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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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내가 우파 사상에 물들었다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다. 계급이나 인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있지도 않고,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아예 이해 못하는 이론들은 빼고 어느 정도 찬성한다. 그러나 본인은 재태크나 부동산에 관한 기사들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하고 있으며, 주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전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비록 투자는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일단 그의 글에 대한 나의 반발감부터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물론 우리는 북한에 우연히 태어나 가난과 절망에 길들여진 인민을 혐오해선 안된다. 우리라고 좋아서 대한민국 남한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민이 밥 사먹을 돈을 끌어모아 벤츠 끌고 다니며 3대까지 길이길이 왕족체계를 유지해나가려는 북한의 정권을 혐오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 사람과 '정치적 생명'을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경악했다. 우리의 개인적 삶을 침해하는 정책이 있다면 당연 비난할 권리가 있지만, 지식도 없이 시시콜콜 나라정책에 하나되려 한다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이다. 즉 정치란 모든 국민이 시시콜콜 알아야 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4대강같이 대책없는 정책은 예외다.) 많은 사람들의 밥줄과 생명이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평생 몸담아 공부하지도 않고 어줍잖은 지식으로 덤빈다면 나라가 망한다. 이미 갈때까지 간 북한 정권은, 그 안에서 '정치적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북한 산지기같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번식된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먹을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아직도 자신들의 정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는 북한 사람들. 만일 통일이 된다면 과연 정부는 그 모든 생명들을 어떻게 '교화'시킬 것인가? 북한 사람들을 싫어하진 않지만, 본인은 가장 먼저 그 사실이 우려된다. 비록 그 이야기는 4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 산지기의 정치적 의식이 달라졌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김규항씨는 독재에 공감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도록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 되었다.

 대통령에 관련된 그의 사회적 견해에 대해선 동감한다. 본인도 운동에 참가하면서 배운 점도 많았고 영감도 많았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 시시콜콜 글을 쓰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엔 우리나라 현실이 너무나 '쪽팔린다'. 술에 만취해 막차도 못타고 택시 아저씨랑 실갱이하면서 자신의 '상대적 가난'을 세금 탓으로 돌리는 인간들은 대통령 욕할 자격이 없다. 마찬가지로 본인을 포함, 운동권 나가기엔 무섭고 돈 벌려고 아등바등 공부에 매달리면서 시위자들에게 통행방해가 된다고 따지는 학생들도 대통령 욕할 가치가 없다. 아고라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곳이 없어서 타블로 '퇴진'서명운동에나 동참하고 있다. 참... 남녀노소가 저마다 이 꼬라지에 처해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책이 공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도 책을 읽느냐 공부를 하느냐 갈등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공부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겠다. 대학을 가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는 김규항씨, 혹은 대학을 그만 둔 '어떤 여학생'의 이야기에 공감은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대학이 공부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만큼 언제든지 싼 비용에 대학을 가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나라도 없다. 학원? 자찬같아서 쑥스럽지만 본인은 압구정 종로엠스쿨에서 쪽지시험 한 번만으로 학원비를 전부 면제받고 즉각 특별반에 배정받아 부자애들과 같이 공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우물 안 선생들, 어떻게든 동료를 밟고 올라가려고 아등바등대면서도 사회관계는 좋게 유지하려는 아이들의 이중적 태도가 역겨웠기 때문이다. 고 3땐 담임선생님께 전문대도 못 간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 본인은 아무 분노심없이 말하고 있다. 지금 학교에 있는 수천만의 학생들은 이보다 더한 언어폭력으로 인해 꿈을 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인은 고등학교 시절엔 평생 학원 안 다니고 야자 안 하고 이비에스만 해서 대학 붙었다. 아무리 대학입학방법이 바뀐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선 빠져나갈 길이 많다. 반드시 대학을 가기 위해선 학원밖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나도 대학 안 갔다. 결국 잘못된 자본주의 공부프로그램을 없애는 방법은 '자본주의적 이론인 수요'를 없애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김규항씨는 아마 좌파입장이라서 그렇게 애둘러 말했나보다. 

 결과를 줄여 말하자면, 책 전반에 걸쳐 자신은 아주 순수한 좌파인마냥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일기랑 연설을 짬뽕시킨 책이라서 그런가, 중첩되고 반복되는 이론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의 가족적인 면만은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후에 시간이 난다면 '예수전'도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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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토마스 아 켐피스의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박동순 옮김 / 두란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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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종교가 좋고 나쁘고 하는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당장 1시간 뒤에 수업을 들으러 가야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분법으로 하기 참 까다로운 이야기인 것을 알지만 가톨릭교의 부정부패 역사를 꼬집으며 분연히 일어난 루터의 용기덕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흘러, 우리나라엔 현재 참으로 많은 종류의(가톨릭 교구의 수를 뛰어넘으리라 짐작되는) 교회가 있다. 그들의 의견도 천양지차라서 아마 그 모든 의견들을 통합하려면 수억년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을 접하면서 대체 어느 이론이 진실에 가까운지, 대체 하느님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리라. 그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이 저서는 많은 깨달음을 준다. 

 물론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론들도 있지만 매우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이니 이해하길 바란다. 굳이 토마스 아 켐피스만 아니라 중세시대 수많은 지식인들은 대중들이 책을 읽어선 안 된다며 주장했다. 그런 시대다. 더군다나 머리를 깎고 수도 중인 수도승들의 책인데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몇 달 몇 년에 걸쳐 침묵훈련을 받으며, 철심이 박힌 옷을 입는 등 육체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예수를 본받으라는 범상치 않은 핵심주제 때문이다.  

 설령 그리스도가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는 분명 우리 같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죽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으며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마저 그 장애물에서 벗어나려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택했다. 그는 유달리 체포되기 직전에 자주 하느님께 기도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그가 구하려는 사람들이 유태인들이었던 인류였던간에, 아무튼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체포되기 직전까지 스스로도 확신치 못했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 사랑이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첫째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기득권층에게 저항하는 법을 새롭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직접 나서서 성전을 뒤엎었다. 분명 그 시대에도 극단적인 유태인 혁명 단체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분들의 도움을 평생 받지 않았다. 어찌보면 간디보다 더 철저한 비폭력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참고하려면 김규항이 쓴 '예수전'이라는 책을 보시길 추천한다. 둘째로, 만일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가톨릭교는 아직도 제사를 위해 양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에까지 들어오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순화시키긴 했지만 이 책에서도 분명히 쓰여져 있는 내용이다. 그의 영광과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이 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이 두가지 이유들만으로도 그를 숭배하지 않고 '본받는' 일은 대단히 어렵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야말로 열렬히 찬양한다. 두번째 장에서 등장하는 예수와 제자의 대담 방식에선 더욱 심화된다. 예수님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 논리를 찬미하는 제자가 되면서도 은근슬쩍 말씀을 풀이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치는 숭배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제일 마지막에는 성체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비록 토마스 아 캠피스는 옛날 시대의 사람이라 그 단어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몰랐겠지만, 우리는 그 성체가 맡은 역할을 오늘날 비전이라 부른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그 단어를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요즘 그리스도의 리더십이라던가, 정치관에 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실용서를 읽기 전 고전부터 파악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신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손색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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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눈뜨는 아이들 - 어른들이 꼭 알아야 할 우리아이 정신건강 클리닉 8
다니엘 펑 지음, 안진이 옮김, 문지현 감수 / 즐거운상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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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이 책이 싱가포르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으레 미국이나 유럽에서 쓰여진 글일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나라에서 출판된 책이라니! 그래서 그런지 낯선 단어들이 등장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열대과일 두리안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번역자의 주역이라도 있으면 좀 알기 쉬울 텐데. 성에 대한 책의 후기로는 매우 뜬금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본인이 이 책으로 인해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고환이 열대과일 두리안의 씨앗과 비슷한 크기라는 정보뿐이다. 호기심을 그냥 넘길 수 없어서 검색까지 해봤다. 뭐 고환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열대과일이니 국적에 맞게 밤송이로 대체했더라면 좀 더 이해가 빠를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의 장르가 문학이라면 이런 지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성과 관련된 지식을 이해시키려는 게 목적인 실용서적이라면 이런 점은 꼼꼼히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너무 개방적이거나 너무 보수적인 책은 아니라서 읽을 만 했다. 제 3세계의 의견을 듣는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성지식을 가르치는 방법을 소개하는 어른용 도서이다. 대부분은 청소년기의 성적호기심에 성적 호기심에 초점을 모은 글이다. 하지만 청소년기뿐만 아니라 아동기에서도 성적 관심이 생겨난다는 사실은 현재 널리 알려져 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남자태아는 자위행위를 한다고 밝혀졌다. 일명 일산 SBS 프로그램에서 김창규 박 사가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하기사 본인의 생각에도 그렇게 수긍할 수 없는 보고서는 아니다. 아마도 인간은 미래에 불편한 육체에서 탈피하여 실험관 속 두뇌로 남을지라도 계속 성에 대한 대화를 지속하리라. 다시 말해 우리는 섹스와 성(젠더)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굳이 과학적인 견해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성에 대한 아동교육의 필요성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밝혔듯이 아이들은 평균 13세 때부터 이성과 ‘제대로 된’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유치원 때부터 ‘특별한’ 여자 혹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경우를 우리 예상보다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유치원 때야 단순한 친구로 치부하고 넘어가더라도,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성을 가진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언젠가는 생기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아이의 어릴 적 이성친구 관계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고 넘어가지만, 아이가 자라서 청소년이 되면 어떨까? 만일 어린 시절 이성친구를 대하는 태도 상에서 잘못된 면이 있어도 부모에게서 지적받지 않는다면, 청소년이 돼서 갑작스레 그 태도를 버릴 수 있을까? 이성친구 관계와 인격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죽인 히틀러는 24살이 될 때까지도 이성을 대하는 데 심한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순탄치 못한 어린 시절도 고려사항에서 배제할 수는 없지만, 훗날 진지하게 연구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성친구를 사귀는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으며 더불어 이성과의 데이트 체험(?)의 기회는 더욱 늘어난다. 물론 성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관계의 일부분이다. 육체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 절묘하게 설정되었으며, 정신적으로는 결합에 의한 헌신과 만족과 애정을 느끼기 위해 설정되었다. 결국 핵심은 결합과 조화이다. 물론 ‘제 3의 성’도 있다. 태국의 ‘까터이’와 같이 여성처럼 사는 남성들을 특별한 성의 형태를 나타내며, 자신과 비슷한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기도 한다. 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들이 추구하는 건 무엇일까? 단순한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과 결합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섹스가 아니라 단지 자위일 뿐이다. 좀 더 복잡하고 까다롭고 머리 아픈 관계를 추구한다면, 그들의 목표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중세에서의 치밀한 정략결혼과 근친결혼은 현재 와서 줄어들거나 법으로 근절되었으며, 점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한다. 여자라도 혼자 살기 괜찮을 만큼 사회가 윤택해지고, 사회적 문제로 인해 출산율이 점차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이 세상엔 아직 사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사랑으로 기뻐하고, 사랑으로 오만 가지 감정을 겪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로맨스소설과 연애이야기가 담긴 음악 등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을 볼 때면 답이 더 분명해진다. 그 외에도 자연적 성과는 다른 젠더의 정체성 등으로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결국 그들의 고민도 사랑에 기초한다. 꼭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는 자신과 맞는 동성의 연인을 찾아내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랑을 한다. 그들의 사랑도 이성의 사랑과 다를 바 없으며, 심지어 이성관계보다 더 치열한 사랑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을 볼 때 요즘 시대에선 사랑이 밥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도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다. ’갑이 을을 더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갑의 성격과 을의 성격, 갑과 을이 만날 때 누가 주도권을 잡는지 혹은 누가 더 배려해주는지 등등을 일일이 계산해서 답을 산출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답도 가끔은 엇나가기도 하다. 물론 여러 가지 복잡한 개인적 요소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애초에 그 모든 요인들을 완벽하게 통계분석하기란 불가능하다. 세계적으로 실력있는 회계사라고 하더라도 그 답을 얻지는 못하리라. 성적 경험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사랑을 경험하는 날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사랑에 제대로 된 답은 없다.

 그렇기에 더욱더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날을 좀 더 앞당겨야 한다. 요즘 한국에서 대폭 늘어난 청소년의 ‘자발적’ 성매매나 아동 성학대의 상황을 봐도 성에 대한 한국의 재인식이 시급함을 알 수 있다. 성범죄 가해자가 청소년인 경우가 점차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요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소위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의 그 엄청난 정보력을 볼 때 매체 단속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현재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연령 고려도 없이 무차별로 퍼뜨려진 저급 아동 포르노와 아동 성 학대의 증폭은 연관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매체의 극단적 단속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아니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느 지방에서 음식점을 해서 재산을 꽤 모은 한 아버지는 대학입학을 앞둔 아들에게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아들과 소주 몇 잔 걸치고 홍등가로 나갔다. 나름대로 여성을 성적으로 매너 있게 다루고, 골치 아픈 임신을 막는 방법을 직접 지도해주고, 아들의 총각딱지도 떼 줄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국 아들은 홍등가의 스타가 되어버렸고, 제법 돈 있던 그 집안은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적고 있는 본인도 이 이야기가 실제라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홍등가에 미성년자가 드나들지 않도록 법적으로 차단해도, 부모가 홍등가를 ’부모동반 관람가‘ 취급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돈과 성을 주고받는 관계, 여성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성관계가 남발하는 곳이라면 오히려 아들이 간다고 해도 부모가 차단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사창가를 ’남자가 크면서 한 번 쯤은 갔다 올 수도 있는‘ 곳으로 치부한다. 심지어 사창가의 단속강화에 대해서 국회의원들은 앞장서서 심히 유감스러운 심정을 솔직히 드러내었다. ’사창가가 없어지면 남자는 성적 욕구를 참을 수 없어서 해소할 곳을 필요로 하게 될 테고, 결국엔 범죄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엄연히 사람을 짐승 취급하는 이 해명에 대해 남자들이 그닥 강력하게 반발하지 않았다는 점이 심히 유감스럽다. 아무튼 이런 사회구조도 우리가 아이들을 성적 정보의 범람에서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 두 번째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에 대해선 공개적으로 말하기 꺼려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교육의 적기를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앞의 예시에서 보았듯이 부모의 성적 견해나 지식도 아이의 훗날 성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성기기에 접해서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저지하며 부모들은 무의식적으로 더럽다거나 나쁜 짓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성을 공경하는 전통사회의 미덕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왜곡된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데, 이런 경우가 반복된다면 아이에게 성적 인식과 행동 전체가 더럽다는 잘못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성적 호기심에 대한 심한 체벌과 금지는 자칫하면 ’몰래하는 도둑질’의 재미를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격이 되어버린다. 정말 억울한 경우이지만 성 학대를 당한 아이는 학력과 친구관계 모두에서 진척을 보이지 못하며, 때로는 정신이상 증세마저 보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자위과잉증세까지 거론했는데, 놀랍도록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경우에 대처하려면 성적 정보에 대한 적절한 개방과 적절한 폐쇄가 필요하다. 적당한 성교육이 점차로 중요해지는 시대가 왔다. 부모의 성에 대한 인식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성에 관련된 자료들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 장에 걸쳐서 극구 강조하고 있다. 개방적인 성 추세가 진행될수록 부모의 적절한 가르침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전히 성과 사랑은 상당한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의식적으로 아이와 터놓고 이야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책은 매우 간략하지만 성교육의 지침이 될 알짜배기 요소만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자녀의 성적변화에 대한 바람직한 대처까지 지적하는 꼼꼼함을 나타낸다. 아들은 아버지가 가르쳐야 하고, 딸은 어머니가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다만 아동이 이해 못할만한 이성의 특징(예를 들어 딸이 남자의 유별난 성적 관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할 때는 동성부모보다는 이성부모가 가르쳐야 더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책에서 또 한 번 더 드러나는 조그마한 흠이라고나 할까.

 이성친구와의 관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겠다. 앞으로 성과 관련된 행동 모두에 선택과 합의와 책임을 져야하는 시대가 온다. ‘키스에 대한 책임’이라는 문장은 물론 어색해보일 수 있다. “네 귓불에 키스해도 될까?”라는 질문은 더욱 어색하고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점 양성화되어가는 시대를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태도라 생각할 것이다. 성적 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함부로 여기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며, 물론 여성도 남성을 함부로 여기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감정에 생긴 상처는 육체에 생긴 상처보다 몇 배로 치유하기 어렵다. 성추행이 법적으로 금지되고, 추행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자 사람들은 매사의 태도에 조심스러워졌다. 심지어 데이트폭력이나 부부폭력이라는 단어도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안방에 법률을 끌어들인다는 항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서라도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이미 굳게 우리 사회에 자리잡았다. 아직 경찰의 무시, 집안싸움엔 왠만해서 끼어들 생각 없는 이웃 사람들 등의 문제들이 남아있지만 사회는 많이 변했다. 적어도 ‘집안싸움 따위에 이혼하지 말고 그냥 참고 살아라‘ 라고 무신경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 피학적/가학적 성적 관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적 관계가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이가 성인이 돼서 선택한 성적 관계라면 물론 부모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사랑을 하던 간에 자기 자신의 책임이고 자기 자신의 자유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성인의 단계에서이다. 아직 사회에 대해 배워야 하는 청소년기라면 성에 대한 부모의 견해를 솔직히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아이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개체지만, 사회를 배워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항시 돌봐주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부모가 아닌 누구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성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겠는가. 물론 상담가나 보건사들의 지식도 풍부하겠지만, 아이가 부끄러워한다면 부모가 적극적으로 주도해 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아이가 물어보는 성적 질문에 답하는 타인은 편협하고 왜곡된 지식을 가질 수도 있다. 별별 사람들이 다 드나드는 인터넷이 특히 그렇다. 부모는 대부분 자식을 위해 노력하므로, 아이들에게 무엇이 유익한 정보인지 최대한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상담에 적합한 사람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성에 대한 지식을 공부해서 올바른 답을 해줄 수 있다.

 문제 있는 아이들에 대한 TV프로그램이나 책을 보다보면 흔히 부모의 잘못된 점을 보게 된다. “너는 애비에미도 없냐?“, ”너네 어머니 아버지가 널 이렇게 가르쳤던?“ 등등의 말은 왠만한 욕보다 더 사람을 상처 입힐 수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사회가 아이를 대신 맡아서 키워준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유전자상으로도 사회상으로도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아이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책을 펼치자마자 졸게 된다면 백날 때리고 꾸짖어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행복한 가정을 만드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신중하게 생각할 때 전혀 유익하지 않은 결혼이라면 이혼해야 한다. 사회에는 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다. 심지어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은 동성애자도 미혼자도 자신의 아이를 가져서 키울 수 있다. 본인은 미국의 여성 주의원이 게이커플의 아이를 낳아주기 위해 대리임신을 한 경우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레즈비언 부부에게 입양된 아이는 성인이 돼서까지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정상적으로 자랐다고 한다. 비록 이 책에서는 동성애를 ‘왜곡된 성 발달’이라고 해석해서 책을 읽는 본인을 매우 유감스럽게 했지만, 동성애에 관한 본인의 견해는 이 책의 취지와 멀어지니 생략하겠다. 아무래도 심리치료 전문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여하튼 다양한 성적 관계가 발달하고 있는 지금 그에 관련된 지식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래에 생겨날 다양한 가족에 대해 편견 없는 식견과 편견 없는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황금대 시간의 드라마라거나 뉴스에서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아동이 그 장면을 보고 어머니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제 시대는 아동에게 ‘아기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라는 초보적 질문보다 더 고차원의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 모든 질문에 올바르게 답해주려면 부모의 기초적 상식과 지식이 요구됨은 물론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은 적절치 않다. 모르면 오히려 아동이 쓸데없는 지식에 더 접할 기회만 마련될 수도 있다. 지식을 전달해주는 데에도 신중한 고려와 수정이 필요하다. 수많은 생각과 명상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올바른 도덕심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 불교의 경전에서도 ‘모든 지식을 접하려들고 모든 나쁜 일들을 알려하면 나중에 발을 빼려고 해도 소용없을 수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또 실제 사례를 들어보겠다. 본인은 언젠가 자신의 딸이 청소년이 되면 결혼할 때까지 피임약을 피부에 붙이고 다니게 지시하겠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주머니를 한 분 본 적이 있다. ”한강에 배 지나가지 않으리란 법 있어?“ 물론, 한강에 배 지나갈 수도 있다. 나름대로 아이를 고려한 방법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그 행위를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이라고 해석하지는 않을까? 오히려 성에 대해 더욱 개방적인 행위를 부추기지는 않을까? 차라리 어릴 때부터 혼전성교의 ‘장점’을 가르치는 게 더 경제적이고 바람직한 일이지 않겠는가? 물론 굉장히 어렵고 까다로운 교육이 될 수 있겠지만 아이의 앞날과 부모 자신을 고려한다면 아주 못해먹을 일도 아니다.

 요즘은 정보의 시대인 만큼 쓸모없는 정보도 판을 치는 세상이다. 오죽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첫 경험을 겪을 때 순간적으로 자신이 보았던 포르노나 성인 게임을 떠올린다고 하겠는가? 성적 판타지에 대한 공식적 조사는 우리나라에 아직 전무한 상태이지만, 무척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성적 지식보다는 아이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도록 도와준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성적 지식을 더 쌓기 위해 다른 책들을 읽으며 정보를 쌓는 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맨 마지막 장에 나와 있는 청소년 성 상담 전문센터 사이트라거나, 정신보건센터 전화번호 중 몇몇 개는 이미 노트에 써놓았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집은 이유는 성 피해 아동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였다. 역시나 성 학대를 받은 아이가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영향은 부정적인 것들 뿐이다. ’나중에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한다‘라는 단정이 사실 나를 조금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 일일이 화낼 필요는 없다고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아동 학대를 당한 3분의 1이 어른이 된 후에 자기 아이를 학대한다면, 3분의 2는 학대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아동학과에 들어간 이유도 사실 좋은 부모가 되어 아이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물론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만, 이런 속내(?)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가끔씩 이유모를 슬픔과 분노가 터져 나와 당황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지식과 노력, 그리고 인내심이 있다면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만일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조심스럽게 세상을 걸어나가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아직 요리할 줄도 모르고, 집안일 할 줄도 모르지만 아이가 정신적으로 상처받지 않도록 제대로 감싸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물론 ’우리 아이 정신건강 클리닉‘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훈련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육아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할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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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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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에코페미니즘 토의를 할 때, 시위를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본인은 그녀가 하는 말에 사사건건 비판하려는 심술굳은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사회자를 맡으신 분이 온화하게 말을 잘 하시는 분이라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그 이유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요지는 자신이 다니던 사립고등학교가 집단의식을 끔찍히 강조하는 곳이었던지라,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결국 '집단'과 '우리'라는 말에 알레르기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나는 금방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제나 '우리'라는 말이 있으면 '남'이라는 말이 있게 마련이다. 적이 없으면 내분이 일어나지만, 적이 생기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살기 위해 똘똘 뭉치고 저항하는 게 인간이다. 너무 부정적으로 말했나? 이 책의 어떤 대사를 읽고나서 본인은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시련에 대처하는 민중의 태도는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점이 있나 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은 그 자리에서 누울 뿐, 뿌리뽑히지 않는다. 로사처럼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고, 제이크처럼 짜릿한 흥분과 재미를 느끼기도 하면서. 때려눕히려 하는 바람이 없으면 풀은 그저 땅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그저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서있는 '행동'보다 더 지루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책은 기이한 마력을 일으킨다. 분명 심각한 사태를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천진난만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이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소 딱딱한 객관적 서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제이크의 이야기는 더욱 극단적이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고 학교까지 다니지 못했지만, 결국엔 로사의 소원대로 행복해진다. 그렇다고 해피엔딩이 이 소설에 전반적으로 풍기는 핑크빛의 근본적 정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시위배경 또한 알 수 없는 낙천적 분위기에 한 몫한다. 말도 국적도 다른 노동자들이 넓다란 광장에서 한 데 모여 시위를 벌이고, 행진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 글을 쓸 줄 아는 어린 여자아이 로사가 또박또박 쓴 글이 널리 화자된다. 인생엔 빵도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 예수님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가족간의 사랑, 지친 몸을 쉬게 해주는 깨끗한 집의 환경 등도 사람이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정신없이 일해서 밥 먹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습관처럼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은 저어기 북한이나 남아시아에 널린 기아상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면 그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 쌀 소비 촉진에 돈을 쏟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지예산은 국민들이 '장미'를 얻기 위해 필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멋대로 복지예산을 삭감하여 장애인들과 노약자들의 꿈을 앗아가는 행위는 파렴치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복지예산을 지키기 위해 촛불시위 때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운 시위를 할 날이 오리라. 본인은 조용히 분노하면서, 그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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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전집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과제때문에 이 책을 보았지만, 책을 직접 보니 정말 버지니아 울프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작가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에 일일히 이름을 다는 꼼꼼한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을 소개하는 친절한 나레이션 따위는 없다.
 그나마 간간히 써있는 인물묘사는 모호하고 불친절하다.
 독자들이 직접 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친절하게 묘사된 경우는 렘지부인 정도?
 양성론을 부흥시켰다는 작가의 업적을 드러내듯, 이 소설에서는 페미니즘적 성격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괴팍한 성격의 렘지 씨와 그를 차분하게 돌보는 렘지 부인을 묘사할 뿐이다.
 그리고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직업에서의 성취나 돈을 많이 버는 데 집착하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의지가 되어주고, 모든 사람을 도와주면서 사랑을 받는 렘지부인을 부러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아무튼 짧은 내용이지만, 그녀의 소설 속 평온한 장면마저도 왠지 섬뜩한 기운이 풍겨졌다.
 마치 알지 않는 게 더 나을 듯한 그녀의 사생활을 들춰보는 기분, 그 꺼림찍함이란!  

 그래서 이 책을 넘기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나보다.
 생각할 여지를 많이 주는 소설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과 함께 원서로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 

 P.S 별 세개를 주었다고 해서 그녀의 명성을 깎으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지 불친절한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일단 그녀가 소설을 쓰는 패턴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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