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내 인생
주세페 쿨리키아 지음, 이현경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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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낯선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책을 한 권 샀다.

나의 어설펐던 지난날을 반추해 보고 싶은 마음에 뭐 마땅한 성장소설 없을까 어슬렁 거리던 중에 발견한 책이었다.

요즘 정말로 어설픈 것들에 시선이 간다.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근래의 드라마들에서 차용하는 상품 가치로서의 어설픔, 그야말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어설픔이 아니라 진정한 어설픔 말이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고 근사한 성공도 꿈꾸지만 어디서부터 핀트가 어긋나 버렸는지 그런 이상향과는 자꾸만 멀어지게 되는 삶, 그러한 삶에 기초한 어설픔 말이다.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데미안의 싱클레어, 이 소설의 발테르 같은 인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설픔이 그것이다.

감수성 예민하고 삼라만상에 관한 호기심이 발달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자신의 성장 단계에서 필수적으로 거치게 되는 어설픈 시기가 있다.

아이처럼 순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른으로 대접받기엔 사회적 능력들이 부족한, 여러 모로 어정쩡한 시기에 이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사람들, 이렇게 두 부류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한없이 고독하고 무한정 방황한다.

이 소설의 발테르 역시 그러한 시기를 겪게 되는데 더군다나 그는 돈도 없고 그렇다고 든든한 뒷백을 가진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대학이라도 보내주는 집안 분위기도 아닌 악조건 속에서 대학의 청강생으로, 공익근무요원으로, 섹스광인 여학생의 남자친구로, 무료하고 의미 없는 나날을 계속한다.

그 자신 책 속에서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욕은 있지만 없는 마음을 짐짓 있는 것처럼 가장할만큼은 아니고 즐겁고자 하는 의욕도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에 탐닉하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만큼은 아니다.

이십대 중반의 경계에 있지만 나도 만약 여차저차하여 직업을 갖지 않았거나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면 사회의 부담스런 시선 속에서 한껏 냉소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지도 모른다.

냉소란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것'이라고 사전에는 지극히 냉소적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 치기 어린 시절의 냉소란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다수가 따라가는 대세에 따르지 못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어 자세가 아닐까 싶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서 한껏 비웃어 주되 그 모습이 실상은 무척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것이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긴장들에 대하여,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에 편입하기 위한 안간힘들에 대하여, 나는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삶이란 원래 형이상학적인 것 못지 않게 형이하학적인 것들로 움직이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 아니던가.

어제 뉴스에 이십대 취업률이 전체 취업률의 17 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보도를 들으며 나와 비슷한 또래들이 겪어야 하는 고민 속에서 나는 일찌감치 해방될 수 있었다는 행운에 안도했다.

사회에 나와서 간혹 정말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 밖에는 없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정말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 같다.

발테르처럼 방황하던 그 때를 떠올리면 초가을의 어느 날, 대학 근처 초등학교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내 모습이 잔영처럼 남아 있다.

복학을 해서 마치 여자 예비역같은 기분으로 생활해오던 그 때, 연애도 공부도 꿈도 죄다 내 기대치와 어긋나 버리고 고작해야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위안 받고 있었던 그 때, 운동장에서 뛰노는 꼬마들을 보면서 예쁘다는 느낌보다는 어른이 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할거라는 점에서 무척 딱하다는 느낌부터 앞섰던 그 때, 나는 세상을 아직 반에 반도 몰랐던 풋내기였다.

모르기 때문에 마음껏 냉소하고 마음껏 웃어제끼고 마음껏 시름에 잠기고 마음껏 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그 당시의 어설펐던 나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어설프고 어지럽고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바보지만 세상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 사람이나 현상에 대해 비판을 가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고 종이처럼 꼬깃꼬깃 구겨서 던져 버리고 싶은 것들과 마주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성격 드러내봤자 이익이 될리 없다는 계산,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알아줄 것도 아니란 체념에 대충 넘기고 집에 와서는 공연히 튀지 않길 잘했다는 자족감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최고조의 냉소, 진정한 냉소의 지점에 이른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느낌이 든다.

뫼르소처럼 완벽한 이방인이 된 기분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발퇴르의 냉소에서 뫼르소의 냉소로 化 해가는 것이 성장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겉으론 빗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발퇴르의 시간이 사실은 내 생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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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림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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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절실하여 글이 되어 나올 수 밖에 없는 간곡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신선한 재미나 깨달음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한 두 작품 정도는 모르겠으나 나머지 작품은 책을 내기 위해 묶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요즘 이 책과 함께 읽은 것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었다.

그 책은 나를 홀렸다.

문장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며 한 번 더 읽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읽고 나서 보니 플로베르는 이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꼬박 5년이란 세월을 보냈단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적어도 2년 6개월 정도는 걸려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으로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책을 몇 년에 걸쳐 몇 권을 묶어내든 그것은 작가의 수완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앞으로 책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만 <홀림>을 읽으면서 적잖이 실망했다.

다시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이 요즘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보고 너무나 쉽게 글을 쓰려고 덤비는 건 아닐까 우려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홀림>에 홀리는 대신 앞에 여섯 장, 뒤에 두 장, 그리고 사이 사이 작품을 분류한답시고 끼워넣은 종이까지 참 아깝다는 생각만 내내 들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감히 말하자면, 책을 만들지만 말고 책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좋겠다.

 혼신을 다해 써낸 작품에 홀딱 홀려보고 싶은 바람이 나에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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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김점선 - 개정판
김점선 지음 / 깊은샘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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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자유롭다 - 김점선 作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보다 어릴적의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참 많이도 헤맸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목록을 밤새도록 써보기도 하고 사주나 관상 같은 운명철학에도 기웃거리는 등 나를 규정하기 위해 참 오래도 방황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혼자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몰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으면서 나를 규정하는 일이 그만치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오히려 나를 규정하는 것은 그만큼 나를 어떤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보다 많은 자유였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보다 나라는 인간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탐색보다는 나를 살아내는 것. 그 살아내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나다움.

마음이 원하는 소리를 따라서 솔직하게 투명하게 살다보면 나는 아무도 닮지 않은, 단 하나뿐인 특별하고도 멋진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을까?

마냥 자유롭고 행복한 경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신발도 벗은 채로 하늘을 걷는 느낌.

<나, 김점선>에서 그러한 '자유'를 보았다.

그리고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기억, 사랑받았던 기억은 우리의 남은 생에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야 만다는 '애정의 효능'을 실감했다.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면역제가 되어준다.

화가 김점선이 인생 앞에서 그만치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녀의 책 속에서 발견되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현명하고 따듯한 사랑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 떳떳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

그것은 필요한 것 모두를 코앞에 갖다 주면서 울타리 안에 가두는 교육이 아니라 너른 세상을 보여주고 잘하는 점을 찾아내 부지런히 칭찬해 주는 교육을 통해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 교육에 대한 tip까지 나른하고 각박한 삶 속에 휘둘려 지내던 사람들이라면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혹시 'TV 책을 말하다'를 보면서 화가 김점선의 언행에 호기심 내지 호감을 느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권해드리는 바이다. 

 난 참으로 오랜만에 겉과 속이 똑같은 착한 사람을 발견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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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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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을 읽으면서 삐삐 밴드의 '유쾌한 씨의 껌 씹는 방법' 이란 노래가 떠올랐다.

유쾌한 씨는 삐뚜름히 머리를 까딱거리다가 장난스레 송곳니로 껌을 가르기도 한다.

유쾌한 씨는 큰 눈을 천천히 깜빡대면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덮을만한 풍선을 불기도 한다.

세상을 보는 방법도 여러가지라서 앞으로도 보고 옆으로도 보고 나누어서도 본다.

기쁨도 알고 슬픔도 알고 환희도 알고 고통도 알지만 유쾌한 씨는 좀처럼 직접 내색하질 않는다.

기쁠 땐 보조개가 패이도록 어금니로 씹고 슬플 땐 껌 향기가 콧구멍까지 전해지도록 크게 풍선을 분다.

유쾌한 씨의 껌 씹는 모습은 항상 유쾌하다. 

이건 좋지 않다라는 느낌이 들면 껌으로 씹어버리고 풍선을 불어 터뜨려 버린다.

이건 좋다라는 느낌이 들면 단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즐겅즐겅 즐기며 씹는다.

유쾌한 씨의 껌 씹는 모습은 항상 감동적이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 김애란이 유쾌한 씨의 껌 씹는 방법처럼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쾌하고 감동적이고, 그리고 신선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그녀가 긴 호흡을 가지고 꾸준히 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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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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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구독료도 안 내고 조선일보를 보던 때가 있었다.

그냥 집 앞에 놓아주고 갔다. 구독료 달란 소리는 한 번도 안하고.

고난이도의 상술인가?

어찌 되었든 글 읽는데 주인이 따로 있으랴 싶어 챙겨보곤 했는데 늘 빼놓지 않고 읽던 글이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칼럼이었다.

당시에 한창 영문학을 넘성거렸던 나는 영미문학 쪽으로는 건질만한 작가도, 눈여겨 볼 작품도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던 참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오만한 결론을 다 거두어 들인 것은 아니지만 장영희 교수님의 칼럼을 읽으면서 작품을 보는 나의 안목을 의심하면서 다시 읽어보리라, 마음 먹곤 했다.

글 속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일상 안에서 무심코 꺼질 수도 있는 반짝임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다정히 그러나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문학이 주는 메시지와 삶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에 대하여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문학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문학이 되는 어렵지 않은 경쾌한 체험, 비극 안에서도 희극을 보고 희극 안에서도 비극을 보는 유연하고 조화로운 시선, 그 밖에도 이 책의 장점은 많다.

우리를 불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큰 아픔을 사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 상대가 누구였든 사람 하나 하나를 사소하게 바라보아선 안되는 생명에의 사랑.  

영미문학과의 다정한 산책로인 이 책을 따라서 잊고 지냈던 '좋은 생각'들을 떠올리며 시원하게 호흡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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