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의 이야기



Alice-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존 테일러 (그림), 마틴 가드너, 북폴리오, 2005.


  어느 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판본이 나오고 여러 갈래로 세계로 이야기가 번져갈지언정 그 기본적인 틀은 굳건하고 그렇기에 간단하게 보이니까 말이다.

  주석달린 앨리스를 보면서 일찌감치 다층적인 말재간을 부리는 앨리스의 세계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시대의 배경에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작가의 생각, 표현의 의미를 더 알게 되니까 말이다. 모자장수와 삼월 토끼는 영국의 양대 정당을 가리키고 겨울잠쥐는 국민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온갖 정치 풍자가 가득하다는 것도. 특히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의의를 둔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그 심오한 수학적 계산의 형태는 그냥 이야기로만 흘리기엔 아깝고 흥미있는 요소니까 말이다. 그에 더해 어린 시절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면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간다.

  직장 상사 리델 학장과의 교류는 학장의 가족과의 교류로 이어진다. 학장의 세 딸들과 함께 정원에서 뱃놀이 등을 함께 즐겼다고 하는데, 둘째 딸의 이름이 앨리스 리델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둘째 딸을 모델로 지어진 이야기다. 당시 세 살 꼬마라고 하는데 아이는 이 이야기를 다 이해했을까. 세 살 아이에게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도새처럼 내성적이고 말더듬는,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루이스에게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 조르고 함께 즐겁게 놀 수 있는 마음 편한 아이들이 소중했음은 분명한데, 어찌 그런 소문들에 휩싸이게 됐을까.

  널리 알려진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이들에게 요청받아 즉석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후에 삽화를 그려 넣어 앨리스에게 책으로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직장 상사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책으로 선물을 할 정도라면 루이스는 아동문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전부터 루이스는 다양한 방면으로 재주를 드러냈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의 역할, 성직자, 사진가, 시인 등 예술적 감성이 가득하게 넘쳐난 수학 교수였다. 루이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아동성애자, 롤리타 콤플렉스-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 것은 유달리 아이들을 모델로 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향한 집착과도 같아 보이는 사진과 언행들이 루이스의 기록에 제법 드러나고 이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소문들이 흐르고 넘치고 그렇기에 루이스는 사진찍는 일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앨리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긴 했던 모양이다. 앨리스의 어머니가 이 편지들을 모두 불태웠고 의절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어서인지 알 길 없다. 루이스의 일기 중 의절하던 날들의 이야기가 루이스 가족에 의해 찢겨 있었다는 점이 더욱 궁금증을 당기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떤 글이 쓰여 있었기에. 물론 루이스가 다른 소녀들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런 소녀들에게서 불편한 이야기가 나왔던 적은 없다 한다. 루이스가 주욱 독신이었던 것 때문에도 소문이 보태진 것일까. 결국 동화 이야기보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더 떠올리고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이것이 동화가 아니라 어른을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수없이 달린 주석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읽기란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거 자체에 매몰될 때가 있다. 덧달린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흥미. 그런데 무언가 안타깝다. 루이스의 인생이 어떨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독하고 외로움에 휩싸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가 루이스에 대한 소문을 겹치면 마냥 섬뜩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루이스와 현실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의 간극,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생애. 그리고 이상한 나라로 거울 나라로 간 앨리스의 이야기를 재밌게 즐기면 될 터인데 외적인 부분에 솔깃해지는 가운데 그 상황의 중심에 있었을 실존 인물 앨리스가 느꼈을 감정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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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어린 시절을 채워줬던 앨리스의 세상은 환상이었다. 모험 가득한 세상에서 앨리스처럼 살아보고 싶었던 그 시절에는 앨리스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지난 지금 앨리스는 낯선 얼굴을 하고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니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앨리스의 입에서 나오기에 어색한 말, 그런 말들을. 너만의 길을 그려 보라 하지만 이런 말들을 웃으며 전하는 앨리스가 어린 시절의 그 앨리스일까. 지금의 모습을 과거로 이어간다면 어린 시절의 앨리스는 어떻게 토끼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을까.  꼬마 앨리스의 성장이 가짜처럼 보여서, 생기없는 인형처럼 보여서 방긋 웃으며 건네는 앨리스의 말들을 덮고 기억 속 앨리스를 꺼낸다.    


  그곳엔 앨리스보다 더 흥미를 돋우는 수많은 캐릭터를 만난다. 모두 말재간이 넘쳐나기에 앨리스가 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캐릭터들. 그러고보니 앨리스 덕분에 트럼프 카드가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수많은 동화책 속에서 왕과 왕비, 공주의 등장하는데 앨리스에서는 여왕이 등장하는데 무지 희화화되어서 흥미진진했던. 새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니 기억보다 앨리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열 살은 되었을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곱 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다. 그 나이의 내가 지녔던 호기심과 모험심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보면 곳곳에 보이는 풍자가득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며 읽고 보았던 건지 새삼 성인이 되어 보는 동화의 느낌은 참 새롭다. 어쩌면 어릴 적엔 이보다 훨씬 축소된 내용의 그림책을, 동화책을 읽었던 것일 게다. 이 책이 완역판이라고 하니까.

 

 모험을 멈추지 못한 앨리스의 겨울 여행은 거울 속으로의 잠입이다. 거울 나라로의 여행은 마치 수수께끼 가득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수학과 교수라는 사실, 그리하여 수학공식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이 더해지고 그 오묘한 말들의 조합들에 빠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루이스 캐럴. 본명은 찰스 도지슨. 오래도록 루이스 캐럴에 길들여져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 교수 찰스 도지슨이 앨리스를 탄생시킨 이름으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그가 창조해낸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즐거이 들은 아이들 덕분에 책으로까지 출간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의미없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에 얼마나 즐거워하는지가 생각난다. 그런 점을 루이스 캐럴은 잘 캐치한 듯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공과 잘 맞물리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앨리스를 따라, 앨리스인 것처럼 모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말발도 죽지 않은 일곱 살의 앨리스. 새삼 생각하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두려워하지도 이것저것 재지도 않은 채 하는 말에 귀기울이고 이상한 것을 이상타 말하며 정의감에도 불타오르는 앨리스와 같은 모습일 거라 싶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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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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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편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장은진, 문학동네, 2009.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사람뿐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쯤 전에 편지가 도착했다. 북에 띄운 메시지가 USB에 담겨 왔다. 되돌아온 편지가 아닐 걸 알면서도 전달되지 못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북에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씁쓸했다. 만나지 못하면 소식조차도 받을 수 없는 건가.

  이산가족 상봉 뉴스 속에는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 연신 말하듯 고령의 노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부둥켜 우는 모습들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할머니는 저렇게 울진 않았을 거야. 별로 안 애틋했어.”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되기 전에 이산가족 상봉 추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작년부터 적십자 관계자들의 연락과 방문을 받았으니 이산가족과의 만남은 준비가 오래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남북 생존자 명단이 교환될 즈음 북에는,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전달되었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은 한번 보시겠구나 했지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산가족 상봉단이 되지 못했더라도 아쉬울 것 없었을 거라는 이 위안은 할머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동생을 만나고 가셨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내가 갖는 것이니까.  

  아버지는 외사촌들의 소식을 자유롭게 알게 될 날이 올까. 북에서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삼촌의 생존 소식조차도 전해받지 못했다.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정례화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매체들은 그런 것조차도 탐탁지 않게 이야기한다. 이산가족들의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많다는 것을, 남아있는 가족보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이산가족’은 없어지겠지만 그 쓸쓸하고 슬픈 마음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삶의 시작은 기쁨이지만 삶의 결말은 결국 슬픈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제목과 이 문장이다. 때로 이 제목이 맴돌 때가 있다. 소설은 참 쓸쓸하면서 따스했다는 기억을 준다. 삼 년 동안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하며 친구를 맺은 ‘나’가 그들에게 띄우는 편지. 단 한번이라도 답장이 온다면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데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함께 한 눈먼 개 와조와 전전하며 하루의 마감때 쓰는 편지는 그날의 여행과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띄운다. 여행 중 만난 사람을 번호로 기억하는데 자기 책을 파는 여자 소설가 751과는 여행을 함께하기도 한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만큼이나 편지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우체통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절망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편지가, 답장이 오기를 기대한다. 서로 교감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맞닥뜨리고 위로하기도 했는데 소통했는데 답장을 하지 않는 일련번호들. 할아버지 장례식날 받은 연인의 이별통지처럼 ‘나’만 그들에게 일방통행의 소통을 했던 것처럼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3년여의 나날. 모텔이 꽉 차는 날 고시원에 묵다가 화재로 겨우 살아나기도 한다. 기력이 다해 가는 와조 때문에 아무에게도 편지받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돌아온 집에서 와조는 ‘나’의 곁을 떠난다. 편지를 받기를 원하는 집엔 ‘나’를 맞이한 편지도, 가족도 아무도 없다. 

  ‘나’가 와조와 함께 이렇게 편지여행을 다니게 된 시작에는 ‘나’의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고통과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견뎌가는 ‘나’의 여행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기대하는 만큼 세상에 혼자이고 싶지 않은 ‘나’가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교감이다. “진정한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같이 있다’가 아니라 ‘같이 나누다’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끝없이 확장되는 일련번호에게 가 닿았으려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10년쯤 전 출간된 소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나’가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련번호들처럼 번호표를 달고서 가족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의 사연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도 이렇게 한번 만나고서 돌아가면 간절히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겠지. 그러나 받을 수 없었던 편지, 그로 인해 절망하고 그러나 또 희망하면서. 우리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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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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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비수가 되고 싶다


아몬드, 손원평, 창비, 2017-03-31.


  괴물에 대한 인상은 흉물스럽거나 기괴한 행동을 일삼거나 난동을 부리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괴물이라 불리는 <아몬드> 속의 괴물 윤재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약물에 취한 것처럼 힘이 없이 보인다. 과잉행동장애가 아니라 과소행동인데 이런 행동에 비해 생각은 과하게 넘쳐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한 기능이 한쪽으로 쏠린 듯이 소년은 많은 시간을 생각에 할애한다.

  하긴 ‘웃는다, 운다’ 또한 학습된 형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감정의 예의를 오래도록 학습받아 왔으니 윤재 또한 그러한 교육을 엄마에게 받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 대해 분노,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한 개인차가 있고 윤재가 말하듯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곧 정의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하지도 않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의학적으로 윤재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윤재의 상태에 엄마도, 할멈도, 나아가 세상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같은 감정을 가져주기를 더 바라는 건가. 사실, 어떤 상황에 따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지나간 후 아닐까. 그렇다면 감정보다 선행하는 것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이성’의 영역이 더 작동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엔 ‘감정을 느껴서’ 일어나는 사건·범죄가 많다. 감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사이코 패스들의 연속적인 범죄와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시선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잠재적 범재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사고를 상실하기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화가 나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짜증이 나서, 너무 기분이 나빠서 등등 사람들은 감정표현이 서투른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각의 결여 아닐까.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감정불능자 괴물 윤재와 감정과잉자 괴물 곤이의 대립을 보고 있으면 탁구가 생각난다. 공격수와 수비수 간의 싸움에서 공격수가 이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비수의 지속된 방어에 공격수의 감정이 터져버리는 탁구 경기였다. 이 경기 이야기를 한 이는 수비수인 한국 선수가 방어만 하는데도 답답하지 않고 너무나 흥미진진했다고 말했다. 결국 무너져 버린 공격수와 달리 수비수는 마지막까지 침착했는데, 딱 윤재가 그렇다. 곤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늘 같은 태도로서 대응하는 윤재에게 폭발하는 건 곤이다.

  내가 엄마라면 윤재를 어떻게 대할까 가정을 해보는데 그저 가정인데도 뭐가 막혀버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편도체에 이상이 오는 것인지 감정을 느끼는 일에 무뎌진다. 특별히 슬프고 즐겁고 우울하고 기쁘고 분노를 느낄 것 없는 상태. 이것은 살아가는데 특별히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만. 처음부터 비정상이라는 틀로 가둬지게 되는 소년이라면 아무래도 삶을 대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감정적인 동요가 되지 않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든 사회를 살아가는 규율을 가르쳐주는 이의 방침이 소년, 윤재를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감정불능’ 아이가 ‘이성 불능’이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런 엄마와 할멈이라는 존재가 윤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와 방향을 이끌어 주었다. 물론 도라가 등장해 동년배 여학생에 대한 호감을 느낌으로 인해 변해가게 되는 윤재를 드러냄으로써 도라의 역할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윤재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토대는 엄마였다. 엄마의 두려움과 공포가 기우였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엄마의 가르침이 윤재가 결핍 속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선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재는 그 가르침에 힘입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만들어 갔다. 결국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가 세상살이에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이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의 바람직함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국 제 아이에게는 이기를 쫓는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가르침만 아니라면, 수많은 이들의 아몬드에 이상이 온다 해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없는 사회가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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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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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성장일까

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arte(아르테), 2017.


  『크루얼티』에서 보여주듯 국가를 위한 직업군의 삶은 위험이 가득하다. 액션과 스릴이 가득한 첩보 스타일의 이야기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고 이야기의 구조도 줄거리도 결국은 유사하기 그지없는데 지속적으로 양상된다. 이번에는 열일곱 고등학생, 그웬돌린이 외교관 아버지의 납치범을 추적하는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끈다. 영화화되기로 했다는데 ‘영화관’이 좋아할 이야기구나 싶었다. 어떤 형태로든 CIA 비밀요원이란 흥미진진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웬돌린은 CIA요원이 아닌 열일곱 다른 아이들에게 왕따당하는 여학생일 뿐이다. 그 어떤 비밀훈련을 받은 적 없는 그웬돌린이 파리, 베를린, 프라하를 넘나들며 사라진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수많은 범죄자들과 맞닥뜨리는 일과 같다. 그 일을 겪으며, 아니 아버지를 찾기 위해 범죄조직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웬돌린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새삼 다른 의문이 들었다.

  우와, 그웬돌린, 정말 멋져!

  이런 반응은 들지 않았다. 액션 스릴러 소설에서 여성 캐릭터의 정점을 밀레니엄의 마라가 가지고 있기에 그웬돌린의 매력이 비교되었을 수도 있고 작가의 그웬돌린의 창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바비’와 ‘공주’로 국한되는 여성성에 반발해서 그웬돌린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여성성의 제거가 곧 남성성의 극대화인가, 바비 공주 캐릭터도 여전사 캐릭터도 지나치게 안이하고 소비주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사라진 부모를 찾아가는 여정은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가 보여주었다. 그 시절의 어린 소년이 엄마를 찾아가던 여정과 최근의 소녀가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섭게 변화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그웬돌린은 더욱 더 무장해야 한다. 짧은 순간에 그웬돌린은 범죄와 폭력을 주요업무로 삼는 이들을 제압한다. 짧은 순간의 수련으로 오래도록 폭력을 쉬이 사용하던 남자들에게 신체적인 열세 없이 맞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판타지가 아니라 오버다. 그웬돌린의 강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악랄하다고 해야 할 범죄조직들, 인신매매단의 보스부터 말단 조직원의 숙련된 전문성은 사라져버린다. 

  그웬돌린의 목표는 당연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데 다른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웬돌린은 아버지가 표면적으로는 외교관이었지만 CIA 비밀요원이라는 점을 알고서 아버지를 절대 선의 위치에 놓는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납치한 일당들은 모두 가 ‘나쁜’ 사람이 된다. 이 전제는 나쁜 사람들은 모두 ‘죽여도 된다’라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물론, 그웬돌린이 만나게 되는 일당들은 마약거래, 인신매매, 무기 밀매를 일삼는 확실히 악한 이들이긴 하다. 범죄조직의 잔혹성에 맞추어 그웬돌린 또한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혹해진다. 더 악한 일들을 처단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고 더 큰 잔혹성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열여덟이 된 그웬돌린의 활약상은, 통쾌하다기보다 씁쓸해진다. 이건 성장일까.

   

“생각해보면, 이 애들이 너무 어리다는 생각도 들거든. 어쩌면 저 빨간 머리는 페테르부르크에 계속 살면서 학교 선생님이나 뭐 그러게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저 애를 창녀로만든 거잖아.“ 에밀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 앞으로 펼쳐진 길을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철학자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거야.“


  5개 국어를 하는 그웬돌린 역시도 통역가가 되었을 지도 모르고 왕따로 기억되는 학교에서 만난 테렌스와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다. 세상이 그웬돌린을 잔혹한 여전사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고 열광하고 있다니. 나도, 생각을 아예 안해야 마음이 편해지려나.

  

“그럴 리가 없어요. 클라디보는 괴물이잖아요, 아빠. 클라디보는 인신매매범이에요, 여자들, 어린 소녀들을…….”

하지만 아빠도 이미 알고 있겠지, 직접 겪어보았을 테니까.

“맞아, 하지만 CIA는 상관하지 않지.”

“하지만 클라디보가 CIA 요원이라면 어째서 아빠를 인질로 잡고 있었던 거예요?”

“돈 때문이야, 그웬. 언제나 돈 때문이지. 온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돈이야. 클라디보의 보스였던 조릭은 거액의 계좌를 남기고 죽었어. 클라디보와 다른 CIA요원이 그 돈을 가로채려고 했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아낸 거야.”


정의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야. 오늘 밤에 네가 한 일이 바로 정의야. 정의의 얼굴은 추하고 비열하거든.


   세상은 가치와 신념보다 ‘돈’이 우선한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가장 잘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온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돈’이라는 이 씁쓸한 말, 모든 범죄의 이유는 돈이고  CIA 요원이라면 악인이 아닐 거라는 이 믿음이 깨지는 일 또한 잔인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며 달려왔던 그웬돌린의 아버지는, 믿을 수 있는 CIA 요원인 걸까. 미심쩍어하면서도 그웬돌린에게 처음부터 믿고 의지하는 이들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해야 했고 결단을 해야 했던 그웬돌린의 활약의 정점은 인신매매로 잡혀 있던 소녀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려는 생각일 것이다. 그웬돌린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를 찾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를 찾고 난 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달려간 그웬돌린은 이제 이전의 그웬돌린으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다. 범죄의 잔혹성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 그 세계를 잊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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