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햄릿이 뭘 안다고?!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6.


  교사의 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면 에이미가 생각났다. 하나같이 다르지 않는 똑같은 패턴의 말과 행동, 여지없는 결말, 그리고 그루밍. 한여름이란 어찌 해도 그늘을 찾게 만들고 그 볕은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인 무더운 여름 날씨와 셜리폴스 풍경이 습한 열기를 드리우고 숨이 막히게끔 한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관계도 그렇게 느껴진다. 익숙한 패턴처럼 10대 소녀는 제 엄마에게 애정은 저 멀리 두고 반항과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늘 엄마들은 항상 아이에게 이것을 또는 저것을 하지 말라 다그치고, 아이는 항상 그 말에 반항하느라 관계가 어그러지긴 하지만 제 엄마가 다른 엄마이기를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기를 바라는 에이미의 감정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엄마”라고 입 밖으로 나오고 난 이후에야 이저벨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에이미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이, 이저벨에게는,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몇 주 뒤에 그윽한 밤의 어둠 속에서 이저벨은 그 말을 떠올렸는데,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똑같은 강도로 그녀의 가슴속에 은백색 고통의 파문이 일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휘청거리는 것 같았고, 심장은 어처구니없는 속도로 질주했다. 흉물스러운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 시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일이 도덕적 약점이 되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에이미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 에이미가 의도했거나 짐작했던 것보다 더 강한 주먹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삼십대에 구두공장 사무실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 굿로는 교사가 되기를 꿈꿨었고 좋은 남편을 갖기를 소망하고 구두공장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셜리폴스에 십사년째 살고 있다. 사람들과 특별하게 교류하지 않으며 홀로 에이미를 키우며 에이미의 일 하나하나 단도리하기 바쁜 이저벨은 이제 햄릿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런 ‘책들을 읽는 여자’임을 에이미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저벨 마음속에 깊이 있는 또다른 욕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실행할 수는 더더욱 없는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 품은 이저벨의 욕망과 열다섯 에이미의 세배쯤 나이가 많은 교사에 대한 욕망은 대비된다. 감정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실현에 있어서 말이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지독히도 닮아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평행선으로만 향하는 듯 보인다. 엄마와 딸은 과연 친밀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뒤섞인다. 먹먹해진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과 생각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일이 불안으로 인해 확장됨을 느낀다.


자신이 반대만 아는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에이미에게 늘 무섭게 대했나? 이런 의문조차 끔찍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겁이 많은 아이로 자랐고, 늘 고개를 숙이나? 이저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줄곧 스스로가 신중하고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끔찍했다.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은 일보다 더 끔찍했다. 자식이 겁에 질린 채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는 딸을 흘끗 돌아보며, 그 말은 맞지 않아, 완전히 반대야, 하고 생각했다. 내가 줄곧 너를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올바르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겁에 질려 있었지.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이저벨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의 나이였다면 에이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놀란 건 이래저래 이저벨의 나이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이 더 마음쓰이게 된 이유였다. 에이미를 기르며, 대립하며 자신의 지나온 삶, 그리고 전개된 삶을 생각하였을 이저벨처럼 어느 순간이 시간이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다 해도 참으로 젊은 이저벨이었기에. ‘심각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외로운 외톨이’로 살아온 이저벨의 모습이 이 세상 거의 모든 싱글맘의 모습은 아니었을런지. 하긴 그렇게 볼만도 아니다. 이저벨은 그렇게 여기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맙소사.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남자를 잃는 것에 대해 햄릿이 뭘 안다고?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이저벨은 실내복을 더 단단히 여몄다.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먼 옛날부터 세상을 흘러가게 한 것은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만 해도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지붕은 새고 차에는 윤활유가 필요한 뉴잉글랜드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에게 나약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동조자 - 전2권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트라이앵글


동조자, 비엣 타인 응우옌, 민음사, 2018.


  베트남이 한국에 열광하고 있다. 가보지 않은 관계로 기사로 접하는 것일 뿐이지만 베트남 축구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했고 한국인 감독이 우승을 이끌었다며 감독의 나라에 대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고 있다 한다. 하긴 히딩크로 인해 네덜란드에 우호적인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 기사를 전적으로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축구가 뭐기에, 이 말은 항상 긍정의 의미를 띤 감탄사는 분명 아니다. 그냥 즐겨, 이 말도 있는데 굳이 따지는 것도 흥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감정의 어디쯤에 있을 뿐.

  한국인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난민 학살과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 아니 강간했던 역사로 베트남은 한국인에 대한 분노가 있다. 축구 우승-더구나 월드컵도 아닌-으로 상쇄될 감정은 분명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감정의 골이 깊지 않은 것인지, 축구가 대단한 것인지, 한순간의 기쁨을 언론이 과장한 것인지, 각 사안에 따라 이성과 감정의 반응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베트남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세상은 하나임을 자본은 국경이 없음을 진정 화합의 승리자는 자본인 것인지…. 이것들 하나하나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음만은 확실한.

  전지구인의 화합과 동맹을 강조하지만 이건 그냥 허울 가득한 슬로건이다. 세세하게 보면 결국 나라와 민족의 구별이 있고 개인의 이익에 따른 층계가 있다. 이토록 정교하게 세분화하며 화합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정체성과 이중성 어느 것이 살아가기 위한 말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둘 다 필요로 하면서 정체성은 가치있는 것으로 이중성은 고약한 것으로 치부한다. 단어에 이미 감정을 부여하고 있기에 이중성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이중성을 놀이에서 쓰는 ‘깍두기’라 얘기해도 될까. 게임에서 무척 부러운 자, 깍두기.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면 ‘잡종새끼’가 된다. 이 책은 그 잡종새끼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이 곧 절체절명의 이중성을 지닌 자로 고정되어 버리는 깍두기가 된 그의 이야기. 그의 양 옆에는 명확한 세계가 있고 그는 항상 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부모는 프랑스와 베트남을, 의형제 만과 본은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의 경계를 주었고 전쟁은 북베트남에서 자란 그를 남베트남에서 살게 했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로서 CIA 소속 비밀요원이기도 하고 베트콩 소속 고정간첩을 수행하고 있다.

  순간 순간의 선택으로 점철되었을 그의 운명을 그는 항상 부정한다. 자신이 가진 명확하지 않은 정체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오로지 하나, 잡종새끼로 태어나 그렇게 불린  대로 살아가는 운명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고 소모적인 일이 있을까.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선 어쩐지 끊임없는 모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가 ‘우리가’나 ‘우리에게’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셨습니다. 파견된 스파이로서 첩보 활동의 대상인 남쪽 군인들이나 철수자들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불렀던 겁니다. 그 사람들, 나의 적들을 ‘그들’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과 함께 거의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후에,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동조하는 내 약점은 ‘잡종 새끼’라는 내 존재와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잡종 새끼라 나면서부터 쉽게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잡종 새끼들이 잡종 새끼다운 행동을 합니다. 내가 내편과 다른 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배운 것은 상냥한 내 어머니의 공이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만약 어머니가 하녀와 사제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않았더라면, 혹은 경계가 허물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유로 힘든 시선 속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쪽에 있었다면 그가 선택한 것을 확고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삶이 되는 것의 아이러니와 혼란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선택임이 분명하지만 만과 본의 것과는 다른, 그 것조차도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닌가.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늘 그렇게 자신을 확연하게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이 선택을 그는 늘 자신이 잡종새끼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그의 삶의 결과는 정체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길 거부하고 있었음에 따른 것이다.


자네의 동양적인 본능을 견제하기 위해 자네는 미국인들이 나면서 배워 온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부단히 연마해야만 해.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주인공이 발끈하는 부분은 누군가가 그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몰아갈 때이지만 자신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해 무언가를 철저히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스스로를 옭아맨 것이다. 그리고 그 옭아맴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쩌면 확고한 정체성을 획득했다.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를.

  그의 존재는 양편에 의해 맥없이 희생과 착취를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시각을 보여주지 않는 존재가 된다.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시각에 의해 해석되어 왔다. 베트남인들이 그들의 목소리가 없었겠는가. 그 목소리를 제쳐두고 한국 역시 미국의 시선을 따랐다. 게임에 참여하는 깍두기처럼 이편, 저편이 되어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위선과 모순을 경험할 수 있었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 시선.

  인간은 항상 이중, 다중의 인격을 가지고 제 이익을 취하며 살아가면서도 ‘정체성’을 강요한다. 권력의 처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인이 취해야 할 정체성이란 결국 어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서 내가 누구인지, 취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삶의 태도와 방향을 설정하는데 힘겨워한 주인공의 간절하고 처절한 고민이 얼마나 허무하게 박탈되어 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 감정이 이입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로노스


N. E. W. 김사과, 문학과지성사, 2018-08-08.


  새로운 세상이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은 낯설지 않다. 동화도 미래세계를 그림에 있어 그 기괴함이야 만만찮지만 대체로 긍정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지 기대가 너무도 크기 때문인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기괴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계보에 이 소설도 놓일까. N.E.W. 새로운 것일지 새것일지를 가늠하기엔 애매하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공간은 꽤나 익숙하기에. 낯설지 않다는 말은 새롭지 않다는 것, 새것 같지 않다는 것이므로 N.E.W.라는 단어에 일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엔, 이, 더블유, 뉴N. E. W.가 현대 세상을 결정했다.’ 그게 무슨 약자인지 아세요? 신경학neurology, 전기electricity,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 믿어지세요? 제 아버지가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유치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죠. 그게 다 아버지의 연기에 속고 있는 거야.


  내가 속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리 보아도 소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막장드라마 일컬어지는 배경을 지닌 인물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인간군상에게서 보던 삶을 살아가는 패턴은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새롭게 읽어나가기엔 무리이다. 적당히 환상이라 생각하며 넘어가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익숙한 그림 속에서 제목 때문에 N.E.W.를 되뇌며 연관성을 억지로 주입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에 생각은 다른 방향, 그리스신화 속으로 흘러간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죄송한데요, 아버지의 시대는 끝났어요. 아버지의 거짓말은, 아버지의 사기는, 그 조잡한 마술은 이제 통하지 않아요.


정말로 죽어주시면 안 되나요? 저와 제 아내를 위해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 유일한 부탁이에요.


  제우스의 할아버지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에 의해 거세당한다. 자식에 의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 또한 제 아비와 같은 운명이 될 뿐. 이것은 과거가 물러나고 현재가 도래하는 것이니 아버지 세대가 사라지고 아들 세대가 오는 것이다. 오손그룹의 정대철 회장이 구축하고 있는 권력이 그의 세계에 속한 아들 정지용과 며느리 최영주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이야말로 완벽하게 과거와 현재의 교체이며 ‘N.E.W.’가 아닌‘N.E.W.’의 모습이다. 그런데…신화와 소설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아니다, 결국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이란 그렇게 신들이 벌이는 전쟁처럼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신’으로 나타났을 때는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인마냥 세뇌당한 그 세계가 현실에도 얼마나 강요되고 있는지를.


정 회장이 굳이 복잡하게 5평짜리 서민용 원룸과 2백 평짜리 최고급 펜트하우스까지 한 건물 안에 섞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거기에도 그만의 독특한 신념이 숨어 있다.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과 완전히 섞여서도 안 되지만 완전히 격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멀리서,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느껴야 했다. 그래야 쌍방간의 두려움이 유지되며, 살얼음 같은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의 두려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그것은 통제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가 가장 까다로운 예술이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느껴질 때, 두려움의 대상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개달았을 때 사람들은 용감해진다.


  국숫집 성공자도 BJ 이하나도 욕망을 갖는다. 어쩌면 성공이라 이름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벌이는 처절한 ‘노력’과 대비되게도 모자란 한량같은 정지용은 쉬이 권력을 가진다. 5평짜리 서민용 원룸에서 사는 이들이 몸과 마음으로 발버둥칠 때 정지용은 그저 아버지 하나만 제거하면 늘 하듯 재밌는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오손그룹이란 세계를 거머쥘 수 있다. 아, 그조차 제 힘으로 거두지도 못한 것이지만. 심오할 듯 보이는 정회장의 독특한 신념이란 결국 권력을 더욱 드높이게 보이는 수단일 뿐이다. 2백평 펜트하우스만 늘어선 곳에서 권력을 명확히 휘두를 수 있을까. 2백평 펜트하우스가 더욱 빛날 수 있는 건 그 옆에 놓인 5평짜리 원룸의 존재다. 그들이 어떤 신념으로 그들 자신을 이미지화시키든 5평의 인생이란 그들에게 개를 키우는 공간일 뿐. 정지용이든 최영주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제 왕국을 세우든 변하지 않는 것, 여전히 5평짜리 원룸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 안에서 그들을 위한 개를 사육시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꾸뻬 씨의 핑크색 안경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마시멜로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핑크색 안경을 쓰고 노란 조끼


꾸뻬 씨의 핑크색 안경, 프랑수아 를로르, 2018.


  파리는 여전히 노란조끼 시위가 한창이다. 유류세 인상 반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시위는 최저임금 인상, 교육제도 개편 반대, 연금제도 개선 등의 정부정책에 반대하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확산되고 있다. 파리 정부의 친기업 정책이 시위 확산을 가속화시키는 이유라고 하는데 내일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에펠탑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는 폐쇄조치가 이뤄졌다.

  파리의 정신과 의사 꾸뻬씨는 이 상황에서 어떤 색 안경을 쓰고 있을까. 꾸뻬씨는 행복과 불행은 어떤 안경을 쓰고 삶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항상 행복을 이야기하는 꾸뻬씨는 행복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지금’ 그가 있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한다. 다시 돌아올 파리의 노란조끼 물결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옛날 옛날에 꾸뻬 씨란 정신과 의사가 살았다. 그는 사람들한테 핑크색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자기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환자들이 주변을, 자기 자신을, 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건 이를테면 이들에게 새로운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꼭 새롭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환자들이 평소 끼고 있으면서 그들의 삶을 망치게 만드는 안경보다는, 삶을 덜 암울하게 덜 왜곡되게 보게 해주는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고민을 안고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치유와 깨달음을 얻는 꾸뻬씨의 여행은, 생각은, 글은 고민을 안고 있음에도 가벼웁게 띄워올린 풍선처럼 느껴져서 맑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진중함에서 밀려난다.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들로 엄청난 통찰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기보다 도덕교과서를 보는 기분이 들게 되는. 익숙하고 반복적인 알고 있지만 실천의 문제라서 그것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감정의 정화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이래서 비극 어쩌면 막장 요소를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감정을 드러내게끔 하니까. 아니, 행복의 문제는 단지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깨닫고 반성하며 치유하는 일은 할만큼 한 것 아닌가 싶기도.


비록 젊지는 않지만, 꾸뻬 씨는 자아실현이 삶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이고, 앞선 세대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자신은 이미 운이 좋았다고 자위하면서 세상을 전혀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의무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첫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랄딘에 비해서는 권태를 잘 견디지만, 부모님이나 다른 세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동갑내기들에 비해서는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삶의 뭔가를 바꿔볼 작정이었다.


  파리 시위의 이유가 무척 익숙하다. 이번 시위가 파리에서 발생했을 때 ‘파리 테러’라고 들었던 듯하다. 유럽에서 테러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니까라고 생각했지만 곧 파리 폭력 시위, 과격 시위라는 제목으로 나아가더니 ‘노란 조끼’가 등장하면서 파리 시위, 집회라는 제목을 달고서 기사들이 연잇는다. 그동안 기사를 놓친 것인지 언론의 논조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들에게 정치란, 국민을 위한 정책을 위한 고민의 방식은 어떻게 빙빙돌아 항상 그 자리로 가는가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가장 센 것은 돈이 되는 건가.

  ‘세상을 전혀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의무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세대’. 삶의 뭔가를 바꿔볼라치면….  새삼 폭력없던 시위가 생각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복과 인복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2018.


  소설속 인물을 현실로 끌어들여와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생각하는 일은 아주 오래전에 끝난 것 같다. 언제부턴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은 K이거나 M이거나 또는 L이거나 그랬다. ‘J 스치는 바람에 노래 가사처럼 나만의 J를 불러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K, M, J는 익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뚜렷하게 이름이 기억되는 작품이 있었던가.

  그 이름들을 수식하는 말에 의해 정체성이 확보된 각각의 주인공들은 고유명사였지만 결국 보통명사가 되어 주위를 맴돈다. 강민호도 권순찬도 최미진도 한정희도 나정만도 박창수도 김숙희도 반경 1km 안에 분명 살고 있을 것 같다. 가까이에 그들이 살고 있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삶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들 때문에 잘 살아가려는 내 삶이 방해를 받는다.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를 이해하며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려 ’애쓰는’ 나의 노력이 끝날 것 같은 기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 것은 권순찬과 한정희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한정희와 나]


  친절, 윤리,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말이 주는 무게와 권위에 눌려, 경직된 채로 기계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감정이라는 것이 진심이 녹여든 마음은 어떻게 다를지,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느끼는 당혹감 또한 강박적인 윤리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해와 친절의 한계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기계적 친절은 나를 더 옥죌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형식적·기계적 배려를 느끼는 이가 결국은 나를 멀리할 지도 모르겠다.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소설 속 이름들은 윤리적이려 하는 나를 방해하는, 시련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면서 윤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나에 의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이해가 힘들었던 김숙희에 대해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지 않은 과장된 친절이 배려가 불편함을 줄 수 있는지 나아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없음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탓에 일을 쌓아놓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일복은 많고 인복은 없다였다. 강민호, 권순찬, 김숙희 등등이 하루 걸러 내게 뭔가를 부탁했고 많은 일거리가 내게로 왔다.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성향으로 인해 힘겨워 턱턱거리면서 나를 탓하다가도 상대방을 탓한다.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이러면 안되는 걸 알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거절의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거절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과한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과하고 때론 습관적인 부탁의 말을 하는 자의 윤리를 생각했다. 거절이라는 불친절한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을 그토록 꺼리며, 어떤 불편함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친절의 과장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도 불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배려였을까, 이기였을까. 결국 내게는 힘겨움이란 결과만을 주었던.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해야 할 거절보다 그들이 하지 말아야 부탁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내가 있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최미진은 어디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