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발명품이 초기에는 기존에 사용되던 최고의 도구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 초기 중세 대포는 발전의 정점을 지난 투석기보다 성능이 한참이나 떨어졌다. 어떠한 도구나 테크닉에서의 잠재력을 파악하면 연습과 훈련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paul Romer의 주장에 따르면, 획기적인 발명은 많은 사람이 시간을 들여 이를 가다듬어나가는 과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을 좀 더 확장한다면,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은 함께 진화한다고도 할 수 있다. 발명가는 그가 만든 발명품이 어떻게 사용될지 혹은 어떻게 오용될지 예측할 수 없다. 특히 전자 제품의 시대에서 발명가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사용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62 

 

 


 

 

시점의 신선함만이 문제라면 누구를 데려오든 도움이 될 것이다. 전문가는 부르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길을 걷는 사람들을 붙잡고 설계, 또는 문제정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훨씬 낫다. 오히려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우리는 사룸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87

 

새로운 시점은 반드시 새로운 차이를 낳는다 당신의 문제정의를 외국인이나 맹인, 어린이에게 시험해보다. 또 스스로 외국인이나 맹인, 어린이가 되어보자 89

 

분할해서 통치한다는 것은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정반대이며, 전형적인 전략이다. 따라서 역으로 문제와 관련된 책임자가 그 문제를 직접 안고 있지 않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그 사람의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나의 문제우리의 문제라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하며, ‘그들의 문제그의 문제로 바뀌도록 해야하는 것이다....변화를 원한다면 우선 자신을 비난해 보자. 가령 한순간만이라도... ... 126 130

 

자신이 문제를 안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느끼는 방법의 문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확실히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개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많다.(문제는 사람이 바라는 바와 실제로 느껴지는 사물의 상태와의 차이이다.)179

 

학교가 그토록 멍청한 문제해결자만 배출하고 있는 이유는 학생드이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때문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문제란, 교사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만 해당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문제답게 보이는 것은 덤벼 들려는 본능이 있고, 가능한 빨리 해결하려하고 긴장해서 집중하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다. 179-180

 

타인을 위한 문제해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달라고 한 것을 주기 전까지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192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 문제해결자는 애초부터 자신과 또 다른 관계자가 무의식중에 헤엄치고 있는 물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물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모래로 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문제해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해답을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죄악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미덕인지도 모른다. ‘’ 우선 나 자신에 대해 진실해져라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해지려면 해답에, 아니 문제정의에 조차 친숙해져 감수성이 무뎌지기 전에, 그 도덕적 측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사용되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해결은 결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6-208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3v신세대, 1992

 

볕뉘.

 

1. 사물의 역습이라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오다. 과학기술에 경도된 우리는 그 무게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는 테크닉,그 방법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물에 그 방법과 가치를 비롯한 다른 외연들을 버무려내려고 함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치우친 의식들을 물밖으로 건져낼 수 있을까? 사실은 모래였다고 우리는 거꾸로 물구나무 서서 있었다고... ...

 

2. 문제를 방해하는 원인을 3가지이상 찾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가지고 있는 질문들도 그러하며, 그런 질문에 근력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문제를 내는 사람들도 문제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의 출발부터 다시 생각해보라고 한다. 전제를 다 무시하고 처음부터... .. (책장에 있는 책을 우연히 집어들었다. 번역도 내용도 뒤죽박죽이지만 추려읽어본다)

 

3. 맑스주의와 형식을 읽고 있다. 형식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자본주의의 역사, 시대의 틀과 형식을 끊임없이 변주하면서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개인의 무의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무의식, 시대의 산물인 인물과 작품이 노는 물이 무엇인지 보지 않으면 않된다고 한다. 경제라는 관점을 놓치는 순간, 경제의 맥락을 가진 역사를 놓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앎이 될 뿐이라고 말한다.

 

4. 흐린 날, 얕은 봄비가 내리고 바람은 스치듯이 지나 사월의 꼬리가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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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이울다. 봄이 고개를 넘는다. “꽃구경와서 이론이야기 하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다.”는 말에, “괜찮지 않느냐.”고 건넨다. 어색함이 흐르기 전에 봄꽃처럼 화려한 이론이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딱부러지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한 전개가 무척이나 인상깊었다.”고 했다. “‘무시받는 것과, ‘인정이아는 높은 미각으로 다시 들여본다는 것이 얼마나 색다른 일이 아니냐.” “그렇게 가슴에서 우려내서 지금의 현실을 다시본다면 얼마나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삶들의 가능성들이 많이 만들어지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유행은 없었고, 가슴에 담는 이도 없고, 자신의 개념에 뒤섞는 이도 없었다. “‘자유평등이란 개념과 달리 특별한 맛이 있지 않느냐. 무시당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고, 다른 이들의 인정투쟁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다시본다는 일이 뜨끔한 것은 아니냐... ...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감에 맞는 생각만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맛있는 상품을 끈질기게 찾으러다닐 뿐, 받아들여 만들지 않는다고, 이름만 나면 눈길이나 줄까? 이름이 나서 더 외면하든가? 아무도 자신의 저류지에서 삶의 저장소에서 출발하려하지 않는다.

 

“‘용인과 달리 인정이라는 것은 위계를 함유하고 있는 것 같다.” 고 전한다.

 

, 그렇지만 이런 시각만으로도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되는 것은 아닌가요.”

 

베버를 다시 불러들이고 맑스를 다시 만나는 것은 현실을 더욱 폭넓게 보고, 깊게 보자는 것이지, 이론의 문제점을 더 구성하자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정치철학 역시, 개인으로 사고하는 주체의 문제나, 위계의 문제로 파고들자는 것이 아니라 좀더 다른 관점을 지금으로 끌여내려 현실과 섞자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반지성주의의 이면에는 아마 트라우마처럼 실패의 역사를 담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 이대로도 과거의 신념을 끌고가기에 벅차다는 우울이 섞여있는 것은 아닐까. 경끼를 일으키듯 한 앎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흔든다. 자신의 생각에는 이식을 시킬 생각조차 없는 듯이 물과 기름인 것처럼 앎과 삶을 이으려하지 않는다. 엘리트면 엘리트일수록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면 할수록 진보라고 자칭하면 할수록 그들의 남과 다르다는 인식은 독특하다. 뭐가 다른지 조차 모르면서 말한다. 절대로 시선과 반성은 자신을 향해 되먹임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올무에 매여있다. 발버둥치면질수록 더 죄이는 악순환에 있는 것은 아닌가.

 

 

 

 

 

 

 

 

볕뉘. 절은 몹시 붐볐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런 번잡함에 고스란히 휩쓸려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얕은 산행으로 지는 꽃들과 푸른 숲이 넉넉했다. 내려오는 길  주고받은 메일에 이어 조금 더 얘기를 나눈다. 잊혀진 독서, 잊혀진 디테일들이지만 구름처럼 남은 느낌들은 여전하였다. 말련의 베버가 선거에도 출마하고 책임으로 정치에 대한 저작도 남겼다. 어쩌면 그것 또한 여운이거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필요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무엇을 애타게 갈구했는지 느끼면 좋겠다고 한다. 곧 자리를 옮긴 절은 한산하고 아름다웠다. 사월의 목련꽃 그늘아래는 참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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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몇번 목숨을 연명하였다는 걸 듣다
한번은 스탈린 끝이었고
또 한번은 페레스뜨로이까의 끝이다.

맑스를 불러내 인공호흡을 하였고 숨이 붙다
붙은 숨결 얕은 호흡
다들 환영이라 하지만 들어선 마음길은 증발되지 않는다
모두 지켜볼 뿐이라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맑스의 씨앗을 몇번 다시 심는다고 듣다
한번은 스탈린의 숨너머
또하나는 1989 언저리다

죽음은 비옥을 낳고
씨앗은 돌틈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지난 과거의 거울을 뚫고
가지는 번지고 햇살은 고와 푸르름은 반짝인다

곰팡이 곰팡을 탓하고
절망이 절망도 탓하며
객관을 가장한
주관이

울고불며
불고울며
그제서야
온전함이 돌아온다

씨앗은 퍼져 관목도 되고 숲이 되자
사림들은 이를 마지막이라 부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역사는 마지막을 늘 시작이라 하는 자의 몫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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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홍 토핑 맥주' - 욕먹을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꽃소식이 궁금하여 우리나라 개화시기에 관한 연구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또 궁금하여 개화시기와 벌과 나비의 도래와 과실 수확량과 관계에 대한 논문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꿀생산량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 것인지. 꽃샘추위가 목련의 외양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지, 개화시기의 집중과 꽃을 빌미로한 만남이 조직의 건강성에 기여하는 역할은 무엇일지. 대전에서는 꽃을빌미로 한 만남과 회수가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사소함은 사소하지 않음을 어떻게 감싸는지. 오늘 하루의 밀도는 일주일과 한달의 농도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한몫에 피는 꽃잔치가 내 삶에 몇번이나 있는 것인지. 꽃같은 만남은 또한 몇번이나 만들 것인지. 문득 건네온 연산홍 모임드레싱에 이 생각들이 귀에 꽃꽂는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라고 되뇌여봅니다.

 

내 삶에 화인은 몇번이나 ᆞ너의 마음의 잔에 꽃으로 몇번이나 떨어질지 ᆞᆞᆞᆞ

부질없는 일과 관심만은 아니라는 생각의 응어리를 가져갑니다. ᆞᆞ 벌써 코끝은 짠내음이군요^^

 

 

 

 

 

 뱀발. 선배가 꽃든 잔을 건넸습니다.  지난 해 천그루의 목련에 대한 흔적들을 되뇌였습니다. 마당굿패의 한감독의 기행이 전해옵니다. 제 마음 같았습니다. 자본주의가 부러움을 무의식적으로 시스템으로 흘러넘치게 해서 일상을 조종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진보라는 단어앞에 삶을 붙여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적으로라도 말입니다. 자본의 속도도 쫓아가지 못하거나 가는 길의 앞에 서서 기다리지도 못하니, 잘게잘게 미분해서 일상의 노선을 바꾸어내는 재미라도 맛보아야겠습니다. 치기와 치기가 쌓이다보면 어쩌면 결기라도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취기가 채 가시기 전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은 이미 데여버렸고,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서울 개화시기 논문

 

 

 

 

좀 더 찾아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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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정을 느낄 자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거리를 유지하는 힘을 잃지 않은 채 관계적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인식하라는 하나의 정언 명령이 됩니다. ..낙인찍힌 개념들의 목록 중 총체성과 총체화라는 단어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65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맑스의 용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범주이자 특히 루카치의 베버적 유산과 본격 맑스주의적 유산의 어떤 종합의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근본적으로 전문화, 노동분업, 노동과정 자체에 깔린 사회적·심리적 파편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용어는 또한 격자 형태로 이뤄지는 데까르뜨적 확장, 데까르뜨적 공간의 추상화를 상징합니다. 데까르뜨적 공간의 추상화에 동반되는 여러 종류의 인식적 전문화과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심리가 새롭게 분할되고, 그에 따라 육체 자체가 그 감각기관이 새롭게 분할되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개념적 추상화가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76

 

서양의 우리 경험에 따르면, 생태학적 정치는 중산계급의 정치로 되기 쉽고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흔히 그것과는 상충되는 다른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생태학적인 목표도 달성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더 큰 집단적인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기획이 아직 창출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140

 

미적인 것과 욕망의 영역, 심층 성격 등등을 포함하여, 종전 형태의 자본주의나 사회체제 자체의 세력권에서 어떤 의미로 벗어난 구석이 인간본성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 탈근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의식에 대한 침투와 식민화입니다. 예술이 상품화되고 무의식 자체도 매체와 광고 등등에 의해 상품화됩니다. 141

 

근본적으로 달라진 오늘의 조건에서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의 그러한 환기를 우리가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화의 타락이라든가 인간심리의 타락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근거가 되는 어떤 가능한 인간본성의 좌표를 갖게 되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이 유토피아 및 미래의 시간과 변증법적인 관계에 서야지, 현대사회에 의해 상품화 또는 비속화되고 있는 지금 이곳의 어떤 정태적 인간본성을 연역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144

 

사실주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좀더 단순한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알기 쉬운 서사적 가닥과 구성들을 통해 총체성의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 시기에 오면 총체성의 재현가능성의 위기가 옵니다. 바로 여기서 현실의 각부분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지를 보여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제국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총체성을 재창출하려는 모더니즘의 비상한 형식적 실험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전지구적 체제 아래서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의 또다른 영역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존하는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어떤 정치적 비판을 한다면, 그들이 이러한 시도 자체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재현이란 불가능한 일이고 총체성이란 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결정해버렸고, 그 결과 각기 다른 상황에서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양자에 공통적으로 긴장과 원대한 포부를 갖게 해주던 요소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149

 

정치적·경제적 위기 자체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없이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예술가가 이 총체상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럴 이유나 동기가 없어져버리니까요.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이런 형태의 인식의 지도 작성은 심미적 동기에 조금도 못지않게 정치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

 

그들이 포크너와 마르께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작가로 하여금 사회의 표면을 기록함과 더불어 그 좀더 심층적인 역사의 이러한 지속적인 영향도 마치 지진계처럼 동시에 감지하게 해주는 새로운 서사적 장치였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물론 그보다도 더욱 파국적이고 충격적이었을 터인데, 루카치적 명제의 실현을 바로 그런 데서 봅니다. 즉 루카치는 18세기 영국 소설이 사회의 표면을 인지하다가 스콧과 발자끄에 이르러 좀더 심층적인 역사를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을 서술합니다...어쨌든 더 많은 것을 포함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생각건대 더 복잡해지고 더 흥미로워지리라는 것입니다. 153

 

포스트모더니즘 전반, 지금 이 시대 전체가 공간의 새로운 중요성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입니다. 모더니즘 시기에 시간 또는 시간성이 중요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최근에 대두한 맑스주의의 가장 흥미있는 새 형태 가운데 하나는 급진적 지리학자들의 작업인데 도회적인 것과 지리학·지정학 등등을 동시에 분석하는 것으로, 공간적 맑스주의라 부름직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식의 공간 분석을 더 발전시킬 수 있고,..당신이 한국의 상황을 그려내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이런 새로운 의미에서 공간적 변증법이니까요. 162

 

탈근대 시기에 국제주의와 지역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변증법이 성립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그것은 대단히 풍부한 정치적 가능성을 담은 새로운 종류의 연결이자 대립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전이 역사적 시기들에는 많은 경우 지역에 대한 집착이 퇴행적인 정치를 낳았는데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고, 전체 굮제적 현실과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새로운 공간적 사고의 이점을 찾아내는 열쇠가 이런 데 있다는 생각입니다. 163

 

정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치행위가 다중적이라는 사실을 늘상 기억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정치에 참여하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어떤 만족스러운 단답형 해답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한가지 차원에서는 새로운 전지구적 상황에 합당한 어떤 사회주의 개념을 재창조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제주의라는 차원에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식으로 지식인들간의 새로운 연결망, 지식인들의 전세계적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167

 

볕뉘. 인터뷰집이다. 1982년부터 인터뷰한 것을 모아서 발간하였다. 인터뷰 사이사이 연결한 글들의 겹쳐지고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다. 읽다가 1989년 백낙청교수와 대담한 것이 끌렸다. 알튀세르가 스탈린의 몰락에서 맑스를 다시 읽었다면, 소련이 몰락하는 지점에서 제임슨은 사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낙청교수는 민족문제와 통일, 삼사중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되묻고 있다. 몇가지 특징적인 대담사이에 밑줄을 그어둔다. 역사라는 바다에는 역사의 물고기를 낚는 집어등이라도 있어야된다는 말인가? 흘러가고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총체정, 전체성의 그물에 걸릴 수 있을까...흥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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