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까의 밀감                    

  옛날 日本의 에도에 오오까라는 판관이 있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 할거하던 時代였다. 내란이 빈번했고 민중들의 삶은 어려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게 일상사였다. 재판관의 판결은 뇌물을 얼마나 바치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罪가 없어도 가난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갔고 심지어는 처형되기도 했던 反面에 돈만 있으면 아무리 몰염치하고 뻔뻔스런 罪를 짓고도 풀려났던 그런 時代였다.

  오오까는 판관이 되어 에도에 부임하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큰 만찬을 베풀었다. 에도의 귀족 명사들과 관리와 그리고 다른 판관들을 합쳐 모두 3백 명을 초대하였다. 食事가 끝난 뒤 그들은 정종을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 중에 판관들은 재판을 심리할 때 그 진실을 알기 위한 제일 빠른 길이 고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판관들은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고 뻔뻔스러운 자들도 고문만 하면 다 불게 되어 있다는 意見에 입을 모았다. 오오까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表情은 침울했다. 그들이 술 마시기를 거의 끝마쳤을 즈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모든 食事의 마지막에 과일이 빠질 수 없고 또 지금은 밀감이 아주 잘 익는 계절인데 내가 그것을 소홀히 했으니 제빈들은 이 나의 불찰을 용서하시기 바라오. 즉시 조처하겠소."

  그리곤 그의 충복인 나오수까에게 3백 개의 밀감을 급히 가져오라고 지시하였고 나오수까가 급히 달려가 밀감이 든 부대를 오오까에게 갖다 대령하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오수까에게 그 밀감을 헤아려 보라고 指示하였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밀감의 숫자를 헤아린 나오수까의 表情이 어두워졌다.

  "나으리, 3백 개에서 한 개가 不足하옵니다."

  "너에게 3백 개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빈객 중에 한 분이 못 잡숫게 되었단 말이냐!"

  "나으리, 틀림없이 3백 개였사옵니다. 小人이 직접 세면서 집어넣었사옵니다. 정말이옵니………"

  울상이 된 나오수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오까의 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네놈이 한 개를 먹었구나 그렇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아니에요. 감히 어찌 小人이 그런 일을………"

  "그렇지 않다면 네놈은 지금 밀감한테 날개가 있어 날아갔다는 말을 하려느냐, 아니면 발이 있어서 도망쳤다고 말하려는 게냐, 이 발칙한 놈!"

  "아니옵니다. 감히 小人이 어찌……… 하오나 小人이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은 事實이옵니다."

  나오수까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목을 조아렸으나 主人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眞實은 밝혀지게 마련인즉……… 게다가 名色이 판관인 내가 바로 家內에서 벌어진 일의 眞實을 밝혀내지 못한다고 해서야 어디 판관 자격이 있겠느냐!"

  오오까는 형리에게 화로와 끓는 물 등 고문할 채비를 차리라고 명령하였다. 형리가 곧 화로와 끓는 물 그리고 인두 등을 준비하여 대령하자 오오까가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以實直告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저 못된 놈에게 하나하나 說明해주렷다!"

  오오까의 지시를 받은 형리가 말을 붙일 사이도 없이 새파랗게 질린 나오수까는 오오까를 향해 꿇어 엎드려 목을 조아리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제발, 나으리! 小人이, 小人이 自白하겠나이다. 그러하오니 제발, 제발………"

  "좋다. 그럼 어서 以實直告하여라. 네놈이 어떻게 밀감 한 개를 훔쳤는지 자세히 自白하렷다!"

"小人이 처음에는 그 밀감에 손댈 생각이 秋毫도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밀감이 하도 잘 익었고 때깔도 좋고 먹음직스럽고 또 향내도 그윽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사와 한 개를, 딱 한 개를 꺼내 먹었사옵니다. 어떻게 맛이 있었사옵던지 지금까지도 입안에 군침이 돌고 있나이다. 이렇게 自白하오니 제발 나으리! 제발, 나으리!"

自白을 마친 나오수까는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초대객들은 眞實이 곧 밝혀진 것에 입을 모아 탄복했다. 그 중에는 "역시 고문이야말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첩경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또 충복에 의해 도둑질 당한 오오까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 말들을 조용히 다 듣고 난 오오까가 다시 나오수까에게 이렇게 다짐하듯이 하였다.

  "그러니까 네놈이 眞情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밀감 한 개를 훔쳐먹었다는 것을 自白한다는 것이렷다!"

"예, 예. 自白하옵니다. 小人이 도둑질을 했사오니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나으리, 처음 저지른 일이었사오니 나으리의 넓은 아량으로……… 한번만 그저 단 한번만………"

  나오수까는 울면서 대답했고 또 그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오까는 침울한 표정으로 나오수까를 그리고 빈객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오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수까에게 다가가 그 앞에 함께 엎드려 그를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라. 너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했구나.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이렇게 謝罪하오니. 그리고 이 불행한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내 眞情 갑절로 너를 돌볼 것을 약속하겠노라."

  그리고 그는 그의 넓은 소맷자락에서 밀감 한 개를 꺼내 빈객들을 향해 던지고 이렇게 외쳤다.

“밀감을 훔친 자는 바로 나였소. 내 下人은 훔치지도 않았으면서도 훔쳤다고 自白했소. 그것도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이오. 먹지도 않은 밀감의 맛으로 입안에 아직도 군침이 돌고 있다고 한 말을 잊지 마시라! 고문이 있기도 전에 고문의 공포가 그렇게 했던 것이었소! 그리하여 제빈들은 돌이켜보시라. 당신들의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억울하게 썩어가고 있는가를! 그리고 제발 이 밀감을 잊지 마시라. 眞實을 밝힌다는 美名 아래 고문을 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이 밀감을 생각하시라!”

 

-  홍세화『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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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똥 세 개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의 할아버지께선 나에게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대부분 잊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신께서 중국의 노신을 읽으시고 좀 바꾸어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며 우리 옛이야기에 실제로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얘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옛날에 서당 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 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터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 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도 글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 하니 서당 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 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세 개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커가면서 세 개째의 개똥은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이 할아버님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저사]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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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 오늘, 58일째 단식을 푸셨다. 입원하셨단다.

사진으로 본 천성산은 참 아름답다. 그 산을, 그 산에 깃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세 번이나 목숨을 건 단식을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스님의 욕심이라하지만, 그런 욕심 때문에 세 번씩이나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있을까? 그건 또 단순한 '욕심'은 아닌 것이다. 개인을 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욕심'이겠지.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들여다 보아야 보인다. 자신의 일-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그렇게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부러웠다.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단순히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죄스럽다.

개학 첫날 오늘, 실은 몸이 좀 무거웠다. 갈까 말까 계속 망설였다. 누군가 같이 간다면 모를까 혼자 대중교통으로 그곳에 가기에는 너무 아득했다. 그러면서 후원금 몇푼 내고 집회 몇 번 간 것으로 양심의 빚을 덜어보려했던 불순함을 씻고도 싶었다. 황경희 샘한테 연락이 왔다. 가야지... 같이!

이 집회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장준호샘 말처럼 극좌에서 극우까지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르겠지만 연령이나 성별은 확실히 그렇다. 오늘은 금정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앞에 나와 글을 읽었고 개구장이 1학년들이 노래를 했고 수녀님들도 노래를 해주셨다. 소박하지만 다양한 힘이 모이는 참 마음 따뜻한 집회다. 노래하고 웃고 느끼는 동안 몸이 좀 가벼워지는 듯도 했다. 역시 사람은 움직여야한다.

집회장 한 쪽에 마련된 스크린에 천성산의 모습과 지율스님의 인터뷰가 흐른다. 눈물 흘리시는... 코끝이 찡해왔다. 목숨을 걸고 무언가 하는 사람.. 부럽다. 내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 지, 혹은 걸어볼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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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율스님 동생의 아린 편지 [지부 게시판에서 펌]

저에게는 언니가 둘이 있습니다. 사실 말이 언니지,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들은 저에게는 엄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 언니는 저를 먹이고 입혀서 키웠고, 다른 한 언니는 제게 산과 강으로 여행을 시켜주며 자연을 보여주고, 어린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문학과 음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엄마 같은 언니가 지금 50일이 넘는 단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니가 얼마나 천성산을 사랑하는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노력하며 싸웠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언니를 보면 애가 타지만 겉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속상해하면 저를 집으로 보내려고 할 것이란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설마 죽게까지야 놔두겠냐고 생각하면서 버티기를 50여일, 속살에는 여름장마에 습기가 차 생긴 피부병과 영양부족으로 검버섯 같은 까만 점들이 수없이 박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걷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뒤에서 뭘 먹고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30일 정도만 단식을 하고 바로 다른 음식을 삼켜보라고. 아마 죽지 않으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3번의 단식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하는 것보다 단식이 끝난 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식이 끝나도 바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여러 잡곡을 푹 끓여서 꼭 짜내고 국물만 먹었습니다. 제철에 나는 채소와 다시마 끓인 국물 정도로 일주일정도는 속을 다스려야 죽이라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긴 단식 중에는 물 종류 이외에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단식을 해본 분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언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억지로 등을 떠밀어 집에 오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속상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맡겨놓은 아이들을 데려올 생각도 않고 펑펑 울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울만큼 울면 속이 시원해지는데, 왜 울면 울수록 답답해지는 것일까요? 누구를 원망할까요? 단식을 하는 언니를 원망할까요, 아니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청와대를 원망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늘을 원망할까요?

제게 언니는 내가 죽으면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니가 꼭 가족장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안심을 시켰지만,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이없는 환경영향평가로 산과 계곡을 마구잡이로 훼손시키는 사람은 죄가 없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죽음 앞에 서야하는 게 우리의 자연보호 현실이었습니다. 지키는 것 역시도 우리의 몫입니다. 모든 분들이 공이 적고 많음을 따지지 말고 한마음으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밥 한 그릇이 우주


  일완지식(一碗之食)에 함천지인(含天地人)이라. 곧 ‘밥 한 그릇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무슨 뜻인가? 장일순의 얘기를 들어보자.

  “해월 선생님의 말씀 중에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려면 거기에 宇宙 一體가 參與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어. 宇宙萬物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다 이거야. 밥 한 그릇이 곧 宇宙라는 얘기도 되지. 잡곡밥 한 그릇, 김치 한 보시기 같은 소박한 밥상도 전 宇宙가 참여해서 차려 올리는 밥상이라는 거야. 그러므로 거기에 고기반찬이 없다고 투정하는 건 무엇이 올바르게 사는지를 모르는 엉터리 짓이야.”

  건강한 사람에게는 무엇을 먹든 다 달다. 맛있고 고맙다. 밥맛이 없다면, 밥상 앞에서 고마운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뭔가 크게 잘못 살고 있는 게 分明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야. 요즘 出世 좋아하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出世야. 나, 이거 하나가 있기 위해 태양과 물,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이 地球 아니 宇宙 全體가 있어야 돼. 어느 하나가 빠져도 안 돼. 그러니 그대나 나나 얼마나 엄청난 存在인가. 사람은 물론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도 위대한 한울님인 게지.”

  장일순은 飮食을 가리지 않았다. 外食을 할 때도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거절하는 법이 없이 따랐다. 추어탕도 먹었고, 개고기도 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칼국수였어요.”

  밥상에 무엇이 올라오느냐는 장일순에게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여러 번 보았다. 밥을 먹기 전에 밥상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이던 모습을.

  “밥 한 사발만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해월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우리가 평생 배워 아는 것이 밥 한 사발을 아는 것만 못하다고. 대단한 말씀이지. 이 밥알 하나라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힘을 합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법이야. 하찮게 보이는 밥알 하나가 宇宙를 백그라운드로 삼고 있는 셈이야. 靑瓦臺 빽 좋아하는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밥알 하나, 티끌 하나에도 대우주의 生命이 깃들어 있거든.“

  佛敎의 食事 기도는 이런 내용으로 시작된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萬人의 勞苦가 담겨있다.”

 

- [좁쌀 한 알 장일순]  최성현. 도솔. 2004.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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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을 쏘지 마라"

"위통을 벗어 던진 채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쳐들고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아스팔트를 달리는 청년이 갑자기 카메라에 들어왔다.

1984~1990년 사이 시위현장만 집중적으로 지켜 보았던 당시에 그 동안 찍어 왔던 무수한 사진이 대부분 폭력장면투성이여서 데모 현장 속에서도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 사진이 찍혀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이날,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은 부산 출장 3일만의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80년대 최대의 시위로 불리던 이날 부산 문현동 사거리는 8천여 데모군중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팔이 다탄두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하자 군중 속에서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펼쳐지고 그 태극기 앞에 위통을 벗은 청년이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튀어나온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이거다' 하며 목에 걸고 있던 세 대의 카메라 중 니콘 F2 300밀리 렌즈로 후다닥 2컷을 찍었는데 찍자마자 쳥년과 태극기는 인파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이 영상은 나에게는 하늘이 준 선물이었고 기억에 남는 걸작 사진이 되었다.

그 청년의 절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국가 공권력,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오류와 이 세상을 향애 외치는 양심의 상징 같았따. 이 사회의 폭력, 탐욕, 무지, 저속, 잔인, 부정에 대해서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5공화국과 6공화국의 정치형태에 분노하며 최루탄과 함께 눈물 흘리며 돌아설 때 나는 갈망했다. '이제 다른 사진을 찍고 싶다' 정말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은 이것 뿐인가. 노동자가 임금을 올리고 대학생들이 민주사회를 요구하는 방법이 이것뿐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공권력 모두가 답답하고 울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명진)기자는 특별히 민주화의 현장에 관심을 갖고 시위현장만 계속 다니다 보니 '데모 사진기자'로 소문난 기자였다.

역사적인 현장을 제일선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사진기자는 항상 진압경찰과 시위대의 중앙에서 시달려야한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시위현장에서 방독면과 헬멧, 그리고 사다리, 무전기, 카메라 가방을 메고 시위대들의 돌멩이, 화염병과 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를 피해가면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행위는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 폭력경찰을 사진 찍는 사진기자의 경우 폭력이 가해 오는 것을 각오해야한다. 최루타노가 파편이 피부에 박혀서 병원에 입원도 해야하고 화명병에 화상을 입고 붕대를 동여맨 채 쥐재다는 것도 다반사로 되어 있다.

[ 이 한장의 사진] 해설 전민조. 행림 출판 1994. 114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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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3-0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3.1절.. 이철수님 말대로 미완의 3.1절.. 저...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