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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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찾아가는 곳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8-2-20.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모두의 이상을 모아 만든 유토피아에 이 문구를 걸었다면 그것은 자만일까 경각일까. 아르카디아는 “순수한 것. 대지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대지와 더불어 사는 삶. 상업주의라는 악마에게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일구어나가는 삶. 우리의 사랑이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는 것”을 희망하며 일군 공동체다.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비트’의 일대기는 아르카디아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과도 같다.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트는 그곳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존재이며 그곳에 대한 애정을 지우지 않는다. 비트는 그 공간에서 꿈꾸고 희망하고 사랑했다.

  비트의 시선으로 보는 아르카디아는 흔히 이야기되는 유토피아의 모습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때의 유토피아는 환경적으로는 아름답고 깨끗하고 문명이 거치지 않은 듯한 자연풍광을 가진 섬으로 묘사된다. 또한 함께 토론하고 일하는 사회다. 희망을 안고 출발했던 공동체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1970년대 히피 문화가 그러하듯이 아르카디아는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맞는 규칙을 정했지만 히피문화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약물은 그들의 지향을 무너뜨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실제 히피문화가, 그들의 저항운동이 보여주었지만 자유의 상징이 왜 마약과 약물의 절정으로 치닫는지는 참 모를 일이다. 자유와 방종의 그 끈끈한 관계. “자유가 너무 많으면 공동체는 썩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빨리.”  

  아르카디아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난 후 최초로 태어난 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비트이기에 그가 아르카디아에 갖는 남다른 애정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인구과밀과 가난과 굶주림과 갈등이 이어지고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아르카디아의 변화되는 모습에도, 사람들은 흩어지고 아르카디아는 와해되었어도 비트는 아르카디아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행복했던 곳으로 기억되는 곳, 아르카디아.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정신에는 자기 고유의 공간이 있고  자기 안에서 지옥의 천국도, 천국의 지옥도 만들 수 있다”는 『실낙원』의 문장이 비트에게 일찌감치 각인되었을 지도 모른다. 비트는, 이미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을 이상적인 곳으로, 유토피아로 구현해 놓았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곳이 무너졌든 아픔과 상실을 겪었던 곳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아르카디아의 바깥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기억 속에 더 크게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실험이 모두 아름다웠던 건 그곳이 시골이어서가 아니란 걸 모르시겠어요? 중요한 건 사람이었어요. 서로와의 연결,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했던 그 친밀함, 그것 때문이었다고요. 지금 시골 마을들은 다 죽어가고 있어요. 미국적인 작은 타운이란 것은 죽어가고 있고, 지금 그때와 같은 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여기, 도시예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바로 여기라고요. 이곳, 여기. 지금이 유토피아보다 더 유토피아예요. 이웃이라고는 딱따구리밖에 없는 아버지의 숲속 작은 집보다 더 유토피아라고요. 모르시겠어요? 우리 아이들 전부가 여기에, 아르카디아 아이들 거의 전부가 여기 도시에 있잖아요. 우리는 모두 도시로 왔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요. 여기가 그것과 가장 가까운 유일한 곳이에요. 친밀함. 연결. 이해하시겠어요? 다른 곳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비트가 외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간적인 특성이 유토피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함께 했던 공동체의식, 그러한 것들이 유토피아를 규정한다는 것을. 그러나 현재 안전하게만 보이는 도시 공간 역시 지속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비트가 사진작가로, 교수로 살아가는 도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된다. 알 수 없는 병이 휘도는 세상을 떠나 비트가 찾아간 곳은 아르카디아다. 엄마가 없는 그의 딸 그레테와 루게릭 병을 앓는 그의 어머니 해나와 함께. 어쩌면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을 떠난 뒤의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한 이유일지 모르나 다시 돌아온 폐허가 된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에서 비트가 보는 것은 유토피아와도 같은 지상낙원의 아르카디아, 그때의 모습이다.

  소설의 분량은 제법 되는데도 아르카디아에서 벌어진 사건보다도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는 문장이 많다. 그렇기에 비트의 긴 인생의 시간은 너무나 쉽게 축소되어 이야기된다. 매력적이게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에 비해 아르카디아가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쉽게 아르카디아의 몰락이 서술되었다는 것도 크지만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공동체적인 질서를 갖추고 생활하는 모습이 매우 적게 서술되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르카디아가 시골이어서 유토피아가 아니라 서로간의 친밀함과 연결이 유토피아였다는 말,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아의 대표인 핸디는 공동체의 리더로서의 역할과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아르카디아의 환경을 제외하고 애당초 아르카디아라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었나 싶고 핸디가 왜 아르카디아의 리더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써 갖추려던 아르카디아의 공동체적 질서가 이상적인 지도자에 의해 잘 운영되고 곧 쇠락이 이어졌더라면 아르카디아의 실패를 더 안타까워했을지 모르나 아르카디아를 세우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던 비트의 부모, 에이브와 해나의 노력에 비해 턱없이 아르카디아는 무너졌다. 유토피아는 결국 신기루인가 싶을 정도로.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친밀감과 연결이 잘 형성되고 공동체적 질서가 잘 유지된 이상향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어느 휴양의 섬같은 이미지로만 작가가 아르카디아를 그려놓은 듯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화를 읊조리는 듯한 작가의 문장에 힘입어 나홀로 그렇게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등장인물 역시도 인과가 명확치 않은 채로 흘러 서사는 묘사에 숨겨진다. 그럼에도 아르카디아를 읽고 나면 길도록 쓸쓸함과 비트와 비트의 아버지, 에이브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아, 그건 서사의 힘이겠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으로 아르카디아를 그려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수많은 이야기들은 ‘문명’이 가해지지 않은 모습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문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음인가.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도 찾아가 머무는 곳. 유토피아. 비트의 생각처럼 유토피아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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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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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세실, 주희[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9년. 그동안 보아오던 낯익은 이름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올해 수상작가의 단편 한두편을 읽었으니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거 신입사원을 만난 듯한 기분과 함께 세월이, 이렇게도 흘렀구나 싶었다. 점점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온 경험치가 소설속 현장을 이해하는데 모자라다는 걸. 생각을 더하게끔 하는 소설속 주요 ‘사건’을 직접 겪거나 지근거리에서 보거나 몇 명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이나 행동반경이 그리고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상상’을 동원하게끔 하는 ‘현실’에 있다. 분명 현실인데 내가 경험한 현실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아, 세월, 나이, 이해,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내가 살아온 그 틀에서 기본적인 이해를 하게 될 텐데, 이때의 나의 이해란 얼마나 보잘것없음일까, 아니 구시대적인 것일까. 이런 기분들로 인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세실, 주희」속 대사를 빌려, 이번 작품집을 읽은 끝이 고작 나이듦을 느끼는 것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민정 작가의「세실, 주희」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동일한 경험을 통해서임을 새삼 실감했다. 감정이입과 이해의 깊이에 개입되는 동질감의 차이가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J와 주희와 세실의 경험이 병렬적 구조로 구성된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폭력을 당한 느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희에게서. 주희는 뉴올리언스 마르디 그라 축제에서 겪은 끔찍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안내자이기도 했던 J에 대한 반감을 가진다. 타문화에 대한 동경과 J에 대한 선망이 어우러진 여행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당혹스러움 이상이었다. 하지만 주희는 그 상황을 복기하며 ‘모든 게 내 탓이오’ 쪽으로 무게 짓기도 했다. 포르노 영상의 피해자가 하게 되는 반성은 늘 안타깝고 화가 난다.

  주희가 깨달은 바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주희가 겪은 일과 세실이 겪은 일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두 상황을 병렬선상에 놓고 있으므로 주희를 통한 세실의 경험은 또 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주희가 J를 통해 통렬히 깨달은 것을 세실에게 전가하는 것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를 가장한 무심함, 상황을 인지하면서 행하는 가해를 알기에 느끼는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좀더 ‘친절’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주희가 당한 그 불편하고 부당한 경험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전쟁영웅의 후손으로서 세실이 참여하게 되는 위안부 집회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더 타당했으리라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희에게 은연중에 질책하는 나를 보고 적잖이 당황스러웠다면 삶의 어떤 문제들에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한 다음, 그것으로 끝내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지랖이 넓지도 않거니와 정의감이 투철하지도 않고 더하여 어느 정도 소심함마저 지녔다면 주희와 다를 리 없었을 거라는 깨달음, 굳건히 박혀 있는 집단의 이데올로기, 내가 아는 선에서의 이해, 그럼으로 인한 타인에 대한 몰이해, 그렇게 행하는 방관 내지 폭력. 내가 살아온 경험이 이미 굳어진 시각과 행동패턴의 나를 만들어 냈고 타인을 이해해보고자 경험타령을 해본다 한들, 그것의 온전한 이해는 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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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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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재해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열린책들, 2018-04-15.


  얼핏 창밖을 보았을 때 주차된 차량 사이에 숨은 듯 서 있는 한 소년에게 시선이 갔다. 아무리 보아도 중1은 넘지 않은 듯한 소년의 손은 간격을 두고 입을 향했다. 내가 주시한 것은 소년의 손가락 사이에 든 ‘무언가’였을 게다. 절대 새우깡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 내가 본 것이 착각이리라 생각하는 사이 소년은 사라졌고 담배를 본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는 내가 이상하고 우습게 느껴졌다. 새벽 여섯시 즈음 발생한 교통사고, 무면허 고교생이 운전했고 탑승자 다섯은 중고생이며 이 중 네 명 사망, 음주 여부 확인하는 중이라는 기사를 보고서도 그랬다. 

  뭐랄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 지 몰라 생각을 정지시켜 놓은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 앙투안에게 딱 그랬다. 어떻게 앙투안을 바라봐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인생을 위로하지도 격려하지도 질타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있었다. 감정과 이성이 제각각 분리되어 서로의 의견을 내달리는데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았다. 최근의 잇따른 사건들, 촉법소년들이 벌인 무수한 사건들이 겹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뿔난 소년의 주먹 한방에 여섯 살 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무덤에 곱게 묻힐 기회도 없이 나무 구멍에 은폐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죽이게 된 앙투안이 제일 먼저 할 일은, 한번 더 아이를 후려치는 일이었다. 왜 죽어 버렸느냐는 울부짖음과 함께. 실종된 아이, 레미를 찾기 위해 작은 마을 보발 사람들이 수색을 벌인다. 곧 마을에는 엄청난 재해가 닥친다. 사흘이라는 시간, 운명은 누구의 편이었을까. 소설은 레미를 죽이고 시신을 은폐한 열두 살 앙투안의 불안과 공포, 혼란이 전반을 차지한다.

  

삶은 결국 승리해야 한다……. 이것은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삶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는 상태로 계속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실이란 것은 각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고, 쓸데없는 걱정들에 사로잡혀 봤자 아무 소용없으며, 그것들을 쫓아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앙투안의 어머니 쿠르탱 부인은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에서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타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에게는 완벽하게 전수되지 않은 듯하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닥친 재난은 어린 레미를 찾는 일을 이차적 관심사로 내려버리고 레미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그렇게 십이년, 앙투안은 레미의 일을 추억의 한 사건으로 인식하며 살았지만 순간순간 들이닥치는 공포와 고통, 불안으로 시달렸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으니 삶은 결국 승리했을지 모르나 그 일을 쉬이 ‘무시’해 버리지는 못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겼고 레미의 유골 또한 발견되었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의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성인’ 앙투안의 심리가 이어진다.


동이 텄을 때, 그는 자신이 에밀리와의 그 일을 통해 스스로를 심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은 교도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가 미리부터 혐오해 마지않던 삶을, 그가 끔찍이 여기는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보내는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가 증오하는 환경 속에서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의 형벌이었다. 그의 삶 전체를 내놓는 대가로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아침에 앙투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앙투안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때, 나도 인정했다. 애매하게 있는 내 마음에서 좀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른 앙투안에 대해서는 연민하지만 앙투안이 그 죄를 은폐하기로 한 ‘의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나름 앙투안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마을에 닥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까. 조금 양보해서 자연재해 탓이라고 하자. 자연재해에 따른 위약금이나 환불이 없기도 하니 사흘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 앙투안의 일이 덮인 건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하련다. 생각하는 바는 성인 못지않으나 ‘고작 열두살’일 뿐인 앙투안이니 이해를 가지기로 하자.

  하지만 ‘성인’ 앙투안에게서는 달라진다. 앙투안은 고작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뿐이다. 앙투안의 패배 선언에서 일순간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 레미를 죽게 했던 어린 앙투안처럼 내 마음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앙투안의 처벌이 십이년 동안 유예된 것이라 한다면 앙투안의 삶은 보다 성실하고 착한 형태였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순간의 실수도 없이 그는 모범적인 삶을 보여줘야 했다고. 그래서 어린 레미를 때리던 순간의 감정처럼 움직인 앙투안의, 아니 ‘성인’ 앙투안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연민하지 못하는 것이구나라고. 기본적으로 앙투안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레미를 죽임으로써 받는 형벌이라고 여기는 그 마음에 대한 반발인지도.

  어느 날엔가 또다시 레미를 죽인 범인을 파헤치는 일이 생긴다면 앙투안은 어떻게 할까. 또다른 은폐를 위해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이 명백한 자기합리화에 나는 떨고 말았다. 그러나 나또한 앙투안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떨림이다.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될 때면 무언가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이 깨달음의 불편함이 길게 갈 듯하다.

  소설은 흡입력 있게 읽혔다. 추리와 스릴러라기엔 애매하고 세밀한 심리묘사가 좀더 눈에 띄었다만 이 책 소개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비교하는 건 너무 심하게 나갔다 싶다. 다행히 책을 다 읽고나서야 그 문구를 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모든 것은 자연재해 탓이라 했지만, 요즘 자연재해의 대부분은 결국 ‘인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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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형식을 만든다

 

 언론에서 뜨고 있는 작가라며 지인들 사이에서 작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받은 작가에 대한 인상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전혀 달라졌다. 일단 언론은 이 작가를 전혀 소설에 관해 교육받지 않은 노동자 작가로 소개했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이미 온라인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어 책으로 출판된 작가이며, 이미 써 둔 글도 300편이 넘고, 기존의 소설 형식을 파괴하는 그동안 없던 새로운 작가라고 홍보했다. 작가와 글에 대한 소개만으로는 ‘노동’쪽에 방점을 두고 있어서 노동소설의 계보 쪽으로 생각했더랬다.

  소설을 읽고 나서 왜 언론은 작가를 계속 ‘노동자’ 작가임을 강조하는지 그것이 커다란 차별점이자 특성인 듯이 소개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장정일 작가가 등장했을 때 중졸임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이미 게시판에서 커다란 호응을 얻은 글이 출판되기는 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호응을 바탕으로 독자층이 구비되고 더 많은 독자로까지 확산되었을 김동식 작가의 책들을 한번에 읽었다. 그만큼 쉽게, 빠르게 읽힌다.

  강조하듯 익숙하게 보아오던 소설의 형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익숙하게 보아오던 인터넷 게시판의 글과는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우화구나, 세태에 대한 풍자가 재밌고 옹골차기에 흥이 솟았고 삶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을 지속했다. 문장이나 구성의 힘 보다는 SF, 판타지가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형태가 기묘하게 흐르는 것이 재밌는 요소라고 느꼈다. 

 최근 짧은 소설 역시 인기 있는 추세가 되었고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되는 익숙한 패턴 또한 다양화되기도 했다. 김동식 작가 역시 이렇게 익숙한 소설 패턴을 벗어난 작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책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야기 한편 한편의 틀은 같다. 그러니까 김동식 작가 자신만의 소설 형식, 틀을 구사하고 그 틀에서 이야기의 내용을 바꾸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흔히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읽게 되면 작품마다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장, 이야기, 구조를 보게 된다. 그것이 김동식 작가의 작품에서는 뚜렷이 나타나, ‘새롭다’는 말이 무척이나 식상하게 느껴졌다.

  인터넷 공포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고 하는데 대다수의 글들이 ‘공포’에 어울린다. 현실의 모습을 풍자한 글들이 한창 펼쳐지고 있었을 때에는 더더구나 엄청난 공포였으리라. 세상은 회색빛에 요괴가 가득하고 주위엔 온통 김남우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지다가도 과연 ‘온 정신’이라는 게 어떤 상태인가고 묻게 된다. 적어도 이런 세계를 잘 컨트롤 하는데 ‘김동식’이라는 작가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 자신이 개척한 익숙한 패턴의 반복이 아닌 소설이라는 형식에서 익숙한 형태로 글을 쓰면 작가의 글은 어떤 묘미를 지닐까 궁금해진다. 300편이 넘는 글을 써두었다니 4~5개월 사이에 다섯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미 써두었던 이 책들이 출간되고 난 이후의 글, 그 글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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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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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어둠

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저, 문학과지성사, 2017.2.24.


  테 포케레케레,라 말하는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그 부족은 아프리카의 어디쯤에 살고 있을까. 하고많은 말 중에 ‘테 포케레케레’를 전한 것인지, 그곳의 말을 ‘얻은’ 작가는 이 말만을 각인하고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마치 소설의 모든 문장들이 그 부족의 언어인 것처럼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글들. 테 포케레케레, 미지의 어둠. 모든 문문장이 미지, 낯선 나라의 언어를 마주한 듯하다. 부족원들은 열심히 말하고 손짓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뜻을 유추하지만 아직은 명확히 소통하지 못할 서로의 언어. 그리하야 소설의 문장은 음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러스크로노스. 시간합창. 소설 속에서는 어느 골목에 위치한 건축물의 이름이지만 무한한 공간이자 상상의 공간에 가깝다. 이곳에 들어서면 시간은 잊어먹게 되지만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인식만이 남아 미래의 공간이 아니라 오래 전의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문명과 떨어져 있는 듯한 생각에 빠진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시공간에 머무른다 함은 완전한 미지와는 또 다르다. 그 실체를 경험해보지 못하였을 뿐 수많은 문자와 이미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 서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는 것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익숙한 것에 기대어 의미를 읽어내고 표현한다 한들, 알 수 없는 것들이 흘러오고 흘러나오고 그리하여 내뿜을 수 있는 말들은 의미조차 지니는지 알 수 없는 음률들. 그리고 이미지. 그럼에도 그 세계에는 여지없이 폭력이, 죽음이, 독재가, 지진이, 테러가, 위기가, 존재했다. 그토록 어딘지 모를 곳을 돌고 돌고 돌고 돌아서 들어갔음에도.


    때마침 얼음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물그림자.

    불행한 사람들이 꿈꾸는 방식.

    여행.

    죽은 붕어가 세상을 뜬다.

    말로의 말로. 죽은 붕어가 물에 뜬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모든 접속 부사들 속에 ‘그’

    내가 속해 있어.

    나는 말로의 말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한다. 문단과 문단을 연결한다. 부채와 부채를. 부재와 부재를. 이 도시의 말로. 나는 당신과 당신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잇닿아 있다.

    말로의 말로.


  언어의 묘미를 한껏 살려 결국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익숙한 언어를, 구조를 작가는 해체하고 작가가 준 몇 개의 단어에 의지해 문장을 생성하여 독자는 의미를 읽는다. 한없이 시간으로 들어가지만 시차에 부딪친 듯 어지럽고 몽롱해진다. 아직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말들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말이란 결국 환멸입니다. 많은 경우 환멸이죠. 그렇지만 그 환멸의 힘으로 밀고 가는 삶도 있는 겁니다. 환멸에 떠밀리는 시간도 있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을 많이 하고 삽니까. 우리가 얼마나 안 해도 될 말을 많이 하고 삽니까. 동생은 안 해도 될 말을 오래 하고 있었다. 동생은 말로, 끝없는 말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뱉어지자마자 사라지는 말로. 동생은 존재했다.

     

  이렇게 갈라진 언어로 이 죽음의 시간을, 공포의 시간을, 우울의 시간을 위로할 수 있을까. 뜻을 알 수 없는 노래로 의성어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동일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말이 가닿지 못하는 시간들을 되돌려,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건네며 그 속에 표정을 담고 그저 음률을 담아 시간을 흘러가는 것도 좋으련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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