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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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드는 일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2018.


  “세상에, 그렇게 재미없는 일도 있군요.”

   책 속 10대인 딸 친구가 말했듯이 매일 단어를 만드는 일이란 재미없는 일이고 기대를 크게 가져서인지 단어를 만드는 일은, 아니 단어를 만드는 일에 관한 코리 스탬퍼의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일이 매우 재미있고 이 일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무려 20년을 웹스터 사전 편집자로 살아온 코리 스탬퍼가 차근히 보여주는 사전 편집자로서의 일상은 아, 막연하게 상상하는 이미지는 사라져버리고 그냥 직장인의 모습으로 남았다. 직업적인 면보다 단어에 관해 더 알고자 했으니 말이다. 사전 편집자의 일을 기술하고 있으니 그 세계에 관해 잘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그 일은 고체로 분류될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고 새뮤얼 존슨에 의하면 “무해한 노역자”다.

   그렇다. 단어를 찾는 일도 역시 재미있지 않다. 나이듦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강하고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를 찾는 일이 재미없는 건, 그렇게 사용된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은 대체로 차이를 두기 위해, 그리고 차별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생산된 말이 많아지니까 더욱 단어를 찾는 일은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단어는 사전에 올라가지만 어떤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 종이 사전을 쓸 때보다 사전을 검색하는 일은 훨씬 쉽고 빠르게 되었다. 물론 그때보다 사전을 찾을 일도 무진장 많아졌지만 찾지 못하는 단어가 훨씬 더 많아졌다.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들을 감으로 맞추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를 사전편집자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단어는 빠르게 변하고 무수히 생성되지만 사전 속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한달, 심지어는 아홉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한 단어의 의미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문법과 쓰임들에 관해서도 꼼꼼히 기록해야 한다. 어원에 관해서도 기록한다. 어원을 안다는 것은 단어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어’를 만드는 일은 단지 세상에 생성된 말을 사전이라 불리는 곳에 옮겨다 놓는, 모아 놓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해한 노역자들은 칸막이 책상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가장 적확한 단어와 쓰임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사전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단어가 뜻하는 바와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릴과 로맨스를 기대하며 사전을 펼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전편집자들은 단어와 사전과 사랑에 빠지고 인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며 일한다. 심지어 천국의 직업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어떤 면에선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전류가 통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지 직업적으로만 회사원으로서 사전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진행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관한 귀하의 질문은 저희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사전 편찬자들이 할 줄 아는 일은 단어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과 영구성에 관한 질문은 저희가 다루는 범위를 약간 벗어납니다. 더 큰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의 편지에 답에서 사전편집자들에게 단어를 정의할 뿐 단어가 지닌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에 관해서는 멀리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적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수없이 생성되고 있고 그 단어의 의미를 기재하기 위해 의미를 찾고 어원을 찾고 쓰임을 찾고 있지 않나. 사전에 등재되는 단어는 모든 단어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논의 끝에 편집자들에 의해 걸러지고 합의된 단어라는 점, 그 행위에 감정적 속성이 개입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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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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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로 전진하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2018.


   한 나라의 정상이 갈라진 국경을 넘는 방법은 발자국 한번 떼면 되는 일이었고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일은 발자국 한번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서로간 교류가 없이 흘러간다면 그 차이는 더더욱 커지며 의사소통을 위한 통역가와 전문번역가가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육십여년의 단절은 반만년 역사의 언어를 갈라놓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언어가 국경을 넘는 일은 어렵고 더디게 흐른다. 여전히 우리 국경을 넘지 못한 언어가 있고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정영목 번역가가 국경 너머의 글들을 불러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세계,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읽고 생각하고 느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작가들과 작품세계는 책 뒷페이지 역자의 말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와 작품세계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었던 글을 생각나게 한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지만 저자에게 인상깊은 작가와 작품을 선별하여―필립 로스, 주제 사라마구, 헤밍웨이, 존 업다이크, 이창래, 알랭 드 보통, 오스카 와일드,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윌리엄 트레버, 커트 보니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작가들의 생애와 글쓰기 특징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과 그들의 평가, 저자 자신의 평가가 더해져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프게 만든다.

  특히 낯설지 않으면서 낯선 작가 이창래의 이름을 보고선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인이 위안부의 삶을 다룬 글을 썼다는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기억의 주인공이 바로 이창래 작가임을 알았다. 매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는데 번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한국인이었던 작가. 저자는 인종은 한국인이지만 국적은 미국인이며 영어로 글쓰는 이 작가의 글을 번역하면서 느낀 소회를 이렇게 말한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 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입술의 움직임과 말의 부조화로 20%는 생각을 곁으로 흘려보내며 보게 되는 더빙 영화처럼. 이제는 이런 기분을 멀리 던지고 이창래 작가의 책을 편케 읽을 수 있을까. 

  정영목 작가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번역하면서 보통의 까칠한 성격을 매끈한 성격으로 바꾸어 번역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토로한다. 번역을 하게 되면 그들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고 하니, 나 또한 정역목 작가의 글이 자신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정영목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이 분의 결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정갈하고 맑게 느껴진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인상도 그렇다. 갑자기 정역목 작가의 책이 연달아 출간되었을 때 잠시 놀랐다. 어떤 신변의 변화가 있어서 책을 낸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어딘가 아프다거나 더 이상 번역일을 하지 않겠다거나 뭐 그런. 그것이 아닌 것을 알아서 편하게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인생의 한부분에 대한 정리이자 자신의 일에 더 전진하리라는 다짐이리라 생각하며 나도 ‘전진하다’가 자동사라 여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세상을 겪을수록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전진이냐 퇴행이냐 하는 흐름의 결정은 평지가 아니라 비탈에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전진이란 늘 비탈을 올라가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인간적 성취도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함께 안간힘을 써서 밀어올린 것이어서 사실 그 자리에서 간신히 지탱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전진하다’가 자동사라고 믿고 두 손을 내려놓는 순간 그간의 성취는 내리막길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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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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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의 시절을 지나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문학동네, 2018.


  그러고 보니 영미소설의 대다수, 수많은 작가의 책을 정영목 작가의 번역으로 읽었다.   저자는 27년간 200여 권을 번역했다고 하니 놀랍고도 가늠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작가보다도 기억에 남는 번역가 정영목의 번역의 방법과 번역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다. 독자들이 말하는 ‘번역투’ 문장에 대한 생각, 번역의 역할과 번역가로서의 자세, 번역과 글쓰기 등에 관한 저자의 고민과 생각 등은 번역 작가들 덕분에 여러 나라의 저작을 편하게 읽어왔으면서도 쉽게 ‘아, 번역투’라고 하던, 책이 흥미롭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으면 쉬이 ‘번역탓’으로 돌리던 것을 쑥스럽게 한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너 참 불쌍타”라고 번역되었다고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이윤기 작가의 신화관련 책에서 도대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고 영어 원문을 기재하지도 않은 ‘육준강대의’의 정확한 뜻을 찾아 원서찾기 전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가장 머리를 아프게 했던 번역서였고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로베르트 발저,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번역되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작가의 맛, 느낌을 알고 싶어 원문을 애타게 읽어보고자 했던 적도 있고 영미권이 아니라 동구권, 아랍권,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에 끌리는데 번역되어 있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은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나마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하여 나온다면 환호하게 되는데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번역의 세계는 가야할 길이 멀고 고달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적다는 것, 또한 노벨상 후보로서의 위상을 얻는 일이 힘들다는 것,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오역 논란 등이 지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AI가 바둑 세계 제패에 이어 번역과 창작에까지 진출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저자는 기계의 번역에 대해, 특히 소설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AI가 멋진 번역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에 안심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이 사람의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계속 사람의 일이었으면 한다.


기계에게는 인간처럼 읽는다는 것, 즉 해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읽지 않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따라서 기계는 텍스트를 읽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 나름의 우회로를 거쳐 인간번역과 같은 수준, 혹은 더 나은 수준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우회로는 인간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을 중시하는 저자의 생각이 책 한권 한권을 번역하는 동안 번역의 원칙과 방법이 되었다. 이 책은 번역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책이겠다. 번역이란 무엇인지 번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고민들, 나만의 원칙과 방법을 찾아가기까지의 저자의 노하우와 깊은 생각들이 같은 직업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생각할 때는 자기 학대적인 면과 과대망상적인 면이 공존하는 듯하다”는 저자의 말이 확, 와닿는다. 그래서 일이란 언제나 힘들다. 내가 하는 일에서 원칙과 방법을 세워 나가는 일이 비록 자기학대를 부추기는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으로 일을 대한다면 때론 과대망상쯤은 허용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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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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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의 부재에 대처하는 자


귀환, 히샴 마타르, 돌베개, 2018-03-30.


  소설이라 여기고 읽던 책이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현재가 어떤지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찾은 한 명의 기사에선 익숙한 냄새가 흘러 넘쳤다.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올해 리비아 대선 출마”

  

   이 책은 작가인 히샴 마타르가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어디에 있는가. 카이로, 뉴욕,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히샴이 여덟살에 떠나온 나라는 리비아는 지금도 내전으로 정권이 안정되지 않고 난민이 속출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나라를 만드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는 1969년 군사 쿠데타로 리비아를 장악해 독재자로 군림한 무아마르 카다피다. 작가 히샴의 아버지 자발라는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며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했지만 영향력있는 자발라는 1990년 3월 12일 카이로에서 이집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리비아의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된다. 히샴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히샴의 삼촌과 사촌도 많은 이들이 카다피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감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1996년 6월 29일 아부살림에서 1270명의 정치범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아버지의 소식은 끊어졌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기에 히샴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리비아의 역사이자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히샴의 할아버지 하메드 마타르 또한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투쟁했으니 리비아의 국민들은 오래도록 주권을 찾고 독재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를 지속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침내 40년 독재집권자인 카다피는 이들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2011년 카다피는 축출된다. 그렇게 아랍의 봄이 왔고, 수감되어 있던 히샴의 삼촌과 사촌은 석방되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996년의 그 아부살림 교도소의 학살 현장에 아버지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사실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장면처럼 히샴에게 스며들기도 했다. 아부살림 교도소의 처형이 있던 그날 히샴이 6년 동안이나 감상했던 그림 대신에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운명을 느낀 어떤 힘의 작용을 믿게 한다. 무척 슬픈 장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계시리라는 희망을 가지던 가족들은 이제 명확한 언어로 그날의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려 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히샴 또한 반정부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에 힘썼고 그또한 독재에 저항했다. 이 요구에 협상자로 만나게 된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세이프 알 이슬람은 지연작전을 쓰며 방해하더니 그의 포지션을 아주 잘 정하여 실천했다.


세이프의 측근들은 그를 비롯해서 삼촌들과 살레에게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석방 소식을 전했다. (…) 의례적인 인사말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나자, 그들은 석방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지금까지 반대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


  세이프는 시위에서 정부 당국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가족에게 어떤 사과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었고 카다피는 은신처에서 시민군에게 체포되는 중 사망했다. 아랍의 봄이 없었다면 강력한 카다피의 후계자로 군림하였을 세이프는 카다피 집권 당시 대량학살 혐의 등으로 기소돼 2015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고 복역한 지 6년 만인 2017년 출소했다. 그리고는 곧 정계 복귀, 대통령 출마 선언까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익숙한 행보…리비아는 지난날의 고통을 잊었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선보인 그 앞날을 보지 못한 건가.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학살과 사치의 독재자의 아들이 반성도 없이 사과도 없이 당당히 제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독재자의 아들로 권력을 쥐었던 자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이 헛헛하게 들린다. 그의 무개념과 나라를 제 것으로 여기는 몸에 밴 갑질적 사고가 불쾌를 넘어 치가 떨린다.   

  세이프가 독재자의 아들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이프의 행보가 그가 제시하는 리비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비전과 신념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대한민국의 독재자의 딸과 닮아 있다. 단지 그 딸이 독재자의 딸이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딸이 가지는 가치와 신념이 ‘독재자의 가치’를 우러르고 칭송하고 있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간 대한민국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널려 있다. 2대에 걸친 독재정권에 의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가족들은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히샴처럼 찾고 있을 것이다.

  갈 곳없는 반독재 활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히샴 어머니의 말없는 희생을 기억하는 누군가처럼 수많은 이들이 독재에 맞서 투쟁했고 희생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들은 히샴의 아버지처럼 억압의 시절들 속에서도 “어떡하든 살아남아라, 어떡하든 살아남아라”라는 메시지를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히샴이 이미 돌아가셨음을 인지하는 아버지의 행적을 찾는 것, 그가 이 험악한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메시지를 다져가기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히샴은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를 그의 아버지와 자신으로 치환시켜 이런 생각을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 한구석을 늘 차지했던 이 친숙한 시구가 처음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확장되었다. 그 말들은 이제 텔레마코스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디세우스에 대한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여생을 고향 집에서 편안하고 위엄 있게 살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바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래서 마침내 아버지가 편안하게 집을 떠나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한 텔레마코스는 집을 떠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가 집에 없는 한,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모든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걱정 마라. 난 잘 있어. 난 잠시 지나가는 폭풍에 흔들리지도, 약해지지도 않는 산과 같은 사람이야.” 

  “깊은 미로 같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극도의 절망 속에 유폐된 느낌”을 받았던 히샴의 생각의 전환은 아버지의 여정을 찾는 과정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잃기 쉽게 한다는 그의 속내가 오랜 여정의 끝에 길을 찾음을 보게 될 때, 아버지의 부재는 부재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올바른 방향을 나아가는 아버지의 부재는, 결코 부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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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곰돌이 푸 시리즈
곰돌이 푸 원작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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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잔소리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동화, 만화를 다시 보는 일은 옛 기억이 떠올라서, 그때의 감정에 젖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곰돌이 푸에 관한 관심은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책이었지만, 생각했던 것에 미치지 못해서 ‘멈춤’보다는 주루룩 책장이 넘어간 책. 다만, 곰돌이 푸와 친구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위로받았다. 그림책마냥 그림들이 좋았다.

  하필이면 이 책을 읽기 전 『긍정의 배신』을 읽은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긴 해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긍정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부정적인 편이니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곰돌이 푸와 만나 대화를 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이 길어질 것이다. 그래도 한번쯤은 곰돌이 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겠고 또 때로는 딴지를 걸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스토리가 있지 않았다. 그냥 곰돌이 푸의 그림을 배경으로 어쩌면 익히 아는 에피그램을 시화전처럼 담았다. 그렇기에 왜 곰돌이 푸가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고 페이지마다 담긴 문구들은 그냥 보기에 좋은 말 정도로 여겨졌다. 어쨌든 이런 문구들은 마음에 확 와닿아 실천해 나가면 좋은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면 ‘잔소리’와 다를 리 없는 것 아닌가. 나이를 먹어서만은 아니겠지만 좋은 말도 쇠귀에 경읽기와 같음을 오래도록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아, 하며 감탄하게 되는 경구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앞에 한 말들에 대해 다른 문구가 나와 앞의 말을 반박하는 형태가 된다. 매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한 좋은 생각들을 일러주는 방법이라도 상황이 늘 같지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나 여기, 상황은 주어지지 않았으니 인생은 이런 건가 싶어진다. 언제나 갈등이 존재하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문구란 없는 것인지도.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태도를 설정하는 힘이 굳건하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아서인지 마냥 좋게 말하는 이 메시지에서 웃음이 난다. 아니, 어릴 때였다면 좋았으려나. 나이듦은 온갖 좋은 말에도 딴지걸고 싶은 건지, 그렇지 못한 생에 대해 한탄하고 싶은 건지, 곰돌이 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지기까지 하다.

  전체적으로 행복을 위해서 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들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상황에 귀기울이고 받아들이라는 반복된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지. 세상살이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오는 경쟁과 갈등과 어울림이니까.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행복한 일은 매일 있는가라는 물음보다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하루를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싶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기준이 무엇이든 좀더 오바스럽게 ‘행복’거리를 만들고 강박적으로 행복하다 생각하면, 정말로 그 하루는 행복한 것인가 싶은.

  곰돌이 푸는 내게 긍정을 심어주고 더 좋은 하루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그냥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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