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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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단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작가정신, 2017.


  각각의 이야기이자 잘 맞물린 세 편의 이야기로 직조된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혼을 빼놓는다. 시간을 달리한 이야기마다마다에 담금질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슬픔이,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들의 여정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남은 자의 애도의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의 최후의 목적은 같다. 분노하는 토마스, 아내의 삶을 기억하려 이야기를 짓는 에우제비우, 침팬지와 교감을 나누는 피터가 살아간 시대, 1904년에도 1938년에도 1981년에도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 포르투갈에서 그들은 어떤 운명을 맞닥뜨리게 될지 인생에 가득한 물음들을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숙부가 모르는 것은 그가 뒤로 걷는 것이,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는 것이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반발하면서 걷는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반발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퀴블러 로스는 죽음 또는 애도의 과정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로 이야기했다. 「1부 집을 잃다」를 담당하는 토마스는 일주일 사이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겪는다. 절망과 분노의 감정이 옹골차게 자리한 토마스의 신에 대한 분노가 이해된다. 고미술 학예사로서 17세기 고문서에서 발견한 십자고상의 소재지를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가는 토마스의 여정은 분노가 한점도 소멸되지 않는 여정이다. 신을 향한 복수로 발을 디딘 토마스가 작동법도 익히지 않은 신문물 자동차를 끌고서 1904년의 포르투갈을 누비는 모습은 혼란가득한 코믹을 연출하지만 한편으로는 재앙이다.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맞는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짓지 못할 만큼 놀랍게도 토마스는 자동차로 금발머리 한 아이를 치고 마는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여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치부하며 토마스는 그곳을 떠나버린다. 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거둬감에 절망하고 복수를 맹세한 토마스의 행동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게 된다. 그러니 환상이었던가 생각할 밖에.


애통은 질병이에요. 벌집을 쑤신 것마냥 슬픔의 마맛자국이 생겼고, 우린 열에 시달리고 타격에 무너졌어요. 그 병은 구더기처럼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이처럼 달려들었죠―우린 미칠 정도로 몸을 긁어댔어요. 그 과정에서 귀뚜라미처럼 활력을 잃고 늙은 개처럼 기운이 빠졌어요.


  「2부 집으로」의 병리사 에우제비우 역시 아내의 죽음을 겪는다. 그에게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되는 시간 남편의 시신을 끌고 찾아온 여인은 “그이를 열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세요”라며 부검을 의뢰한다. 무엇이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가 아니라 살아온 그의 삶을 알려 달라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이 숙연하다. 그의 아내와 같은 이름인 그녀, 마리아를 통해 에우제비우 역시 아내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질병처럼 부여잡고 있는 애통에 대한 의미 전환을 이룬다.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해 미스터리는 늘 마지막에 해결되며 의혹이 말끔히 해소돼요. 우리 삶에서 죽음도 그래야만 해요. 아무리 어려워도 죽음을 해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맥락을 살펴야 해요.


  2부에서는 철학적인 논쟁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마리아의 남편 라파엘의 시신 속에 품고 있는 침팬지와 새끼 곰의 모습, 그 안으로 들어가 두 침팬지를 끌어안으며 “여기가 집”이라 외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각인된다. 아들이 죽던 날, 뛰다시피 뒤로 걷던 애절과 비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던 이방인처럼 뒤로 걸으며 살아온 라파엘의 뒤로 걷기는 분노였을까, 애도였을까. 마리아와 에우제비우가 이루는 애도의 방식은 타협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이 동일한 선상으로 이어지는.


삶을 돌아보는 것은 달콤 쌉싸름한 일이다. 그는 향수에 젖는다. 어떤 사진은 벅찬 기억들을 불러온다. 어느 날 저녁, 아기 벤을 안은 젊은 클래라의 사진을 보다가 피터는 울음이 터진다. 벤은 자그맣고 빨간, 주름투성이의 갓난아이다. 앙증맞은 손이 엄마의 새끼 손가락을 꽉 잡고 있다. 오도는 동요하지 않고 근심스럽게 피터를 바라본다. 침팬지가 사진첩을 내려놓고 그를 껴안는다.


  「3부 집」은 캐나다에서 시작한다. 40년을 함께 한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피터는 모든 일들을 접고 가족도 친구도 두고 고향 포르투갈로 향한다. 그 여정의 동반자는 침팬지 오도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가는 동안 오도는 피터를 피터는 오도를 닮아가며 그들은 인간과 동물을 떠난 교감과 사랑을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는다. 오도와 함께 하며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피터의 삶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소설을 읽는 내내 알고 싶었다. 그곳에 닿으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곳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상실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이들의 치유의 여정이 그곳에 닿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러나 일찍이 예상도 됨직하다. 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특정한 장소, 인물, 물건 등의 신비한 것을 찾기 위한 길을 떠날 때마다 그들이 깨닫는 것은 그것은 마음속에 있었다, 나의 집에 있었다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을. 무엇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 그 길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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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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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가 필요한 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문학동네.


  새해가 되었고 심지어 황금돼지해임에도 지난 해의 푸쿠가 새해로 넘어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들은 새해 희망과 설렘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한해의 마지막 날, 이제 새해를 두시간여 앞두고 불행을 선고받는다면 나도 모르게 푸쿠를 떠올리게 된다. 새해에 생각하는 단어치고는 참, 참으로 희망적이다! 

  계속된 불운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원인이 있을 거라고. 차라리 저주라고 할지도 모를 그 어떤 것이 있어주어야만 불행에 대해 수용하든 맞서든 할 수 있다. 명명을 한 후에야 대상이 명확해진다. 푸쿠. ‘우리는 그후로 줄곧 그 염병할 저주 속에 살고 있다.’

  한 해를 울음으로 마감하고 울음으로 시작한 이들에게…. 사파! 사파! 사파!


산토도밍고에는 제독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들었을 때, 아니면 푸쿠가 수많은 대가리 중에 하나를 곧추세웠을 때 내 주위에 재앙이 똬리를 트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나와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줄 유일하고 확실한 역주문이 있어.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 그것 역시 한 단어야. (대개 집게손가락을 열심히 포개면서 내뱉는) 한 단어.

사파.


  와오! 이런 주인공을 본 적 없다. 실로 미안하지만 황금돼지해에 딱 떠올려지는 그 몸매의 소유자. 110kg 거구에 사교성과 운동신경은 없는 ‘덕후’ 감성 가득한 도미니카계 흑인 오스카 와오. 그의 덕후 기질은 만화, 영화, 게임, SF와 판타지 소설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무척 바쁠 것 같은데도 언제나 사랑을 꿈꾸는 사랑에 고픈 오스카 와오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랑이 동시만 아니었더라도 한명만을 선택해야 함으로써 모두를 잃는 비극은 없었을 테다. 사랑, 이라 이름하며 동정을 떼는 것이 실천이자 당연한 것인 오스카에게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이 불행의 근원은 오스카의 누나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 할아버지 아벨라르를 비롯한 데 레온 가족 삼대에서 이어진 저주, 푸쿠 때문이다.

  오스카의 불행으로 볼 때 가볍고 코믹스럽게 느껴지는 푸쿠는 어머니 벨리시아와 할아버지 아벨라르의 이야기 속에서 결코 가볍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잔인성과 폭력성, 끈질긴 푸쿠의 면면을,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미니카에서 건너온 오스카의 가족에게 여전히 끈질기게 붙어 진행중인 푸쿠 또한 도미니카산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경험하였듯이 독재자만이 가장 강력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다. 도미니카에서는 실존인물로서 트루히요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작가는 도미니카에서 푸쿠 탄생의 역사인 독재자의 트루히요의 31년의 활약과 함께 오스카 가족에게 닥친 모든 비극적인 서사를 유머와 풍자를 담아 들려준다.

  오스카가 빠져 있는 세계, <혹성 탈출>을 비롯한 SF판타지는 오히려 트루히요의 세계보다 아름답다. 그럴 지도 모른다. 누나 롤라는 사춘기면 으레 찾아오는 그런 반항과 방황의 기질로 변화를 찾아 헤매지만 오스카에 대한 사랑만큼은 굳건히, 흔들리지 않으며 가족의 몰락과 거듭되는 배신에 이민자로서의 힘겨운 삶, 거기에 암까지 얻은 쉴틈없는 푸쿠의 저주에도 어머니 벨리시아 역시 오스카를 사랑하고 사랑해준다. 그렇기에 오스카가 여전히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내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 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

어떤 이들은 저주라고 말하겠지.

 난 삶이라고 말하겠다. 삶이라고.


  거듭 삶이라 강조하는 롤라처럼 푸쿠가 아니었던 걸까. 푸쿠의 마력에서 뻗어나지 못하고 푸쿠에 잡혀 버렸지만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누나가 푸쿠에 쉬이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어떻든 저항은 이어졌다. 그 저항이 푸쿠를 중첩하였을지언정. 오스카 또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생 일대의 사랑을 눈앞에 두고서 푸쿠가 찾아와 사랑과 목숨 중 선택을 강요한다면 오스카는 무엇을 가리킬까. 오스카에겐 이미 그런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 것이 푸쿠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오스카의 사랑, 동정 떼기를 코믹하게 엮어 나가는 이 이야기의 과정이, 결말이 권력이란 것이 개인의 삶 하나하나에 관여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저하게 되는 것도 더 나아가게 하는 것도 사랑, 전진하는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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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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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되지 않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크로스비 마을은 올리브로 인해 가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다양한 색채를 띤 정감어린 실제의 마을로 느껴진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낯설던 올리브는 배우고파 지는 수학 선생님으로 그녀의 거구가 얼마만큼인지 옆에 서보고픈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마주치면 눈흘기게 되는 동네 아주머니로, 그럼에도 늘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픈 사이로 자리한다.

  열 세편의 단편소설에서 올리브 키터리지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젊은 날, 중년의, 노년의 올리브가 타인의 삶 속에 등장해 그들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수많은 인생들이 그러하듯이. 삶은 각자의 인생에서 주연이고 타인의 삶에서는 조연이지만 어느 순간에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며 결코 별일없이 흘러가지 않을 감정을 안겨준다. 그 같은 속도의 흐름을 깊이 있는 감정으로 채어 놓는 작가의 글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이런 올리브 스타일의 아줌마가 동네에 있다면 성가실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올리브 역시 그녀만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짐 오케이시의 차가 도로를 벗어난 후에,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 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 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니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 [약국]


  신기하게도 올리브도 남편 헨리도 각자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사랑을, 사람을 품고서 살아왔다. 그들 삶에 기쁨이기도 하고 회한이 되기도 한 대상, 그 시절들은 흘러가 버렸고 헨리도 올리브도 부부라는 그 충실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잘 견뎌내고 있다고 믿었다. 부부란 사실 자그마한 일에도 무수히 싸우기도 하면서 또 자그마한 일로 인해 가장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떠나보내고 쓸쓸한 노년의 삶에 서로가 위로가 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적이자 동지로 살아온 헨리와 올리브의 삶이 주욱 「다른 길」로만 걸어 왔음을 알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이것이 삶인가 싶은.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튤립]


  애써 추억이라 말해보지만 그 어떤 좋았던 날들의 기억이라도 그쯤되면 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길을 맞닥뜨리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길」이 보여주는 파국의 여운은 길다. 인질이라는 엄청난 사건과 마주했지만, 그 대상이 되었지만 헨리와 올리브에게 충격으로 전해진 것은 평생 겪을까 말까한 그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오래도록 숨겨왔던, 감춰왔던 서로의 속내다. 위급한 순간에 드러난 아찔한 말들, 그 부대끼는 독설들은 생애 자체가 거짓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강력하다. 상처 위에 상처, 그 위에 또다시 상처, 거듭된 상처의 중첩. 소설에서는 상실과 상처를 거듭 끄집어낸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 [작은 기쁨]


  돌아봐도 멈춰봐도 씁쓸하고 쓸쓸한 바닷가. 휑한 마음 가득하게 서 있는 노인 올리브의 생애가 이대로 마감되도록 작가는 두지 않는다. 결코 사과할 줄 모르며 변덕 심한 사람이라는 것이 남편과 아들의 올리브에 대한 평가이며 그래서 힘겨워했던 두 사람, 특별히 크게 싸운 것 같지 않음에도 어느틈에 벌어진 관계는 쉬이 되돌려 지지 않는다.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아들의 말 한마디를 바랬지만 결코 이뤄지지 않았고 헨리가 죽은 후엔 외로움을 더욱 더 껴안은 채 여전한 성격을 유지하며 올리브는 살아간다.

  외로움과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듯 철썩 달라붙어 있다. 칠십이 넘은 나이라고 해서 외로움에 면역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올리브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독과 외로움에 자살을 선택하지만  「밀물」 속 젊은 케빈과 패티의 놓고 싶지 않았던 생에 대한 의지가 올리브에게서도 나타난다. 노년에 만난 사랑 때문인지, 깨달음으로 인해 젊은 올리브였다면 관심두지 않았을 성향의 잭에게 마음을 주며, 결코 알지 못했던 알려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작은 기쁨이 필요한 삶을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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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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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휘어잡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불현듯이 들이차는 상념. 그것은 바쁘게 서둘렀던 마음을 휘어잡고 속앓이를 하게 한다. 굳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할 리 만무한데도 과거의 기억이 가지는 힘은 크다. 때로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생각하기 위한 전조가 아닌가 싶다. 여기, 소설 속 루시 바턴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갈망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팠던 열망이다. 루시의 삶은 기억의 프리즘을 통해 보아도 아프다. 그 아픔을 루시는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오래 전 오래 병상에 머물렀던 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 루시와 루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엄마 고향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오간다. 기억 속 이야기는 소설가가 된 루시의 소설 속 이야기 같기도 하다.


“픽션 작가로서 작가님의 일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그녀는 픽션 작가로서 자신의 일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모든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루시는 외친다. 모든 생은 감동을 준다고 외친다. 루시가 타인의 생을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루시라서가 아니라 ‘소설가 루시’이기에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로 타인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만든 것이라고.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그 자신의 삶에 박힌 그 씁쓸한 모든 기억에서 외로움을 인생의 첫맛이라 기억하는 이라면 외로움을 짝지우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삶에 눈이 갔을 거라 싶다. 그러니 루시가 생각하는 방식이, 타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껴안으려는 그 마음이 루시를 소설가로 이끌었구나 싶다. 모든 생이 감동이라 여기는 그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소설가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루시’로서 그 마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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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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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화재 현장에서 할머니를 구한 불법체류 노동자가 영주권을 획득했다. 스리랑카인 니말은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영주 자격을 얻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제주도 예멘 난민으로 급격하게 불거진 외국인 혐오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그 이유와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는 곧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영주권을 얻은 이유를 써 붙이고 살아가진 않을 터이니 니말은 그의 피부색을 이유로 혐오의 시선을 받는 날들을 여전히 겪을 것이다. 한국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버지스 형제』에선 난민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이제는 중년이 된 세 남매의 이야기다. 형제자매는 어릴 적엔 함께 살지만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들 역시도 그러하지만 가족에게 사건이 일어나자 일을 해결하려 당장 달려간다. 또한 그들은 어릴 적 함께 겪은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다. 언덕 위에 차를 잠시 세워 두고 함께 타고 있던 짐, 밥, 수전의 아버지가 내린 사이 네 살 밥의 장난으로 구른 차에 아버지가 치여 사망한 일이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날의 일이지만 이 일은 자라는 내내 밥에게 원죄를 부여하였고 그는 죄책감 가득한 소심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반면 여덟이었던 짐은 집안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뉴욕으로 간 짐과 밥과 달리 수전은 고향 셜리폴스에 머문다.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마을의 소말리족 난민 공동체 이슬람교 사원에 돼지 머리를 던진 일로 그들은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2006년 메인 주 루이스턴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 재커리는 증오범죄로 기소되어 변호사 일을 하는 짐과 밥이 이 일을 해결하는 과정이 세 남매가 살아온 이야기들과 연결되면서 각각의 상황에서의 갈등을 드러낸다.

  갈등은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돼지 머리를 던진 일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에 대한 감정만 높게, 깊게 쌓아가고 해결할 의지를 갖지 않고 싸우기 위한 대치상태로 소모적이던 상태에서 재커리가 벌인 것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드러나야 상황에 대한 다른 형태의 일들이 진행되게 된다. 문제가 있음을 소리칠 수 있고 그렇기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 서로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품고서 은근히 드러내왔던 문제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뚜렷해지는데 그때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의 갈등은 세세한 것까지 드러나게 된다. 짐과 밥의 가족들 간의 은근했던 갈등의 감정들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메인에 왜 소말리족이있는 거야?” 헬렌이 문을 통과해 옆방으로 가면서 물었다. 그녀가 돌아보며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족쇄를 찬 게 아니고서야 누가 셜리폴스에 가겠어?”

밥은 헬렌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버지스 가족의 고향을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투였다. 짐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족쇄를 찼으니까. 가난이 족쇄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시각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보인다. 짐과 밥과 수전, 그들의 배우자, 그들의 아이들을 사다리로 연결하여 애정관계와 갈등관계를 선으로 잇는다면 무수한 교차가 이뤄진다. 그들 갈등의 이면을 한발짝 깊이 들여다보면 한 개인에 대한 감정의 틀을 쌓아가는 것이 환경에서 체득한 계급의식이다.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간의 갈등은 개인간, 가족간의 갈등속에 잠긴 생각의 확장판이다. 가족이 개인에게 애정을 달리 하듯, 사회는 특정 집단에게 애정을 달리한다. 그것은 곧이어 당연한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 처절한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인식, 그것이 갈등의 차별의 편견의 혐오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준 사람들한테 더 차갑게 대해. 참을 수가 없거든. 말 그대로야. 우리가 누구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져. 내가 그랬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온갖 이유를 다 끌어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도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고 따스하게 전개된다. 불안하고 두려움 가득한 밥과 그렇게 보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르지 않았던 짐에게 그리고 헬렌에게, 이 세 남매에게 아닌듯이 보였던 가족의 느낌이 서려가듯 이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형태도 이 남매들처럼이 아닐까. 미국의 개인주의가 무조건 나쁘지 않고 소말리아의 지역문화와 가족주의가 무조건 답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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