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보다 존재가 앞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먼저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고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는 그다음에 정의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주의자가 상상하는 사람이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어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을 상상할 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다. 이것이 또한 사람들이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18

 

그러나 종말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사람은 자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린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신의 엄격한 개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실존주의의 깊은 뜻은 이렇게 제2의 의미를 갖는다. 19

 

만약에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정당하게 해주는 가치라든가 질서를 우리 앞에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다 뒤에서나 확연한 가치의 영역 속에서 어떤 정당성이나 변명도 설명해낼 수가 없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고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 선고를 받은 셈이라는 말로써 표현은 끝난다.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닌 까닭에 선고를 받은 것이요,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26

 

진리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파악하는 주체성은 엄밀히 개체적인 주체성은 아니다. 우리는 코키토 속에서 사람은 다만 자기 스스로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 역시 거기서 발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는 데카르트 철학과는 반대로, 또 칸트 철학과도 반대로 타인과 마주 선 우리를 파악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타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존재다. 40

 

우리 인간은 각자가 호흡하고 먹고 잠자고 또 어떤 방법으로 행동함으로써 절대적인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스럽다는 것, 지향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신의 본질을 선택한 존재라는 것과 절대라는 것 사이에는 하등의 차이도 없다. 또 시간적으로 국한된 절대적 존재, 즉 역사 속에서 국한되어 있는 절대적 존재라는 것과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하등의 차이도 없다. 45

 

예술과 모럴 사이에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 경우 우리에게는 창조와 창안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찾아온 학생이 모든 모럴, 즉 칸트 철학이나 혹은 다른 철학의 모럴에 비추어보아도 아무런 지시도 없었던 경우를 말함으로써 내가 그것을 독자에게 충분히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율법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감정과 개체적 행동과 구체적 자비심을 모럴의 기본으로 삼아 어머니와 남아 있을 것을 선택했거나, 차라리 희생을 선호하여 영국으로 가기를 선택했거나,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이 무상의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모럴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이며, 환경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모럴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47

 

인간에 대한 정의로서의 자유는 타인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앙가주망이 발생하자마자 나는 나의 자유와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타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을 때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50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한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즉 중심에 있다. 인간의 우주, 즉 인간의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 56

 

 

볕뉘. 다가선 책들 사이 잠깐 살펴본다. 실존주의에 대한 갖가지 비난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콕콖 짚어 얘기하는 대목이다. 물론 맑스주의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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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고
락키 비번을 바꾸고
현미로
밥을해보고
티비를 잠그고
구석에 있는
라디오 세트를 살리고
과일보관법을 찾아
오렌지를
따로따로
나눠두고
며칠살림과
익지않은
새벽같은아침의
만일도 준비해두다

조금 다른
며칠들을 궁리해본다
조금 다를
쌓인 책들
시식도,
달리 다가올
생각들도, 님들도
넣어본다

... 바다가 냉기를 머금다가 뱉는다. 아침 여섯시보다 찬기가 느껴지는 밤, 미리미리 가늠해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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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더위는
내리고

조금씩
쌓이는데

눈길을
연신
연신잡는

너에게
분수같은
꽃이라고

분수사이를
깔깔거리며
지나는

아이웃음같은
꽃이라

섞인 여름에
너는
환한
물보라물보라

- 나도 사람들 눈에 눈물을 돌게 만드는 재주가 생겼나보다. 아픔을 참는 만큼 시오소오처럼 눈물은 솟는다. 모임도 여름으로 성큼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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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5-05-11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참 예쁘죠!!
 

싸르트르 말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의 현실, 나의 지평 내에 존재하는 노동자대중의 육중한 현존, 바꾸어 말해서 맑스주의를 살고 실천하며 원거리에서 소시민 지식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견인력을 행사하는 거대하고 어둠침침한 집단의 현존이었다.” -원거리 견인력 250

 

 

 

싸르트르는 자기 세대에 대해 우리는 사적유물론만이 현실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접근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맑스주의는 역사의 객관적 차원을 바깥에서부터 이해하는 방식이며, 실존주의는 주관적 개인적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방법 탐구는 상반된 것들을 화해시키는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두가지 완전히 다른 존재론적 현상이 일련의 공통된 등식을 공유할 수 있고 단일한 언어적 술어적 체계로 표현될 수 있는 일종의 통일장 이론의 형태를 취한다. 251

 

발레리의 구체적 작품을 하나의 추상적 관념과 결부해서 그것으로 번역해내는데, 이는 곧 소시민의 개념인바, 실제 이런 사고양식과 동시대에 속하는 독일식 정신사의 그 어떤 개념에 못지않게 플라톤적이고 초시간적인 개념이다. 발레리를 실제 소시민, 즉 일정한 역사시기에 나타난 특정 형태의 소시민과 결부시키는 일은 사실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터인데, 발레리 자신과 같은 다수의 개인적 구체적 실존들을 의미있게 다루지 않고서는 그 사회계급을 파악할 수 없으며, 이것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싸르트르는 이런 추상관념의 지적결합을 진정한 체험적 결합으로 대체하려 하며, 사회적 개인적 생활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시간의 중복이나 지체 및 상이한 시간도식들의 동시적 공존과 접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를 다시 역사 속으로 던져넣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관겸과 인간실존의 관계를 역동적 관계로 대체한다. 이는 즉 기투이며, 과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미래를 향해 투사되는 역할의 자유로운 창출로서, 계급관계 및 귀속의 문제다. 259-260

 

역사의 의미는 총체화에 있다고 한다면, 역사의 의미는 있는 것이라기보다 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변증법적 방식에 입각해, 우리는 인류가 상호 무관계한 집단과 부족으로 생활했던 선사시대에는 실상 역사에 어떤 단일한 의미도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계가 하나로 되어가고 있으며 특정 지역의 사건이 전혀 다른 나라와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존재와도 관련되고 영향을 끼치는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의 삶이 단일한 기투로서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단일한 총체화 과정을 구성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할지를 막연하게나마 실감하게 된다. 278

 

존재와 무의 문맥에서 볼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시대와 주위 세계 전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직면한 전쟁은 단지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내면화하고 그것에 반응해야 하며, 어떤 반응에 의해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의미에서만이라도 나의전쟁이다. 282

 

싸르트르는 힘의 반목적성 내지 실천적 타성태란 두가지 부정의 도식이 가져오는 결과는 인간이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작용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손과 팔을 도구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대상에 작용하기 위해 자신을 대상화하며 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타성화한다. 따라서 인간이 소외되고 비인간화될 궁극적 가능성은 애초에 인간이 물질에 대해 취하는 이러한 최초의 기본 관계 구조 속에서 주어진다. 283

 

우리는 결코 단둘이 될 수 없다. 모든 만남은 항상 좀 성급하게 사회라 지칭되는 것을 배경으로 하거나, 적어도 다른 일군의 인간관계를 배경으로 해서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한쌍이라는 개념, 그리고 3개념에 대한 저항은 이 세계가 텅 빈 공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정한 고독이나 사생활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스스로 믿으려 함으로써 우리 주위에 공간을 마련하려는 방편이다. 싸르트르 체계에서 타인의 역할은 일시적으로 사물에 의해서도 충족될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면상 고립된 두사람에게 부재하거나 잠재적인 제3자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물들인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신혼여행 중인 부부는 모텔에 단둘이 있지만, 다른 모든 미국 중산층사회와 함께 있는 셈이다. 289

 

이와같이 3자관계가 우선한다는 생각은 갖가지 풍부한 시사점과 가능성을 지니는 것 같다. 우선 이 개념은 인간의 삶이 그 구조 자체에서 개인주의적이라기보다 집합적이라는 사상에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또 이것은 3자 관계의 기초 위에 구축된 완전히 새로운 심리학 체계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양자관계의 개념이 정적 순환적임에 비해 3자관계 개념은 동적이다. 이것은 개인 간의 경험이 집단경험에 선행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비판과 존재와무의 책으로 시도한 분석과 같은 개인주의적 차원을 즉시 넘어 고독한 개인이 집단행동과 집단단위를 창출해 그의 존재론적 사회경제적 약점을 극복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실어준다. 291

 

산업문명에 특유한 대부분의 행동을 수행할 때, 나는 혼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며, 이것은 외적이기보다 내적 동일성인데, 나는 자신을 타인 내지 타자로 만들며, 나의 행동양식을 타인의 행동양식이라 생각되는 것에 의도적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존재양식이 지니는 존재론적 아이러니는 내가 나자신과 나의 행동을 외부 타인의 존재에 맞추고 있는 동안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타자란 없으며 무한퇴영과 사방으로의 무한도주만 있을 따름이다. 각자는 스스로에게 타자인 그만큼 타자들과 동일하다.”고 싸르트르는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수열성은 거대한 착각이며, 개인의 고독으로부터 여론이나 그냥 그들이라 간주되는 가상의 존재로 투사된 일종의 집단환각이다. 그러나 여론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개인을 수열체 속에 통합하는 것은 여론에 대한 믿음과 그 효과일 뿐이다. 295

 

싸르트르는 우리에게 관료조직이 다시 게릴라집단으로 변신할 수 없으며, 경화된 집단은 쇄신될 수 없고, 다만 새로운 집단형성의 충격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320

 

개인적 인간관계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집단행동의 실패에 대한 싸르트르의 기술도 경험적 측면이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싸르트르가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사랑하고자 하는 기투는 존재론적 실패라고 말할 때, 이것은 사랑이라는 실제 체험이 실제로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사랑 그 자체란 스스로 정한 존재론적 기능, 즉 어떤 궁극적 충만함을 가져오거나 다른 말로 해서 시간 자체의 궁극적 종말을 달성하는 기능을 실현하는 데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집단 차원에서 존재론적 실패설은 시간 경과, 집단과 상황의 계속적 변화, 세대 계승 등을 강조한다. 이 설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기능을 지니는바, 곧 존재의 윤리라는 환상을 불식하고 우리를 시간 속의 삶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한다...우리는 대부분 본능적으로 유토피아를 역사가 정지하는 지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판이란 책의 실존적 요소는 이를 엄격히 불식하려 한다. 323

 

중산계급의 존재환상이 취하는 형태란 바로 후회와 가책, 또는 아마 후회보다 훨씬 더, 후회와 가책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는 두갈래 길로 나아간다. 가책은 과거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반면, 가책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앞으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결정적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이런 두려움의 복합심리는 사용가능성 개념에서 적극적 형태로 나타난다.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을 자유롭게 열어두려 애쓰는 나머지, 나는 미래의 필요에 대비해 현재의 낭비를 두려워하며 수전노처럼 현재를 저장한다. 자아에 대한 이런 완강한 집착과, 이른바 개성으로 알려진, 중산계급적인 내면의 사생활권과 행동여지를 포기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싸르트르의 작품에 낯익다. 326

 

자아의 죽음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를 특별히 변호하기를 포기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새로운 심리적 익명성과 비개인성을 획득함으로써 처음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며 최초로 자신의 입장을 모든 타인으로 구성되며, 어떤 타인과 마찬가지 가치를 지니되 누구보다 낫지 않은 한 전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330

 

세대 간에 이어지는 중산계급 유산의 본질적 부분은 그들이 행한 과거의 폭력, 즉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행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앞의 한 절에서 혈통적 죄라고 불렀다. 이것은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변증법적 개념이다. 1848년 세대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는데, 노동자들은 그 기억을 자기 자식들에게 전하며, 새로운 세대의 공장주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사전에 작정한, 퉁명스럽고 불신적이며 분노에 가득 찬 노동자계급을 대면해야 한다. 이처럼 한번 저지른 행위는 세계 자체의 구조에 편입되어 한편으로는 억압적 입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의혹으로 그 자취를 남기며, 그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으로 제2, 3의 세대에게 돌아온다. 334

 

내가 근본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결코 그런 결정에 대한 나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결정을 회피하는 것은 일부가 해결되거나 일부가 문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동의를 뜻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단일한 상황과 문제에 반응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친 계급투쟁의 연속성 때문이다. 337

 

소외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자신에게 행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340

 

순수 인간적인 작인보다 경제적인 작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왜곡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 행위자나 개별 계급으로부터 자유와 유효성을 박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행위가 역사에서 취하는 기본적인 구체적 형식, 즉 계급간의 투쟁을 추상화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 속에서 인간행위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가 간과하는 것도 바로 이것, 즉 인간행위가 작용하는 대상인 타인과 타 계층이다. 342

 

싸르트르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물화된 관계의 복합체를 인간행위와 인간관계라는 최초의기본적 현실의 측면에서 다시 진술하려고 결심했다. 이는 맑스주의 모형이 역이다. 346

 

안에서 바라본 나와 바깥으로부터 나의 객관적 존재에 대해 내려진 판단 사이의 거리는 타인을 통한 소외’, 즉 타자와의 기본 투쟁의 모든 형태를 특징짓는데, 우리는 그러한 투쟁에 항상 연루되어 있으며, 나는 항상 그것에 책임이 있고, 내가 그냥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그것에 죄가 있다....본 적도 없는 낯선 먼 이방인의 시선은 나의 삶이 영위되는 맥락인 수많은 계급적 집단적 투쟁 중의 하나를 형성하는 만큼, 그 판단으로 나를 엄밀히 에워싼다. 이제 서두에 언급한 바 있는 노동자의 원격 작용평가할 수 있는 좀더 나은 위치에 도달했다. 어떤 구체적 역사적 접촉도 발생하기 전에 단순히 그들이 실존한다는 사실만으로 노동자들이 행사하는, 거의 중력같은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바로 시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53

 

역사란 내가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그러나 먼저 악몽의 넓이와 세기를 헤아려보지 않고서는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354

 

 

볕뉘. 싸르트르의 책 변증법적 이성의 비판은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부분은 500페이지가 넘어서 드러낸다고 하다. "구체의 차원과 역사 자체의 장"을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부분 앞에서 지쳐 떨어져나간다고 한다. 끝까지 들여다보면  싸르트르이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실존주의를 그저 따로 떨어진 것으로만 느꼈지 맑스주의를 품에 안거나 안긴 모습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고 일러준 이도 없다.  많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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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적 대립이 현재 통용되는 더 낯익은 소외 개념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이니, 추상적인 것이나 소외된 것이나 분명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다만 왜 서구 사상가들이 대체로 소외 개념을 더 좋아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소외 개념은 명백히 타락하고 퇴락한 현실의 진단을 허용하되, 인간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는, 상응하는 노력을 정신에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외는 따라서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개념으로, 유토피아의 계기를 은연중 배제한다. 반면 추상이라는 술어는 반명제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사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성의 관념을 보존, 발전시킬 수밖에 없게 만든다. 202

 

우리는 예술에서 구체성이 갖는 두가지 기본 특징을 강조해야 한다. 첫째로, 구체성이 획득된 상황이란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순수히 인간적 견지에서, 즉 개인적 인간경험과 개인적 인간행위의 견지에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황이다. 둘째로, 그러한 작품은 삶과 경험을 하나의 총체성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작품의 모든 사건과 모든 부분적 사실 요소들은 한 총체적 과정의 일부로 즉각적으로 파악된다. 207

 

루카치는 인간의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이미지를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가 자신에게서 본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는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성공하며, 실로 소설가의 창작이야말로 주인공이 헛되이 추구할 뿐인 물질과 정신의 그 순간적 화해를 가르킨다. 소설가의 창조활동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소극적 신비주의. 소설은 따라서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 삶의 궁극적인 윤리적 목표는 유토피아, 즉 의미와 삶이 다시금 불가분해지고 인간과 세계가 하나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어는 추상적인데, 유토피아는 관념이 아니라 비전이다. 따라서 모든 유토피아적 활동의 실험장은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구체적인 서사 자체며, 위대한 소설가는 바로 자신의 문체와 줄거리의 형식적 구성 속에서 유토피아의 문제들의 구체적 실례를 제공한다. 반면 유토피아 철학자는 다만 창백하고 추상적인 꿈, 실체가 결여된 소원충족을 제공할 뿐이다. 211-212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제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인데, 사실 이 책은 정치적이기보다 인식론적이며, 새로운 맑스주의 인식론의 기초를 전문적인 방식으로 확립하고자 씌어진 책이다. 루카치의 계급의식이란 그러므로 경험적 심리적 현상이나 혹은 사회학에서 탐구하는 그 집단적 표현물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귀속성 자체가 정신의 외부현실 파악능력에 가하는 선험적 한계 내지 이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구의 이데올로기 비판과는 처음부터 구별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미 신비화(현혹)를 함축하며, 일종의 부유하는 심리학적 세계관, 정의상 이미 외부세계 자체와는 무관한 일종의 주관적 그림이라는 발상을 담기 때문이다.....루카치가 적절한 프롤레타리아 인식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이른바 부르주아 철학을 진지하게 취급한 덕분이었다. 루카치는 거짓된 것은 고전적인 중산계급 철학의 내용보다 그 형식이라고 보았다. 220-221

 

맑스의 중산계급 경제이론 비판이 그렇듯,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도 중산계급 철학의 한계를 바로 총체성의 범주를 감당할 능력이나 의지의 결여에서 찾는다. 이것은 외재적 판단기준만이 아니라 고전철학자들 자신도 관심을 기울인 딜레마였으니, 맑스 이전의 독일철학은 개별적 주체 내지 인식자의 보편성(칸트의 선험적 자아나 헤겔의 절대정신의 개념에서 비로소 추상적인 형태로 제기된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었다. 루카치의 독창성은 이 추상적인 철학적 문제를 바로 사회현실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구체적 위치에 되돌려놓은 점, 그리고 인식론 차원의 보편성과 개별 사유자의 계급귀속성이 갖는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223

 

루카치가 보기에는 칸트 체계가 그 기념비가 되는 고전철학의 딜레마는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 태도란 철학에 선행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이 딜레마는 우리와 외부대상의 관계를 (그리고 결국 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정태적이고 관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중산계급의 성향에서 비롯한다. 마치 우리가 바깥세계의 사물과 갖는 원초적 관계가 만들고 사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시간이 정지된 한순간, 사고로는 결국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사이에 두고 꼼짝 않고 응시하는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물자체의 딜레마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나 거짓문제인 셈이며, 중산계급적 인식의 특권적 계기인 이 애초부터 고정된 상황의 일종의 왜곡된 반영인 셈이다. 224

 

바깥세계를 정태적이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이 노동자에게는 불가능한데,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가 바깥세계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이를 직관할 여유 내지 여가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가 바깥세계의 요소를 사고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도 전에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니, 노동자 자신 속의 이 원초적 소외가 다른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그러나 노동자 위치의 강점은 바로 이 끔직한 소외에 있다. 그의 최초의 운동은 작업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지식, 즉 자기의식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자기의식은 애당초 대상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에, 바깥세계의 상품적 성격에 대해 중산계급의 객관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참된 지식을 가져다준다.그의 의식은 상품 자체의 자기의식, 바꿔 말하면 상품의 생산과 교환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의식 내지 의식화다.” 225

 

호의적인 현대이론가들에 비해 루카치가 우월한 점은 변별적이며 철저히 비교적인 사유양식에 있다. 그는 현대적 현상 내부에 위치하면서 그 근본적 가치들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이 현상을 오직 그것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그것을 규정짓고, 하나의 역사적 계기로서 그것의 경계를 확정하여 그것이 아닌 것들과 구분지을 수 있다. 238

 

루카치의 작업은 서사와 총체성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이런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관찰들에 하나의 이론틀을 제공해준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다름 아닌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전문가의 견해를 재확인해주는데, 하이데거는 맑스주의를 단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존재론으로, 그리고 우리와 존재 자체의 관계를 회복하는 근원적 양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사회적 역사적 실체로 파악된 이런 존재로의 열림에 대해 형식적 기호이자 구체적 표현이 되는 것은 바로 서사. 245

 

 

볕뉘.

 

  루카치와 벤야민편을 읽다보니, 국내에서 미학이나 복제로서 예술 등으로 소개되어 진면목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한다. 미학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맑스를 다시 읽으며, 사회 역사적 변증법을 살려내고 현실에 기반한 인식론의 확장과 역사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점이 정작 회자되고 논의되어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 자료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4장 사물화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뭇 책소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의 놀라움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인식론이자 현실을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접혀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대위하는 순간 폭발적으로 살아날 핵심인식이 아닌가 한다. 부디 편견과 오독 왜곡에서 벗어나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함께 맛보기를 바란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없다보니 이론의 씨앗도 싹을 틔우고 자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싶다. 번갈아 읽어도 좋을 것이다.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제임슨의 책 제목이 맑스주의와 형식이다. 왜 형식, 역사화하는 것이 중요한지, 변증법과 자신의 문체, 전체성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다음편 싸르트르가 더 기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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