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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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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책 읽었으면 꼭 독후감 써야 하는 것이, 써 버릇해야 하는 것이, 여태까지 이 책을 사놓고 책꽂이에 꽂아둔 다음 읽지도 않고 마치 읽은 듯한 느낌으로 근 육칠년 세월 묵혔다고 생각했다가, 그것도 친애하는 서재친구 잠자냥 님이 쓴 서평을 보고도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크게 반성을 한 후, 진짜로 읽겠다고 큰 마음 먹고 책을 딱 펼치는데, 새 책 사서 첫장을 넘기는 그 기분 아시지? 특히 열린책들 양장본 같은 경우 딱딱한 첫장이 삐거덕 거리면서 넘어가는 기분, 이렇게 얘기하면 꼭 변태 같겠지만 마치 세상의 첫날 드디어 불 끄고 더듬더듬 거리면서 살짝 공간을 넓히는 그런 기분, 뭐? 진짜 변태라고? 중요한 얘기하는 순간이니 그딴 건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첫문장을 딱 읽었는데, "일이 끝나고 급료로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에 갔다." 어, 이거. 읽은 거다. 그러니 여지껏 사놓고 읽지 않았다고 반성했던 건 전부 헛지랄이었다. 내가 원래 책을 얌전하게 읽는 습관이라 완벽하게 새 책인줄 알았다. 한 번 벌렸던 양장본의 하드커버도 꽉 끼는 책장 속에 오래 두면 다시 처음처럼 꼭 다물어지는 모양이다. 거 사람의 가랑이하고는 좀 다르네. (이쯤에서 난 변태성에 관한 번민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메모 형식의 아주 짧은 자국으로라도 독후감을 써야 하는 거다. 이런 지랄 하지 않게. 뭐 하긴 이래서 좋은 책 한 번 더 읽는 것이긴 하다.

 내가 읽은 하인리히 뵐은 순서대로 세권.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책들의 특징? 농담부터 하자면,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사람이 번역했고, 대체로 책 제목 짓기에 곤란을 느끼는 듯 상당히 제목이 긴 편이다. <카탈리나...>에선 무소불위 제 4의 권력인 매스컴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성을 보며 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어릿광대..>를 읽고는 단박에 뵐의 팬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어릿광대..>에 얼마나 빠져버렸는지 이 <그리고...>는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한 처지가 됐는데 그건 이 책의 분량이 너무 얇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내렸는데 암만해도 핑계 혹은 변명 아냐? <카탈리나...> 역시 아무 독후감도 쓰지 않았지만 매스컴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아마 카프카의 <소송>과 관련하여 생각했었기 때문인 거 같아 아직 잘 기억하고 있는 반면, <그리고...>는 프레드와 아내 캐테의 가난한 생활과 그 속의 사랑, 즉, 한 마디로 궁상스런 장면이 뇌속에서 특징지워지지 않아서 그랬던 거 같다.

 다시 읽어본 <그리고...>. 새삼스레 깜놀. 본문이 230쪽 밖에 되지 않지만 읽으면서 쓸쓸함과 안타까움을 공기와 함께 내내 허파에 담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뵐의 글. 전쟁 후 자신이 이렇게 살았었을까? 그래서 곤궁과 그것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그럼에도 넘쳐흐르는 가족애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갈증하고 천천히 지쳐버리는 사랑과 가족애. 전쟁에 참전했던 자, 그것이 전쟁을 겪음으로 해서 유발되었는지 전쟁이 아니더라도 주인공 프레드 안에 이미 내재해 있었는지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혈관을 따라 흐르는 노쇠한 허무와 회의와 부적응과 무기력과 절망의 피. 도무지 보이지 않는 희망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마저 해체의 순서를 밟을 수밖에 없는 피곤의 절정 속에 프레드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10 마르크를 빌려 화주를 마시고 버튼을 당겨 핀볼 게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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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13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래서! 이미 읽으신 작품이었던 것이군요! 하하하. 맞습니다. 그래서 리뷰나 최소한 100자평이라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나저나 저도 폴스타프님과 똑같은 순서로 뵐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ㅎㅎ 왠지 반가워서 ㅋㅋㅋ 앞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운전 임무를 마치고>를 읽어볼까 합니다.

Falstaff 2017-01-16 09:09   좋아요 0 | URL
제가 이렇게 정신없이 삽니다. ㅋㅋㅋ
책세상에서도 뵐의 작품이 나왔군요. 저도 관심 갖고 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낙원의 이편 펭귄클래식 1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화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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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뭐해먹고 살까, 깊게 고민하다가 사실 할 줄 아는 것이 글 쓰는 거 뿐이라 프린스턴 다닐 때 써놓았던 잡문들을 모아 순서대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엮어보니 거 참 그럴싸한 성장소설 한 편이 되는 거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선수이자 이후 등장하는 비트세대의 아버지 격인 천재작가 피츠제랄드의 첫 장편소설이며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낙원의 이편>. 혹시 아는가, 당신 또한 글쓰기 솜씨에 있어 후대의 전범이 될, 그러나 아직 이 후진 세대엔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한 작가 지망생인지. 그러니 여태 써놓은 것들이, 당신이 지금 새삼스레 읽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어 차마 불태우지 않으면 참기 힘들 지경이라도 절대 delete 버튼 누르지 마시라. 어느날 때가 되어 그것만 엮어놓으면 군데군데 짜깁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억의 인세가 굴러들어올지. 이 외람된 독자가 당신의 행운을 진정 바라고 있음을 기억하시라.

 혹자는 <낙원의...>를 자전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피츠제랄드가 아마 44살에 알콜의존증에 이은 심장마비로 죽었는 바, 명색이 '자전'소설이라면 적어도 환갑은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 것이 겨우 24세. 에잇, 그럼 내가 위에서 말했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지. 옛 선배들은 보통 일찍 죽어서 그런지 다들 일찍 까졌다. 아아, 좋아 좋아, 좋은 말로 해, 지금보다 훨씬 조숙했다. 책의 주인공 에이머리 블레인의 7할은 스콧 피츠제랄드인 것처럼 보이고, 그 나이에 벌써 대학졸업, 1차대전 참전, 한 번의 취직과 사표, 네 번의 연애, 친구 네명의 죽음(1명은 사고사, 1명은 행방불명, 2명은 전사) 참 복잡한 세상을 살았다.

 허위의식과 사치와 방만과 게으름과 가톨릭스러움과 오만의 집합체인 언짢은 의미로써 부르주아 정신의 정수를 지닌 어머니 비어트리스(아, 이름 정말 멋있다) 블레인의 오소독스한 교육환경 하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의 주인공 에이머리는 이후 기숙학교와 프린스턴을 거치면서 책의 1부 제목이기도 한 '낭만적 에고티스트'로 성장한다. 근데 에고티스트, 이기주의자이긴 한테 낭만적 이기주의자라. 어머니로부터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을 받았기는 한데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선 (아메리카를 포함한) 서양에는 바야흐로 사회주의 혁명의식과 1차대전을 향한 모종의 불길한 활발, 개별감정의 무거움 등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냉풍과 열풍이 교차하듯 변혁기를 맞아 이기주의자이긴 하지만 어머니 비어트리스 시절과는 달리 변혁으로 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낭만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 시절에 의하여 빅토리아 시대와 시대의 정신을 옥죄고 있던 볼트는 이미 풀어져버렸던 거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에도 정신적 환절기가 닥치고 하필이면 딱 그때를 골라 청춘시절을 보내게 된 피츠제럴드와 일당들. 한편으론 불우하고 한편으론 모든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도 온갖 변화에 직접 참가하게 되지만 경험이란 것이 늘 그렇듯 겪었다 해도 남은 것도 없고 시절에 내가 남긴 것도 없으며, 오직 청춘만 소비된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걸 자각하게 된 작가 그리고 에이머리 블레인. 그들을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칭한다.

 선량하기만 하고 전적으로 자기중심적, 극단의 에고티스트였던 어머니 비어트리스로부터 동전 몇 푼만을 상속받고 이제 주머니에 겨우 24달러만 남아 스스로가 가난의 위치에 떨어졌을 때,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선수 페츠제럴드, 그가 뉴욕의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한다.

 "에이머리는 이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중략) 오 헨리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도 낭만과 연민과 사랑과 증오를 찾아냈다. 에이머리 눈에는 오로지 천박함과 육체적인 더러움과 어리석음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자책이란 것을 몰랐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감정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법이 없었다." (386쪽)

 자신이 가난으로 떨어진 다음에도 그에게 가난은 오직 천박함과 더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스스로 천박하고 더럽고 어리석게도 가난에 빠져들었음에 불구하고 그는 자책하지도 않으며, 그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감정. 진퇴양난의 갈림길에서 그는 잠시 앉아 있는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때쯤 에이머리 혹은 피츠제럴드가 이 책을 썼을 거라고.






* 근데 써놓고 보니까, 내가 도대체 뭘 주장한 거야? 난필증이야? 쪽팔려. 그래도 안 지우고 내비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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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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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초반에 이 책을 사두고(물론 표지는 이 그림이 아니다) 여태 읽었는줄 알았던 작품. 하, 세상에. 그냥 책꽂이에 있기만 했는데 당연히 읽었다고 치부해 둔 책이 이거 말고도 모레쯤 독후감 쓸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도 있다. 헤까닥! 도무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귀찮음을 무릅쓰고 책을 꺼내 들었더니 전혀 들춰본 자국이 없는 거다. 근데 이런 책의 공통점이, 대단히 좋은 평가를 얻는 책들이라는 점. 그리하여 진짜로 읽어보지도 않고 나도 이 훌륭한 책들을 (당연히) 읽어봤겠지, 이딴 식으로 여기고 넘기고 간 거 아닌가 싶다.


 다이 허우잉을 읽고자 하신다면 <시인의 죽음>, <사람아 아, 사람아!> 그리고 <허공의 발자국 소리>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난 결론적으로 3-1-2 순서로 읽은 셈이 됐지만 앞에 적어놓은 순서로 보는 것이 중국 현대사 최고의 격랑일 수 있는 문화혁명과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 허우잉의 글은 다분히 연애소설이고 또 그 연애와 사랑이 시대의 어려움을 오랜 세월 거쳐가며 서서히 사랑의 결정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가 긴 소설을 통해 우리 앞에 내놓는 사랑의 모습은 보석이 된다. 남루하지만 단단한 시대의식을 공감하는 지식인 남녀가 문화혁명과 그 속에서 돋아나는 허위의식, 기회주의의 역류를 힘겹게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공감과 애정을 북돋는 건강한 사랑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결코 상황과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희망과 이상적 사회주의의 내일을 확신하는 그들의 공감대는 이 책에선 인본주의(휴머니즘)이라고 말 할 것이다.

 격심한 문화혁명의 모습을 먼저 그려본다. 작가의 전작(그러나 발간은 이 작품보다 한 해 늦은 <시인의 죽음>)이나 위화의 <형제>의 장면들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야수상태에서 벌어진 인간모독. 전체주의에 절대 반대하는 공산주의에 의하여 벌어진 변태적 전체주의의 와중에서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받은 사람은 대다수의 인민들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만 존재하게 되고, 심지어 친척과 가족의 테두리에서도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 <사람아....>에서도 마찬가지. 주인공 쑨위에(이후 "쑨")은 소꼽친구이자 남편 자오져우한(이후 "자오")에게 이혼을 당한 채 모진 세월을 오직 혼자의 힘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세월, 젊은 시절에 쑨을 짝사랑했던 허징후(이후 "허")는 문화혁명 초기에 비판을 당해 혹독한 시절 동안 신분증도 없이 만리장성 노동판을 포함해 전국을 누비벼 험한 생활을 거치다가 돌아와 해방조치를 맞는다. 거칠게 말하면 쑨-자오-허 이들을 둘러싸고 20년 만에 다시 복잡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연애사건을 독자의 가슴에 한없이 호소하는 건 이들이 겪어온 문화혁명과 그 이후 시절을 만나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표변해버리는 인간들의 군상과 달리 혁명 전이나 도중이나, 혁명이 끝나고나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의지를 굳건하게 지키는 인간들의 만남이 오히려 역경을 거쳐가며 승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쑨-자오-허가 만드는 사랑의 트라이앵글의 결론에 관해선 절대 이야기할 수 없는 건 물론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것은, 다이 호우잉, 다른 건 모르겠고 그가 글 속에서 엄정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반듯한 사랑, 그건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건강하다는 것. 게다가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만들어내는 (찍어내는?) 소설에서 가끔 보이는 생경한 커플들, 그들이 누리는 사랑에 대하여 단 한 번의 회의도 없고 반성도 없으며 과거를 돌아보며 혹시 있었을 오해의 여부에 관한 심사숙고도 없는 그런 무대뽀 사랑, 그런 무대뽀 식 운동의 고양, 무대뽀를 능가하는 투쟁은 다이 허우잉의 글 속에선 없다.

 참 아쉬운 건, 그가 환갑상還甲床도 받지 못할 정도로 명이 짧았다는 거. 한 십년만 더 살았더라도 중국 현대문학에 그가 뿌린 자양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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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계문학전집 13
에밀 졸라 지음, 최애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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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졸라가 썼으나 이저 정말 졸라가 쓴 거 맞아? 읽어가며 자꾸 이딴 생각 들었다. 첫 장면, 고아소녀 앙젤리크가 거의 맨발로 한 겨울 밤 성당 앞에서 밤을 새우는 묘사는 정말로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 졸라스럽지만 바로 그 다음 수예手藝장인 위베르 부부가 앙젤리크가 입양한 다음부터 서서히 기독교 성녀들의 삶에 자신을, 이거 뭐라그래, 일체화? 몰입? 동일시? 환자? 광신? 세뇌? 하여간 이딴 거 비슷하게 일평생 기독교적 순결을 지키며 산다는 내용, 이거 <제르미날>과 <작품>을 쓴 졸라의 작품 맞아?

 물론 소설가로서의 졸라, 대단한 관찰력과 사물을 보고 그걸 읽는 사람이 절절하게 공감하도록 만드는 필력에 관한 한 누가 있어서 감히 졸라한테 한 번 겨뤄볼까, 도전할 수 있을까마는, 이 책에서 우리가 졸라한테 경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런 능력을 유감없이 펼쳐보이는 졸라의 필력 말고는, 나한테는 없었다.

 아.몰.랑. 혹시 그것 때문에 색다른 졸라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나한테 졸라 구시렁거리는 인간들이 있을 것이고, 또 평소의 내 소신 '다른 것을 인정하라'와 완전히 딴소리한다고 지청구를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돈 내고 산 책 내가 읽으면서 싫으면 싫은 거다. 나머지는? 나.몰.랑.


 이럴 때 오프라인 책방이 좋은 거 많이 느낀다. 책장에 기대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사도 되는 옛날 책방. 근데 그런 책방 가본지 정말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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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1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졸라답지 않게 졸라 착한 느낌이었습니다... ㅋㅋ

Falstaff 2017-01-10 14:35   좋아요 0 | URL
몰라도 졸라의 루공-마카르 스무권 가운데 제일 잼없... 잠자냥님 표현대로 하면 착한 졸라 같습니다. ㅋㅋㅋ

blanca 2021-11-29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다 Falstaff님 글 읽고 다시 꺼내고 갑니다. ^^

Falstaff 2021-11-29 08:5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래도 루공-마카르 총서 전작을 읽는다는 마음으로...ㅋㅋㅋ
저도 지금 또 한 권의 루공-마카르 읽고 있습니다. ^^
 
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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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책.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 분량은 서로 비슷하다. 전형적인 일본식 기담.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들하고 어깨를 견줄 것들. 굳이 유럽 소설하고 비교하자면 소위 말하는 고딕문학 작가들 <피로 물든 방>의 앤절라 카터가 문득 떠오르는데(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에드가 앨런 포도 생각났다),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하고 제일 가까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서 일본인의 정서가 유럽인들의 그것보다는 내 심성에 가까운 것이 당연하여 같은 엽기 이야기라도 교카의 글들이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엽기니 고딕이니 하다가 난데없이 매혹적이었다고?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을 거다. 왜? 엽기라고 매혹적이면 안 된다는 법 있나? 한 번 읽어보시라.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아실 수 있을 터.

 고백하노니 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거 참 일본 사람들 문장 하나는 진짜 뇌쇄적, 감각적으로 잘 만든다.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를 발표한 시대의 딱 가운데 조선에선 『만세보』를 통해 이인직이 <혈의 누>를 연재하고 있었다. 아 쪽팔려. 이거 참. 이즈미 교카가 1873년 생. 그의 문장은 모르긴 모르지만 19세기에 이미 완성을 하여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쓸 1900년과 1910년엔 아주 제대로 무르익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글은 자연을 이해하는 동양인들의 독특한 시선이 가득하다. 일본 특유의 괴기(좋게 말하면 환상)스러운 일화가 자연의 묘사 속에 용해되어 마치 예술지상 혹은 낭만성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하,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뭘 아는 것처럼 쉽게 얘기하는 거 같아 차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근데 이렇게 문장이 짜르르하니 감각적으로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거 그거 대단한 거고 쉽게 이룰 수 없는 성취같은데 내가 일본 소설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있든지 아니면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문장을 이렇게 만드는 솜씨가 부럽겠지만, 나처럼 평생 독자의 즐거움만 누릴 사람들한텐 이런 류의 것들이 (이를테면 말씀입죠) 마치 진한 탕수육 소스처럼 너무 빨리 질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먹을 거리로도 난 단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단 맛을 즐겼다면 나처럼 술 좋아하는 인간들 40살 넘게 살기 힘들었을 거다. 독서도 뭐 비슷하지 않겠어?

 그러나 단 음식에 대한 호오, 통음의 즐거움에 관한 호오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듯이 이즈미 교카의 환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매혹적이고 몽환스런 문장에 관한 호오도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아니겠는가. 좋건 싫건 반드시 한 번 직접 읽어보시고 결정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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