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만남 후에는 잔영이 오래 남고 그 잔영은 피로를 몰고 온다. 넋두리를 하는 내게 남편은 그런 말을 했다. 연애의 프로가 생활의 프로는 아니잖아. 내가 만나고 온 그녀에 대한 촌평이었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최선을 다할 수도 있다. 혹은 완전히 길을 틀어 천성과 본성에 더욱 충실해진다. 고만 까불고 앞으로 오빠 말 잘 듣고 살면 돼. 그날 밤 그녀에게 건넸던 충고의 핵심이 그러했지만 이후의 기분이 내내 깔끔하지가 않다. 들이붓다시피한 카페인과 시린 밤바람 탓인지 약간의 체기도 있다.           

  너도 나도 어렸으니까. 하지만 니가 마흔이 되고 오십을 먹어서도 이렇게 산다면 나는 너를 보지 않을 거야. 그녀는 눈썹을 약간 치켜뜨며 뜨끔한 표정을 짓다가 금방 웃음을 되찾곤 그럴 리 없다고 확언했다. 그녀와 나. 둘 다 불안해 보였다.  

  십년 전. 신록이 눈부신 봄이었다.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붙잡고 자전거 뒷좌석에 몸을 실은 채 캠퍼스를 누볐다. 신나게 소리 지르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다. 도서관 마당으로 담배 피우러 나온 예비역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나 무겁지? 그만 내릴까? 연신 물었고 그녀는 괜찮아! 재밌어!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모두가 내게서 등을 돌릴 때도 너만은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하고 좋은 기억도 많아, 수줍게 얼버무렸지만 그때 나는 열심히 페달을 밟던 그녀의 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마음이 아팠고 그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구 끝까지라도 다다를 것처럼 봄바람을 타고 씽씽 달렸다. 그녀의 하얀 등을 보며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를 오래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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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따끈한 쫄쫄이 호떡 하나에도 마냥 행복한 여자인데 어떤 경계에 있을 때는 좀 크게 지르는 편이다. 

  새해다운 전환이 필요했다. 그래서 차를 질렀다. 들어서자마자 화악 시선을 잡아끄는 뉴- 거시기 앞에서 아예 다른 차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너무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소심하게 망설이는 남편을 부추겨 결국 새 차를 구입. 화이트 펄로 반짝이는 이 차를 밟으면 천국에라도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계약을 마쳤다. 이것은 그를 위한 내 선물이다. 올 한해도 그가 씩씩하게, 어깨를 활짝 펴고, 열심히 달렸으면 좋겠다.   

  지난 한해는 내게 찾아든 새로운 생명을 무한 사랑하게 된 한해였다. 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어떠한 관계를 겪으며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지난 시간이 일순간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사무치게 깨달은 한해이기도 했다. 나는 괴로움에 붙들려 있었다. 웃는 낮과 우는 밤이 나날이 교차했다.  

  감정을 감추는 것 뿐만 아니라 감정을 속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잘 안 되고 하기 싫은 것인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 속에서 나 스스로를 지키려면 잘 안 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부할 때는 고통이었지만 무시해 버리기로 하자 가뿐해졌다. 과연 일관되게 지속될 수 있는 성질의 가뿐함일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해도 지금의 결론과 의지를 믿기로 한다.   

  내게 힘이 되는 사람들과 내가 힘을 실어줘야 할 사람들을 좀 더 깊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는 신영복 선생님 말씀을 되새긴다. 그렇지 않다면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는다 한들 늘 제자리 걸음 아니겠는가.         

  영달이는 빠빠이를 배웠고 두손 올리며 만세도 한다. 하루도 어영부영 그냥 살지 않는 너에게 배운다. 오늘도 열렬히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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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5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5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5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6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1-01-0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구.. 호떡과 새차를 비교하시다니요 ^^;
영달이 사진 많이 찍어주세요. 나중에 10년후에 보면 지금이랑 다르게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나실거에요.
가족분 모두 건강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깐따삐야 2011-01-05 16:24   좋아요 0 | URL
둘 다 스트레스 푸는 데는 아주 그만이더라구요.^^
벌써 신생아 무렵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 커가는 모습이 감탄스러워요.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것은 잘 안 보게 되는데 현상해서 앨범을 만들어 놓으니 종종 찾아보게 되고 아기도 더 좋아하고 그렇더라구요. 계속 부지런히 찍고 현상하고 그래야죠.
고맙습니다! 무스탕님 가정도 올 한해 즐겁고 평안하시길 바래요.

레와 2011-01-0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뉴- 거시기가 궁금합니다!!


안전운전요, ^^

깐따삐야 2011-01-05 16:45   좋아요 0 | URL
2011년형 뉴- 거시기가 아주 끝장나게 예쁘더라구요.^^

저는 주차에 미숙해서 계속 앞만 보고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나 운전이 가능할 것 같아요. 저한테는 지금 모는 소형차가 딱이지요. 안전운전 명심하겠습니다! 레와님도 조심운전 하시구요.

감은빛 2011-01-1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도 어영부영 그냥 살지 않는 너에게 배운다. 오늘도 열렬히 놀자!

이 마지막 말, 참 멋져요!
뒷부분은 여러모로 공감이 많이 가는 글입니다.
새 차 뽑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깐따삐야 2011-01-11 10:1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안녕하세요.^^

영달이는 매일매일 눈에 보일 정도로 부지런히 자라나요.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모든 것에서 배웁니다. 사소한 사물들을 흥미롭게 갖고 노는 모습이 부럽기도 해요.
차를 뽑아주니 남편이 요즘 말을 잘 듣네요.ㅋㅋ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안경을 홱 낚아챈 영달이. 베란다 창틀에 주욱 긁어주시니 바꾼지 얼마되지도 않은 안경알에 자잘하게 생겨난 빗금들. 오른쪽 시야에 거미줄이 어른대는 것 같아 곧장 안경알을 교체했다. 안경점에서는 사은품이라며 누가 신을까 싶은 못생긴 양말을 한켤레 주었고 팝콘 기계를 가리키며 팝콘을 좀 싸드릴까요,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덕담을 한 뒤 양말도 팝콘도 필요없는데 아무래도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가격에 떨떠름하게 돌아왔다. 슬슬 버릇이 나빠질 무렵이니 안돼, 라고 단호하게 말할 것은 말해야 한다는데 나는 당최 엄한 얼굴을 할 수 없어서 오늘도 안경을 빼앗기고 말았다. 렌즈나 라식 등을 떠올려 봤지만 익숙함을 벗기란 어려운 일.    

  그리고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택한 영화. '라스트 갓 파더'. 안경알을 바꿨고 어떤 상황 때문에 온종일 우울했기에 더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 웃고 잊는 거야. 희희낙락 입장을 하는데 양복 차림의 중장년층 어르신들이 앞서 들어가고 계신다. 2차를 영화관으로? 좀 의아해하며 좌석을 찾아 들어가보니 내 좌석에 떡하니 앉아 계시는 한 어르신. 어르신은 어르신인데 그냥 어르신이 아니다. 급 당황하여 인사를 드리고 잠시 호흡을 추스르며 둘러보니 송년의 밤을 영구와 함께 보내려는 그 어르신들이 나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그렇다고 서로 안다고 할 수도 없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어르신 한 분이 표를 확인하며 우왕좌왕하시는데 그냥 됐다고, 저희는 알아서 관람할테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상당히 관대한 척 사실은 비굴모드로 마무리. 결국 남편과 나는 영화관의 메뚜기가 되어 몇 차례 좌석을 옮겨야 했다.   

  남편은 어둠 속에서 그분을 어떻게 알아봤냐고 신기해했고 나는 그러게 내가 알아본 게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그분이 누구든 평소처럼 여긴 제 자린데요, 라고 말했어야 하고 또 그게 맞는 건데 설사 그렇게 했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는 않았을까 아녔을까 하며 횡설수설. 남편은 별 우연도 다 있다며 재미있게 영화나 보자고 말했다. 그래서 정말 재미있게 영화를 보려고 했고 나는 '디 워'도 혼자 표 끊어서 재미있게 본 사람인데 '라스트 갓 파더'는 좀 너무했다. '88분'에서 휴대폰을 들고 엉성하게 뛰어다니는 늙은 알 파치노를 보며 대실망을 한 적이 있는데 살 붙고 나이 먹어 특유의 표정을 살리지 못한 채 웃으면 주름만 한 가득인 영구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플 지경. 역시 미스터 빈 아저씨가 짱인가. 웃어도 웃는 게 다가 아닌, 상념에 젖어 위태위태한 헛웃음을 흘리게 되는 참으로 심란스런 관람이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오늘까지 올해 연말은 대체 왜 이러냐는 말에 남편은 미안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영구의 어색한 웃음이 오버랩되어 정말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종은 울렸고 새해가 밝았다. 이 정도면 집 앞의 눈을 다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펑펑 울었고 우는 와중에도 오늘 저녁 동기들과의 약속을 되새기며 눈이 부으면 어떡하나 한편으론 걱정. 새벽녘에 잠들어 아침 일찍 눈을 뜨니 눈꺼풀이 뻣뻣하고 속도 쓰렸지만 육수에 만두와 떡을 넣고 계란 지단까지 올려 든든하게 떡국을 끓여 먹고 나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방을 닦고 현관을 쓸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밤이 전부라며 슬퍼하다가도 어김없이 날이 밝아오면 다시 일상에 열중하는 나 스스로를 응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향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도. 더불어 심형래 감독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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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1-0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장년이면 아직 영화관에서 자리를 혼동할 연배는 아닌 것 같은데...그 분들은 노년이 되기도 전에 왜 그러셨을까요...

깐따삐야 2011-01-05 09:22   좋아요 0 | URL
혼동한 것은 아닐 거에요. 아랫 사람이 좌석 번호에 상관없이 가장 좋은 자리를 안내했을 것이고 그분은 워낙 대우 받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겠죠. 어둠 속에서 꿈쩍도 안 하던 눈빛이 여태껏 생생합니다.

BRINY 2011-01-05 13:58   좋아요 0 | URL
ㅠ.ㅠ 그런 분위기 참 싫네요..

깐따삐야 2011-01-05 16:36   좋아요 0 | URL
BRINY님, 거기다 영화까지 별로였으니 그날 제 기분을 아시겠죠.ㅠ

순오기 2011-01-02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깐따님과 가족들의 건투를 빌어요~~~~~

깐따삐야 2011-01-05 09: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순오기님도 건강하고 보람 있는 한해 되시길요.^^

레와 2011-01-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 감독님을 계속 응원해야 할까요. 아흥..ㅠ_ㅠ


깐따삐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깐따삐야 2011-01-05 09:27   좋아요 0 | URL
저는 공짜 티켓으로 봤는데 돈 내고 봤어도 심형래니까, 하면서 괜찮아 했을 거에요. 영화는 실망스러웠지만 아직 끝을 모르니까 계속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슬랩스틱은 로완 앳킨슨이 역시 최고인 것 같아요.

레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 가득가득 하시길요.^^

다락방 2011-01-0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엄청 보고싶었는데(예고보니 웃길것 같더라구요) 레와님도 깐따삐야님도 실망하셨으니 저도 패스...할래요. 일전에 [디 워]도 내가 꼭 봐줘야지, 이러면서 식구들 다 끌고 가서 봤었는데 용전투씬 말고는 볼게 없어서 참 난감했던 기억이 나요. 휴.

깐따삐야님, 새해 복 많이 받읍시다. 우리 해피 뉴 이어 합시다.

깐따삐야 2011-01-05 16:44   좋아요 0 | URL
그날 조지 클루니, 러셀 크로우, 심형래 중에서 단연 심형래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후회스러웠다기 보다는 많이 아쉬웠어요. 분명 웃기려고 연출한 건데 웃음이 빵빵 터지질 않으니 답답하더라구요. 더욱이 뒷줄에 앉은 터프한 소년 하나가 영화 상영 내내 투덜거리며 욕을 해대는 바람에 참 꿀꿀했어요. 니가 심형래를 알아? 니가 변방의 북소리를 들어봤어? 막 이러고 싶고. 우리의 심형래 감독이 제대로 한번 세상을 놀래켜주길 응원합니다!

다락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우리 즐거운 한해 만들어요.^^
 

  반듯하게 각진 칸막이로 서로를 분리한 낯설고 스산한 교무실 정경. 의례적인 안부를 나누고 자필로 꾹꾹 눌러 복직원을 쓰고 돌아오는 길. 이 시를 떠올렸다.  

Coda 

        Octavio Paz


Perhaps to love is to learn
to walk through this world.
To learn to be silent
like the oak and the linden of the fable.
To learn to see.
Your glance scattered seeds.
It planted a tree.
I talk
because you shake its leaves. 


코다

          옥타비오 파스


사랑한다는 것은 아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우화 속 참나무와 참피나무처럼
묵묵히 있는 법을 배우는 것.
보는 법을 배우는 것.
그대의 눈길은 씨를 뿌렸다.
한 그루 나무를 심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은
그 나무의 잎들을 그대가 흔들기 때문.

  코다. 이 시는 나의 세밑과 아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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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12-2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네모나게 각진 안에 사는 사람들 얼굴은 둥글답니다.
착잡하신 마음이 짧은 글에 잘 들어 있네요. ^^
혹시 압니까? 내년에 옆자리에 앉으실 분이 평생 만나실 좋은 벗인지도... ㅎㅎ
그런 희망을 안고 저도 올해를 마무리하고 싶네요.

깐따삐야 2010-12-30 09:21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러네요. 먼나라 시인이 제 마음을 아주 잘 대변해주더라구요.
혹시 가능하다면 부지런하고 말수가 적은 분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못 그러니 도움 좀 받으려면.ㅎㅎ
글샘님도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옆자리에 좋은 짝궁 만나시길 바랄게요.

L.SHIN 2010-12-29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네요...
근데, '세밑'이 무슨 뜻인가요? 확실히 깐따님은 저보다 먼저 지구에 온 티가 나요( -_-)힛

깐따삐야 2010-12-30 09:24   좋아요 0 | URL
이 시 보자마자 좋아졌어요.

세밑은 한 해가 끝날 무렵을 가리킨답니다. 연령으로 봐선 엘신님이 먼저 오신 것 같은데...? 형님이시잖아요. 홍홍.^^

L.SHIN 2010-12-30 18:19   좋아요 0 | URL
오!

2010-12-30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1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와 재야의 종소리를 함께 듣기로 했다는 E는 설렘으로 충만했다. 치마를 입어야겠지. 카드를 살까. 직접 만들까. 문구는 어떤 게 좋겠어. 영어로 쓰면 좀 그럴까. 아주 모처럼의, 어쩌면 이 친구를 알고 처음 보는 달뜬 모습이었다. 사람을 만나 호감을 느끼고 그것이 연애감정으로 발전하는 일이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비일비재한 일은 아님을 잘 알기에 나는 E를 독려했다. E가 상대를 향해 품고 있는 미혹과 의혹은 슈가파우더를 흩뿌린 듯한 창밖 풍경처럼 달콤하게 눈부셨다.   

  그날 헤어질 무렵 즈음 E가 내게 한 말. 그때 너는 칼날 같았는데 지금은 상당히 유해졌어. 그리고 내 손을 잡아주며 덧붙였다. 모든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제발 너무 깊게 생각하지도 말고. 너는 내가 얼마나 단순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인줄 모른다며 웃었지만 마음 속으로 E의 말을 곰곰히 새겼다. 고마워. 그래야겠지. 

  그리고 오늘 복직 신청을 하러 간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과일을 사고 오랜만에 순차적인 화장을 했다. 영달이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데도 영달이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오버하지 말란 식으로 말씀하셨고 나는 아주 잠깐 영달이를 업고 수업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쿡, 웃음이 나왔고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하는 엄마들의 유일한 자기위안은 아이와 함께 하는 데에 있어 양보단 질을 우선시하는 것이라던가. 나는 그저 영달이의 성장에 누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눈과 귀를 열어놓자.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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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미 다짐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는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닐까요?
복직하시는군요!

깐따삐야 2010-12-29 13: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의 정리벽은 아무래도 보이는 것에만 한정된 것인가 봐요. 머릿속은 분리수거 하지 않은 쓰레기통 같아요. 간명한 해답 언저리를 돌며 답이 없다, 답이 없다, 중얼거리곤 해요. 스스로 삽질이나 뻘짓이라고 의식하면서도 그만두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힘들구요.

2월부터 복직이랍니다. 영달이가 이만큼 많이 자란 모습을 보고 나가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다락방님 조카 아가도 무럭무럭 크고 있죠? ^^

blanca 2010-12-29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복직하지 못하고 그렇게 다니기 싫다고 외쳤던 회사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에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깐따삐야님이 부러워지는걸요. 돌아갈 곳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아이 업고 수업하는 광경이 갑자기 그려져요 저 대학교 때 교수님이 일곱 살 딸아이 데려와 첫째줄에 앉히고 수업했던 기억도 나고 ㅋㅋㅋ

깐따삐야 2010-12-30 09:12   좋아요 0 | URL
그만둬야 하고 그만 만나고 싶은 사람과 이별하면서 저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blanca님 말씀처럼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인데 제가 마음이 당차지 못해서 괜히 짠하고 미안하고 그러네요. 아무 소용도 없는 감정인 것을 말이죠.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부장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선생님이 일 보시는 동안 아이와 인터넷으로 옷 입히기 게임을 하며 놀아줬던 생각나요. 그 아이가 훌쩍 자라 초등학생이 되어 인사를 하는데 살짝 감격스럽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