시설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건물이 지어지면 처음에는 건축물이 사람에게 적응하라고 명령한다. 이미 잘 짜인 공간 속에 거주자의 의지가 들어설 틈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주자가 텔레비전을 놓고 이부자리를 깔고 조석으로 음식을 하면, 도도한 듯 적응하라고 명령을 내리던 건축물에 거주자의 냄새가 밴다. ..오랜 세월의 때와 사람의 냄새가 장판과 벽지 위에 살며시 내려앉으면, 모든 이의 집은 세상에서 제일 내밀하고 안전하고 편한 곳이 된다. 234

 

좋은 집을 꿈꾸는 사람들은 시세 차익만을 생각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보다는 선하다. 하지만 좋은 집에 대한 꿈은 부동산 세계의 극과 극 사이에 끼인 중산층의 선한 꿈이다. ‘좋은 집에 대한 꿈은 부동산 난민에게는 언감생심이며, 부동산 재벌에게는 순박한 공상일 뿐이다. 237

 

인간은 정주를 꿈꾸지만, 자본은 정주를 업신여긴다. 자본은 부동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자본은 정주하고 싶은 사람의 꿈을 하찮게 여기며 유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자본이 이윤을 쫓아 이동하면 할수록, 거주의 터전에선 막대한 규모의 난민이 만들어진다. 238

 

성숙

 

배움이 넘치는 우리 사회는 군자는 아니어도 최소한 성숙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품격 있는 나라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움에 투자했지만 싸가지 없는 애들과 주접스런 중년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들이 뒤섞인 지하철 풍경은 배움이 사람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철썩 같은 믿음을 접도록 만든다. 241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성장성숙을 대체하여 삶의 목표가 되는 사회에선, 배움조차 성숙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된다. 전 국민이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도 승진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지식사회의 외양은 갖추었어도 성숙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245

 

성장이 성숙으로 귀결되지 못함이 너무나 분명할 때, 차라리 성장하지 않겠다는 귄터 글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의 선택은 오히려 성숙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246

 

죽음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매일매일 조금씩 노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 발자국씩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시장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우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통찰이 헛헛함을 남긴다면, 삶의 그 쓸쓸함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노화는 젊음의 상실이지만, 그 대가로 원숙함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비록 젊음은 잃었지만 그 대신 원숙함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젊음만을 잃고 원숙함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252

 

 

볕뉘. 주말 글을 쓸 일이 있어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했는데 연체중이라고 한다. 일요일 빌려 읽는다. 메모지가 없어 여기저기 문구를 전전하다 포스트잇을 구해 흔적을 남기고 흔적을 다시 들추고 몇번을 오고간다. 그러다보니 저자와 편집자의 노고가 읽히기도 한다. 설렁설렁 읽고 지난 기억때문에 바랜 흔적들을 돋군다. 상식과 양식, 그람시의 시선에 다시 한번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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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시각의 변화'야 ㅡ 미술이든 예술이든ᆞᆞ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흔적이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된거지..."

 

 

쫓아가거나 따라가면 채울 수 없다. 코스프레는 흘러넘칠 수 없다. 문득 멈추어서 보니, 채운 줄 알았는데 비우고 있었다. ' (   )를 넘치게 하라'

 

 

달라져야 다른 시각도 보인다. .ᆞᆞᆞ 화두처럼 연두빛 생잎처럼 몸을 비빈다

 

 

 

'아침이슬' 김민기 "세월호, 나는 그 죽음을 묘사할 자격이 없다"

 

 

볕뉘.  

 

1. 느낌을 갖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느낌은 때로는 치명적이 되기도 하고, 삶의 방향을 엉뚱하게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화인이 되어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기도 할 것 같다. 바닥의 삶은 추상으로 건져올려지지 않는다. 삶의 트랙과 속도, 박자가 다르므로 접점의 기회는 많지 않다. 기회는 있다고 하더라도 형상화되지 않는다. 느낌이 공유되지 않으므로, 공유될 수 없으므로. 지인의 밑줄이 잠깐씩 반짝인다. 살펴보았다. 물방울화가, 하나에 천착하는 화가들도 있는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작품을 챙기지 않냐는 질문에 벗어놓은 내복같다는 말을 한다. 부끄럽다고...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시각의 변화는 주문이 아닐 것이다. 다른 일상과 다른 삶들을 살아내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맛본 체화된 느낌들이 새로운 시각들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몸에 각인된 시선들이 추상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2. 오목한 그릇, 나는 그 그릇을 채우려 너에 기대려 한 것은 아닌가. 기대서야 채워지는 것이라고 한 건 아닐까. 작년말부터 들어앉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나를 제대로 채운 적은 있는가. 차서 넘쳐야 너에게 흘러가는 것이라고..그런데 정작 채웠다고 여겼지만 나를 비우면서 너를 채우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빈 시간들, 빈 마음들을 모임에 네게 채우려 안달했던 건 아닐까. 이론을 쫓고, 지식을 쫓고, 앎에 천착하려하고 너무 많이 주어서 너덜너덜한 것이 우리의 몰골은 아니었을까. 나, 나-너를 채우는 것이 일상이어야 할텐데. 소진하는데 일상을 허비하여 이제 줄 것이라고는 빈그릇만 있는 건 아닐까. '시각의 변화'...사람들은 달라지지 않는데, 유행만 바꿔 달라졌다고 하는데.. ... 섹시하다고 하는데 뭐가...앎도 사는 것도 서열이 있다고 나는 뭔가 다르다고 하는 선민의식에 쪄들어있는데...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위로받고, 또 똑같은 사람만 찾아다니고, 또 똑같은 앎만 찾으려 하는데... ...

 

3. 아름다울 수 있을까. 처절함이 안개처럼 배회하는데 아름답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이 조응할 수 있을까...과정에 방점을 찍거나 천착하거나, 조금 다른 모습을 지양하거나 하다보면 서걱거리는 불편이 순치되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워지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달라지는 피와 땀의 결실이라고...한 일의 매듭 뒤에 미적 감수성으로 평가해보면 알 수 있다고...뭔가 꺼림칙하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라 눈치채야 한다고...당신이 밟고 있는 과정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추상과 구체가 만나는 지점은 왜 그걸 몰랐을까. 맞다 맞어, 정말 예술이네..그 지점일지 모른다. 정말 아름다움이 유통될 수 있을까. 바닥의 삶은 우쭐한 지식의 그늘을 관통해서 형상화될 수 있을까.

 

4. 공연한 생각이 꼬리를 무는 아침이다. 햇살이 곱다. 산중턱의 연두 화폭이 그립다. "바람과 나"  서투른 기타반주에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무척 - -

 

4.1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4.2

물결 건너 편에
황혼에 젖은
산끝보다도 아름다운
아 나의 님 바람
뭇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
하늘 위로 구름 따라
무목(無目) 여행하는 그대의
인생은 나 인생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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