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J, 한국언론자유 대참사 우려
 
 

2008년 08월 07일 (목) 08:53:17 백혜영 기자 otilia@pdjournal.com
 

정연주 KBS 사장, 감사원 보고서 정면 반박

감사원으로부터 해임 요구를 받은 정연주 KBS 사장이 6일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 보고서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정 사장은 이 자리에서 “감사원 보고서는 거짓과 왜곡, 자의적인 자료선택과 해석 등 부실하기 짝이 없다”며 7일 해임요구 무효처분 확인소송과 효력 집행정지 신청을 서울행정법원에 내겠다고 밝혔다.


   
▲ <한겨레> 4면 ⓒ<한겨레>
정 사장은 이날 A4 용지 8쪽에 이르는 긴 글을 통해 △현 정권 언론장악 기도의 부당성 △감사원 감사결과의 부당성 △공영방송 독립의 당위성 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한겨레는 “정 사장이 공개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탄압을 비판한 것은 현 정부 들어 처음”이라고 밝혔다.

정 사장은 KBS에 대한 비판에 대해 “언론기관으로서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 이상의 ‘경영성과’가 어디 있겠느냐”며 “대업을 성취한 구성원들의 노력에 말할 수 없는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반박했다.

또 자신의 개인 비리를 찾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까지 조사했지만 감사원은 끝내 아무런 비리도 찾아내지 못 했다고 밝히며 “이번 감사는 역설적으로 KBS의 투명성을 확인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온갖 근거없는 음해와 비난을 당하면서까지 자리를 지켜온 이유는 공영방송의 독립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8일 임시회의를 앞두고 있는 한국방송 이사회가 독립을 파손시키는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경우 역사앞에 죄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이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영방송 사장 ‘해임’이라는 초법적 조처로 치닫고 있다”며 “눈 먼 권력이 일시적으로 공영방송 KBS를 장악할 수 있겠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KBS VS 감사원, 정 사장 경영성적표 진실은

한겨레는 “감사원이 5일 <한국방송> 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연주 사장의 부실 경영의 근거로 재임 4년 동안 1172억원의 사업손실이 발생했다고 지적했지만 한국방송 쪽은 정 사장이 취임한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189억원의 흑자를 냈다고 설명한다”며 정 사장 경영 성적표의 진실을 파고 들었다.

한겨레는 “그 답은 감사원이 ‘당기 순이익’ 대신 ‘사업이익’만을 따로 떼 합산한데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기순이익은 사업이익(영업이익)과 사업외이익을 합한 수치다. 사업외수익은 계열사의 영업실적이나 건물·토지 임대 등 각종 투자 및 재무의사결정에 따른 성과를 포괄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상 최고경영자의 경영실적을 따지는 지표로 무엇이 활용될까?

공인회계사인 이은정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실장은 “최고경영자 평가를 위해서는 사업손익과 당기순이익 모두를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겨레는 전했다. 예컨대 자회사 경영 실적은 사업외손익에 들어가는데 사업손익만 보면 이런 실적에 대한 평가가 누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영신 한국방송 정책기획센터장도 “감사원이 감사에서 기업의 재무상황을 보면서 사업손익만을 본 적이 없다”면서 “감사원이 정 사장의 경영 책임을 묻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업손익만을 부각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중동과 뉴라이트 진영이 주장해 온) 1500억원 적자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천억 이상의 적자를 꿰맞추기 위해 2003년을 뺀 사업손익만을 제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감사원 정 사장 해임 요구 적법성 논란 확산

경향은 “감사원이 정연주 KBS 사장에 대해 방만 경영과 인사권 전횡 등을 이유로 해임을 요구한 것을 놓고 적법성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연 공영방송이 적자를 내고 인사권 행사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비위’로 단정하고 사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냐는 것이다.

현행 감사원법 32조 9항은 “비위가 현저하다고 인정될 때 임용권자 또는 임용제청권자에게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경향에 따르면 감사원이 밝힌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 요구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취임 이후 KBS가 1172억여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방만한 경영을 했다는 점, 자격미달자를 국장으로 특별 승격시키는 등 인사전횡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갑배 전 대한변협 법제이사(변호사)는 6일 “감사원법이 말하는 현저한 비위는 고의성이나 반복성이 있는 업무상 배임 등을 말하는데 감사원의 이번 발표에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경향은 전했다.

그는 “만약 그런 정도로 현저한 비위가 있었다면 먼저 사정기관인 검찰 등에 수사를 의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게 아닌가”라고 반문하고 “사장이 경영상 판단을 잘못했다면 이사회 역시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고 경영상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비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경향에 따르면 감사원은 이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경영관리 12건, 조직인사 5건, 방송시설 11건에서 지적사항이 나왔고 개인비리는 아니지만 기관장으로서 한 행위는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며 “이번 발표는 요약에 불과하므로 곧 전문을 공개해 의혹을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 <경향신문> 4면 ⓒ<경향신문>
KBS 사장 해임, 대통령·KBS 이사회 모두 권한 없어

8일 열리는 KBS 임시 이사회에서 감사원의 정연주 사장 해임 요구에 대한 수용여부가 안건으로 채택된 가운데 경향은 정연주 사장을 대통령이 해임할 수 있는지 여부를 짚었다.

경향은 “KBS 이사 11명 중 7명이 친한나라당 추천 인사들이어서 이변이 없는 한 정 사장 해임안은 그대로 통과될 전망”이라며 “KBS 이사회가 정 사장 해임 건의안을 의결,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하면 대통령이 최종 해임여부를 결정하게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경향은 “이 같은 해임절차는 법적인 측면에서 효력을 가질 수 없어 통과된다 해도 법적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경향에 따르면 현행 방송법은 KBS 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임명권만 갖고 있을 뿐 해임권이나 사면권은 갖고 있지 않다. 방송법이 개정되기 전인 옛 한국방송공사법은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는 권한뿐 아니라 해임할 수 있는 임면권도 갖도록 규정했으나 2000년 개정된 방송법은 임면권에 대한 조항을 삭제했다.

경향은 “KBS 이사회 역시 해임권고 결정을 내리더라도 사장을 해임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은 없다”며 “이사회 내규에도 사장에 대한 임명 제청권은 있으나 해임 제청 및 결의권한은 없다”고 지적했다.

경향은 법조계에서도 “KBS 사장은 방송법에도 나와 있듯이 국가보안법 33조(국가공무원 결격 사유) 위반 혐의에 대해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을 때에만 면직될 수 있다”(김갑배 변호사)는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국제기자연맹, 한국 언론탄압 비난 성명 발표

정권 차원의 정연주 사장 해임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제기자연맹(IFJ)은 5일 ‘한국 언론에 대한 정부의 정치적 간섭’을 비난하는 항의성명을 냈다. 국제기자연맹은 1952년 창립된 국제적 언론단체로, 100여개국 60만명의 언론인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날 연맹은 성명을 통해 “정부의 압력으로 한국방송 사장이 임기 중에 물러나고 대통령의 측근이 사장으로 부임하면, 언론의 자유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한국 기자들의 우려가 크다”며 “또 정부에 비판적 태도를 보인 텔레비전 프로그램(PD수첩)에도 한국 정부가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단 화이트 연맹 사무총장은 “최근 한국 언론사 사장들이 정부의 측근으로 채워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며 “한국이 과거와 같은 억압적인 언론정책으로 회귀한다면, 언론 자유를 거스르는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겨레> 사설 ⓒ<한겨레>


한겨레 “이대로 가면 한국 언론자유의 대참사”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IFJ가 제기한 “한국의 언론자유가 대참사를 겪을 것이라는 우려가 이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예언”이라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에는 감사원·검찰·경찰 등 국가기구와 함께 용역업체까지 총동원됐다”며 “이 과정에선 우리 사회가 애써 가꿔 온 민주화의 관행이나 절차는 물론, 실정법 규정까지 무시되고 있다. 감사원이나 검찰은 정치적 중립성은커녕 전문인으로서의 직업적 엄정성까지 내팽개쳤다는 비판을 받는다”고 꼬집었다.

한겨레는 또 “이미 개별 프로그램에 대해서까지 정부의 간섭과 제약이 공공연하게 가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EBS ‘지식채널e’는 광우병 파동을 다뤘다가 청와대의 전화 뒤 한때 결방됐고, 엊그제는 담당 피디가 보복으로 의심되는 인사조처를 당했다. 대통령을 욕하는 장면이 실린 YTN ‘돌발영상’에 대해서도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고 한다.

한겨레는 “이런 일들이 곧 모든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칼이 된다”며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대참사”라고 탄식했다.

조선, 정연주 사장 노무현 정부 ‘코드인사’ 비난

조선은 6일 열린 정연주 사장 기자회견과 관련 “정연주 사장은 그 자신이 노무현 정부의 코드 인사로 KBS 사장에 임명됐으면서 지금 자신의 자리 유지가 공영방송을 지키는 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선은 “정 사장은 취임 직후 자신의 두 아들 모두 미국 영주권 취득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도덕성 논란에 휩싸였다”는 점을 들고 나왔다.

조선은 또 “정 사장은 취임 후 <인물현대사> <미디어포커스> 같은 이념 성향이 강한 프로그램을 편성하며 ‘코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KBS 노조의 입장을 그대로 전하며 정 사장 사퇴 주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조선은 정 사장이 스스로 용퇴하는 것이 “감사원의 정연주 KBS 사장에 대한 해임요구 결정과 관련해 KBS 노조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전했다.

이어 “KBS 노조는 ‘정 사장 지키기’에 앞장서는 언론노조도 겨냥했다”며 “노조는 6일 논평을 통해 ‘언론노조가 전임 정권이 임명한 낙하산 사장을 옹호하기 위해 전임 정권을 탄생시킨 특정 정당에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지독한 모순’이라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또 KBS 사내 게시판에 ‘정 사장은 스스로 용퇴해야 한다’는 글을 언급하며 “찬반 의견을 남길 수 있는 이 글에 대해 이날 오후 5시까지 찬성 240명, 반대는 50명으로 찬성 비율이 5배쯤 더 높았다”고 전했다.

최시중, 차기 KBS 사장 언급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벌써부터 차기 KBS 사장에 대해 언급하고 나섰다. 조선은 “감사원이 KBS 이사회에 해임을 권고한 정연주 사장 후임 인선에 벌써부터 정치권과 언론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와 정부는 후임에 정치적 논란을 빚을 수 있는 이 대통령의 측근 인사를 배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조선에 따르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6일 이명박 대통령 선거 캠프 출신인 김인규 전 KBS 이사가 차기 KBS 사장으로 거론되는 것과 관련 “전혀 결정된 바 없다”며 “KBS 에 대해선 정치권이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사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감사원의 정 사장 해임 요구에 대해서는 “KBS 이사회에서 수용 여부를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
조선, 사설 통해 정연주 사장 맹비난

조선은 사설을 통해 보다 노골적으로 정연주 사장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조선은 ‘방송 독립 뒤에 숨은 KBS 정연주 씨의 어제와 오늘’이란 제목에서부터 아예 정연주 사장을 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씨라는 호칭을 붙이고 정 사장의 과거 행적을 들어 그를 공격했다.

조선은 특히 “정씨는 자신을 기용해 준 정권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며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로 만드는 데, 건국 원훈(元勳)들을 일제(日帝) 앞잡이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국민의 전파를 이용해 반미·친북의 좌파이념을 온 나라에 확산시켰다. 북한을 드나들며 김일성을 수시로 만난 송두율씨가 대한민국 법정에 서게 되자 두 차례나 다큐를 만들어 ‘민주투사’로 칭송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기사를 통해 <인물 현대사>나 <미디어포커스> 등의 프로그램을 이념 성향이 강한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한나라당의 주된 레퍼토리인 탄핵방송 ‘편파’ 주장도 또다시 들고 나왔다. 조선은 “정씨는 자신에게 사장 자리를 준 정권이 탄핵위기에 몰리자 꼬박 이틀 동안 탄핵 반대 선동방송을 지휘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국민을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 지역과 저 지역으로 갈라놓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나라 경제를 결딴내고 종신 집권을 꾸미는 남미 독재자 차베스를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영웅이자 대한민국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치켜세웠다”고 주장했다.

동아, 감사원 정연주 사장 해임 요구 정당성 주장

경향, 한겨레가 졸속으로 진행된 KBS 감사 결과 발표에 대해 그 문제점을 지적한 반면 동아는 감사원 발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2004년 감사 결과까지 끌어오며 KBS의 ‘방만 경영’ 사실을 강조했다.
동아는 “감사원은 2004년 감사에서도 KBS의 방만 경영을 다각도로 지적했다”며 “조직과 인력, 예산 및 사업 집행 과정의 허술한 관리는 2008년 감사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어 “감사원은 기관장의 부실 경영이 현저하다고 판단되면 해임을 요구한다”며 “지난 감사 때는 정 사장 취임 초기여서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을 합리화하라’고만 요구했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엔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그의 주도로 부실 경영이 초래됐다며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 동아의 주장이다.

동아는 “이번 감사는 2004년 때와 달리 방만 경영의 정도가 심하고 정 사장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 많아 결국 그에 대한 해임 제청 요구로 이어졌다”고 이번 감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광우병 다룬 EBS ‘지식채널e’ PD 보복인사 논란

한미 쇠고기 협상 이후 광우병 관련 방송을 내보냈던 EBS ‘지식채널e’ PD가 최근 다른 부서로 옮겨지면서 보복인사 논란이 일고 있다.

한겨레는 “영국의 광우병 파동을 다룬 EBS ‘지식채널e’의 담당PD가 최근 회사 쪽의 인사 조처로 다른 부서로 옮겨져 당사자와 노동조합이 ‘보복성 인사’라며 반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EBS는 지난 1일 정기인사에서 ‘지식채널e’를 지난 3년 동안 연출해 온 김진혁 PD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린이·청소년팀으로 발령냈다.

영국의 광우병 파동을 다룬 ‘지식채널e’ 프로그램 ‘17년 후’는 지난 5월12일 방영됐으나 청와대 쪽의 ‘방송 내용 문의전화’ 이후 한 차례 결방돼 청와대 외압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한겨레에 따르면 김 PD는 “인사가 난 뒤 바로 부당 인사로 보고 회사 쪽에 이의 제기를 했다”고 밝혔고, EBS 노조도 4일 성명을 통해 “국민의 알권리에 충실했던 담당 PD를 교체한 인사는 보복성 인사이며 경영진의 전형적인 정권 눈치보기”라며 반발했다. 한국PD연합회도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김진혁 PD가 아니라 ‘전화 한 통’에 방송을 중단할 정도로 이명박 정권에 과잉 충성한 교육방송 경영진 등 관계자들”이라며 보복성 인사를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PD수첩 광우병 방송 전 청와대로부터 압력

경향은 “MBC ‘PD수첩’의 김은희 작가가 최근 발간된 ‘월간 방송문예’ 8월호에서 지난 4월 ‘광우병’ 편을 방송하기 전 청와대로부터 압력 전화를 받았다고 폭로해 파문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향에 따르면 김 작가는 기고문에서 “방송이 임박한 어느 날 청와대 모 인사라고 밝힌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며 “그는 제작진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쇠고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공세’ ‘선동’ 운운하는 단어를 썼다”고 밝혔다. 또 “시사 프로그램에 몸담은 지난 10여년간 청와대에서 방송을 앞둔 제작진에게 직접 전화가 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고 전했다.

김 작가는 6일 경향과 가진 전화 통화에서 “지난 4월 25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자신을 청와대 언론비서관이라고 소개한 뒤 민동석 농림수산식품부 차관보를 통해 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면서 “‘TV에서 잘못 보도하면 선동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위압적인 말을 남겼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조사결과 당시 전화를 건 사람은 언론2비서관실에 근무하던 ㅎ 행정관으로 파악됐지만 제작진에 압력을 넣었거나 ‘정치공세’ 등의 용어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구본홍 YTN 사장, 노조원 징계 착수 논란

6일 새벽 기습출근한 구본홍 YTN 사장이 첫 공식 업무로 ‘낙하산 인사’를 거부하며 구 사장 출근 저지 투쟁을 벌여온 노조원 징계 등을 논의해 논란이 일고 있다.

경향은 “YTN 사측이 6일 구본홍 사장의 출근을 저지해온 사원들을 징계하기 위해 인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업무방해 혐의 고발과 근무지 이탈에 따른 징계를 하겠다고 밝혀 노조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향은 또 “구 사장이 최근 청와대에 두 차례 전화를 걸어 자신의 출근 관련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경향에 따르면 구 사장은 5일 밤늦게 회사로 출근, 사장실에서 밤을 지샌뒤 6일 오전 6시쯤 간부회의를 열어 노조원 등의 업무 방해 혐의에 대해 사법처리하기 위해 법률자문과 채증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구 사장은 또 자신의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사장실 등으로 몰려온 노조원들을 ‘근무복귀 거부자’로 규정, 각 부서 간부들에게 해당자들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또 사원들의 직급별 조정을 포함해 승진인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히는 등 사장으로서의 직무수행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에 대해 YTN 노조원 70여명은 이날 오전 8시부터 17층 사장실 앞에서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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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8-08-1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요즘 같아서는 딱 이민 가고 싶다.

느티나무 2008-08-11 22:52   좋아요 0 | URL
무서워요... 이제 서막이 펼쳐지고 있는데... 진짜 광풍은 언론장악 후에 오겠지요. 그 때 우리는 바람에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ㅠㅠ

글샘 2008-08-12 00:05   좋아요 0 | URL
느티나무님, 우리 같이 서울갑시다. 금욜날... 지부서 신청받던디..

글샘 2008-08-11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쉬워야 말이져. ^^ 저같은 국어 선생은 어디 가서 뭘 할갑쇼. ㅠㅜ 해콩샘은 중국 가서 좀 ... ㅋㅋ 정연주 사장을 구속까지 시킬 모양인데, KBS가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봐요. 올림픽 중계고 뭐고 다 거부하고, 종일 뉴스만 하는 거죠. 친일파 때려잡기, 뉴라이트의 실상, 뭐, 이런 것들... 수구 꼴통 군바리 노인네들 뒷돈은 어디서 오는가? 전두환, 노태우 왜 감옥 안 가고 있는가... 이런 거... 뭐, 끝도 없져. 이제 전면전으로 한판 붙을 때가 오고 있습니다.
 


EBS, 광우병 방송 PD ‘인사조치 파문’

2008년 08월 05일 (화) 18:19   고뉴스



(고뉴스=백민재 기자) EBS ‘지식채널e’의 ‘17년후’ 편을 제작한 PD가 1일 사측의 인사 조치로 ‘지식채널e’에서 빠졌다. 이에 한국 PD 연합회가 5일 성명서를 발표, “명백한 보복성 인사”라며 반발하고 나서 파문이 예상된다.

5일 PD연합회는 “EBS 경영진, 이번에는 또 ‘무슨 전화’ 받았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 ‘지식채널e’ 김진혁 PD에 대한 ‘보복성 인사’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5월 방송된 ‘17년후’는 17년 전 영국에서 벌어진 광우병 파동에 대한 내용으로, 인간광우병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방송 이후, EBS 경영진 측이 이틀 동안 방송을 중단시킨 사실이 알려지며 파장을 낳았다. 이유는 당시 청와대 관계자가 EBS에 전화를 걸어 방송내용을 문의했기 때문.

방송 중단 직후 김진혁 PD는 사내 게시판을 통해 정권과 사측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알렸고, 노동조합 등의 반발이 있자 방송은 재개됐다.

PD연합회는 “방송 중단 사태 뒤 EBS 공정방송위원회에서 사측은 EBS 노조에게 유감을 표하며 ‘김진혁 PD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결국 김진혁 PD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또 “이번 김진혁 PD에 대한 인사 조치가 책임을 묻는 보복성 조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김진혁 PD가 아니라 전화 한 통에 방송을 중단할 정도로 이명박 정권에 ‘과잉충성’한 EBS 경영진 등 관계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김진혁 PD에 대한 보복성 인사 등을 계기로 EBS가 교육적인 내용만 방송하는 곳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EBS 경영진이 이야기하는 교육적인 방송이란 ‘지식채널e’ 같이 PD들의 창의성이 돋보이고, 시청자들에게 유용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사라지고 EBS가 ‘수능방송화(化)’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PD연합회는 “우리는 김진혁 PD에 대한 보복성 인사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명박 정권이 방송장악 의도를 노골화하는 이때 눈치 보기로 일관하며 알아서 기는 EBS 경영진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또 “정권의 방송장악 시나리오에는 EBS도 포함되어 있다. 이명박 정권은 아직 임기가 남은 EBS 사장을 끌어내리고 ‘낙하산 사장’으로 누구를 앉힐 것인가까지 이미 정해 놓았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EBS가 정권의 방송장악에 맞서기는커녕 스스로 길들여지길 원한다면 시민사회와 시청자들은 EBS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사진=지난 5월 방송된 EBS ‘지식채널e-17년 후’ 방송화면]




  • [관련기사]

  • ☞EBS 경영진, “광우병 방송 내려라” 외압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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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8-08-0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이 있다니요. http://home.ebs.co.kr/jisike/community/community_bbs.jsp?progcd=0003176&keyfield=&keyword=&menucode=0300&curPage=1&page=1#로 가서 항의합시다.

sooninara 2008-08-07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한심한 짓들을 하는군요. 국민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게 다 딴나라당 찍어주는 무지한 분들때문인듯.
어제 방송에서 부시대통령과 잘사는 미국이 우리나라를 도와주면 도와주었지 뺐어갈리가
없다는 기독교인인 아주머님의 인터뷰를 보고 허걱했습니다.ㅠ.ㅠ

BRINY 2008-08-07 22:45   좋아요 0 | URL
그 아주머니에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바른 것을 골라라 -> 미국의 이기적인 대외정책을 인식하고 반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라는 고교 한국근현대사 전국연합학력평가를 풀어보게 하면 될까요?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로버트 짐머만Robert Zimmerma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밥 딜런Bob Dylan은 라디오를 듣고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며 성장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리틀 리처드의 음악을 알고나서부터 여러 록밴드에서 활동했다. 내성적이던 로버트는 11학년 학예회에서 피아노 옆에 서서 절규하듯 노래를 불러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당시 학교의 교장은 노래가 채 끝나기 전에 커튼을 내려 공연을 중단시켰다. 그의 영어교사의 말에 따르면, 그 다음날 등교한 그는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유행했던 비트족 열풍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우상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의 블루스와 포크가 결합된 음악에 심취했다. 그는 이름을 딜런으로 바꾸고 포크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61년 학교를 그만둔 딜런은 당시 투병 중이던 우디 거스리의 병상을 지키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났고 얼마 후 맨해튼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블루스/포크 커버곡과 새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여 순식간에 그리니치 빌리지의 극성팬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했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그는 이미 포크와 블루스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데뷔앨범 "밥 딜런" (1962)에서 음악적 소양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두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1963)을 통해서였다. 이 앨범은 "블로잉 인더 윈드Blowin in the wind"와 어 하드 레인즈 거너 폴A Hard Rain's a gonna fall"같은 송가를 통해 밥 딜런이 저항세대에 끼친 짧지만 엄청난 영향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는 고전적인 곡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 The Times They Are-A Changin”(1964)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딜런은 반정부주의, 시민권리를 주장하는 운동, 마약 그리고 문화적 불만으로 점철된 갈등의 시대를 산 동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일종의 정치적 표어를 곡으로 썼다. 그 후 이삼 년 동안 그는 포크음악에 변화를 몰고 왔다.



^밥 딜런                           ^프리윌링 밥 딜런

 <더 타임즈 데이 아 어 체인징

 

 

 

그의 다음 앨범, “어나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 Another Side Of Bob Dylan”(1964)은 그의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는 사회적인 이슈들을 버리고, 여자에 대한 큰 쓰라림에 대한 감정들을 표현한 개인적인 노래들을 불렀다. 이것은 팬들이 배반이라고 생각한, 그의 여러 전환들 중 첫 번째 였다. 개인적인 노래들을 위해 항의하는 노래들을 버린 후 그는 락을 위해 포크송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락을 버렸고 다시 태어난 기독교를 위해 유대교를 버렸다.



^어나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음악을 넘어섰으며,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구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또한 그는 로렌스 펄링게티와 앨런 긴즈버그 같은 비트족 시인들이 쓴 재즈적으로 변용된 시들과 공연 중간에 신들린 즉흥 연주를 보여준 기타리스트 척 베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5년에 이해에 그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자 악기로 돌아섰다;-브링잉 잇 올 백 홈Bring it All Back Home’이라는 획기적인 앨범을 발표했다. 그에게 실망한 포크 순수주의자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서브터레이니언 홈시크 블루스Subterranean Homesick Blues’같은 노래는 전작들처럼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 제작자 D.A.펜베이커는 무대 위와 무대 밖에서 딜런의 모습을 촬영하여 <돈 룩 백Don’t Look Back(1965)>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오프닝 장면에서 딜런은 서브터레이니언 홈시크 블루스의 가사가 적힌 여러 장의 큐 카드를 카메라 앞에서 떨어뜨렸고, 앨런 긴즈버그는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어슬렁거렸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네마 베리떼의 특징을 알림과 동시에 뮤직 비디오의 시대를 예고했다.



^브링잉 잇 얼 백 홈                  ^"돈 룩 백"의 오프닝 씬

 

 

 

 

그 후 2년 동안 그는 두 개의 앨범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Highway 61 Revisited”(1965)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1966)를 더 발표했다. 두 앨범 모두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추구하는 그의 의도를 확인시켜주었으며, 최고의 팝 뮤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 “라이크 어 롤링스톤 Like A Rolling Stone” 그리고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Just Like A Woman”같은 곡들은 딜런이 얼마나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지 입증했다. ‘라이크 어 롤링스톤은 이 시기의 가장 성공적인 불후의 명곡으로, 60년대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열렬히 표현하였고 그들의 진심 어린 저항심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것은 세대의 대변자로서의 밥 딜런의 역할의 가장 높은 지점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2004년 가을, 롤링스톤지의 역대최고의 노래 1위를 차지했다. 1965년과 1966년에 두 번에 걸친 세계 순회공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팬이 되었다.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          ^블론드 온 블론드(감독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앨범)

 

 

 

 

1966년 밥 딜런은 오토바이 사고로 목을 다쳤다. 이 사고는 그의 생애의 터닝 포인트였다. 이 사고 후 밥 딜런은 우드스탁의 그의 집으로 사라져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의 아내 사라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이후의 노래들은 밥 딜런의 송라이팅이 변형을 겪었으며 간결하고 더 직설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사고 이후의 첫 번째 앨범 <존 웨슬리 하딩”John Wesley Harding(1968)”은 소란한 락을 버리고 조용하며 더 개인적인 노래들로 채워졌다. “얼 어롱 더 워치타워All Along The Watchtower”(지미 핸드릭스의 리메이크로 유명)’ 진실과 진지함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표현하였다. 영화 음악 팻 가렛 앤 빌리 더 키드Pat Garrett and Billy the Kid(1973)”‘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은 밥 딜런에게 최초로 미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게 했다. “블러드 온 더 트랙스Blood on the Tracks(1975)”는 오랫동안 컴백을 기다리게 한 그의 첫 번째 차트 1위의 앨범이 되었고 뒤이어 두번째 앨범 디자이어Desire(1976)”이 나왔다. 다시 한번 그는 정열적으로 열중하여 음악을 하였다.



^존 웨슬리 하딩                    ^팻 가렛 & 빌리 더 키드

 

^블러드 온 더 트랙스             ^디자이어

 

 

 

 

1970년대 말에 딜런은 기독교적 성향이 아주 강한 일련의 세 음반 중 첫 음반인 슬로우 트레인 커밍Slow Train Coming”(1979)를 발표했다. 1980년대 초반에 딜런은 유대교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뒤 실망스러운 앨범들을 발표했으며-그러나 인피델스 Infidels”(1983), 메르시Oh, Mercy”(1989)는 예외였다-엉뚱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점점 늘었다. 그러나 이른바 네버 엔딩 투어라고 부르는 전국 순회공연을 위해 계속 옮겨다녀야했던 딜런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순회공연에서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즈나 그레이트풀 데드 등과 공동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슬로우 트레인 커밍



^인피델                              ^오 메르시

 

 

 

 

80년대 그는 여기저기 많은 곳에서 투어를 했고, 90년대에는 그의 노래들이 새로운 청중을 찾았으며 음악계에서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1991년 그는 그래미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그의 1997년 앨범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는 그래미에서 세 개의 상을 받았고, 그리고 2001년 영화 <원더 보이즈Wonder Boys>(2000)에 삽입된 음악 모든 건 변했어Things Have Changed’로 밥 딜런은 오스카상을 받았다. 2006 65세의 나이에 발표한 그의 모던 타임즈앨범은 다시 한 번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사랑 받았다.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              ^모던 타임즈

 

 

 

 


"모던 타임즈"의 수록곡 "웬 더 딜 고우즈 다운When The Deal Goes Down"의 뮤직 비디오엔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http://www.sonybmg.com/musicbox/video/bobdylan/ 에 방문하셔서 위에서 세번째 When The Deal Goes Down을 선택하시면 뮤직 비디오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아임 낫 데어>에 이 영상과 흡사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참고문헌: <아임 낫 데어> 공식 프레스북, <아이콘> (바버라 캐디 지음 인희 옮김 거름.)


[출처] 밥 딜런의 역사|작성자 밥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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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3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잘 지내시죠?^^
어제 '아임 낫 데어'를 봤어요. 참 좋더군요. '아이콘'을 사서 읽어볼까봐요.
밥 딜런의 시적인 노랫말이 좋아요. 자료가 반가워 들어왔는데 사진들이 모두 액박으로만
보여요. 님 ^^

해콩 2008-07-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붙여넣기 할땐 분명 사진 보였는데 이게 왠일? ㅜㅜ 제겐 이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밥 딜런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싶었어요. ^^; 사진은.. 어디 가서 찾죠? ㅠㅠ
 

한겨레

출소하자마자 ‘오야코돈부리’부터?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다마히데

200년 전통 닭요리집의 그 전설적 메뉴,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200년 넘은 닭요리집 다마히데(玉ひで)는, 장어(우나기)를 요리하는 이즈에이 혼텐(伊豆榮 本店)과 함께 가 취재한 시니세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다마히데는 18세기 막부 시절 도쿠가와가를 수행하던 하급 무사 야마다 데쓰에몬이 ‘투잡’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야마다 데쓰에몬은 도쿠가와 가문이 사냥에 앞서 학의 목을 치던 의식을 담당하던 하급 무사였다. 학의 긴 목을 칼로 내리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급 무사의 봉록만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그는 1760년 다마히데를 창업했다. 8대손인 야마다 고노스케(47)는 “아마 학을 죽일 때 칼을 쓰셨던 분이니까 닭요리를 하는 게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의 목을 치던 무사의 후손이 닭을 치다

애초 다마히데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1883년(메이지 16년) 무렵 4대손이 본점을 유지한 채 현재의 위치에 지점을 만들어 5대손에게 물려줬다. 2차대전 때 미군이 도쿄 공습을 감행할 당시 원래 자리에 있던 본점은 불탔고 5대손이 경영하던 지점이 외려 본점이 됐다.

어쨌거나 반경 300미터 안에서 200년 넘는 세월 똑같은 식당이 한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한국의 수원화성도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말에 지어졌다. 그 뒤부터 수원 토박이라면 몇 세대에 걸쳐 “○시에 수원화성 앞에서 만나자”고 말해 왔을 것이며, 몇 세대에 걸쳐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가 수원화성에 나들이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게다. 지역주민의 피부와 일상에 각인된 존재인 셈이다. 마치 수원화성처럼 지역주민들의 입맛을 책임진 시니세 다마히데의 존재감은 ‘참을 수 없게’ 큰 게 아니었을까?


야마다 고노스케 사장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전혀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이지 않는다. “언제 처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느냐”고 묻자 대뜸 “이야이야 주산사이”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싫어, 열세 살”이라는 말이다. 가업을 잇기 너무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중학교 때 일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직업으로 가업을 잇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 땐 요리와 무관한 매스미디어 이론과 노동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공부는 안 하고 마작만 했다. 졸업하고 할 게 없어서 가업을 이었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가업을 잇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결정은 누가 했을까? 주어를 알 수 없는 수동태의 문장에 스스로의 우유부단을 감춘 것이 아닌가 못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하기 싫으면 그만인데 왜 하느냐”고 짐짓 추궁하듯 질문을 던졌다. 얼굴에 장난기를 거둔 야마다 사장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어릴 때 왜 내가 가게를 이어야 하는지 몰랐다. 내 주변에 가부키 배우의 자식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나는 우리 집 가업 잇고 싶지 않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었냐?’고 물었다.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정말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자식들이 태어났다. 첫딸을 낳았을 땐 주위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그저 ‘축하합니다’라고만 했는데 아들이 태어나니 주변에서 던진 첫마디는 ‘아, 이제 얘가 9대째가 되는군요?’였다. 하루는 아버지(야마다 고지)가 손자를 안고 동네를 돌았다. 닌교초 거리의 사람마다 아버지를 보고 ‘아~ 이 아이가 9대째군요?’라고 묻더라.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냈더니 유치원 선생님도 아들을 보고는 ‘아, 네가 다마히데의 9대손이구나’라고 말하더라.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도 어릴 때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에서 다마히데 가업을 잇도록 만든 거구나라고 말이다. 그걸 내 아이를 보며 알게 됐다.”

‘에도시대의 맛’으로만 굳어질까 두려워

그러나 그는 자식에게 가업을 잇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는 ‘신세대’ 아버지다. 아들이 물려받기 바라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아들이 가업을 이을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건 자신의 능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솔직히 가업 이어받으면 편하다. 계승하는 순간 유명인이 된다. ‘네가 이걸 해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식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게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그건 내 책임이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내 자식이 가업 잇기를 거부할 땐 내 여동생의 자식이나 다른 친척이 가업을 이어도 좋다. 다마히데라는 것만 계속되면 된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른 친척도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을 땐 다마히데의 간판을 내릴 계획이라고 그는 말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손님에게 얽힌 추억이 없을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다시 영화화한 영화 <자토이치>의 원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가쓰 신타로라는 영화배우는 1990년대 초 범죄에 연루돼 교도소에서 잠시 복역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집에 가는 대신 다마히데로 달려왔다. 도쿄 시내를 곡예 주행하며 교도소 앞에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자들을 뿌리쳤다. 현관에서 야마다 사장과 눈이 딱 마주친 가쓰 신타로는 웃으며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며 오야코돈부리(닭고기덮밥)를 욱여넣었다.

야마다 사장은 요리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최고급 일본요릿집 하마다야 등 여러 요릿집에서 3년 넘게 요리 수행을 했다. 요리를 하면서 그가 겪는 어려움은 무게감이다. 다마히데가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이기 때문에 ‘다마히데의 맛=에도시대의 맛’처럼 돼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다마히데의 맛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는 게 힘들다고 그는 털어놨다. 사람들은 오로지 전통만 먹으러 식당을 찾지 않는다.

2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와리시타에 숨어 있다. 와리시타는 오야코돈부리나 닭고기전골(스키야키)에 사용되는 소스다. 미림(소주에다 찐 찹쌀과 쌀 누룩을 넣어 양조한 조미료)과 쓰유(간장)를 어떻게 섞느냐를 가지고 다마히데의 독자적인 맛을 표현해야 한다.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신선한 닭고기를 쓰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80년부터 도쿄도 내의 한 축산장과 공동개발 협약을 맺고 닭을 직접 기른다. 달걀은 한 가게에서 35년째 공급받고 있다. 축산 개발한 닭 외에 닭고기를 구입할 땐 거래관계가 100년 넘은 업체에서 공급받는다. 한국인이 ‘영계’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다마히데의 닭은 170일 넘은 투계 품종을 쓴다. 쫄깃한 질감이 닭고기의 생명이라 믿는 까닭이다.

오야코의 ‘오야’는 어머니이고 ‘코’는 아들이란 뜻이다. 달걀이 닭의 자식이므로 닭고기와 달걀이 함께 들어가는 덮밥을 오야코돈부리라고 일컫게 됐다. 오야코돈부리를 한 입 떠넣자 기자와 사진기자, 통역 모두 입 맞춰 “한국에서 장사하면 대박 나겠다”는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적당히 달큼하고 적당히 짭조름한 고기를 씹으며 기자는 ‘인간적인 맛’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닌교초 이치-주시치-주(東京都 中央區 日本橋 人形町 1-17-10).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오후 1시, 오후 5~9시. 토요일은 오후 4~8시. 일요일·휴일 휴무. 03-3668-7651.

⊙ 대표 메뉴와 가격 : 오야코돈부리 1300엔(1만3000원). 단, 오야코돈부리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점심때뿐이다. 이 밖에는 모두 코스요리다. 투계 스키야키 코스요리는 5800엔(5만8000원)인데, 오야코돈부리는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오야코돈부리가 포함된 코스요리는 1만1000엔(11만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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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885년부터 그냥 알아서 줘요”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스시코 혼텐

메뉴판이 없는 희한한 맞춤초밥집… 나이·성별·국적 따라 크기·모양이 달라



주토로(참치 옆구리살)가 길게 밥을 덮고 있다.

밥의 양이 턱없이 많기 십상인 한국의 초밥과 다르다. 입에 넣자 주위는 금세 명품거리 긴자가 아니라 도쿄만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스시코 혼텐(壽司幸 本店)의 점심 코스는 요리사가 서로 다른 재료로 직접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초밥으로 이어졌다. 가자미, 오징어 초밥으로 이어진 코스는 성게 초밥에서 금세 절정에 달했다. 혀는 개펄이었고 개펄로 밀물이 몰려왔다. 흰새우, 아나고(붕장어), 고히다(중간 크기 전어), 다마고야키(달걀), 표고버섯, 참치살 마구로가 심처럼 박힌 데카마키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1인분이었지만, 조금 더 달라고 말하자 이쿠라(연어알), 새우, 가다랑어 초밥이 더 나왔다. 2008년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이 스시코 혼텐에 별 하나를 주며 “에도마에 스시(에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초밥)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고 찬양한 맛이다.

까다롭고 까다로운 최상급 쌀 확보작전

창업자의 4대손인 스기야마 마모루(55)에게 요리 비법을 묻자 그가 되묻는다. “쉰 살 남성과 그의 20대 딸과, 여든 살 할머니가 가게를 찾았다. 초밥의 크기가 똑같을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기야마 마모루는 날카로운 학자 인상이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50대 남자의 초밥이 이 정도 크기라면 20대 여성에게는 그것의 3분의 2 정도로, 할머니에게는 그보다 더 작게 만들어 준다고 설명했다. 손님에 따라 고추냉이의 양, 밥의 양, 생선 크기도 다 달라진다. 여성 가운데 고추냉이에 약한 손님이 올 땐 그 양을 줄인다. 이런 ‘맞춤 요리’는 서양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서양인들은 젓가락질이 서툴러 초밥이 부스러지기 쉬우므로 밥을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지어 생선과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이 ‘맞춤 요리 철학’에서 따로 가격표를 만들지 않는 스시코 혼텐의 정책이 태어났다. 그러니 〈esc〉를 따라 시니세 여행을 온 독자는 스시코 혼텐에 갔을 때 메뉴판이 없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달 2일 스시코 혼텐을 방문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지만, 내부의 조도는 낮아 아늑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떤 식재료도 전시하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왔는데 메뉴판도, 전시된 음식도 없다면 손님은 어떻게 주문할까? 그냥 ‘알아서 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처음 온 분도, 열 번 이상 온 분도 그날 먹고 싶은 게 다를 수 있고, 매일 들어오는 생선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 1대 창업자부터 가격표가 없었다고 한다. ‘맞춤 초밥’에 질 좋은 생선은 기본이다. 같은 업자로부터 50년 넘게 생선을 공급받고 있다. 최상급 쌀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한 쌀 산지의 농가 서너 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그해 가장 작황이 좋은 쌀을 공급받는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손님에게 많은 돈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점심 코스가 일인당 약 9000엔(약 9만원)이니 싸지는 않다.

1885년(메이지 18년) 스시코 혼텐을 창업한 1대 역시 메이지유신으로 월급이 사라진 하급 무사였다. 하급 무사는 먹고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칼을 놓고, 사람을 먹이는 칼을 잡았다. 첫 자리는 긴자가 아닌 신바시였다. 1952년 긴자로 옮겼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삼형제 중 막내여서 자신이 가업을 이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돈 많이 드는 골프 동아리 활동비를 대려고 주방에서 잠깐씩 일했을 따름이었다. ‘예정대로’ 장남인 큰형이 초밥을 만들었지만, 덜컥 몸이 아파 드러누웠다. 둘째형은 이미 취직해 직장인이었다. 아버지 스기야마 야스조는 셋째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랐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그는 2대손의 사위였다. 가업을 잇길 바라는 장인의 뜻에 따라 성을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양자가 됐다.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스기야마 마모루는 처음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서른여섯 되던 90년대 초반부터 경영을 책임졌다.

재산은 다 타버려도 손님은 남더라

53년생인 그는 단카이 세대(47~49년 태어나 60년대 후반 격렬한 좌파운동을 경험한 세대)에 가깝다. 아버지와 사고방식이 다르다. 딸만 둘인 그는 “아버지는 ‘내가 양자니까 여기를 망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본류(아들)니까 상황이 안 되면 끝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어도 된다.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시니세가 지속되는 비결을 물었다. “23년 간토(관동)대지진, 전쟁,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물게 된 엄청난 상속세.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시련이었다. 90년대 초 상속세를 지급하지 못할 상황이 닥쳤다. 그때 내게 남은 게 딱 하나 있었다. 손님들이었다. 손님들은 간토대지진 뒤에도 일부는 살아남았고 전쟁 뒤에도 예전 손님의 3분의 1은 찾아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손님이 바뀌기도 했지만, 중심적인 손님들이 있었다. 손님들이 와준다는 건 맛도 있겠지만 우리 집을 신용해주는 것이도 하다. 재산이 타버린다 하더라도 손님은 남아 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칼을 잡았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산반 하치고(東京都 中央區 銀座6丁目 3番8호).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30분. 03-3571-1968.

■ 대표 메뉴와 가격 : 일인당 점심 약 9000엔(9만원), 저녁식사 2만5000엔(25만원). 정해진 메뉴판이 없어 가격에 변동이 있으며, 대개 이보다 덜 나온다. 1만엔(10만원) 수준의 와인을 중심으로 와인 리스트도 갖추고 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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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实 2008-08-29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很好啊

해콩 2008-08-2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眞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