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자존감


영초언니, 서명숙, 문학동네, 2017-05-18.


  영초언니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실존 인물 천영초의 생애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저자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이었고 비중이 높았다. 짧은 등장에도 천영초라는 인물이 저자의 생애를 오롯이 관통한 중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영초라는 인물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 감정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소설이라 생각한다면 가장 궁금한 사람이자 주요 인물이 천영초일 것이다. 천영초는 그런 캐릭일 듯했다. 실존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등장인물들의 현재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놓여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멀찍이 보는 사람이 이런데 당사자들은 오죽하랴.

  제주도의 올레길을 만든 사람으로 먼저 알게 된 서명숙 이사장이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는다. 그 과거속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풀어놓는다. 천영초라는 인물이 그때를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떻게 살았는지는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현재의 모습이 맑음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느끼게 되는 비애가 크다. 한줄로 말한다면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란 서명숙이 뭍으로 넘어와 대학생이 되어 박정희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행동한 이야기다. 소설이나 다큐에서 다루 보았던 그 시대 ‘운동권’이라 불리는 대학생의 모습들이 드러난다. 유신정권이라는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제 성질을 휘둘렀던 독재자가 그 시대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었으며 여전히 치워놓지 않은 개판이 곳곳에 박제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서명숙 이사장을 비롯해 영초언니와 그가 함께 한 가라열의 활동은 독재에 맞선 운동에서도 남성의 주변부, 보조자로서 한정된 여성이 아니라 운동가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천영초이다. 서명숙 이사장은 천영초는 ‘운동권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운동권 여성이라 하면 각인되는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를 천영초는 풍긴다. 외모상으로도 상당히 부드럽고 여리여리하며 빈곤한 모습이 아니다. 70년대, 80년대 폭압에 맞서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위해 삶을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 활동한 천영초는 자신들을 따르는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챙기며 운동의 리더로서 거침없다. 당연한듯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쫓기고 잡히고 고문당하고 수감된 이력의 소유자들.

  그시대 운동권으로 민주화를 부르짖고 외쳤던 그들이 이룩한 자유와 민주의 시대는 잠깐 반짝인듯했으나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이 현실이 얼마나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익히 아는 대로 민주화 운동을 하던 그들의 현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시민운동을 하거나 정치인이 되거나, 그 기억들을 안고서 버티지 못하여 스러져가거나. 

  어떤 이들은 그때의 민주화를 외치던 몸과 마음으로 다른 민주화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멋들어짐과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천영초의 삶처럼 생활의 변화를 겪고 있으리라 보인다. 경제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공황을 가득 안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회변화를 위해 그들이 쫓던 이상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살이는 어떠했을까. 전력질주를 한 후 골인지점을 통과한 후 급격한 피로감이 생기듯 그들이 질주해온 운동의 결과가 바라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볼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그들의 역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독재 시절의 운동권이었던 이들의 현실 적응이 전화가 핸드폰으로 바뀌는 변화보다도 더 적응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운동권의 전설로 수많은 후배들을 아우르며 제 신념을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지켜간 사람의 모습이, 사회변화를 외치던 목소리로 독재타도를 외치던 목소리로 다단계 상품의 탁월함을 말하는 목소리로 바뀌는 그 간극이 왜 이리 아득한지. 젊은 날을 지배했던 신념, 그것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하고 투쟁했지만 천영초는 한 인간의 삶으로는 ‘불행’이라고 불릴만큼의 일들과 맞닥뜨린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생활고, 이혼과 이민, 목숨을 잃을 교통사고, 그로 인한 시력상실과 뇌손상. 유독 천영초의 생애는 비애로 일관된 듯하다.

  가장 행복했던 천영초의 시절은 투쟁하던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기억을 잃은 채 마른 몸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천영초의 모습을 생각하면 책의 저자 서명숙이 국정농단 최순실이 재판을 받으러 가며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라 소리친 것에 분노를 느꼈다는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시절 가라열 멤버이자 꾸준히 사회변혁 운동을 해온 혜자 언니 또한 독재자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순간 비참한 심경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잃어 가며 독재에 항거했건만 그 독재정권을 추억하며 향수하는 것에 모욕과 조롱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 심정 역시 너무도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 결과가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를 겪고 있는 지금 더더욱. 나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이 결과를 두고도 여전히 상식도 정의도 없이 행동하는 이들로 인해 속이 파닥파닥해진다. 터져 나오는 뉴스는 모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싶은 것임에도 진저리쳐지는데, 그것은 박정희 시대를 겪고도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현실이 또다시 반복될 듯한 두려움, 기대가 희망적이지 않게 느껴짐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극기를 흔드는 1%가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저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답답해져, 행동을 취하는 일이 더뎌진다.

  한명의 박정희와 한명의 박정희 딸이 만든 수많은 영초언니들의 삶이 지금 재판을 지켜보고 있을 터이다. 그들이 또다시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기를.


나는 그날, 학내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이간질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던 경찰초소를 내 손으로 때려부순 날, 역사와 대중 앞에 스스로 떳떳해졌다. 이후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미 충분히, 평생 넘칠 만큼 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그 어떤 형태의 보상도, 인정도 더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나라 정부와 사법부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나와 같은 이를 ‘죄인’으로 낙인찍은 선고와 판결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만 하며 그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하고 역사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나의 유죄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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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5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5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금, 울었던가


아주, 조금 울었다 - 비로소 혼자가 된 시간, 

권미선, 허밍버드, 2017-07-15.


      아예 울지 않는다면 모를까.

  조금 운다는 건 힘들어져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렇다. 혼자 울 장소를 찾는 일도 어렵다. 울지 않아야 할 일을 찾는 것도 어렵다. 울자고 들면 한없이 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된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바빠서, 일까. 바빠서 울 틈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들었던가, 했던가. 울음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에 살고 있다는 건 시선이 직선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러면 울 일도 없다가 더 적절한 말이 되려나. 울음을 우는 일보다 냉소나 분노하는 일이 더 잦아져간다.

  조금, 울었던가. 그래서 조금만 울 수밖에 없었던가. 안구건조증과 눈물 흘리는 일은 상관없는데도 눈물없음을 안구건조증 탓으로 돌리며 건조한 일상을 받아들인다. 사실은 우는 것은 하고픈 일이 아닌 것인지도.

  15년 꼬박 글을 써왔다는 라디오 작가의 에세이집은 내일로 가는 새벽녘, 덜컹거리는 창문이 전하는 바람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같다. 운문 형태의 책은 그 여백을 감성으로 채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도 내렸고 쌀쌀해지는데 감성을 함빡 머금어도 좋을 듯하다. 저자가 써내려간 다섯 장의 혼자가 된 시간의 이야기는 한번이라도 품었을 이야기라 공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연인과의 이별 후의 감정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별후의 감성이 책 전반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립고, 미안하고, 외롭고, 보고 싶은 날들의 이야기. 더불어 시를 쓰고 싶어지게 한다. 감성이란 온갖 건조함을 뚫을 수 있는 힘일 수 있겠다. 그것이 글이든, 글을 통한 지난날 회상이든 우리는 모두 삶에서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기에.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어.

엇비슷한 경험도 해 본 적이 없는 일들.

그래서 짐작은 하지만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일들.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아플까, 느끼려고 노력할 뿐이지,

본인이 겪어 보기 전까지는 전혀, 똑같이 알 수 없는 일들.


우리는 우리가 겪어 본 만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슬퍼하게 되니까.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오래 같이 우는 사람은

아마도 비슷한 아픔이 있는 사람들일 거야.

- 오래 우는 사람

  

  그래서 오래 울 수 있을까. 비로소 지난 경험을 그 마음을 기억하며 여전히 사그라지지 못한 그 감정들을 다 뽑아내기 위해 새로 뜯은 휴지가 모자랄 정도로 울 수 있을까. 어느 것에도 무엇에도 무뎌져 내가 너무 악해졌나, 너무 신경질적이 되었나 생각지 않을 수 있도록 물기를 내뿜을 수 있을까. 밤이 지나 아침이면 지난밤의 글이 마음을 어지럽게, 쑥스럽게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모래시계는 마모되어 시간을 삐끗한다. 급격히 변해가는 세상에서 한번쯤 삐끗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일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로 인해 오는 힘겨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 더없이 마모되는 것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일의 흔적이라는 것을, 시간의 마찰을 이겨내는 일이 살아감이라는 것을. 마냥 주절주절거리는 기분이 드는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다.


그거 마찰 때문이야.

모래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깎인 거지.

시간이 갈수록 알갱이는 작아지고, 통로는 넓어지고,

그래서 빨리 떨어지는 거야.


난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우리 인생의 시간들도

모래시계 속의 모래 알갱이 같다는 생각을 했지.

점점 빨리 떨어져 내리는 것 같거든.

-모래시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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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울지는 마세요...아주, 조금만 우세요.

모시빛 2017-10-15 23:50   좋아요 1 | URL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지난밤 왜 그랬던가, 진짜 좀 울게 되네요 ㅎㅎㅎ

sprenown 2017-10-16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 울지는 마세요..한 방울만.ㅎㅎ, 힘찬 한주 되시길...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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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돌베개.


  아르곤, 원소 주기율표의 가장 첫 번째에 있는?

  아르곤이 검색어에 오르락내릴 때 내 반응이었다. 화학 선생님의 탁월한 지도로 주기율표를 완벽히 외웠던 시절은 까마득해지고 마치 알파벳 순서에 따라 ‘A’가 첫 번째인 것이 맞는 양 아르곤이 첫 번째인 것이 당연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건 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때문이다. 그 책의 목차 첫 번째에 아르곤이 자리하고 있다. 내 기억은 이렇게 퇴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의미없이 외웠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주기율표는 앞으로도 딱히 인생에서 활용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각인하며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의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인 줄 알고 프리모 레비의『주기율표』는 일찌감치 제껴두었던 책이다. 하지만 아유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얘기하는 프리모 레비의 저작 중에서 『주기율표』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인생을 원소 주기율표의 원소에 대입해 이야기한다. 내겐 낯선 원소의 특징이 그의 삶과 맞물려 이야기되는데 단순히 옛시절을 회상하고 있지만은 않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화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이루어졌겠구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열정적이었던 모습들이 나타나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성찰도 담겨 있다. 원소의 성질에 대해 잘 모르지만 원소의 성질에 대입한 철학적인 사유는 상당히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프리모 레비가 얘기하는 대로 원소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 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활성 기체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아르곤은 비활성기체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고 한다. 전구, 진공관, 금속의 생산과 제조, 반도체 분야 등에서 널리 쓰이는 이유일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선조들(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에 정착한 유대인)이 이런 비활성 기체와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물질적으로 활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주기율표의 많은 원소들 중에서 아르곤을 첫 번째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가 겪은 일은 혼자만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한 족(族, group)이 겪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가 줄곧 전쟁과 아우슈비츠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이유도 잊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르곤으로 시작되는 첫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비활성 기체가 “희유(稀有) 가스”라고 불린다는 점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레비는 또 말한다. “그 양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유지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이산화탄소보다 스무배 또는 서른 배나 더 많은 양이다.”라고.

  인종법이 공포되었고 프리모 레비는 외톨이가 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한세기 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한 조상의 후손으로 이탈리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신과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레비는 회상한다. 그런 레비에게 주기율표가 가지는 의미는 무언가.

  

인간의 고귀함, 수만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그 고귀함은 물질을 정복하는 데 있으며, 내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물질을 정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요 몇 주 동안 힘들게 풀이법을 배워온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주기율표는 압운까지도 들어맞는다. 지도 위의 세계와 실재 세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다리를 찾는 사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아우텐리트 교본 속에, 연기로 가득 찬 실험실 안에, 우리 미래의 직업 속에 있다.


  『주기율표』는 화학자인 레비에게 단순히 원소의 특징을 알려준다는 의미 이상이었다. 레비는 이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서 당시 휩쓸고 있던 그 파시즘의 광폭을 이겨내려 힘쓰고 있던 것이었다. 학문적 순수성으로 이 파시즘의 허위를 잔혹함을 찾아가며 인간에 대한 고귀함을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레비는 증류는 아름답다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당연 떠올리고 연관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증류. 순수한 것을 분리해내는 작업. 만족스러운 순도를 얻는 이 증류는 신성시되어왔고 종교적 행동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물질의 증류는 아름다웠을지언정 히틀러의 인종분리는 아름답지 않았다. 순수한 인종을 분리해내는 히틀러의 사고는 결코 철학적이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무개념이었고 난폭한 광기로 행해졌다. 증류가 가지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레비가 겪은 일이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닌 것처럼 인종주의자 히틀러라는 범죄인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만도 아니다. 레비는 수용소생활에서 만난 독일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에게 편지를 띄운다. 하지만 그 독일인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들을 전 인류의 탓으로 돌렸다. 이에 대해 레비는 단연코 주장한다.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그러니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대답해야만 한다고.

  역사의 청산이란 말이 적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히틀러와 나치로 대변되는 독일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인종학살에 대해 참회하며 전범자 처벌을 국가가 나서서 행하고 있고 피해자들 역시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경험들로 나타난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전인류가 나치의 인종학살에 대해 기억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독일의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같은 경험에서 피해자인 한국은 어떤가.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들을 억압하거나 외면하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다. 가해자의 반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이에게 계속 용서한다고 용서를 받아 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형국이다.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바라보며, 가해자들이 승승장구하는 나라. 생각해보면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과 일본인의 만행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유대인 학살과 생체실험처럼 일본 역시 731부대와 마루타, 위안부 학살의 만행을 자행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전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일본인이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전에 피해자인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지식인’이라는 ‘사회지도층’이라는 한 인간의 막말은 이어졌다. “위안부는 끼가 있어서 따라간 것”이라는 말이 이 한 ‘개인’의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끔찍하다. 제 한몸 잘 살기 위해, 권력을 갖고 돈을 갈취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제게 맞게끔 퍼뜨리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있는 한 한국은 이 상태로 계속 비활성기체로, 아르곤으로 머물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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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막다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 왜 우리는 언제나 같은 곳에서 넘어지는가?  


알프레드 아들러,  카시오페아, 2014.  


  심리학, 정신분석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늘 프로이트와 융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특히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행동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가였고 아들러의 이름은 늘 책 한구석에 차지하고 있었다. 때로, 이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 먹고 있다가 이들 셋이 같은 학회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동시대 사람이었음을 다시 또 새겼다. 그렇게 늘 프로이트와 융의 뒤에 있던 아들러가 몇 년 전 서점가를 휩쓸었다. 갑작스럽게 아들러가 돌풍을 일으킬 때 그 아들러가 프로이트와 융의 이름 뒤에 있던 그 아들러가 맞는가 재확인하면서 아들러 열풍을 지켜봤다.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와 융에 치우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이 해석되고 쏟아져 나왔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에 관한 책이 없었다면 읽을 수도 관심 가질 수도 없었을 테니까. 타이밍이라는 요소도 중요하지만 아들러 심리학 열풍이 일본 작가의 미움받을 용기에서 출발했다는 것과 여타의 상황을 보니, 출판계가 일본시장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일본관련 책은 만화시장이 휩쓰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와 추리소설 작가 몇이 이끄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일본 서적보다 우리나라의 책들이 경쟁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별적인 작가의 영향뿐만 아니라 출판시장에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특히 에세이류는 일본 내 출판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다는 출판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씁쓸해졌다. 우리의 출판시장이 엄청 작다는 것,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것, 권위있는 누군가의 권해주거나 입시에 유용한 책만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 출판시장을 두고도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으니 아들러 책의 인기를 이해할 만도 하다. 

  그림책, 시와 같은 구성과 내용의 이 책을 보면서 나를 가로막는 것이 무언지 생각하고 그것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를 가로막는 건 똑같다. 처음 이 책을 읽은 후로부터의 내가 나를 가로막는 것에 대한 분석과 깨달음을 얻었을지언정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난 여전히 나를 가로막는 것이 무언지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가로막음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필요한 건 역시, 행동인가.


    모든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때 개인은 진정 치유될 수 있다.

    우울하고 신경질적이며 무기력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을 원한다.”는 메시지이다.


     개인의 심리는 집단의 정서를 만들고, 집단의 정서는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

     개인이 겪는 문제의 구조를, 그리고 그 문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짐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의 심리 상태를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좋아했던 것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동일선에서 보는 생각때문이었다. 나의 주장은 언제나 이것을 전제로 했지만 그러면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늘 묻는다. 그러면 또 쉽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들러는 이러한 심리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직접 참여와 연대 의지”를 강조했다. 나는 이 직접 참여와 연대에 대한 의지가 약해져 가고 있다.


사회적 관심이란 사회에 대한 흥미나 호기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행위이며 연대 의지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 그리고 사회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가 나를 항상 가로막았다. 늘 넘어지는 지점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당연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음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타인들이 해주기를 더욱 기대하고 있음이고 그 안에 나 역시 내가 하기엔 부족하다는 열등감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도 사실이다. 여하튼 이 소화되지 못하는 이 불편함과 추욱 쳐지고 마는 감정이 반복되다 보니 세상 모든 심리학의 사례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환절기의 일시적인 감정일까. 새로운 날이 밝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날을 맞기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야 하는가가 치유일텐데 원인을 파악하는 행동력과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력 사이의 이 간극은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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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순례가 아프다


순례자 O Diario de um Mago,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6.


  순례가 시작했다. 흘끗 지나며 보다가 왜 겨울 풍경이 나타나지? 의문이 들었다. 또 흘끗, 종교적 의미의 순례가 아니라 유목민의 이동 이야기인 모양인데 순례라는 제목을 지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한참 파업 중인 KBS의 다큐를 틀어놓고 맞닥뜨린 몇 개의 생각 때문에 난 내 머리를 쥐어박아야 했다. 무엇보다 ‘순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슬람교의 메카로 향하는 순례를 먼저 떠올렸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대표적 순례지인 산티아고는 다음으로 생각했다. 순례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한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특정 종교와 장소만을 떠올렸기에 눈내리는 산풍경을 보고 갸우뚱하며 뒤늦게야 내 생각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마냥 종교적 의미로 순례를 생각하지 않기에 언제고 산티아고 순례는 가리라 하면서도 일단은 제한적인 생각에 머물렀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을까…….

  어쨌든 처음부터 다시 순례를 보았다. 눈내리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유목민의 이동이 아니라 순례 행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도 라다크 지역의 소녀의 순례기는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폭발적으로 이끈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의 느낌과는 달랐다. 파울로 코엘료 소설은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한 신비와 환상과 몽환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소설적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이제 발을 뗀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어간 순례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쓴 원제목이 『동방박사의 일기』인 만큼 좀더 종교적이고 사실 명상 수련의 느낌이 강했다. 또 얼핏 자기계발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는 신과 인간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었다면 쏘남 왕모의 순례에서는 종교적인 느낌이나 영적 탐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종교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 여행과는 전혀 다른 순례 행렬의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인 소녀 쏘남 왕모의 ‘패트 야트라’를 따라갔다.

  ‘패트 야트라’는 인도 불교의 한 종파인 드루크파의 수행 중 하나이다. 발의 여정이라는 뜻으로 강이 얼어붙는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해발 5,200M 잘룽카포 산을 넘어가는 순례 여행이다. 18일의 여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걷는 이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도할 시간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보다 짧은 여정이지만 화면으로 직접 봐서인지 이제 중학생 소녀가 견디기엔 너무 힘들어보였다. 무엇보다 너무 추워보였고 어깨를 멘 짐이 너무 무거워보였다. 그들은, 그러니까 승려들은 그 길을 가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걸을까.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며 진리를 깨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중을 구원하는 대승 불교와 개인의 수양에 중심을 두는 소승불교로 나뉜다 배운 기억이 있는데 종교적인 수행의 여정에서 각 개인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고행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여정을 보면서 당연 궁금해 했다. 어쩜 그 궁금증은 내가 저 길을 걷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을까, 어떤 생각들에 몰입되어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인지도 몰랐다. 왕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저 따라 걷는다고 했다. 목적지가 어딘지 상관없고 길을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여정을 함께 하는 도반은 왕모에게 ‘패트 야트라’에서 필요한 세가가 인내와 인내와 인내라고 말한다.

  이제 출가한지 한달된 왕모를 승려로 바라보지 않고 ‘소녀’로 보는 나 때문에 이 순례의 여정은 연민의 눈길로 쫓아가게 되었다. 종교적 신념에 가득차서, 종교에 매혹된 소녀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지 몰랐다. 다른 선택의 길이 있었다면 왕모가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한 가정의 첫째 딸이기에 왕모는 출가한다. 영어를 좋아하고 많은 나라를 다녀보고픈 소녀의 꿈은 가난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른 선택을 불허한다. 배우고픈 마음에 도시로 나가 다른 집의 가정부 일을 하며 학교를 다니려 하지만 일만 하느라 친구들이 고등학생인데 여전히 중학과정인 왕모. 5km를 걸어 학교를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가,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데 그 소녀는 이제 없다. 동생들을 돌보며 웃던 소녀는 인생의 고행을 헤쳐 나가는 야무진 승려의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 모습은 시종일관 아프게 다가왔다. 슬픈 게 아니라 아팠다. 

  배움도 삶도 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 지역이 아니었다면 다른 종교를 선택했을까.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왕모의 어머니가 하는 말, “나처럼 살지 않기를.” 적어도 어머니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인가.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왕모의 모습이다. 승려의 삶은 어머니의 삶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가족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축복할 수 없는 왕모와 같은 아이들의 선택이 얼마나 많이 이뤄지고 있을지, 그들은 행복한지가 궁금했다. 가난하다는 건 늘 선택보다 포기하는 삶을 가르친다. 꿈을 정말 꿈으로만 만든다. 이룰 수 없는 꿈, 상상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꿈.

  한시간의 화면으로 왕모를 보건대 인내와 인내와 인내로 그 삶을 견디어 갈 것을 안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견뎌야 하기에 고행인 순례길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순례라고 왕모가 말한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넓은 길을 걷든 좁은 길을 걷든 살아있는 날들은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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