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지음, 김루시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슬픈 레모네이드


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문학동네, 2010..


  월식이 있었다. 옛 사람들은 재앙의 징조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달이 붉게 보이는 개기월식을 더욱 두려워했다. 달이 지구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인 줄 몰랐다. 갑자기 하늘에서 달이 사라졌다 생각했다. 과학이란 이런 맹목적이고 막연한 두려움을 ‘다소’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과학이 아무리 ‘그것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해도 이미 싹틔운 믿음이나 두려움은 쉽게 바뀌지 않기도 했다. 이제 월식은 일부러 찾아보려는 핫한 아이템이거나 소망을 선사하는 ‘지니’, 불운을 암시하는 징크스 등 개인의 경험과 느낌이 결합한 상징이 되었다. 퓰리처상 수상작『안젤라의 재』속 미국으로 떠나는 작가와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에서처럼 말이다.

 

오늘 이 시각에 월식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골목으로 나가 달이 둥그런 검을 그림자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파 이모부가 말한다. 프랭키, 미국으로 떠나는 네게 아주 좋은 징조로구나.

애기 이모가 말한다. 아니에요. 이건 나쁜 징조라구요. 신문에서 읽었는데 월식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거래요.

종말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종말이야. 이건 프랭키 매코트의 새 출발을 알리는 좋은 징조란 말이야. 이제 몇 년만 있으면 프랭키는 양키처럼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멋진 양복을 입고, 새하얀 이를 가진 예쁜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올 거야. 어디 두고 보라고.

 

  프랭크 매코트의 자전적 회고록 『안젤라의 재』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내내 애잔함을 드리우는 이야기다. 마냥 청량하고 미학적 이미지로 꽉 찬 아일랜드가 오물처럼 지저분하고 검은, 회색빛으로 순식간에 덮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런 얘기 속 이 월식 장면은 참 아리게 다가왔다.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월식이 일어났다는 얘기에 월식을 바라보며 미래 소망의 징조를 갈구하던 이 가족들의 바람이 생각나는 것은.

 『안젤라의 재』를 줄거리로 요약하자면 1930년대~1950년대의 삶이란 전쟁과 대공황으로 인한 기근으로 온세계가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부모세대들이 얘기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 아일랜드인 작가의 엄마 안젤라 시언은 미국에서 아일랜드계인이자 구IRA 말라키 매코트를 만나 결혼과 출산을 하고 다섯 아이를 낳는다. 그동안 가난은 지겹도록 붙어 있었고 말라키는 무능 더하기 술꾼의 면모를 발휘한다. 태어난지 몇 주 되지 않은 딸이 사망하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가족은 아일랜드로 귀향한다. 그곳의 삶 역시 나아질 것은 없다. 나아질 것 없다는 얘기는 가장 말라키의 태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하기보다는 실업수당에 의존하고 그마저도 술로 탕진하는 말라키는 자신이 조국 아일랜드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다친 것만을 기억하고 부르짖는다.

  장남인 작가는 쌍둥이 동생과 또다른 동생의 연이은 죽음을 겪는다. 아이의 흔적을 보며 살아갈 수 없는 안젤라는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가는데 그곳은 마을의 공동변소 옆이다. 매일을 역겨운 냄새와 생활하기에 질병마저 떠나지 않는 그곳에서 프랭크는 동생들과 성장해 간다. 아빠의 실업수당에 의지해 겨우 살아가지만 말라키는 결국 가족들에게 실업수당도 일을 해서 돈을 쥐어주지도 않은 채 사라져버리고 가족은 빈민구호를 받거나 구걸을 통해 생계를 겨우 이어간다. 그리고 프랭크는 열두살, 교육이 아니라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핀다.

  작가는 가난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세세하게 묘사한다. 가난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보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그 시절의 보편적인 그렇고 그런 ‘가난한 시절을 보낸 이야기’와 차별적인 것은 무얼까.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회고록이라는 데서 더욱 애잔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이 있다. 모든 이야기는 작가가 경험한 것이고 등장인물들은 실제 가족의 이름이자 실존인물이다. 이웃들 모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 자체다. 그럼에도 묘하게 다른 느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작가의 지난 얘기에 대한 현재형 서술에서 느껴지는 생생함과 슬픔의 절묘한 절제와 극대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삶을 엿보는 맛에 있다.

  아일랜드인은 8백년 동안의 시달림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이 크고 차라리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랴 생각한다. 깊게 박힌 민족주의 또한 가득하고 생각보다 불끈 불끈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기질이 있어 보인다. 카톨릭 사제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를 잘 살리는 듯 보이지 않고, 가난한 이들 앞에선 벌컥벌컥 문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 힘들고 가난한, 또한 지긋지긋한 삶을 작가는 잘 버티었고 질병으로 인한 몇 번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희망의 땅이 된 미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때 그 삶속에서, 현재의 삶에서의 작가는 마냥 절망적이지 않은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그저 어리다고만 한다면 ‘철없음’이란 꼬리표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어려서라고 하기엔 독특한 아일랜드인의 유머코드가 있다. 작가는 그 시선들을 이 책속에 펼쳐놓아 힘들고 슬프고 애잔한 이 얘기를 거듭 이 유머의 끝으로 끌고 가 미소짓게 한다.

  책을 읽기 전에도 후에도 안젤라의 재가 의미하는 바가 뭘까 생각했다. 기독교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고 고난을 기억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 있다. 안젤라가 미국에서 말라키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니 작가의 어머니 안젤라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평균대를 균형잡듯 걸어가는 네명의 아이들 표지사진과 시작부터 벌써 많은 아이들을 낳은 안젤라를 보며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잃고 미친듯 절규하는 안젤라를 보며 안젤라의 재가 ‘안젤라의 아이들’로 겹쳐졌다. 안젤라의 아이들. 그 시절이니까 더욱 더 그러했겠지만 이 땅에서 엄마의 역할이란 아이를 낳고 낳고 낳고 죽고 죽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의 수요일, 신앙심 깊은 안젤라는 어떤 죄를 고백할까.

  죽음의 문턱에서 레모네이드를 찾는 안젤라와 엄마에게 레모네이드를 먹이는 프랭크의 모습이 참 슬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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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마라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01-12.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의 수용소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이다. 이탈리아인인 그가 어떻게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지, 수용소에서 어떠한 삶을 겪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당연 전쟁의 참상과 전쟁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인간성의 소멸을 그려낸다.

  내용에서 이미 ‘감정’이 어떤 상태로 이르게 될 지 예감할 수 있는데 프리모 레비의 문체는 시종일관 담백하다. 그런 까닭에 프리모 레비는 ‘독일인에 대한 분노’는 어디있느냐는 질문까지 받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힘든 상황을 겪은 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지난 일들을 전하는 프리모 레비의 문체에서 오히려 냉정한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명료해지고 그리하여 전쟁의 참상이, 고통을 겪은 인간의 비애와 고통이 극대화된다.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복음 4장 25절」)’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프리모 레비는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자신들을 건져낸 것이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고 말한다. 평범한 인류의 표본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는 인간을 목격하는 일은 수용소에서 비일비재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광기에 물든 저 2차 세계대전에 인간을 사물화하는 인간들을 목격했다. 지금은 광기도 전쟁의 시대도 아니건만 ‘인간을 사물화’하는 무수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있다. 진정 지금 이 현실이 수용소의 생활이란 말인가.

  인간성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잊지 않는 작은 노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프리모 레비가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욱 연민하게 되고 더더욱 가슴 아린다. 그렇기에 더더욱 극악의 인간성 상실로 제 면면을 유지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찰 수밖에 없다. 지난 그 일들이 결코 ‘지나가지’ 않을 일로, 지속될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프리모 레비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기를 시작했다 말했다. 또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 말했다. 프리모 레비라고 어찌 분노가 없겠는가. 프리모 레비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 그의 기록이니만큼, 이 글이 가진 힘은 단지 피폐한 경험의 표출이 아님을 그 참상의 묘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더운 날이 이어져 이러다 돌아버리겠다 싶다. 폭염에 미쳐갈 지경일 때 더욱 돌아버릴 폭언들과 그에 따른 해명을 듣다 보면 이까짓 폭염쯤은 얼마나 약한 열기인가 생각하게 된다. 여긴 수용소도 아닌데 프리모 레비의 말은 이다지도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을까.

  “아들같이 생각해서”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아들같이 생각해서” 가두고 잠도 못자게 하며, “아들같이 생각해서” 인간이하로 대우한 군장성 부인의 말은 여지없이 이 말을 떠올리게 한다. “딸같이 생각해서” 성추행하고, ”엄마같이 생각해서“ 막말·폄하하고, ”여친이라 생각해서“ 마구 때리고, ”가족같이 생각해서“ 노예처럼 부리는.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인간 군상의 생생한 활동사항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쯤되면 전쟁이, 수용소만 문제가 된 환경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인간의 ‘의지’라는 부분도 작용함을 믿게 된다. 더욱 피폐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환경은 전쟁, 수용소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 끔찍한 인간성 말살 장소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인간성 상실의 최악을 보여주는 무리들도 있다. 그처럼 제 손에 권력이란 것이 주어졌을 때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최적인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이러하다면 이들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적극적이고 수용소를 운영하는데 최적화된 인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쥐면 그 권력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것이 일인 것처럼 행하는 이들이 증가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사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국민을 위해”라고 말하는 국회의원들도 당선배지를 달고 나면 ‘국민’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들 모두는 마치 수용소에 들어앉은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철저하게 인간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종족으로 전락한다. 역시, ‘생각하는 사람’의 전형에서 가장 재빨리 멀리 있는 사람들인가. 이따위 사람들은 제발 생각이란 걸 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저 따위의 생각들은 함부로 입밖으로도 내뱉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권력을 잡으면 눈이 뒤집히는 것이 인간인가. 정말 그런 건가. 그렇다면 권력없는 인간은 늘 이런 권력을 쥔 인간들의 행태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수용소에서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존재하듯 모든 권력을 가진 이가 부당한 행동놀이에 빠져사는 것은 아니다. 결국 권력을 감시하고 제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대다수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에 갑질 사례에 대한 전수조사가 실시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또 한동안 극도로 열을 올릴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결코 갑질 사례가 없을 리가 없으니까.

  이것이 인간인가. 이 말이 거듭 입속에 되뇌지는 것은 ‘그들’로 인해 힘겨운 삶을 겪은 이들의 삶에 대한 얘기임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태도, 그들 자체에 대한 비난의 말일 것읻. 이것이 인간인가. 앞으로도 이 말을 얼마나 생각하고 말하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이 사회가 ‘인간성’을 제거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구나란 생각도 거듭 들게 된다.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엔 이 말로 바꿔지리라 싶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갑질쟁이들’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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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몇주 전 읽은 책인데, 아직도 그 분노와 슬픔이 문득문득 명치를 칠 때가 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모시빛님 글처럼 아직 우리 도처에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을 하게 만드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까닭인가 봅니다.

다시금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어떤 태도와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모시빛 2017-08-09 23:46   좋아요 0 | URL
넵,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담담한 투와는 달리 전 와락 분노를 드러내고 말았네요...
근데 참으면 병나잖아요....인간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지는 늘 생각해도 명쾌해지지도 않고 부족한 것만 같네요. 생각을 안하고 사는 게 속편한 듯 싶지만 계속 생각해야 하는 물음이겠지요.
 

 

    사랑이 안식처일 수 있을까

 

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RHK, 2013.

 

 

   37편의 문학과 연극, 영화에서 뽑은 사랑, 연애, 이별, 인연에 대한 이야기.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 작품으로부터 사랑이야기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 그 속엔 연애와 이별과 인연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정여울의 이 에세이는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서인지 상당히 말랑말랑하다. 문학비평이나 다른 비평에세이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결에서 차이가 있다.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가 보다 감성적이다. 사회학과 비평 용어로의 설명 대신에 문학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접근하는 평범한 생각들을 전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여울은 현대인의 마지막 안식처로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사랑이 안식처일 수만 있을까. 사랑이 지닌 의미 때문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사랑이란 수만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사용된 사람에 의해 각각의 의미를 만들곤 한다. 그 다른 사랑의 모습은 타인에게 갈망을 공감을 느끼게도 거부를 느끼게도 한다. 누군가는 사랑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에도 옳고 그름의 문제는 있다. 흔하게 얘기되는 불륜과 폭력이 동반된 그런 류를 ‘사랑’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덧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상처 입은 사람은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가 어렵다. 아직 옛사랑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더더욱.

 

   이성복 시인의 시 편지의 끝 문장에서 따온 에세이의 제목은 “잘 있지 말아요”다. ‘잘 있지 말아요’란 말은 애타는 감정의 조용한 떨림, 울음 같은 표현이 아닐까. 요즘의 참혹한 뉴스판 연애와 사랑에 관한 기사에서 이 의미를 지닌 말을 따온다면 “죽여 버린다” “가만 안 둔다”가 아닐까. 글로 써놓고 보니 더욱 더 섬뜩하다. ‘잘 있지 말아요’라는 문장이 주는 이별에 대한, 사랑에 대한, 서릿발같은 감정은 오히려 사랑의 충만함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 듯하다. 이쯤되면 사랑의 완성은 이별할 때 말하는 이별어로 성립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세상 안쪽을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상의 사각지대도 있다. 월플라워처럼 벽에 기대 혼자 파티를 견디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간신히 보이는 세상의 비밀도 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모든 풍경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랑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듣고 들어도 막상 경험이라는 위치에 올라서면 미처 몰랐던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각지대에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사랑을 정의하는 나만의 방식이 될 것이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여기 저자가 추려낸 37편의 작품은 그 자체로도 읽어볼 얘기들이다. 거기에서 사랑을 읽어내든 다른 것을 읽어내든 말이다.

 

당신의 마음에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내게 없을지라도, 당신을 만나고 홀로 사랑하게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 이런 마음은 보답 없는 사랑에 몸을 던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존엄이다.

 

  하지만 사랑을 영혼의 존엄이라 얘기하는 저자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곁들여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냥 한방향으로만 흐를 내 ‘사랑의 정의’가 위험한지 아닌지, 그 사랑에는 타인에 대한 존엄이 있는지, 정말로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를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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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마음산책, 2004-04-25 .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폭우 속에 침수된 차량 바퀴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 사진이 인터넷에 실렸다. 주욱 뻗은 한 팔이 물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위태롭게 물길로 미끄러지는 모습 같기도 했다.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새벽녘 날카롭게 그르렁거리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네들은 멀리로 재빨리 지나가기보다 오히려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분명 들고양이들인데 휴지통을 배회하며 주차된 차량 아래로 들어가 숨어 있기만 할 뿐이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재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고양이들의 생존전략도 변한 것인가. 또다시 태풍과 비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저 수많은 고양이들이 차량들이 차량의 주인들이, 마을의 주인들이, 그것을 쳐다보는 모든 이들이 걱정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은 이렇듯 청춘에 관한 문장이었다. 여전히 이 문장에 눈이 머문다. 이 책은 2004년 초판 출간되어 10년 뒤에 같은 제목의 2편이 출간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책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문장들. 아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음에 남게 된 문장들. 어떤 책이든 글이든, 마음에 와닿는 계기나 때가 따로이 있다. 삶의 위로가 되는 문장들이 때마다 다른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경험과 상처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마다에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되어 주는 책이, 글이, 문장이 있다.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8할이 글이 되는 건가.

  시간은 정말 재빨리 지나갔다. 예전에 좋아하던 문장들을 다시 보면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 문장을 좋아하던 시절의 나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은 재빨리 지나간 것 같지만 대부분 하루는 재빨리 지나가기보다 별볼일없이 지나갔다. 별볼일없이 살아왔다는 것만큼 편안하고 다행인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크게 남은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련’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시절 켜켜이 내가 좋아한 책들을, 이야기를, 문장을 읽고 싶어졌다. 또한 미련일지도. 내가 살아온 생애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한, 희망을 주기도 절망케도 한 문장들이 그리워진다는 것. 사춘기, 청소년기라는 시절의 감수성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절의 책들에 문장들에 마음이 쏠리는 것 역시도 ‘지나간 시절’이라는 데서 오는 감정이리라.

  김연수의 청춘의 시절 감성 역시도 남달라 보인다. 작가는 이백과 두보의 시에 특히 애착을 느끼고 있고 다시는 산문을 쓰는 일은 없을 꺼라 말하고 있지만 2004년 이후 출간된 작가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 산문집을 나는 읽었다. 물론 지금도 작가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그의 글은 첫 문단 데뷔작과는 너무도 다른 깊고 섬세한 감성이 있다. 첫작품만 생각하며 김연수를 기억했다가는 동명이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작가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라고 하지만 글쎄 세월과 변화의 관계의 주종을 따지는 일이 뭐 중요한가. 세월은 흘렀고, 어쨌든 변했다는 사실이 현재의 사실인데. 변했다는 사실에 깊은 회한만이 없다면야 변한 것이 또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닌 것이고.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이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표현의 섬세함이나 깊이, 감성. 그리고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청춘에 대해, 지나간 시절에 대해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은 같아 보인다. 이제 3~40대-작가는 35세이 이 산문집을 썼다-에 느끼는 감정은 노년과는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노년에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는 마음씀은 중년에 바라보는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니 노년에서 바라보는 중년의 시절 역시도 청춘이다. 그러니 아직, 내 생에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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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


랄랄라 하우스 -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 김영하, 마음산책, 2012-05-15, 초판출간 2005년.


  

   초판을 읽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그새 책은 재출간되었고 작가는 매주 텔레비전에 나왔다. EBS 세계기행 첫편에 김영하 작가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EBS 세계테마기행을 볼 때마다 세계 곳곳을, 특히 오지를 기행하고 싶은 갈망에 휩쓸렸는데 세계를 기행하는 일은 늘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서 하고 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기행할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기쁨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위안삼는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는 동안 책을 읽는 일만은 버리지 않고 살았구나 하면서. 그러고 보면 내게도 책읽기가 삶에서 ‘랄랄라’를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랄랄라 하우스’는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다. 소설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이하게 쓴. 일상의 이런 정도쯤이야.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깔끔하다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는 담백하면서 깔끔한 느낌이 있다. 그속에선 어떤 신경질이 느껴지지 않아서일 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맞닥뜨릴 그런 순간들을 점잖은 생각으로 전환하는 일상이 부럽다. 생각해보니 방송에서 본 작가의 스타일이 이렇구나 싶다.

  소소하게 일상을 훑어보고 더불어 생각하는 랄랄라 하우스는 2005년 첫출간되었을 때 유행하는 sns의 대표적 프로그램인 싸이월드의 형식을 차용했다. 방문자들의 댓글반응까지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안 된 사이에 지금은 사라졌으니 인터넷 프로그램의 생명력이 얼마나 급속하게 변하는지 새삼 실감한다. 그토록 열렬한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그램의 소멸이 과학기술발달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급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레미제라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적 장발장으로 먼저 이 소설을 읽었을 듯하다. 장발장이 아닌 레미제라블은 엄청난 길이의 소설이었다. 레미제라블을 읽고 나서 빅토르 위고의 이 소설에 대해 박수를 쳤다. 아, 이아호! 소년소녀용 소설이나 청소년용, 만화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이 레미제라블의 제목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랄랄라 하우스에 초기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의 제목을 소개했다. ‘너 참 불쌍타“. 정말로 배꼽 빠지게 웃음이 났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었기 망정이지 소리내어 깔깔거렸다면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웃음에 한번씩 작업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어도 변한다. 언어가 가진 뜻이 변하고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기도 소멸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생각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역시도 필요를 기반으로 한 생각의 전환이 가져오는 것이니까. 너 참 불쌍다! 마구 웃었는데 갑자기 짠해진다. 휘몰아치는 변화의 한복판에서 노회한 사고로 일관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과학기술과 언어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변화, 변화, 변화. 이 말이 고통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내적인 요구에 의한 것인지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환경변화에 적응하려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이 안쓰럽게 느껴지긴 한다. 그냥 너 참 불쌍타 싶다.

  랄랄라 하우스의 부제는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이다. 헬조선 사회에서 묘하고 유쾌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일은 버겁지만 때론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묘하고 유쾌한 생각을 갖는 것이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된다. 청량제같은. 어쩌다가 아니라, 매일을 묘하고 유쾌한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이 책에 있는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고. 작가는 작가라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경험을 쌓고 또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 자신의 환경 내에 그것을 바탕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생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환경’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른다는, 그 경험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사고를 지배하니까. 하지만 사고를 통해 환경을 지배하는 힘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 방법의 차원에서 이 책 역시 나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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