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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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까지 읽고 계속 진행중. 근데 이거 혹시 두껍게 당의 입힌 포르노 아닐까 의심 생기기 시작함. 마저 다 읽고 백자평, 별점 수정할 것. 다 읽었음. 포르노 맞음. 수정할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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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5-09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의 입힌 포르노라니 정말 표현이 절묘하십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9 20:14   좋아요 1 | URL
아휴, 공감해주시는 건 고맙고 반가운데요, 워낙 좋은 평을 많이 받은 작품이라 무지 조심스럽습니다. 여전히 잘 포장한 포르노그래피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는군요.
 
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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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풍월에 의하면 휴대폰 앱 가운데 “북적북적”이라고 책 읽은 내역, 읽고 싶은 책 같은 걸 관리하는 게 있어서 나도 깔았다. 이 앱에 의하면 연초부터 오늘, 4월 두번째 목요일까지 내 키가 111.83cm 자랐고 지금은 다른 책의 388쪽까지 읽었다. 두 개를 합해 22,754 페이지, 63권이다. 앱의 재미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책을 읽으면 별점을 주게 만들었다. 다섯 개 만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데,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어제 오후 한 시 정도에 읽기를 마쳤으며, 앱에 등록을 할 때는 틀립없이 별 다섯으로 나름대로 채점을 했건만, 26시간이 지난 지금 독후감을 쓰려니까, 도무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다행히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 둔 것이 있어 그걸 훑어본 다음에, 맞아, 이런 이야기였어, 어제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었다. 그래, 그래. 거창하게 말해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다.

  작가 셸리 리드를 검색해봐도 별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콜로라도에 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미국인이며, 웨스턴 콜로라도 대학에서 글쓰기, 문학, 환경 및 지속 가능성을 30여 년 가까이 강의했다고 했으니 50대 이상일 듯하다. 이 작품이 2023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라고 한다. 흠. 데뷔작이라. 미국의 대학에서는 작품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박사님한테 글쓰기 교수도 시킨다, 이거지? 좋아, 좋아. 시비하는 거 아니다. 경력 여부를 떠나 괜찮으면 흔쾌하게 교수로 임용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 그러는 거다. 리드는 매우 미국적인 소재로, 매우 미국적인 스토리로 <흐르는 강물처럼>을 썼다. 그래서 독자는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나 스토리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읽자마자 이 책은 별 다섯 만점이야, 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스토리를 통째로 잊어버린 건?


  주인공의 이름은 빅토리아(이하 “V”) 내시. 이제 나이 들어 오랜만에 고향 근처에 돌아온 V는 콜로라도 강의 지류인 거니스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블루 메사 저수지에 잠긴 아이올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깊은 회한에 잠긴다. 콜로라도 주의 건조한 남서부 지역에 물을 흘려 보내기 위하여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댐을 건설하는 바람에 생긴 수몰지역. V가 향수병 같은 것 때문에 회한에 잠긴 것은 아니다. 아이올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집과 농장과 과수원을 팔고 훌훌 떠나온 사람이 V였으니. 이 장면은 드물지 않게 보는 평범한 오프닝. 평범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차별적인 묘사가 있어야 할 터. 셸리 리드의 문장이 좀 매력적이긴 한데 크게 어필할 정도는 아니다.

  본문의 첫 장면은 1948년. 집에서 ‘토리’라고 불린 V는 방년 17세.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진심을 다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한 살 아래 폭력적이고 매사 말썽꾼이며 어린 나이에 알코올과 럭키 스트라이크를 애용하는 철부지 남동생 세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 징집당해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은 오그 이모부와 함께 산다. 그렇다. 내시 씨는 홀아비다. 전쟁이 끝나고 쾌활한 호남이었던 이모부가 우울한 상이 제대자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엄마와 비브 이모와 큰이모의 아들이었던 친절하고 올바른 청년 캘러머스 오빠가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커브를 돌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세 명 다 엉망이 된 채 생을 접었다. 이 사건은 아버지한테 크게 충격을 주어 이후 급격하게 말수도 줄어들고 농장 일도 신경을 쓰지 않는 우울한 중년 농부가 되었지만 딱 하나, 대를 이어 명성을 떨친 내시 복숭아 생산에는 여전히 전력을 다했다. 집안의 세 남자는 아무리 시대가 1948년이라도 그렇지, 겨우 열 두 살이었던 V한테 슬그머니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길 기대했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요구 자체가 무리였으니까. 그러나 V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름대로 충실히 가사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서 열일곱 살이 된 것.

  V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하는 거였다는 점을. 한 가정의 상실과 그로 인한 결여, 또는 결핍이 V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향하게 만든다. 열일곱 살의 V. 당연히 사랑 문제.


  윌슨 문. 그가 마을에 나타났다. 돌로레스 탄광에서 일하다 그냥 그곳이 지겨워져서 탈출해 석탄을 싣고 출발하는 화물차에 뛰어올라 아이올라까지 흘러든 청년 또는 소년. 1948년에 십대 청소년이 탄광에서 일한다고? 그렇다. 그래서 아이올라에 첫발을 디딘 윌슨은 까마귀 날개만큼 새까맣게 빛나는 눈에 담긴 다정함이 있었고, 눈빛만큼 새까만 석탄 자국을 얼굴과 옷과, 옷으로 가리지 않은 모든 부위를 덮은 꼴이었다. 조금 지나면 독자도 알게 되는 것처럼 윌슨은 백인이 아니다. 어느 부족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아메리칸 인디언, 즉 북미 선주민의 후예였으며 탄광에서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학대에 시달리다 도망한 거였다.

  이날 오후, V는 다부진 몸에 유난한 성질을 가진 개 복서종을 닮은 동생 세스를 저녁 식사 전에 집으로 끌고 오기 위하여 포커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되게 작은 마을이라도 메인 스트리트가 있고, 이 거리 한 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윌슨 앞에 V가 섰고, 윌슨은 V에게 자기가 머무르며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며, V는 행상이나 계절 노동자들 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묶는 던랩 여인숙을 추천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차리는데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유럽식 무릎절curtsy을 해버렸고, 윌슨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역시 한쪽 팔을 벌리며 답례했다. 사랑, 남자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현재의 순간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윌슨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잔뜩 술에 취한 세스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던 V. 가던 길에 비틀거리는 세스를 부축하다가 둘은 함께 넘어졌고, 세스의 몸에 깔린 V의 발목이 심하게 삐고 말았다. 처음엔 절뚝이며 걸어보려 했으나 결국 주저앉은 V.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세스한테 의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나무 그늘에서 다시 등장한 이가 윌슨이었다. 윌슨은 말없이 V를 두 손으로 안아 집에 데려다 주었다. 복서 종 같은 성질의 세스가 한낱 인디언 나부랭이가 누나를 품에 안고 가는 것에 열을 받아 있었다가,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보더니 윌슨의 등짝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윌슨이 당연히 반격을 해 세스의 코피가 터졌을 때, 아버지 내시 씨가 호통을 쳐 다툼은 짧게 끝나고 윌슨은 가버렸다. 이때만 해도 V는 길들일 수 없는 복수의 들불이 어떤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복수의 들불. 세스 마음 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불길.

  V가 추천한 던랩 여인숙의 주인 던랩 부인은 뽀얀 피부에 큰 키, 그리고 퉁퉁한 몸매처럼 친절하고 후덕한 여인이었다. 백인에게만. 부인은 윌슨을 인디언을 거의 욕설 수준으로 낮춰 부르는 ‘인전’이라고 일컬으며 인전 따위를 자기 여인숙에 머물게 하면 숙박객이 화를 내고 전염병도 옮을 것이라면서 그를 내쫓아 버렸다. 이 와중에 누군가 윌슨이 도둑질도 했을 거란 소문을 냈고, 이를 들은 마을의 유지 마틴델 씨는 보안관도 아니면서 윌슨을 현상수배 한다고 커뮤니티에 전단을 살포했으며, 이를 본 세스는 “저 20달러, 내가 따고 만다. 두고봐라.” 전의를 다졌다. 우리는 안다. 미국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결국 윌슨은 세스의 손아귀에 잡힐 운명이란 것을. 그러나 윌슨은 마을에서 도망쳐 콜로라도 산맥 한 봉우리에 있는 대피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몇 주 후, 내시 씨가 아들 세스를 데리고 농장일을 보러 길을 떠나 하루 묵고 올 일이 생겼다. 옆집에 이웃과 격리하여 홀로 외롭게 사는 할머니 루비앨리스 에이커스 여사를 통해 연락을 하고 있던 윌슨을 만나기 위해 V는 얼른 이모부한테 점심을 차려주고, 저녁 거리를 챙겨 알아서 먹으라 일러준 후 곧바로 윌슨을 따라 산꼭대기 대피소에 도착해, 둘 다 처음으로 다른 성과 밤을 새운다. 당연히 처음엔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으나 곧바로 익숙해졌고, 이날의 결과로 V는 임신을 하고 만다.

  아침이 되자 서둘러 집에 돌아오고, 나날이 갔으며, 가을이 되어 일손이 바빠져 내시 씨는 던랩 여인숙에 묵던 계절 노동자 포레스트 데이비스를 고용했다. 이게 V한테는 결정적으로 실패작. 가을 수확이 다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만나자마자 포레스트는 세스와 찰떡이 되어버렸다. 세스한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은 윌슨을 산 채로 잡는데 성공하고, 두 명 다, 아니면 적어도 한 명은 윌슨의 손과 발을 묶어 밧줄로 차의 뒷범퍼에 연결한 채 그대로 질주해 결국 산채로 피부가 거의 벗겨진 상태에서 윌슨은 숨을 거두고 만다. 넋이 나간 V. 계절이 또 바뀌고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자 V는 지겹고 지겨운 세 남자의 소굴인 집을 떠나 윌슨의 오두막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출산.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의 V가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V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삶은 그래도 이어가고, 미국 소설이니 결국은 해피엔드까지는 몰라도 그리 사나운 삶으로 생을 마치지는 않을 것이니 독자여, 결코 마음 조리며 읽지 않아도 되리라. V 앞에 어디선가 갑자기 큰 돈이 뚝 떨어지지 않겠는가.


셸리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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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08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북적북적이란 앱이 있군요. 저도 요즘 만보기 사용하고 있는데 안 쓸 때랑 걷는 게 다르긴 하더군요. 저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책은 무슨 식물학 책 같은데 예쁘긴 해요. 전 미국문학은 호불호가 있어서 당장 읽게될 것 같진않고 영화나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ㅋ

Falstaff 2024-05-08 13:34   좋아요 1 | URL
북적북적이 처음엔 그랬는데 좀 있으니 시들시들해지더군요. 다 그렇지요 뭐.
책도 재미는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같아서 아쉽지만요. ^^

페넬로페 2024-05-08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아는 브레드 피트의 <흐르는 강물처럼>과는 다른거네요.
V앞에 큰 돈이 뚝 떨어져 너무나 다행인데요~~
저 앞에도 그런 행운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8 13:39   좋아요 1 | URL
브래드 피트의 강물은 명작입지요!
돈벼락 쉽고 합법적으로 맞는 거 역시 상속이잖습니까.
근데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는 적절한 나이에 죽어서 자식들을 필요할 때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하긴 그것도 뭐 받을 거 있는 집이나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에휴...
 
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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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 소설의 본질은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등장하면 독자들이 헛갈린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초현실적 문장인지, 상징인지, 특정 장면의 메타포인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없이 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같은 작품 속에서 빠져나오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익숙해지면 어렵기는 하지만 읽을 수는 있다. 찬쉐의 다른 작품, 그래봐야 <마지막 연인들>, <황니가黃泥街>,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포함해 네 편밖에 읽지 않았지만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거 참 신기하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격정세계>도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장면/문장을 속속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문학적 재질이 뛰어난 대형쇼핑몰 매대의 계산원인 주인공 샤오쌍(小桑)은 문학적 스승이랄 수 있는 이(儀)아저씨와 한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짜리 구식 건물로 샤오쌍은 4층, 이아저씨는 3층에 산다고 숱하게 나온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같은 아파트에서 샤오쌍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에 있는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멍청(㑁城) 시내를 구경하는 장면이 있다. 이럴 때 당황하지 말기. 원래 초현실이 그렇다. 건물이 지그재그로 휘기도 하고, 가옥의 지붕이 머리에 부딪힐 정도로 낮기도 하고, 심지어 천장과 바닥이 결국 붙어버리기도 한다. 아마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아닐 수 있다. 기억력이 전 같지 않아서.

  작품에는 두 도시 멍청과 진청(京城). 진청은 서울(京)에 있는 성(城)이니 베이징으로 생각하면 되고, 멍청은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가야 도착하는 도시이다. 그런데 멍청은 인구 비율로 보면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판독하여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고급 독자들과, 비평가와, 심지어 소설가들을 무지하게 많이 배출하고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 가운데 딱 한 명, 차오쯔(雀子)의 전남편이자 학교 동창생 한 명을 빼고 모두, 적어도 문학 애호가이다. 즉, 도시의 이름처럼 멍청한 이들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소설 백날을 읽어봐라.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그것도 아니면 라면 국물이라도 한 방울 나오느냐는 말이지. 앞에서 이야기한 작품의 주인공 샤오쌍이 근무하는 대형 쇼핑몰에서도 샤오쌍을 필두로 샤오마, 한마(寒馬)를 멤버로 하는 북클럽이 활성화되어 정기적으로 책을 읽고 작품에 대한 토론을 한다. 그러다가 샤오쌍과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이(儀)아저씨가 젊었을 적 애인의 외아들 헤이스(黑石), 역시 대단한 문학 고수에게 샤오쌍과 연애를 해보라 해서 작업의 일환으로 헤이스는 마치 우연히, 오랜만에 샤오쌍을 만난 것처럼 위장을 해 자신의 ‘비둘기 북클럽’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비둘기 북클럽은 멍청에서 가장 유명하고 실력있는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곳으로 초기 멤버로 헤이스와 페이(費), 리하이(李海)가 있고, 뒤를 이어 옌(岩), 자오쯔, 샤오짱, 샤오미 같은 이들이 규합하여 스무 명에 이르는 호화멤버를 이룬다.

  한 가지 주제로 사람이 모이면 그 안에서 당연히 짝짓기가 생긴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비둘기 북클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비둘기 북클럽과 쇼핑몰 북클럽의 대장 격이었던 헤이스와 샤오쌍, 이들을 엮어주는 핵심역할을 하기도 했고 둘의 실질적 문학 교사이기도 한 나이든 이아저씨와 젊은 샤오마, 비록 짧은 기간 동안만 부부의 연을 맺기는 했지만 페이와 한마, 헤어진 후 다시 한마와 샤오웨. 처음엔 헤이스의 (속물) 애인이었고 동창과 결혼해 1년 남짓 살다가 이혼한 차오쯔가 훗날 진지한 문학적 깨달음을 얻어 연애를 시작한 깊은 시골 출신의 리하이. 몇 번 이야기했는데, 연애소설은 이별소설이기도 하다는 고금의 진리를 찬쉐는 깔끔하게 깬다. 위의 커플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말 그대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쉼 없이 사랑하고, 사랑의 행위를 하고 간혹 헤어지더라도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되살려 남은 생애 동안 가장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낸다. 이게 다 문학의 힘이란다. 그러니까 멍청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수련하는 고수들은 문학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이다.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가장 모범적인 소설. 이게 가능한 건, 본문만 68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작품 자체가 초현실적 관점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6층 구식 아파트가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 테라스가 있는 초현대식 아파트로 변용하듯이. 그리고 이들의 사랑. 특히 사랑의 행위. 거 참. 은근히 야하다. 그래서 좋다는 뜻이지 뭐.


  근데 이 작품의 주제가 뭐야? 멍청이라는 문학, 특히 소설문학의 유토피아를 설정해놓고 삶은 문학이 구원한다, 뭐 이런 식을 설파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과 이별에 대하여 쓴 것인지, 이것도 헛갈리는데, 아무래도 문학의 효용, 문학제일주의, 문학만세를 주장하는 측면이 더 강한 듯하다. 소설과 평론을 하는 사람들의 모색과 탐구, 노력. 지면 뒤에서 이들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찬쉐의 눈길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초현실주의 문학 같은 전위적 글쓰기에 관하여. 작품 속에서 연작 장편을 징청, 즉 수도에 있는 유명 잡지에 실을 한마의 입을 통해 찬쉐는 말한다. 찬쉐는 알다시피 중국의 전위적 그룹이었던 선봉파先鋒派의 기수이다. 선봉파 문학을 거칠게 정의하면 사회주의 문학에 반대하고 형식과 언어의 미궁을 실험하는 전위라고 할 수 있는 바, 찬쉐는 자신의 작업을 작품 중 작가 한마의 입을 통해 어느 정도 독자에게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창작이 이런 관습을 깨뜨리고 있다고 봐요. 나는 자신을 분열시킬 수 있는 현대 작가라고 할 수 있고 언제든 나 자신의 창작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창작과 관련해서 느끼는 생각을 쓰고 싶기도 해요.”

  이 말을 받은 연인 샤오웨가 말한다.

  “그거 잘 됐네요. 한마의 창작은 특별한 경우로, 전통에 얽매여서는 안 돼요. 작가는 소설과 떨어지면 자기 소설의 평론가가 될 수 있어요. 이 역시 미래 문학의 추세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아가 분열되어야 발전을 희망할 수 있어요. 원초적 역량이 가장 큰 사람이 중심이 되죠. 그 중심이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인식되지는 않지만요. 역사는 언제나 그래요.”  (p.523~524)


  작품의 무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시 멍청에서는 새로 작가의 자리에 오른 한마의 전위적 작품에 대하여 털끝만큼의 반대나 저항이 없이 찬사 일변도다. 그래서 혹시 찬쉐가 자신의 선봉문학 작품들을 위한 유토피아로 멍청을 설정하고, 선봉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천사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미래를 여는 가장 올바른 문학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실 전위 작품은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가자미 눈알을 하는 비평가들이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모든 전위 작업을 통해 역사는 진보해 나가는 법이기는 하다. 그래도 너무 했어. 전위문학의 유토피아 이름으로 하필 멍청이 뭐야, 멍청이.

  그러나 나처럼 이미 나온 문학작품을 오직 즐기기 위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과하게 전문적이다. 내용이 전문적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문학에 목을 매고, 실제로 소설작업과 평론을 하고, 중앙 문단과 연결을 하고,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문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것도 전위 문학을.

  전위적인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소수의 잘 교육받은 ‘탁월한 자’들이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그랬다. 예술의 효용이 쾌락이라고? 그건 탁월한 자들의 경우가 그렇고 나한테는 쾌락이기는커녕 고난의 행군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한데 멍청의 숱한 독자들이 그리 쉽게 이해가 되겠느냐고. 그렇다고 좌절금지. 문학적 소양이 대단한 샤오쌍조차 멍청 최고의 비둘기 북클럽을 찾아 가려해도 도무지 북클럽이 있는 고서점 거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다. 아무리 행인한테 물어도 아는 사람조차 없는 고서점 거리 안에 북클럽이 있었던 것. 여기까지는 나나 샤오쌍이나 그게 그거였다는 뜻. 글쎄 초현실주의라니까. 이런 장면에서 당황하면 책 못 읽는다.

  작품의 또 하나는 역시 연애. 연애소설 쓰기가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거의 비슷한 플롯에 비슷한 진도, 비슷한 결합과 분리 과정은 사실 이미 다 써먹었다.  그리하여 찬쉐가 연애소설을 다루는 방식은 문학을 매개로, 멍청이란 유토피아에서 문학공부를 하는 선한 사람들의 연애감정을 꽤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뭐 그냥 넘어가는 게 없을 정도로. 그리고 한 작품 속에 다양한 커플을 등장시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적절한 수준의 베드씬까지. 그럼에도 <격정세계>에서의 격정은 연애보다 문학을 향한 격정이라는 측면이 훨씬 강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인의 유토피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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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5-06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클럽을 찾아 고서점 거리를 걷는 모습은 너무 좋았어요^^ 어디에서 모이는지도 모르고 찾아가는데 헤매다 보니 그 장소에 도착해있는! 마치 그런 전위적인 문학을 읽는 독서과정을 비유하는 듯 합니다.
오향거리 읽다가 멈췄습니다.
틈나는대로 읽기엔 적합지 않아서, 나중에 한꺼번에 읽으려구요. 폴스타프님 리뷰는 책보다 재미있네요^^

Falstaff 2024-05-06 08:31   좋아요 1 | URL
예. 찬쉐가 참 흥미로운 작가더라고요. 대개 이런 선봉파 적 작품은 읽기가 곤란한데, 이이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워 하면서도 그래도 잘 읽히면서 뒷부분으로 가면 나름대로 감을 잡게 되더라고요.
저도 오향거리 읽어야 합니다. 근데 좀 뒤에 읽으려고요. 먼저 읽고 리뷰 남겨주세요. ^^

stella.K 2024-05-06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멍청이라는 지명이 나오나 보죠? 전 첨에 폴님께서 오타하신 건 아닌가 했습니다. 거 이름도 참. ㅋ 초현인만큼 현실에는 없는 그런 곳이겠죠? 문학을 위한 문학인의 이야기라니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4-05-06 16:55   좋아요 1 | URL
옙. 㑁城이란 지명인데요, 베이징 말고 대도시 중 한 군데를 모델로 했던 거 같습니다. 상하이 아닐까 싶기도.
이 책 재미있습니다. 찬쉐 작품 치고 좀 덜 골치 아프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것 참, 은근히 야합니다. ㅋㅋㅋㅋ
 
이상한 막간극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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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1월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작품. 당시 오후 5시 30분에 시작해 1부 공연하고, 디너 브레이크 한 다음 다시 2부 공연, 11시에 막을 내렸단다. 실제 공연에만 다섯 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대작이다. 소설보다 읽는 속도가 빠른 희곡 읽기도 하루 가지고는 무리다. 이 책 본문이 472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러나 독자는 몰입한다. 얼마나 막장인지 한 번 빠지면 헤쳐 나올 수 없다니까. 역시 드라마는 막장으로 갈수록 재미있다. 뭐가 막장이냐고? 미리 좀 알려드리지. 주인공 니나 리즈의 방종한 프리섹스. 결혼 후 남편 가계의 정신병력, 유전으로 정신병의 내리 물림을 막기 위한 낙태, 혼외자 임신과 출산 등등. 이리하여 <이상한 막간극>은 애초부터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라는 극찬과 3류 멜로극이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았고, 특정 주state에서는 공연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뭐 누구나 쓸 수 있겠지만, 이만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극작가는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유진 오닐이 유일하다는 게 내 의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시간을 넘기는 큰 작품이라 아직 시도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도 초연할 거 같지 않으니 오늘은 마음대로 스포일러 신경 쓰지 않고 써보겠다. 하긴, 연극 공연은 미리 줄거리를 알고 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이래저래 부담 없네.


  뉴잉글랜드의 작은 대학 도시에 있는 리즈 교수 댁의 서재가 1막의 무대이다. 리즈 가문은 소위 와스프 중에서도 와스프, 미국판 귀족 가문이라는 자만심에 도취된 집안이다. 그런데 이집 따님 니나 양이 겨우 시민계급인 고든 쇼와 연애를 했다. 교수께서 어떻게 하면 둘을 갈라놓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방법이 없어 애만 태웠다. 그러다가 교수에게는 하늘의 도움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미식축구와 조정 등 대학스포츠의 별이자 학업성취도 최고 수준이었던 고든 역시 참전 신청을 했다. 전쟁을 앞둔 청춘남녀는 뜨거워지는 법. 니나와 고든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결혼을 하려고 한다. 이때 리즈 교수는 고든을 불러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한다. 만일 고든 자네가 전쟁에 나가서 전사라도 하는 날이면 니나는 어쩌면 아이 하나 딸린 과부가 될 것이고, 자네가 재산이 없으니 정부에서 주는 쥐꼬리 만한 전사자 연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가 될 터. 니나 정도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네가 돌아와 자리를 잡은 후에 결혼하는 것이 정당하고도 공명정대하며 명예로운 일 아니겠느냐, 하는 거였다. 평민계급에겐 개념이 없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일부 귀족들의 명예, 공명정대,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젊은 커플은 둘 다 몸의 교환을 뜨겁게 바랐으면서도 결혼도 하지 않고, 침상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로 유럽행 배에 올랐다. 고든이 무사히 귀환해 결혼을 해버렸으면 드라마가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전투기를 몰던 고든은 적군의 기총소사를 받아 기체에 불이 붙어 좁은 조종석에 앉아 새카맣게 타 죽어버렸다. 고든의 전사는 니나에게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고, 고든이 무슨 이유 때문에 결혼도, 섹스도 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던 니나는 아버지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해 뉴욕의 군인병원 간호사로 취직해 집을 나가버린다.

  여기까지 1막이다. 근데 한 명이 빠졌다. 끝까지 별 무게감 없는 조연이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찰스 마드슨. 이이도 귀족. 게다가 소설가이다. 예비학교에 다닐 때라니까 우리식으로 하면 고등학교 시절일 거 같은데, 열여섯 살 때 친구 따라 사창가에 가 나폴리 출신의 못생기고 뚱뚱하고 분가루와 립스틱을 처바른 나이든 창녀에게 동정을 던져버리고 침대에 엎어져 엄마 생각하면서 질질 짰던 인간이다. 찰스는 이 첫경험, 딱 하루 때문에 심각한 생식기 질병이 생겨버렸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병이라서 거의 미신에 입각한 민간치료에 기댔다가 그만 생식불능을 넘어 성기능 불능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겪게 된 인간이다. 니나가 어렸을 때부터 예뻐하고 늘 가까이에서 관찰해 로즈 가족에게는 아주 친숙하다. 찰스 마드슨은 니나가 고든의 전사로 인해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 상흔이 니나의 전 생애를 걸쳐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간파했으나, 자신이 니나의 상대일 수도 있는데, 혹은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그는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니나에게 충실한다. 니나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 죽은 고든, 남편 샘 에번스, 연인 에드먼드 대럴을 초월해 어쩌면 니나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인지도 모른다.


  뉴욕의 군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자신을 원하는 거의 모든 환자에게 무료로 몸을 제공하는 니나는 아마도 그것이 죽은 고든을 위한 씻김굿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이때 니나의 나이 스무 살이 채 안 됐다는 것도 감안하자. 사고가 극단으로 치닫는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을 때였으니. 방종한 뉴욕 생활을 1년 하다가 아빠 로즈 교수가 죽어 다시 뉴잉글랜드 고향집으로 온 니나. 이때 죽은 고든 쇼의 대학동창 샘 에번스가 찾아온다. 대학을 졸업한지 3년이 된 스물다섯 살 총각. 니나가 오기 전까지 집을 보고 있던 마스든 씨가 관찰하기에 똑똑하지 않고 그냥 웃자란 사내 아이지만 호감가는 면이 있는 그저 보통 수준. 고든과는 달리 스포츠에 젬병이요, 공부도 그냥 그럭저럭 했던 범재 출신이다. 하도 꺼벙해서 학창시절 룸메이트이자 3년 선배였던 에드먼드 대럴이 심장 전문의로 근무하는 군인병원에 놀러갔다가 니나를 만나 알게 된 사이로, 니나가 아무한테나 치마를 걷어올린 건 몰랐다. 로즈 가에 오기 전에 벌써 니나에게 청혼해 둘은 결혼한다.

  니나는 샘과 결혼해 북부 뉴욕주에 있는 에번스 가문의 농장으로 엄마를 보러 간다. 니나는 임신 2개월차. 니나는 샘의 엄마이자 시어머니인 에이머스 에번스한테 천둥 같은 말, 에번스 가의 저주를 듣는다. 샘의 할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외증조할아버지 역시 정신병원에서 죽었으며, 샘의 고모도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집의 꼭대기 층에서 자신이 돌보고 있다고. 샘의 아버지는 발병을 하지 않아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나서 자기한테 집안의 비밀을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러나 샘이 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에게도 증세가 나타나 샘을 기숙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같은 증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심각한 정신병 내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샘을 임신한 어머니는 정신병을 유전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했지만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 않은 아버지의 권유로 샘을 낳아 이제 결혼을 시켰더니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어머니는 심각하게 유산을 권한다. 그러면서 샘의 안정을 위해서, 즉 정신병의 발현을 막거나 늦추려면 샘의 아이를 낳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그렇다고 정신병 유전자가 있는 샘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으니, 혼외로 다른 괜찮은 유전자를 가진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만들어 샘의 호적에 올리기 권한다. 어때? 진짜 막장이지? 정신병에, 낙태에, 혼외정사에, 혼외자 출산 권유까지 한 방에 다 몰렸다. 나는 이 때 소름이 좍. 곧바로 떠오른 것이 알코올 중독 증세가 농후한 어머니가 등장하는 <밤의로의 긴 여로>. 그게 괜히, 우연히 나온 드라마가 아니었던 거다.

  그리하여 충격을 먹고 니나가 고른 애인이 에드먼드 대럴. 심장외과 의사에다 빵빵한 체격에 제법 잘 생긴 외모.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데럴 역할을 클라크 게이블이 맡았으니 알아서 상상하시라. 나 같아도 좀 모지리 같은 에번스보다는 대럴이 좋겠네. 하여간 낙태를 하고 다시 생리가 터지자 곧바로 대럴과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들한테 차마 몸의 교환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생전 처음 사랑을 한 남자 ‘고든’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섹스라는 것이 그렇다. 좋아서,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섹스를 하고난 다음에 사랑하게 된 커플도 있다. 딱 니나와 대럴이 그랬다. 특히 대럴이 그랬다. 그러나 유부녀이고, 친한 후배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대럴은 니나를 포기하기 위해 도망치듯 유럽으로 가 몇 년을 머무른다. 자기 연인과 아들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대럴의 가슴이라니. 메지다 못해 아주 무너지지 않겠어? 크.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1부 5막이 끝난다.

  1부 5막 끝나고 뭐? 디너 인터미션. 밥 먹고 2부 6막이 올라 9막에서 대단원을 맞는데, 2부는 아무래도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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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03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찬쉐, <격정세계>
수요일. 셸리 리드, <흐르는 강물처럼>
금요일. 츠쯔젠, 《가장 짧은 낮》

stella.K 2024-05-03 09:57   좋아요 0 | URL
엇, 일주일에 세 작품으로 줄이셨네요. 암튼 기대하겠슴다.^^

Falstaff 2024-05-03 16:58   좋아요 2 | URL
넵. 4월 들어와서 가만 보니까 여차하면 재수 없게 1년에 2백 권 넘게 읽을 거 같더라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1년 2백 권 이상이랍니다. 그리하야... 두꺼운 책을 집중적으로 털었습죠. ㅋㅋㅋㅋ 뭐 다 제 맘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05-04 23:33   좋아요 1 | URL
격정세계
기다리겠습니다.

Falstaff 2024-05-05 10:25   좋아요 1 | URL
컨닝해보니, 별4더군요. ^^

은하수 2024-05-03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부터 너무하시네요 ㅠㅠ
이리 끝내버리시다니... 몰입최고조였는데 말이예요!
이상한막간극2로 후속리뷰 어떠세요?~~ 하하하하

Falstaff 2024-05-03 07: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내용을 다 밝히는 건 좀 그렇잖아요. 혹시 읽어보실 분이 미리 내용을 알게 될까봐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어보셔요. 이 출판사 책이 워낙 비싸서 직접 구입하면 어질어질 하거든요. ㅋㅋㅋ

stella.K 2024-05-03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극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야회 나온 것 같고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감히 시도하기는 어렵겠죠. 코로나 전인가 카망마조픈가? 4시간인가 몇시간 하는 작품 울나라에서 올렸다는데 다시 그런 시도 안하잖아요. 3시간이 맥시멈인것 같습니다. ㅋ

Falstaff 2024-05-03 17:01   좋아요 1 | URL
들리는 말로는 ˝까라마조프...˝ 일곱 시간 했다는데 그건 일단 열외로 봐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건 작품 자체가 정말 재미나요. 시엄마가 며느리한테, 얘야 애 뗴고 다른 멀쩡한 남자 씨 받아라, ㅎㅎㅎㅎ 막장 자체라니까요. ㅎㅎㅎㅎ

잠자냥 2024-05-03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두껍다고 진짜 비싸게 받아처먹네요.
저 그래서 이거 출간 때 도서관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했어요. -_-;
전자책으로 사봐야겠습니다.......근데도 2만원 넘음... 흐아.

Falstaff 2024-05-03 17:03   좋아요 1 | URL
아효, 저 사는 소도시에서도 냉큼 사주는데 서울에서 그리 야박해요? ㅎㅎㅎ 고향 뜨기 잘 했네. ㅋㅋㅋㅋ
재미나요. 근데, 그래도 <밤으로의...>가 더 좋더라고요. ㅎㅎㅎ 첫정이야, 첫 정.

잠자냥 2024-05-03 17:40   좋아요 1 | URL
한정된 예산 안에서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책으로 구입한다…. 고 ㅋㅋㅋㅋㅋㅋㅋ 아, 유진 오닐도 까이는 세상!

그레이스 2024-05-04 23:34   좋아요 1 | URL
올해 도서관 예산이 반토막 났대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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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쓴 작품집인데, 이거 참 난감하게 됐다. 책 읽은 느낌을 솔직하게 쓰면 많고 많은 애독자한테 얻어터질 것 같고, 그래서 한 사람한테 꿀밤이라도 한 대씩 맞는다 쳐도 워낙 팬들이 많아 최하 중상일 터인데 이제는 그까짓 것, 하고 버틸 깡다구도 없어졌으니 이걸 워쪄? 글쎄, 당신도 백수 돼 봐. 매사에 저절로 그렇게 된다니까. 좋다, 좋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최대한 공손하게 쓰는 독후감이겠거니, 하고 최은영의 팬께서는 양해하옵시어 그저 딱 한 번만 쇤네의 입방정을 참아주시면 황감하겠으니, 그리 아셨으면 좋겠다. 물론 이까짓 잡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작가한테는 굳이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지 뭐. 이런 마음이었지만 그냥 간단하게 써야겠다.


  최은영의 문장은 거미줄처럼 섬세하다. 고운 결로 가로 세로에서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는 듯한 애잔함.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소설 다 그렇다. 이런 아름다운 실로 묶인 관계들. 너와 나. 일인칭과 이인칭. 그리고 인칭을 벗어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악의 밀림. 이 틈 안에서 너와 나는 관계를 만들고, 자잘한 오해도 생기고 상처를 받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그저 상처를 간직하는 마모. 섬세한 아름다움은 연약할 경우가 많아 이들은 거의 언제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이어 흉을 가진 채 남은 생을 살아야 하고. 최은영은 이 단계 이후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래 작가한테 많이 익숙한 문법이다. 전형적인 단편소설의 구성은 교과서적이라 할 수준. 표제작 <아주 희미한…> 속에 등장하는 학보사 등 학교 건물이 익숙한 걸로 봐서…….

  문득 드는 의문. 비슷한 분위기의 문장을 구사하는 비슷한 연령대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이들 작가군을 읽으면, 이들에게 교사 혹은 롤 모델이 한두 명 있는 것 같다. 물론 억측이겠지만. 억측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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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5-02 15: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그 이후의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과 또래의 여성 작가들의 글이 비슷하다는 것을요.

서재 분위기상 남들이 좋다는 작품을 비핀하기가 저도 쉽지가 않네요 ㅎㅎ

Falstaff 2024-05-02 21:02   좋아요 1 | URL
에휴, 최은영만큼 굉장한 팬덤을 누리는 작가도 흔하지 않잖습니까. 좀 길게 썼다가 확 줄이고, 무려 한 달 동안 그나마 짧은 글도 숱하게 다시 써서 결국 어줍짢고 하찮은 조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얻어 터질까봐 속으로 걱정했었는데요. ㅋㅋㅋ

공쟝쟝 2024-05-02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은영의 광란의(?) 애독자!! 동세대 여성으로서… (중요합니다!! 동세대 여성!) 그나마 최은영은 남성독자도 설득할 수 있는 포지션이지 싶은데요.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녀의 모든 문장은 제 맘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제가 섬세하고 영롱합니닼ㅋㅋㅋㅋ) 거기에 공명할 수 밖에 없는 세대적 경험(!)이 저를 마그마구 흔들어 놓기 땜에 저는 애껴 읽습니다. 모든 기억들이 소환되고 거기에서 나의 무고하지 않음이 나의 부족했던 성찰이 같이 헤집어져서. 전 최은영만의 어떤 윤리적 감수성으로 ‘답을 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언제나 화나있는 (ㅋㅋㅋㅋㅋ 사는 게 너무 바쁘며 구원따윈 없는 계속해서 돌겠는 현대 여성) 제 맘을 순하게 해줍니다. 내가 순해진다고요.

킹덤이랑 지옥을 봐야 성질이 풀리는 이 각팍한 시절에. (뭐 더 각팍했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저는 안 살아봐서 ㅋㅋㅋ) 그것 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저는 최은영 없으면 안되는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ㅋㅋㅋㅋ 소포클레스 퐐님의 평가에 반발 합미다!ㅋㅋㅋㅋ (반발이래봤자 ㅋㅋㅋㅋㅋㅋ 이게 다임 ㅋㅋㅋ)

Falstaff 2024-05-02 22:07   좋아요 1 | URL
넹.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문학은 언제나 자신이 느낀 것이 제일 중요합지요. ㅎㅎㅎ 그래서 소포클레스와 최은영이 동격이 되는 겁니다. 이의 없습니다.

공쟝쟝 2024-05-02 22:26   좋아요 1 | URL
하지만 최은영을 카슨 매컬러스나 뒤라스에 비교하면 반칙입니다 ㅋㅋㅋ!! 물 건너온 거 말고는 한국의 다른 세대 여성작가들과 비교해보고 싶은데 읽은 게 읎어요… 아쉬운대로 조만간 양귀자라도 읽고 올까봐요?ㅋㅋㅋ 퐐님의 추천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