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당당한 수타면, 1000인분을 쳐라!


기사입력 2008-07-24 17: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간다 마쓰야

100년 인테리어 분위기 속에 먹는 100년 소바…“사위·딸에겐 절대 가업 못 물려줘”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머릿속에 상상했던 시니세.

6월30일 저녁 8시 땅거미 진 거리에서 바라본 소바(메밀국수)집 간다 마쓰야(紳田 まつや)의 이미지가 딱 그랬다. 농구선수 사이에 선 일반인처럼 현대식 빌딩 사이에 끼인 듯 서 있는 건물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연방 흘러나왔다. 고동색 색감의 목조건물에서 시간과 유행에 완강하게 버티는 고집이 느껴졌다.

상상 속의 시니세와 딱 떨어지는 느낌

상상의 시니세와 현실의 시니세 이미지의 놀라운 일치는 6대손에 해당하는 고다카 다카유키(43)의 외모에도 이어졌다. 앙다문 입술과 180㎝에 90㎏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에는 ‘듬직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렸다. 식당 주방 옆에 1평이 채 안 되는 작업실에서 고다카 다카유키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밀가루 반죽을 쾅쾅 도마에 내리친다. 작업실 사방은 나무칸막이로 막혀 있지만 손님들이 수타면을 만드는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위쪽은 유리로 돼 있다. 반죽을 내리칠 때마다 삼두박근과 상완근이 꿈틀거렸다. 짙은 눈썹의 사내는 내리친 반죽을 봉으로 밀어 얇게 편 뒤 다시 말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조심조심 손바닥만한 철판 모양의 소바칼(소바보초)로 반죽을 썰 때마다 간다 마쓰야의 전매특허인 수타소바가 탄생했다.

왜 시니세를 물려받았느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고다카 다카유키의 대답 역시 교과서적이다. 그는 “어느새 (소바 만드는 게) 내 일이 돼 있었다. 내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버지가 ‘너 이거 해야 된다’ ‘이 길을 가라’ ‘요리사가 되어라’ 이런 말은 한 번도 안 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 일을 돕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다.” 그는 대학 졸업 뒤 3년 정도 다른 일을 경험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다른 소바집에서 요리 수련을 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하려면 대학 졸업 직후 바로 시작하라”는 아버지 고다카 도시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내친김에 자식에게도 가업을 잇게 할 것인지 물었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여전히 웃음 없이 무덤덤하게 “3녀1남인데 아직 누가 이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원하면 이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속으로는 먼저 말해주길 바란다. 자발적으로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다. 아마 한다고 할 것 같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도쿄의 시니세는 서로 알고 지내는 곳이 많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스시코 혼텐의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러나 가족 외 다른 사람이 시니세를 이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고다카 다카유키와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의 철학은 다르다. 고다카 사장이 ‘강경파’라면 스기야마 사장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거울과 계산기까지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

고다카 다카유키는 아들이 가업 잇기를 거부한다면 간다 마쓰야 간판을 내릴 생각이다. 수타면을 직접 만들고 가게를 경영하는 일은 딸들이 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스시코 혼텐처럼 사위에게 가업을 잇게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사위가 계승한다고 해도 맛은 그렇게 쉽게 계승되는 게 아니다. 맛이 달라질 게 불 보듯 뻔한데, 그리고 손님들한테 ‘맛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한데 그걸 그대로 용납할 순 없다”고 말했다. 딸과 사위가 소바집을 연다면 맛에 대한 도움은 주겠지만 간다 마쓰야란 이름은 쓰지 못하게 할 것이란다.


간다 마쓰야는 1884년 후쿠시마라는 성을 가진 평민이 처음 열었다. 23년 간토대지진으로 건물이 다 무너지고 일대가 폐허가 됐다. 간다 마쓰야도 문을 닫을 처지가 됐는데, 당시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고다카 다카유키의 증조할아버지가 이를 인수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고다카 다카유키는 인수자의 4대손이며, 연대기상 간다 마쓰야 창업자와의 나이차를 계산하면 약 6대째에 해당한다.

가업을 잇는 데는 게이오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한 아버지 고다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장남이었다. 대신 동생들은 회계사와 판사가 됐다. 고다카 도시는 “다른 소바집은 일하는 게 힘들어서 장남들이 많이 도망가 차남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은 운이 좋아 계속 장남이 가업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의자와 탁자가 모두 오래된 질감의 목재로 만들어져 있다. 입구에 걸린 거울은 소바집을 인수한 증조할아버지가 술집을 운영할 때 쓰던 100년 가까이 된 ‘보물’이다. 고즈넉하다. 소바를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지금 당신은 100년 넘은 소바집에서 100년 넘은 맛을 먹고 있습니다’라고 일깨워주는 느낌이랄까? 계산대의 독일제 젠마크 계산기 역시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한다. 쇼와 5년(1930년)부터 썼다는 계산기를 아직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고다카 도시는 심드렁하게 “그냥 버리지 않아서 쓴다”고 답했다.

고다카 다카유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성스레 만든 모리소바(찬 소바)는 본가다랑어 국물로 만든 쓰유(간장)에 적셔 먹었다. 짭짤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온면에 해당하는 가시와 난반 국물을 떠넣었다. 첫맛은 약간 비릿했지만, 뒷맛은 구수했다. 가시와 난반의 국물은 ‘고등어 부시’(고등어를 말려 가루로 낸 것) 등 세 종류의 서로 다른 부시(가루)로 맛을 낸다. 자극적이지 않고 웅숭깊었다.

메밀 공급하는 가게와 5대째 관계

100년 넘은 맛의 비결에 대해 고다카 다카유키는 좋은 재료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타법 기술은 면을 기계로 뽑는 다른 소바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간다 마쓰야는 소바 시니세 연합에 속해 있다. 소바집 가운데 3대 넘게 이어진 가게들이 연합회를 만들었다. 이 시니세 연합 안에서도 수타면을 고집하는 곳은 간다 마쓰야를 포함해 서너 곳뿐이라고 고다카 도시는 설명했다. 고다카 다카유키를 포함한 요리사 5명은 손님이 몰리는 토요일엔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1천인분의 소바를 만들어낸다. 좋은 재료는 이번에 취재한 모든 시니세의 기본 덕목이었다. 간다 마쓰야도 메밀을 공급받는 가게와 5대째 관계를 이어간다.

밤 10시.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강경파’들은 어느새 이웃집 아저씨·할아버지로 변해 있다. 고다카 도시는 “시니세 하면 교토다. 도쿄는 시니세가 적다. 교토에서는 100년 됐다고 시니세에 안 끼워준다. 300~400년은 돼야지”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옆에서 험상궂은 고다카 다카유키도 그제야 입가에 보일락 말락 웃음을 띤다. “돈가스 시니세 ‘호라이야’도 취재한다고? 거기 우리도 종종 간다. 고기가 아주 두껍지. 스시코 혼텐에 가면 아들 고다카 다카유키 안부 전해주고, 다마히데(玉ひで)에 가면 내 소식 전해줘!” 떠나는 취재진에게 고다카 도시가 손을 흔들며 부탁했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간다스다초 이치-주산(東京都 神田須田町 1-13). 영업시간 오전 11시~저녁 8시. 토요일 축일(휴일)은 저녁 7시까지. 일요일 정기휴무. 03-3251-1556. www.kanda-matsuya.jp. 기치조지의 도큐백화점에 지점이 있다.

⊙ 대표 메뉴와 가격 : 모리소바(찬 소바) 600엔(6000원), 가시와 난반 950엔(9500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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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가 개척한 ‘돈가스의 성지’


기사입력 2008-07-26 15:1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렌가테이

맛 유지 위해 마요네즈도 직접 만드는 일본 최초의 포크가쓰레쓰 전문점


돈가스는 음식이 아니다. 먹을 수 있는 역사책이다.

돈가스는 프랑스 요리인 코틀레트(영어로 커틀릿)가 변형된 독특한 음식이다. 중국·한국도 똑같이 서양 요리를 접했지만, 돈가스 같은 ‘변형된 양식’을 개발하지 않았다. 오직 일본만이 서양의 음식을 자기 음식으로 변형시켰다.

64년 도쿄올림픽 뒤 인테리어 안 바꿔

코틀레트를 일본인들은 가쓰레쓰라고 불렀다. 원래 프랑스 코틀레트는 송아지나 양, 돼지의 등심과 등심 형태로 자른 고기를 튀긴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코틀레트를 변형시켜 닭이나 쇠고기로 가쓰레쓰를 만들었다. 그 뒤 돼지고기를 쓴 포크가쓰레쓰가 나왔고, 20년 뒤 포크가쓰레쓰가 돈가스가 된다. 일본 음식사가 오카다 데쓰는 저서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에서 일본 최초의 포크가쓰레쓰가 이달 3일 찾은 렌가테이(煉瓦亭)에서 첫선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렌가테이는 ‘돈가스의 성지’인 셈이다.


렌가테이는 19세기 사회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났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거대한 혁명이었다. 농경사회에서 급격하게 산업사회로 변하는 과정은 구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무라이(무사)계급에게는 재난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무라이들의 월급을 가차없이 끊어버렸다. 세상의 중심은 생산이어야 했다. 도쿄 아사쿠사의 가난한 하급 무사 기타 모토지로도 역사의 무한궤도를 피할 수 없었다.

기타 모토지로는 난생처음 노동으로 살아가야 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체격이 작은 이유가 서양인과 달리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메이지 정부도 육식을 장려했다. 기타 모토지로는 ‘고기 요리’가 유행임을 직감했다. 그는 혈혈단신 서양인이 모여 살던 요코하마의 프랑스인 클럽 주방 문을 두드렸다. 프랑스인 클럽은 일본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모여 소식을 나누고 음식을 먹던 연회장이었다. 기타 모토지로는 중국·조선인 동료와 접시를 닦으며 코틀레트를 익혔다. 때마침 요코하마에서 긴자 근처 신바시까지 전차 노선이 생겼고, 1895년(메이지 28년) 기타 모토지로는 렌가테이를 열었다.

렌가테이는 가스등 거리를 뜻한다. 실제로 렌가테이의 조그만 간판에는 창업 1년 뒤 서양화가 손님이 그려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스등이 켜진 긴자 거리에 마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64년 도쿄 올림픽 뒤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았다는 고풍스런 내부가 인상적이다. 도쿄올림픽 때 샀다는 스웨덴제 ‘스웨다’ 계산기가 여전히 계산대를 지킨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의 취재를 경험했다는 3대손 기타 아키토시(74)가 역사 강의를 하듯 능숙하게 레스토랑의 긴 역사를 들려줬다.

2차대전 패전은 렌가테이에도 시련이었다. 긴자 근처에 있던 지점은 미군정에 사무실로 무상 접수 당했다. 주식인 밀가루와 쌀이 배급제라 암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어릴 적 물장구 치던 주변 신바시와 니혼바시(바시는 ‘다리’) 주변 하천이 복개되는 것을 기타 아키토시는 묵묵히 지켜봤다. 80년대 후반 일본 경제의 부동산 버블(거품)은 가게를 팔 생각이 없는 시니세에게는 되레 재앙이었다. 요즘 한국인이라면 천정부지로 솟은 땅값에 얼른 식당을 팔고 차익을 챙기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는 시니세에게 땅값 상승은 재앙이었다. 오른 땅값 때문에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물어야 했다.

기타 아키토시는 중학생이던 열두살 때부터 주방일을 도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혼쭐나 가며 돈가스 요리를 배웠다. 패전 뒤 가스가 없어 코크스(석탄을 정제한 연료)와 석탄을 섞어 땐 불 조절에 진땀을 뺀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여러 대에 걸쳐 후손들이 식당을 잇는 것은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문화다. 일본인들은 ‘장인 유전자’라도 타고나는 것일까? 기타 아키토시에게 “다른 일을 꿈꿔보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그런 게 왜 없었겠냐. 그런데 결국 뒤를 잇게 되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남이 가업을 잇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대신 형제들은 다른 길을 갔다. 동생은 <요미우리신문> 기자였다. 그는 외아들인 4대 기타 고이치로와 손자가 계속 가게를 이어가길 바란다.

돼지기름과 샐러드유 반반씩 섞어 사용



시니세에서는 전통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맛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전통만 먹으러 시니세를 찾진 않는다. 렌가테이에서 여전히 마요네즈를 직접 만드는 이유다. 렌가테이의 1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기름에 있다. 렌가테이에서는 돼지기름(라드)과 샐러드유를 반반씩 섞어 사용한다. 질 좋은 돼지기름을 사서 매일 아침 이를 녹여 돈가스 튀길 기름을 직접 만든다. 엄선한 돼지고기를 쓰는 것은 기본이다. 렌가테이는 50년째 같은 가게에서 돼지고기를 공급받는다. 한 입 베어 물자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촉촉한 돼지고기가 씹혔다. 육즙이 풍성했다. 고슈 지역에서 양조된 ‘렌가테이’ 레이블 와인을 곁들였다. 당도가 낮고 산미 높은 맛이 돼지고기 육즙과 섞여 입 안을 풍성하게 채웠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산초메 고반 주로쿠고(東京都 中央區 銀座3丁目 5番16호) 03-3561-3882·7258.

■ 대표 메뉴와 가격 : 점심메뉴 포크커틀릿 1250엔(1만2500원), 밥·빵 추가 200엔(2000원). 스페셜 포크커틀릿 1450엔(1만4500원). 렌가테이 와인 작은 병 800엔(8000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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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 120년, 비밀의 기름이 끓는구나


기사입력 2008-07-26 16:40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100살 넘은 도쿄 맛집 이야기 긴자 덴쿠니

백 년 된 식당

우나기 덮밥 속에

인생이 있네

도쿄 여름밤

이마에는 땀방울

흐르는 맥주

시니세 취재

요리 얘기 하려다

인생사 솔깃







〈esc〉가 이번호 커버스토리를 취재한 과정을 하이쿠로 표현하면 이쯤 될 것 같다. ‘하이쿠’(俳句·배구)란 한국의 시조에 해당하는 전통 일본시다. 전체 3행 17음절로 구성되며, 각 행은 5·7·5음절로 짜여진다. 하이쿠는 ‘살아 있는 전통’이며 ‘팔리는 전통’이다. 영미권에서 하이쿠 짓기 책도 많이 팔리고 대회도 열린다.

먹거리에서 ‘살아 있는 전통’이자 ‘팔리는 전통’은 후손이 대를 이어 경영하는 시니세, 곧 ‘오래된 점포’(老鋪)다. 식당만 있는 것은 아니고 수공업 제품이나 악기를 만드는 기업, 간장 생산 기업 등 다양하다. 가업을 잇는 독특한 장인문화 덕분에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시니세가 활약한다.

 

 
〈esc〉가 이 중 식당만을 골라 그들의 맛의 비결, 100~200년 넘게 지속한 비결은 뭔지 물었다. 기획 의도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의 식당이 수백년 동안 좋은 맛을 변치 않고 유지했던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명성이 나기 시작하면 문을 닫거나 맛이 변하는 한국의 식당문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둘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일본을 여행하는 독자들에게 작은 여행정보가 되리라 판단했다. 원화 강세 탓도 있겠지만, 2006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수가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수를 앞질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가볍고 짧은 휴가를 즐긴다. 혀의 짜릿한 경험은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넘어, 선대가 만든 식당을 대를 이어 경영하고 거기서 요리하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요리를 먹는다는 것은 탄수화물과 단백질 섭취 행위가 아니다. 만든 사람의 마음과 먹는 사람의 상황이 만나는 문화적 행위다. 따라서 이 기사는 요리기사이면서, 동시에 요리기사가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전통 식당을 모두 취재할 수 없어, 도쿄의 대표적인 식당 일곱 곳을 일본 요리에 정통한 미식가들에게 추천받았다. 튀김(덴푸라)집 긴자 덴쿠니, 초밥(스시)집 스시코 혼텐, 돈가스집 렌가테이, 메밀국수(소바)집 간다 마쓰야, 닭요리집 다마히데, 장어(우나기)집 이즈에이 혼텐, 돈가스집 호라이야가 주인공들이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통역 황자혜 <한겨레21>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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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 덴쿠니 튀김 120년, 비밀의 기름이 끓는구나



포장마차로 시작해 3대 때부터 전담 요리사 고용… 경영자도 간장은 함께 담궈

120여년 된 맛이란 과연 어떤 맛일까?

지난 6월30일 오후 4시. 긴자 한복판에 자리잡은 ‘긴자 덴쿠니’(銀座 天國) 본점(혼텐)의 주방은 후텁지근했다. 처진 눈이 “나 사람 좋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요리장 다카하시 슈헤이(60)의 얼굴에 갑자기 긴장감이 돈다. 능숙하지만 조금 긴장된 손놀림으로 재료를 끓는 기름에 넣은 뒤 땀을 훔친다. 1885년(메이지 18년) 처음 이 튀김집을 연 쓰유키 구니마쓰도 아마 똑같이 소매로 땀을 훔쳤을 게다.

초벌 튀김 뒤 다시 튀기는 건 상상도 못해

긴자 덴쿠니는 헤이닌(평민)이던 26살의 쓰유키 구니마쓰가 부인과 함께 연 튀김(튀김) 포장마차에서 유래한다. 막부정치가 끝나고 메이지유신이 벌어지던 격변기에 그는 다른 평민들처럼 먹고살기 위해 포장마차를 했다. 튀김은 18세기 상공업이 화려하게 꽃폈던 에도(현재 도쿄)의 서민들이 누구나 즐기던 일종의 ‘패스트푸드’였다. 18세기 막부 시절부터 에도의 번화가 곳곳에는 튀김·초밥(스시)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쓰유키 구니마쓰는 현재 본점이 있는 긴자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신바시에서 처음 튀김을 팔았다.

긴자 덴쿠니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3대 손인 쓰유키 나오히코부터다. 쓰유키 나오히코는 도쿄가 ‘한국전쟁 특수’로 패전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던 1952년 사업을 물려받았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쓰유키 나오히코는 긴자에서 포장마차가 아닌 정식 건물에서 처음 식당을 차렸다. 지점도 냈다. 대대로 경영자가 요리를 했던 긴자 덴쿠니는 이때부터 전담 요리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현 경영자는 창업자의 4대손인 쓰유키 모토히로다. 다카하시 요리장은 17살 되던 66년부터 긴자 덴쿠니에서 일했다. 










다카하시 요리장은 100년 넘은 긴자 덴쿠니의 맛을 지키는, 신문사로 치면 논조를 책임지는 편집국장이다. 처진 눈초리는 선량함을 숨길 수 없지만 기자에게 답변하는 느릿한 말투에서 자존심이 묻어났다. 그는 기후현 출신으로 건축자재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몸이 허약해 학업도, 공장일도 포기해야 했다. 일정한 장소에서 서서 일하는 직업을 찾다 덴쿠니를 찾았다. 콘크리트를 섞던 두 손은 뜻밖에 튀김을 건져올리는 일에 천재적이었다. 10년 만에 요리장이 됐다.

대체 ‘일개 튀김집’이 120년을 지속한 비결은 뭘까? 다카하시 요리장 옆에서 답변을 거들던 시미즈 가오루 실장에게서 의외로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은 그 맛 때문”이란다. 다른 시니세의 경우 높은 상속세나 신세대 후손들이 가업 잇기를 거부해 고생하지만, 다행히 긴자 덴쿠니에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3대손부터 후손들은 경영에만 전념했지만, 맛의 비밀을 간직한 간장(쓰유)을 담그는 일만큼은 요리사와 함께 했다.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마치고 난 오후 4시. 다카하시 요리장이 미리 준비해놓은 싱싱한 생선살과 새우·야채 등에 튀김옷을 입히고 기름에 넣었다. 초벌로 튀겨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튀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1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튀김옷에 있지 않다. 튀김옷의 재료는 다른 튀김집처럼 그저 달걀·밀가루·물뿐이다. 비밀은 기름이다. 참기름과 보통 식용유(샐러드유)를 섞어 만든다. 그냥 섞는 게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맞춰야 한다. “당연히 비율은 비밀”이라고 말하며 다카하시 주방장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게 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튀길 때마다 냄비의 기름을 계속 바꿔 준다. 그래야 재료의 신선한 맛을 살릴 수 있다.

두번째는 불 조절과 튀겨진 재료를 건져 올리는 시점이다. 긴자 덴쿠니의 대표 메뉴 가운데 하나는 가키아게(여러 재료를 동시에 튀긴 것)다. 생선·새우 등 서로 다른 재료를 한꺼번에 튀겨야 한다. 재료마다 속까지 익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잠깐 한눈을 팔면 설익거나 타버린다.

덴돈과 모둠튀김의 눅눅하되 구수한 맛

설익지도 타지도 않은 덴돈과 모둠튀김(덴푸라 모리아와세)을 맛봤다. 한국의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바삭함이 없이, 외려 부드러운 식감이 독특했다. ‘눅눅하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구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뒷맛이 좋았다. 흡사 한국의 평양냉면이 주는 맛이라고 할까? 처음 먹을 땐 심심하지만 자꾸 먹으면 빠져드는 그 맛 말이다.

맛집의 기본 조건이라 할 재료 엄선은 그 다음 조건이다. 다카하시 요리장은 요즘도 새벽마다 일본의 노량진 시장인 쓰키지 시장을 찾는다. 그날 쓸 새우·오징어·생선 따위를 직접 고른다. 100년 넘은 맛이라고 1년 된 튀김집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할 수는 없다. 보람 있지만 동시에 지겨웠을 매일의 이 노동이 결국 긴자 덴쿠니의 맛이 100년 세월을 견뎌내게 한 힘이었을 게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 하치-규-주이치 긴자도리 핫초메카도(東京都 中央區 銀座 8-9-11 銀座通り 8丁目角).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 03-3571-1092. www.tenkuni.com.

■ 대표 메뉴·가격 : 튀김덮밥(덴돈) 1100엔(1만1000원). 그 외 야채튀김(야사이 덴푸라), 어패류 튀김, 모둠튀김(덴푸라 모리아와세).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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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8-07-2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안그래도 요즘 점심, 저녁 계속 학교에서 먹어서(먹으라고 강요하면서 건강검진결과가 안좋다고 투덜대시는 선배교사님들은 뭐신지??) 위가 커진 거 같은데, 이런 기사까지 퍼서 옮겨주시다니요 흑흑...

해콩 2008-07-28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땡기죠? 지송함돠. 언젠가는 써먹을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브리니님도 일본 자주 가시죠? ㅋㅋ
 

떡볶이   2008. 7. 8.

조금 맵고 아주 달콤한
떡볶이

분식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호호거리며
먹고 싶어

맵지만 자꾸자꾸
먹고 싶어
돈이 없어 침만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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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재, 언제 떡볶이 한 번 먹자
 

우산  2008. 6. 22.

알록달록
여러 색을 입은 우산

비가 오면 친구들이
알록달록해요

알록달록 학교가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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