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념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마음산책, 2016-06-30.


  신문 속 단 몇 칸. 이름만 적힌 부고란을 보면서도 먹먹할 때가 있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것이 주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가. 그런데 이름 몇 글자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한 생애까지 알고 나면 그들이 보낸 한 생에 대한 연민이 더해진다. 이 책은 그렇게, 이 세상의 보다 나은 변화를 위해 한발짝 더 멀리, 깊이, 높이 움직인 이들의 ‘부고’와 함께 그들의 생을 담담히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

  그래서 아쉽다. 타인의 생에 대한 서술에 드라마틱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송구하지만 ‘책’이라는 점으로 접근하면 담백함이 자칫 단순·지루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객관적인 생애에 대한 서술은 좋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들의 생애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지 구성과 서술은 아니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들 삶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는 걸 자제했다. 여러 자료들을 더해 ‘보여주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평전이 아니라 ‘부고’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뜨겁게 우리를 흔든” 그러나 “가만한” 서른 다섯에 대한 부고라는 점을.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 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저자는 “가만한 당신”이란 제목을 붙였다. 가만하다는 말은 조용하다는 말이다. 사전은 “(움직임이)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라고 정의한다. 이들의 삶은 결코 “가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경험을 “투쟁화”하며 불의와 억압에 맞서려던 그들의 정신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감싸안고 차분히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낯선 이의 행동 하나가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을 요약된 그들의 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변화는 필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그들이 시작점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로, 인권운동가로, 장애인운동가로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것에 자유를 누릴 권리에 대해 온 힘으로 외치고 외쳤다. 저자가 어떤 기준으로 서른 다섯 명의 부고를 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른 다섯 명 중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많았고 대체로 여성이기에 폭력과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기도 했다.

  하요 마이어라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데 ‘시오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었다. ‘시오니즘’이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져 같은 지점의 생각을 만나서, 유대인의 시오니즘 비판이라 눈여겨봐졌다. 하요 마이어는 분명 강제수용소가 유대인을 비인간화하는 공간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시온주의자들의 행태에 비교하면서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적 야심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시오니스트들이 “아이들에게(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인 축출의) 편집증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홀로 코스트를 이용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언뜻 “사업수완”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델 월리엄스의 동기는 “여성의 주체성 성 의식의 자유와 권리”였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에 따라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러나 두 어린 동생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해 9주 동안 맨발로 1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고향으로 돌아온 원주민 몰리 캘리의 삶도 잊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끌려가고, 탈출하고, 아이들을 빼앗긴.

  돌아보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가증스럽고 극악무도하게 등장한다. 결코 가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어 간 것은, 역사가 정의롭게 흘러가도록 이끈 것은 안타까이 부고를 전한 이들처럼, 끝끝내 ‘가만하게’ 미소를 짓고 손은 건넨 이들이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삶이란 이러한 이들을 만나는 희망에 의지해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들의 부고에 깊이 머리 숙여 묵념한다. 이들의 삶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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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리를 뒀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책읽는고양이, 2016-10-20.


  기차를 타며 읽으려고 선택한 몇 권의 얇은 책이 모조리 일본 작가들의 책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다」의 제목이 좋아 책을 꺼내드니 표지가 익숙했다. 제목과 표지의 연관성이 뭔가 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표지가 익숙할 만큼 알라딘에서 많이 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책과 역시 제목만 들은 ‘뭐라고’ 시리즈의 작가 사노 요코 작가의 에세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 거리를 뒀나. 몇 문장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거리를 두다」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덜컹이는 기차때문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오히려 덜컹이는 기차였기에 그 감상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다」와 사노 요코의 책을 기차여행에 선택한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에세이가 번역되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이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거나 작가의 유명에 달린 것이라고. 물론, 우리나라 출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작가 모두 소설가라 하는데 작품이며 작가며 전혀 알지 못했고 에세이의 문장에 감흥하지 못하는 것을 여전한 ‘일본풍’이라는 취향으로 돌리기에도 함께 선택한 일본 소설은 그 일본풍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의 무엇이 여행길의 내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성’만을 작동하게 했을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었어도 점점 가까이, 그리고 계속 머물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거리를 둔 것이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산문집은 타인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을 접하며 나는 왜 내 삶에서 이러한 것을 간과했나 생각하게 되고 그 시선을 돌아보기도 한다. 때론 너무나 공감하는 문장들을 만나 하염없이 빠지고 때론 전혀 생각지 못한 문장들을 만나 또 풍덩인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익숙한 경험의 나열이었다. 하긴, 어떤 에세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타당한 논리를 얘기하기에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신선하지, 않다가 이 책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소노 아야코는 차분한 가운데 어두운 느낌으로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고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소노 아야코는 나답게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관한한 일본인들이 월등히 잘하고 있는 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나 했지만 일본의 원제는 「인간의 분수」. 원제였다면 이 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답게 사는법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타인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법을 찾으라는 이 조언은 굳이 일본 번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오고 들어온 이야기다. 알지만 늘, 실천에 능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또다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 또 실패하고, 또 노력하다 실패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싶다.

  소노 아야코의 「인간의 분수」 우리나라 번역본 「약간의 거리두기」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법에서 자주 눈에 띄는 건 익숙하게 들어온 방법이나 감정적 서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역시도 반복적으로 들어온 수사이긴 하다. 그래서 번역본의 제목보다 오히려 원제가 가지는 「인간의 분수」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운명과 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나답게 살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법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법은 내게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세상은 좋아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옳지 못하기에 신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이런 모습은 악이라고 규탄했지만 의외로 신은 ‘상관없다’라고 응답해주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신은 언뜻 봐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적대관계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특정’종교가 없기에 이 반복된 메시지에 감흥이 적었음은 분명하다. 힘겨운 삶의 고민들을 종교를 통해 좀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가고, 또 제 경험을 타인에게 제시한다. 그 지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방법이 내게 와닿지 않았을 뿐.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을 더욱 이기적이게 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이어가는 종교와 어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도 이 생각에 한몫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할 때 불행히도 ‘종교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도 같지만,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가 제 힘들을 제대로 못써먹고 있는가, 잘 써먹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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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유령소년을 만드는가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푸른숲, 2017.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치듯이 제목을 지나쳐가다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책을 쓴 이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책제목은 자극적이기도 하면서 보편적이다. 원제목이 Ghost Boy임을 생각하면 제목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얼마나 다른가. 이 책의 서술톤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담담하고 구성 자체도 기교없이 이어진다. 다만,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있을 뿐이다. 실화의 주인공이 겪는 상황이 놀랍고 안타깝기에 그에 대한 연민과 응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눈에 띈 Ghost Boy가 이 책의 내용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단 한줄로 말하긴 너무 어렵지만 많은 시간이 건너뛴 채 세상에 눈 뜬 소년은 어느날 이유도 없이 쓰러져 세상과 단절된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열두살 소년,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퇴행성 신경증으로 사지가 마비된 채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에 의식이 깨어났다. 그리고 마틴의 의식은 열아홉살 무렵 완전히 살아난다.


나는 열여섯 살 무렵에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열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예전처럼 의식을 되찾은 듯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나의 진짜 인생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이글루 안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신이 들어 보니 빙하 속에 묻혀 있었다. 완전히 무덤 속이었다. p31 


  의식이 깨어나 있는 그 오랜 시간 마틴은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모습을 보았고 들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마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를 돌봐준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임없는 미묘한 변화를 알지 못했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두고 반복된 싸움을 벌이는 부모님과 어머니의 자살이 있었다. 어머니가 지쳐 울며 내뱉은 말,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이 말은 마틴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희귀병이나 치매, 중증질환, 장애인 등등의 병을 가진 이를 간병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 절규일 것이다. 가족 안에 치명적인 병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은 가족이 해체되는 극강의 지름길이다. 또한 가족안에서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은, 대체로 어머니는 다른 삶은 포기한 채 헌신적인 노력으로 돌봄을 수행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며 현실적인 절망의 상태에 있다. 이때의 마틴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듣지 않아야 했을 이 말을, 마틴은 깨어난 의식으로 인해 듣고 만다. 그렇다. 듣는 마틴에게도 내뱉은 엄마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잊지 못할 고통이며 절망적인 삶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말로 내버려두기엔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이 세상의 엄마들은 살아내고 있다. 그 절망을 내뱉은 마틴의 엄마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한 가족의 지지가 없다면 결코 마틴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그 절망과 지침을 이어받고 결코 마틴을 놓지 않으려 한 마틴의 아버지의 노력 역시도 잊을 수 없다. 마틴의 아버지는 직장일과 병행하며 마틴을 돌보며 마틴을 가족과 떨어지게 놔두지 않았다. 마틴이 새로운 삶을 사는데 있어 마틴을 놓지 않으려는 부모님의 강한 의지가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아무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나를 꽉 붙들고 있는 아빠의 팔과 나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아빠의 힘이 느껴진 순간, 나는 아빠의 사랑이 바다로부터 나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바다 위로 넘칠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p159 


  또한 마틴의 삶을 변하게 해준 이는 버나라는 요양시설 간병인이었다. 학대하고 방치하며 장애물, 당나귀, 쓰레기라고 취급하던 다른 간병인들과 달리 버나는 마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내 준 사람이다. 그렇게 마틴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며 친구처럼 말을 건네며 돌봐준 버나로 인해 마틴의 의식이 깨어났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이후로 9년의 시간이었다.

  이제 마틴은 컴퓨터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며 제 의사를 조금씩, 더 많이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공포와 같은 삶에서 다른 이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당연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마틴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에 맞는 적극적 의지와 실천 노력이었다. 이 책은 그런 마틴의 힘겨운 싸움과 도전의 인생을 전하는 얘기다.


나는 무엇보다 누구든 나를 좀 바라봐주길 바랐다. 나를 본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분명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엔 공포가 쓰여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령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p217


  과거로 인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마틴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간 동안의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견뎌낸 삶에 나태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되는 또하나의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돌봄인들의 얘기다. 마틴은 돌봄시설을 이용하는데 그곳의 간병인들의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 충격을 받진 않았다. 역시 그렇군이라는 말이 내뱉어지는데, 직업윤리를 떠나서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버나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마틴을 대하는 간병인들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 그토록 처참한 수준이라는데 놀라고 만다. 결국 유령 소년을 만드는데 그들의 지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윤리의식이 유달리 낮은 것인지, 아니면 업무환경이 이들의 의식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인지…. 삶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사실 사무치도록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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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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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워질 수 있다면


  그곳. 지옥보다 더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전하는 것을 의무라 여기며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던 프리모 레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지 4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 악몽들이 잊혀지지 않고 몸에 마음에 새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살았을 시간들이 애틋하고 안쓰럽게 여겨진다.

  이 책은 그가 자살하기 두 해전 출간되었다. 1964년부터 20년 동안 이탈리아 일간지에 기고한 에세이들이다. 제목은 『고통에 반대하며』이지만 그리하여 또다시 그와 뗄 수 없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관한 글일 거라 예상했지만 수많은 관심을 가진 작가의 글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기존의 그에게 가장 많이 각인되었던 아우슈비치의 고통과 같은 음울함이 아니라 따스하고 호기심 깃든 이야기들, 냉철한 비판과 비평들이 나타나 또다시 애잔함을 더한다. 그에게,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마음과 역량이 있는데 그가 써내려가고 써내려가야 했던 글들이란, 그 기억들이란. 이렇게 그의 생애를 알기에 책 처음에 나오는 에세이부터가 눈길을 끈다. <우리집>. 특징없는 집을 곱씹으며 드러나는 집과 고향, 그 지난 때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전해진다.

  그 외 이 에세이들을 보면 화학 전공자이자 화학자로 일한 저자의 경력 때문인지 ‘화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거미, 나비, 귀뚜라미, 벼룩, 딱정벌레, 다람쥐 등등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읽은 책과 작가들에 대한 비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타영역의 점유’, 다시 말해 타인의 직업에의 침입, 남의 사냥터에서 벌인 밀렵, 동물학·천문학·언어학 영토에서의 약탈에 다름 아닐 터인데,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임에도) 지속적인 매력에 이끌려 영원한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는 모든 학문 영역, 즉 몰래 엿보고 싶고 꼬치꼬치 캐묻고픈 충동을 자극하는 영역의 점유라 할 것이다. p6


  굳이 말하건대 화학자라서인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비평할 때면 자신의 싫고 좋음을 확실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이다. 에둘러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이런 류의 글들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한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화학자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묻기에, 물론 호기심에 찬 어조이거나 거만한 태도이거나, ‘두 문화’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수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다는 것”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도 하며.

  그래서였나 보다. 이 책 속에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많았던 것은. 그래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타인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명확한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서, 그 자신도 글쓰기에 대한 많은 조심과 염려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말을 하는 것과 그저 다른 표현 수단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힘을 보여주며 더불어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아는' 누구에게든 어떤 불신감을 갖고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체계를 너무 선호하는 나머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뒤에 행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전쟁과 학살을 촉발하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p61


  조용조용하게 다가오며 일상의 것들에 대한 과학자식 사고가 더해진 글쓰기로 보였던 글들 속에 종종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작가의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가 스며있는 것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 작가에게 글쓰기는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그 고통의 파편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은, 조금 더 권태로워지고 싶은 발버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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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예방의 날에



 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에 대한민국의 자살예방책은 어디쯤에 있을까. 아니, 세계 1위의 자살공화국인 나라로서 하고 있는 것과 해야 할 정책이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자살예방의 날이 제정된 것도 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이 날의 취지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건 없어 보인다. 자살의 이유는 우울증이기에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울증을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기사들만 넘치게 본 것 같다.

  우울증이 문제라면 왜 유독 한국인들이 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되는가. 자살의 이유 역시 불행한 가족의 이유 역시 제각각이겠지만 어느 순간 대한민국의 ‘자살’의 나라라는 것은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나라, 죽기 좋은 나라라는 건 아닌가. 그렇게 되어 버리는 요소가 곳곳에 채이고 있는 자살의 나라.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고 백만번 외친다 한들!


  여기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있다. 하야마 아마리. 그녀의 결심은 스물 아홉, 생일에 이루어졌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 이제 혼자만의 파티를 시작한다. 혼자인 건 괜찮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혼자였으니까. 그래, 괜찮다. p18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이렇게도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처음엔 물이 뜨겁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 것이다. p21


  그녀는 파견사원이고 애인에겐 버림받았고 뚱뚱하고 못생겼고 외톨이다. 그녀는 생일날 떨어진 딸기케이크를 먹으려 하다가 자신의 이 모습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그순간 그녀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용기도 없다. 마침 텔레비전에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녀는 라스베이커스의 풍경에 매료되고 만다. 죽기로 결심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던 걸까.


너덜너덜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나의 현실과 라스베이거스 사이에는 영겁의 간격이 있어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숨 쉬는 것과 똑같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곳에 저런 세상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암울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 날마다 행복한 축제가 펼쳐지는 세계, 그곳은 지상낙원 그 자체였다. p44


  그 순간 그녀는 삶을, 죽음을 유예한다.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에 죽기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고로 멋진 순간을 맛본 뒤에 죽기로. 그래서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죽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무력하던 생일날 그녀에겐 목표가 생겼고 용기를 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었으니,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쓴다.

  일본인인 그녀는 파견사원이었는데 돈을 벌기 위해 그녀는 투잡을 띈다. 유흥가에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파견사원이기에 퇴근시간이 이르다는 점이었다. 파견사원이란 일종의 비정규직과도 같은데, 한국이라면 그게 가능할까.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정해진 퇴근 시간이 엄수되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국의 직장문화는 정말…. 한국의 퇴근 시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눈치의 시간이다.

  외모에 자신도 없던 그녀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선택한 또다른 일이 유흥가의 호스티스라는 점이 놀랍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동력이다. 이 일과 누드모델일도 하며 살도 빼고 점점 자신감을 갖는다고 해야 하나. 또한, 우연과 운들이 따라오는 것도 같았다.


외톨이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무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외톨이인 것이다. p86 


  정말 그런듯이 그녀는 두 일을 하는 과정에서 외톨이라는 기분을 떨치고 새롭게 관계를 맺는 친구들도 생긴다. 그녀의 처절한 노력들이 치열한 그 기간이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한’ 결심이라는 걸 그녀는 잊지 않았고 드디어 서른번째 생일을 앞두고 라스베이거스 비행기에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을 베팅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녀의 20대도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잠에서 깨어 제 손에 쥐어진 5달러 지폐를 보며 뭉클해진다. 그리고 다시 살기로 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왔을 이 5달러짜리 지폐가 갑자기 나를 뭉클하게 했다. 1년이라는 치열한 시간을 환전해서 여기까지 날아와 인생을 건 도박 끝에 5달러를 번 것이다. ‘……그래, 이긴 거야. 달랑 5달러지만 난 이긴 거야!’ p224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고 한다. 일본의 실화수기로 2010년 출간됐다. 하지만 저자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가명인 ‘아마리アマリ’는 ‘나머지・여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을 1년 유예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죽음을 위해 계획했던 일들을 목표로 삼으며 죽을 힘을 다해 살았고, 그리고 그녀는 변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미나코는 방향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눈앞의 목표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삶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바다는 목적이나 목표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범선은 타륜으로써 방향을 잡지만, 돛과 노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미나코와 나는 각각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p146


  아마리의 실화를 읽다 보면 그녀의 인생은 판타스틱하다. 그 1년의 간극이 너무 크기도 하지만 현재의 그녀는 훨씬 더 변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개인의 삶이 갑자기 남달리 느껴지지 않는 건, 그녀가 진정 죽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그녀는 살고 싶은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었고 살고 싶은 이유를 찾은 것이다. 죽고 싶은 이유가 아니라 굳이 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고 싶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살고 싶다, 간절하게 살고 싶다는 다른 말이다.

  그녀의 얘기는 죽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만 뺀다면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에 가기 위한 청춘의 열정에 대한 기록으로도 읽혀진다. 치열하고 힘들었던 그녀의 날들이 잔잔하게 읽혀지는 것은 역시나 ‘실화’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삶에서 ‘결심’만 ‘생각’만 바꾼다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해 응원을 하면서도 약간은 허무해진다.

  지금 이 순간도 살기보다는 죽음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자살이 잠시의 힘겨움에 의한 충동이 아니라면 , 지속적인 상태에 의한 결정이라면 그들에게 그 상태를 지속하게 만드는 수많은 계기들은 도대체 어떤 ‘계기’가 되어야 전환될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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