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그리고 나니, 어느새 야스쿠니 반대 전사가 됐네요"
[인터뷰]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 국미란, 정은숙, 남동윤
 

박상희 기자   박상희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8월 15일, 일본에겐 특별한 날이다. 지난달 29일 참의원선거에서 자민당 패배라는 고배를 마신 아베 신조 총리가 패전일인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것이냐는 또 다시 한국과 중국에선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 결과로 국내가 뒤숭숭한 일본에서 아주 특별한 학생들을 만났다.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 출판만화전공 국미란(00학번 4학년), 정은숙(05학번 3학년), 남동윤(01학번 4학년) 학생 ⓒ민중의소리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 학생 3명이 그 주인공들. 평소 시사만화 시간에 제작해왔던 작품들 중에서 한국인 2만 1여명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관련 기사를 보고 그린 풍자 카툰 작품을 모아 일본 사회에 보여주겠다는 게 이들이 일본행을 결정한 이유랄까. 7월 31일부터 8월 8일까지 히로시마-나가사키-오사카-교토-도쿄 등을 순례하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2007 Peace Tour Japan>에 참가한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 출판만화전공 국미란(00학번 4학년), 정은숙(05학번 3학년), 남동윤(01학번 4학년) 학생들은 만화가인 고경일 전공교수와 함께 ‘NO! 야스쿠니 풍자만화단’을 구성, 오는 7일까지 도쿄에서 야스쿠니 합사와 관련된 풍자 카툰 작품 2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4일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국제연대를 통해 인간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일본 시민운동의 축제인 <평화와민주주의를향한전국교류회> 자리에서 전시는 물론, 현장에서 캐리커쳐도 할 예정이라 준비가 분주한 이들을 3일 만났다. 예술인들은 작품으로 말을 한다고 했던가. 그림들을 보니 이 사람들, 실력들이 보통 내기들이 아니다. 국미란, 정은숙씨의 캐리커쳐는 혀를 내두를 정도. 특히 남동윤씨는 현재 월간 <인물과 사상>과 월간 <사람>에서 만화 연재를 하고 있고, 오는 10월부터는 <작은책>에서 연재를 하기로 했다. 고경일 교수가 이 학생 세 명 모두를 쉴 새없이 칭찬할 만 하다.
  
  세 학생의 공통점은 잘 몰랐던 야스쿠니 문제를 이번에 그리게 된 야스쿠니 그림을 통해 많은 공부를 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에겐 어찌보면 관심없는 재미없는 주제였을지 모를, 야스쿠니 문제를 이들은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
  
  
 
   
△ 정은숙씨 ⓒ민중의소리  
   

 은숙: 시사만화 전공 수업 시간에서 격주로 주제에 맞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어요. 야스쿠니에 관련된 주제는 5월말쯤 나왔죠. 여러가지 자료를 봤지만 교수님이 보여주신 <안녕, 사요나라> 영화는 많은 공부를 하게 했죠. 며칠 걸려 작품을 완성했는데 교수님이 일본에 그것을 전시하자고 하시더라구요.
  
  미란: 졸업작품을 앞두고 있어서 솔직히 부담은 됐었어요. 하지만 학생이라면 공부하면서 지성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에 야스쿠니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죠. 야스쿠니에 대해 말만 들어봤지 공부를 제대로 해 본적은 없거든요. 일본에 행사가 있는데 역사 공부할 생각있느냐고 고 교수님이 물어보셨어요. 공부하겠다고 했더니, 교수님이 그럼 일본 가는 김에 만화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가지말고 그림을 그리자고 하셨죠.
  
  동윤: 교수님이 처음 <안녕,사요나라>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보고 야스쿠니에 대해 접하게 됐어요. 공부하기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지금생각해보니 타카하시 테츠야 교수님이 말했던 '야스쿠니는 연금술'이라는 그 말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요. 과연 합사당한 일본 병사들도 행복했을까? 그 사람들도 같은 피해자가 아닐까? 마약같이 속아서 한 전쟁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라는 등의 고민을 해보면 그들도 모두 전쟁 피해자거든요.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게 가장 위험한 것 같아요.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어요.
  
  그림을 한 번 보자.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그림 한 컷에 담긴 야스쿠니의 본질. 한 컷으로 야스쿠니를 말한다는 것이 만화에 대해 모르는 기자로서도 어려울 것이라는 걸 실감할 것 같았다.
  
  
 
   
△ 국미란씨 ⓒ민중의소리  
   

 미란: 아이디어만 짜는데 15일정도 걸렸어요. 그리는 건 몇 시간 안 걸리는데 말이죠. 어떻게 재미를 주고 메시지를 줄 것인가하는 감이 잘 안오더라구요. 한번은 메모지를 머리 맡에 두고 자다가 꿈에서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메모지에 적어놓고 또 자고 했었는데요. 근데 일어나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게 쓰여있는 거에요. (웃음)
  
  사실 야스쿠니에 대한 카툰이 많이 나왔었어요. 작년에 세이카 대학에서 '돌창고'라는 만화를 공부하는 시사만화 그룹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전시회를 크게 한 적도 있거든요. 야스쿠니가 쉬운 주제가 아니잖아요. 이번에 낸 그림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만화적으로 표현할까', 또한 '다양한 연령층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시사만화의 매력인데' 라는 고민이 참 많았죠. 야스쿠니가 큰 덩어리의 주제가 엉켜있다보니 하나를 꼽는게 쉽지 않더라구요.
  
  제가 그린 그림의 의미요? 음, 하나는 해골(A급전범)과 아베 총리가 전통혼례 의상을 입고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빨간 융단 위에서 혼례를 하는 그림인데요. (그림을 가르키면서) 일본 전범 자민당 둘 사이가 공생관계,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과거 전쟁을 일으켰던 세력들이 지금까지 온 세력들이라고 생각해요. 총리는 물론 자민당의 의원들이 참배하는 것은 과거 당신들이 해왔던 것을 인정해주겠다는 뜻이잖아요. 조상들은 범죄를 저질렀던 주범인데도 불구하고, 과거를 긍정해주고 인정을 해준 것이 현재 아베 내각이니까요.
  
 
△국미란 학생 작품 ⓒ민중의소리

  그래서 결혼 그림은 서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조를 지키겠다는 아베 총리와 A급전범의 결합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 그림의 이름이 <천생연분> 이구요. 또 하나는 아베 총리가 기생으로 A급 전범에게 차를 따르는 그림인데요. 기생은 몸을 파는 것이잖아요. 물주를 위해 아부를 하는 것인데 자세히 보면 아베가 따르고 있는 것이 피와 유골이에요. 아베의 일그러진 얼굴은 코믹하면서도 그의 신사 참배 등과 같은 일련의 행동들을 비꼬기 위한 것이구요.
  
  동윤: 저도 아이디어 짜는데 12일정도 걸렸어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쉽게 일반 사람들이 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접근했는데요. 시사만화라는 자체가 내용을 제대로 정확히 알아야 이해하고 또 그것이 만화에 나타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렸죠.
  
  
 
△남동윤 학생 작품ⓒ민중의소리

  먼저 그림은 고이즈미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그네를 타고 있는 아베 총리를 밀어주는 것인데요. 아베 총리가 고이즈미 전 총리의 후계자이잖아요. 밀어주는 것이 뒤에서 지지해준다는 의미에요. 조용하던 문제가 고이즈미 전총리의 참배로 인해 점점 커지고 또 그것을 아베 총리가 받아 참배를 하고 있잖아요.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노무현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밑에서 비난을 하고 있구요. 두번째는 고이즈미가 꼬마 아베에게 야스쿠니 장난감 세트를 선물하는 것인데 채색방법을 좀 다르게 심플하게 표현했어요. 아베 총리는 멍하게 아이처럼 앉아있는데 받고 있고, 고이즈미 총리는 비웃으면서 야스쿠니를 건네는 그런 설정이죠.
  
  
 
   
  △ 남동윤씨 ⓒ민중의소리
   

 그동안 그림을 그려오면서 대부분 국내 사회 문제를 많이 접했었어요. 야스쿠니 문제로 처음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야스쿠니 문제는 사실 일반 대중들이 제일 관심을 가질 문제이면서도 잘 모르는거든요. 한국인들이 강제 징용 당한 것도 모자라 강제 합사당한 것이 근본적인 큰 문제점이잖아요. 만화를 그린 다른 친구들은 그것에 초점을 많이 맞췄는데 그것과 다르게 저는 인물을 중심적으로 해서 표현했어요.
  
  죽어서까지 영혼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죠. 아무리 해방됐다고 해도 그분들은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빨리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미약하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도와드리는 차원에서 만화를 그렸어요. 시사 아마추어이고 또 시작한지 얼마 안됐지만 야스쿠니는 알릴 수 있는 방안에서 최대한 알리고 싶은 문제에요. 또한 제 2,3의 야스쿠니가 생기지 않기를, 전쟁에 목숨거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왜 우리 병사들을 강제로 합사하고, 또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그것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일본 병사들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을 일본 내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숙: 저는 끊임없이 이어오는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첫번째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받아서 이념들에 의해 계속 지배당하는 민중들, 끝없는 지배 속에서 암울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을 그리고 싶었는데 약간 공포스럽게 표현된 것 같아요.(웃음) 미란 선배는 문제를 돌려서 비판해 재미있게 읽어가는 재미를 주는 것 같은데 저는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 같아서... 희생자들 포함한 현재 일본 민중들 위 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배하는 모양새에요.
  
  
 
△정은숙 학생 작품 ⓒ민중의소리

  도조 히데키, 고이즈미, 아베 로 이어지는 얽힌 구조를 말하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유치원생들이 야스쿠니에 소풍을 가서 고이즈미와 야스쿠니의 토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인데요. 카메라의 뷰파인드로 비쳐진 장면이 한 컷이에요. 뷰파인더로 보면 귀신이 찍히는데 그것이 전범들이 칼과 총을 들고 순수하게 웃고 있는 아이 뒤에서 웃고 있죠. 사실 저도 그런데, 저와 같은 젊은층들은 일본에 대한 관심 높고 우상적이고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 있잖아요. 제가 그린 그림으로 큰 바람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일본내 이슈가 돼서 많은 사람들이 야스쿠니 본질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런걸 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아픔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동윤: 전시회는 조금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목소리의 한 형태에요. 만화는 메세지를 쉽게 전달할 수도 있고, 또 신선하게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카툰을 일반사람들이 보고 '이런 문제가 있었구나'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효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란씨와 은숙씨는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공개편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미란씨는 "야스쿠니 문제가 워낙 큰 문제이다보니 편지를 쓰는데도 쉽지 않았다"면서, "감정적으로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미란: 편지에 이렇게 썼어요.“우리는 피해국으로서 더 이상 수치감 갖고 시피 않고 너희도 알지 못하는 전쟁에 짐을 지고 싶지 않을텐데 이제는 자기말만하지말고 들어보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전쟁일어나서는 안되고 전쟁 단어 알아서도 안되고 몰랐으면 좋겠고 일본 젊은이들이 좀더 선거할 때 관심갖고 했으면 좋겠 다. 그 친구들이 표를 분산시켜줘도 자민당 같은 의원들이 점거하지 않았을까. 감정 소모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질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이에요.
  
  은숙: 우리 세대가 부모님한테 주입을 많이 받았던 세대잖아요. '일본 것을 좋아하지 마라'는 등의 반일감정 같은 거 말이에요. 그 때문에 일본의 문화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부모님하고 충돌이 있기도 했거든요. 그러나 야스쿠니 문제를 놓고 보면 정말 옛날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어져 오고 있고, 또 피해자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게 관심 가지면 알 수 있는 문제인 것이잖아요. 해결되면 세대간의 감정들도 우호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귀기울여 노력하면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민중의소리




2007년08월05일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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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칼럼] 윤한봉 형, 그는 갔다
홍세화 칼럼
 
 
한겨레 홍세화 기자
 


 

» 홍세화 기획위원
 
그는 갔다.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는 갔다. 끝내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일까, 민중을 온몸으로 사랑했던 그가 말없이 먼저 떠났다. 뻔뻔한 자들이 번들거리며 활보하는 땅을 그가 앞서 떠났다. 옆에서 그를 지켜본 지인은 말했다. 미국에 망명자로 있을 때보다 귀국한 뒤 더 답답해했다고. 김남주 형이 출소 후 더 답답해했듯이, 그는 귀국 후 더 답답해했다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가슴앓이는 귀국하면서 심해졌다고. 그가 숨쉬고 싶은, 5·18의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만큼 그의 폐기능이 사라지고 만 것이라고.

윤한봉, 그는 말했다. 5월의 상처는 기억만 할 게 아니라 그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을 끊임없이 오늘 되살려야 한다고. 그것만이 죽은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그것은 민주주의처럼 우리가 조금 다가가는 듯하면 저 멀리 물러난다.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엔,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억압당하는 민중과 함께 하기엔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실은 우리에게 적절한 선에서 명분도 챙기고 실리도 챙기라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그는 그런 현실에 끝까지 저항했다. 나이 먹는다는 것이 민중성 추구가 아닌 현실 추구 편에 친화력을 가진다면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나이 먹기를 거부했다.

일그러진 현대사, 일제 침탈과 민족상잔은 이땅 곳곳에 배반의 씨앗을 뿌렸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억울함조차 신원하지 못할 만큼 잘못된 힘의 역학관계가 자리잡은 곳, 그래서 민족 반역자든 반민주의 범죄자든 스스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거꾸로 용서와 화해, 상생을 먼저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이 잘못된 힘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올바르게 바꾸도록 항쟁정신으로 맞서야 하건만 타협이라는 쉬운 길을 택함으로써 용서를 구할 잘못을 저지르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운 역설의 땅이 되고 말았다. 5·18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답답한 가슴으로 쓴소리를 던져야 했던 이유였다.

현실에 영합한 자는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현실의 어려움을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현실성 없는 요구라고 간단히 치부하는 과거 운동권 인사들이 바로 그 현실을 구성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모른 체한다. 디제이 집권 이후 정치권에서, 혹은 5·18을 기념하고 사업한다면서 실리를 챙기려는 자들 사이에서 대동정신을 외친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십여 년 전, 나는 그를 독일 땅에서 처음 만났다. 같은 망명자 처지의 동갑내기.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는다”,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도피 생활을 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의 원칙을 지킨 사람. 유약하기 그지없고 먹물 근성을 버리지 못한 나를 부끄럽게 했던 사람, 그러나 그는 본디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마음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배반의 땅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

왜였을까? 그를 마지막 보내는 곳에서 나는 어색했다. 그에게 추서된 국민훈장 동백장이 낯설듯이. 그 자리에 온 공인의 숲에서 잠시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닐 듯. 그 외로움이 그와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에서 온 것이기를. 그가 지핀 들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을, 눈빛으로 나누었던 그 약속을. 그는 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정신을 떠나보낼 수 없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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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Godiva


그림이나 사진에 작가가 담아두고자 하는 주제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인간의 삶과 내면을 표현하게 된다. 또 더러는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
작가 특유의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런 모든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그 영상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과 이야기를
시간와 공간의 제한없이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욕심 많고 힘있는 자들이 대접받는 어수선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오히려
맑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순수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더 그러워지곤 한다.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외모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 고다이버.

역사 속에서 여성이 옷을 벗는 데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성의 몸은 예술 작품에서는 언제나 찬미의 대상이었으며, 여성이
세상을 향해 옷을 벗는 순간은 죽음 아니면 어떤 숭고한 의미 때문이었다.





영국 런던에서 차로 70분 거리에 있는 코벤트리(Coventry)는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받아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곳의 대성당도
폭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괴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잔해를 그대로 놔둔 채
그 바로 옆에 대성당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한가지 인상적인 풍경은 새로 지은
성당 앞 광장에 서있는 동상인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11세기경, 코벤트리 영주의 부인이었던 고다이버다.
대체 무슨 연유로 그것도 공공의 장소에다가 영주의 부인을 벌거벗은 동상으로
만들어 세워놓았는가. 코벤트리의 가혹하고 잔인한 영주 레오프릭에게는
그와는 정반대 성격의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Lady Godiva다.



* Lady Godiva,1852, Engraved by J. B. Allen after the painting by G. Jones


그녀는 6세기 이후 영국에 들어온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으며,
신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가진 정직하고 숭고한 여인이었다. 고다이버는
나날이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남편의 과중한 세금정책을 비판한다.
신실한 믿음을 가졌던 고다이버는 가난한 농민들이 남편의 세금 때문에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세금을 줄여 영주와 농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남편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레오프릭은 고다이버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냈다. 그녀의 숭고한 마음을 비웃기도 하였다. 레오프릭은 고다이버의
읍소가 그칠 줄 모르자 그녀에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고다이버의 농민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 진실을 몸으로 직접 보이라는
것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나가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그녀가 그토록 호소하는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고다이버는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남편의 폭정를 막고 죽어가는 농민들을 구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편의 제안을 수락한다.
이 일이 코벤트리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
레이디 고다이버의 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농민들은 영주의
부인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농민
스스로도 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레이디 고다이버가 벌거벗고 마을을 도는 동안
마을 사람 누구도 그녀의 몸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레이디 고다이버가 벌거벗고 마을로 내려온 날. 코벤트리 전체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은혜로운 영주부인의 나체시위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영주 부인을 위해 집의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으며 그 날의 일을 모두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이때 고디바 부인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
엿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톰(tom)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는데,
하늘이 노했는지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이 일화에서 유래하여
영국에서는 남몰래 엿보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 관음증)이라고 한다.

고다이버는 결국 백성들의 세금을 줄이는데 성공했고, 그녀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18세기 이후 코벤트리 마을은 고디바 부인의 전설을
관광상품화했고, 지금도 말을 탄 여인의 형상을 마을의 로고로 삼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 초콜릿의 이름이 이 고다이버 부인의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벨기에 초콜릿의 장인이며 고디바 초콜릿의 창시자인
'조셉 드랍'의 부인이 이를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었는데 우아하고 고귀한
고다이버 부인의 높은 뜻을 받들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초콜릿을
만들고자 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레이디 고다이버의 이야기는 이후 학자와 역사가들에게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숭고한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녀가 행한 알몸 시위가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불응하고 대담한 역의 논리로
뚫고 나가는 정치'를 고다이버의 대담한 행동에 빗대어 '고다이버이즘(godivaism)'
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다이버의 파격적인 알몸은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뜻깊은 일이었다. 요즘의 많은 미인들의 알몸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 때문인지 잠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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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 1%의 영감으로 창작됩니다

  등의 맞은편에 가슴이 있습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지만 손가슴이라 부르는게 맞습니다. 발등의 맞은편은 발바닥이라고 하지만 발가슴이라 부르는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귓등의 맞은편은 귀가슴, 눈등의 맞은편을 눈가슴,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다는 것은 세상의 의미 있는 것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소리 중에 가치 있는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대지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본질에 있어 낯선 것인 세계와 내가 소통하는 방법은 그처럼 ‘끌어안음’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그러나, 끌어안음은 한 사상가가 표현했듯이 ‘목숨을 건 비약’입니다.  내게 목숨같이 중요하던 관성을 성찰을 통해 뒤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낯선 세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사람의 포옹속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와의 포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입니다.  낯선 세계일뿐인 ‘물’은 나와의 포옹을 통해 ‘물결’이 됩니다.  ‘바람’은 ‘바람결’이 됩니다.  ‘숨’은 ‘숨결’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결’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결’은 금강저의 투철함과 천의무봉한 선녀옷의 한없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습니다.  ‘결’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새의 부리질과 밖에서 알을 깨주려는 어미새의 부리질이 정확하게 일치하여 새끼새가 세상에 태어나는 ‘즐탁동시’의 절묘함이기도 합니다. 

  ‘결’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매체에 대한 숙련성만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미야고프스키‘가 말하듯 ‘시어 하나가 창조되는 것은 수십톤의 흙을 걸러 1g의 라듐을 만드는’과정이며, ‘노신‘이 말하듯 ‘소가 취하는 것은 거친 풀이나 세상에 내 놓는 것은 젖’인 것처럼 감상자가 눈물을 흘리기 위해 창작자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결’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저의 창작관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으로 사진은 창작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는 혹은 예술가는 시대의 본질을 관통하는 주제를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대에 이룩된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학적세계와 시대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일뿐 아직 예술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일 순 있어도 아직 예술일 순 없습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학문이라면 또 좋아하는 것이 가치를 실현하기위한 실천이라면 즐기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 체화입니다.  즐거움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르고자하는 궁극이며 ‘결’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즐거움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가 학자의 모습으로, 운동가의 모습으로 비출 수 있는 것은 현실발전의 법칙과 예술발전의 법칙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창작공정은 첫 번째 사진주제였던 ‘비무장지대’작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작업은 ‘자본’으로 잡았으나 9.11사태로 2년동안 몰입했던 이 작업을 미루고 ‘미군’을 주제로 10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문제에 있어 초심자에 불과한 제가 방대하고 전문적인 이 주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추동한 힘은 2003년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핵문제가 우리 운명의 나침반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과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까지 우리민족의 최대 화두이자 근본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 우선 핵무기 문제를 소 주제로 잡았습니다.

  2003년에 도래할 위기는 1994년 북이 제네바합의가 기준이 되기에 북과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검증이 가장 객관적인 위기해결의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학문적 성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물론 방법조차 제게 제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방법론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제가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의 핵무기연구 일 수 밖에 없었고, 북의 핵무기 연구는 차후과제로 미루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에서 길이 막히자 직접 미군기지를 답사해 보기로 하고 주한미군기지 전체를 거의 답사했습니다.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핵문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은 전혀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기를 고민하던 시점에 다시 용기를 내기로 하고 주일미군기지까지 답사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주일미군기지를 답사했습니다.  많은 경험과 기반지식의 축적은 있었지만 이 작업역시 결정적인 단서를 주진 못했습니다.  학문은 발품만을 팔아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막막함속에 보내던중 일본인 사진가 ‘신도게이치’가 쓴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미군 탄약고의 표식을 통해 탄약고안에 있는 무기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했을 ‘탄약표식’에 관한 원문을 찾기 위해 몇 달동안을 인터넷과 씨름한 결과 드디어 문서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의외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개문서였습니다.  한편, 허탈하기도 했지만 감격스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 화학무기 등도 이 방법에 의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되었습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지식도 내가 두드려야만 열린다는 평범한 진리의 확인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진해 핵잠수함에 대한 기사가 나가자 많은 반론이 댓글을 장식했습니다.  예의 그렇듯이 댓글은 일부 모독적인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걸러내고 그분들의 반론을 경청하고자 노력하다보니 댓글에 대한 답변과정에서 저는 원래기사에서 보다 더 정확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군에 대한 독자적인 방법론이 하나씩 찾아지게 되었습니다.

  미군에 대한 공부는 비무장지대 사진작업의 경험과 만나면서 제게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유엔사 문제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저 역시 주한미군,연합사,유엔사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유엔사 문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일본 사세보 미군기지에 게양되던 유엔사깃발을 보고나서 였습니다. 비무장지대 초소마다 걸려있던 유엔기가 일본기지에도 걸려있었던 이유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유엔사의 4가지 근본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유엔사의 이름을 걸면 북을 공격하기 위해 유엔안보리결의를 따로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1950년 6월 유엔안보리참전결의가 있은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에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 북을 점령한다면 그 점령주체는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에 의한 것이며, 보수적인 분들이 더 심각하게 제기해온 문제인데 북의 영토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3조 영토조항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유엔사령관이 한국군, 주한미군뿐 아니라 주일미군까지 작전통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세보를 비롯한 6개의 주요기지가 유엔사 후방기지로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엔사령관이 4성장군이고 주일미군사령관이 3성장군인 것은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유엔사령관은 일본자위대까지 작전통제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951년 9월 일미안보조약 체결시 요시다 수상과 애치슨 국무장관 사이의 교환공문에 의해 ‘일본정부는 한국에서의 유엔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시설과 역무를 제공한다’고 합의하였습니다.  시설제공이 앞서 말한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이며 역무제공에는 자위대제공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유엔사는 과거 대인지뢰매설과 고엽제 살포시 작전통제권자로서의 책임이 있으며, 서해교전의 핵심주제인 북방한계선과, 경의선과 동해선지역 비무장지대의 남북관리구역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어 통일과 남북교류협력에서도 남측이 넘어서야할 관문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결심하여 추진하고 있는 연합사 해체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유엔사에 위기관리권을 양보하거나, 연합사 자신의 작통권을 유엔사에 재위임하면 모두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한강하구의 자유항행에서 유엔사가 관리권.허가권을 주장하고 나오는 것도 역시 유엔사 강화론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엔사 문제는 보수진영과 일본의 평화애호세력까지, 연대를 넘어선 연합을 구성할 수 있는 의제이며 유엔차원의 국제적운동입니다.  유엔사는 평화문제와 통일문제가 겹치는 의제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미군’으로 시작했던 저의 작업은 ‘유엔사’로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공안당국은 ‘유엔사 해체’가 북이 주장해온 선전선동에 동조하여 북을 이롭게 한다는 판단에 의해 저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였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단순논리에 저는 그저 황당할 뿐입니다.  1+1=2라는 공식은 남쪽의 학교에서도 북쪽의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1+1=2라고 말하는 것이 북에서 주장하는 것이기에 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1+1=2는 객관적 사실이며 그것은 북에도 이롭지만 남에도 이롭고 세계 모두에 이롭습니다.

  ‘유엔사 해체’는 이미 1975년 유엔총회에서 공산측과 자유진영측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된 객관적 사실입니다.  미국무부의 73년 회의기록에 이미 유엔사 해체가 미국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있었고 1975년 유엔총회연설에서 미 국무장관 ‘헨리키신저’가 결의안대로 76년 1월1일 유엔사를 해체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유엔사 해체는 당시 미국이 스스로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제가 직접 만난 주한미대사,부대사의 입을 통해서도 ‘한국정부가 결정할 일이다’라는 말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2.13 합의조치 이후 촉발될 평화협정 논의에서 한국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의제가 유엔사 문제임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한국정부가 설정할 수 있는 의제권한 1순위는 유엔사 문제입니다.  이미 ‘핵의제’를 통해 주도권을 잡은 북측정부에 버금가는 의제가 유엔사 문제이며 이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회담의제가 될 것은 자명합니다.  미리 국민여론을 환기하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유엔사 해체 문제를 의제로 선정하여 의제설정권을 행사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두를 이롭게 할 의제를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공안당국은 구태의연한 냉전논리, 반북논리로 우리의 미래가 전진할 수 있는 길을 막아선 안 되겠습니다.

  공안당국은 저의 창작과정의 일부인 저술뿐 아니라 사진작품에 대해서까지 군사기밀유출이란 혐의를 씌우고 있습니다.  성경의 잠언에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속엔 하나님은 없다’란 구절중 한 부분인 ‘하나님은 없다’만 떼어내면 정반대의 의미로 왜곡되는 것과 같이 저들은 예술작품을 칼질하여 혐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술작품의 탄생은 빙산의 일각처럼 물위에 뜬 작은 조각으로 보이지만 물 아래에 거대한 빙산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창작과정에서 사진을 발표한 것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예술적으로 완성됐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둘째는,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취하기위한 알권리를 위해 발표된 가지들입니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수없이 많은 촬영과 노력의 소모가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각도,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빛의 상태, 구름,. 바람, 이 모든 것이 ‘즐탁동시’의 절묘함으로 일치하는 순간 한 장의 사진이 ‘결’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준비된 필연과 행운에 가까운 우연의 통일체이기도 합니다.  ‘결’로서의 작품에는 지식과 정보., 즐거움과 감동이 하나의 완성체로서 존재하기에 거기에서 기밀정보를 얻고자하는 이는 기밀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로서의 사진은 기밀정보만을 캐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기밀 이상의 세계로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가장 많이 인용한 사진중의 하나가 강화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의 일몰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진에 대해 기밀유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찍기까지 대상에 대해 수집가능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그 연관과 실체를 연구했으며 정보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전자파와 또다른 파동으로서의 평화를 상징할 빛의 극적 대비를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헛걸음을 하고 기다리며 인내하던 끝에 즐탁동시의 순간을 만났고, 원하던 사진을 얻었습니다.  제가 이 사진에 적용한 개념은 ‘전파의 기교도 빛의 장엄만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소재로 평화를 말하고자하는 저의 역설적인 사진방법을 나름대로 구현하는데 성공한 것 같고 제가 보기에 흡족했습니다.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은 ‘국가기밀이기에 촬영해선 안 된다’가 아니라 그것은 ‘창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창작을 통해 기밀보호보다 더 큰 가치를 국가는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헌법의 취지에 맞습니다.  창작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관점도 문제지만 기밀의 테두리에 씌워 탄압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평화의 ‘결’은 전쟁을 외면하고 성립할 수 없으며 거실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습니다.  

  제가 공개한 두 번째 종류의 사진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할 권리에 속하는 사진들입니다.  핵무기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화학무기 역시 국민에게 치명적인 것이기에 정부가 기밀의 테두리에만 둘 일은 아닙니다.  열화우라늄탄은 우발적 사고에 의해 사람에게 피폭되었을 때 핵무기에 의한 내폭증상과 똑같은 질환을 일으키는 무기입니다.  설령 그것이 기밀일지라도 공개되어야 할 것인데 저의 발표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획득된 자료들입니다.  이는 제게 취재를 허용한 당사자들이 더 잘 아는 문제일 것입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낯선 것을 온가슴으로 포옹하여 한시대의 ‘결’을 만들어내는 자로서의 예술가의 본성은 마치 잠수함에 독가스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넣어지는 토끼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낯선 것이 위기와 도전과 고난일 때도 있기에 시대의 위험을 감지하고 끌어안는 예술가의 혼으로 인해 한 시대는 위기를 예감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저의 사건이 이시대의 위기를 예고하는 사건이 아니길 바랍니다.

  ‘사람몸 중에 중심이 어디일까요?’라는 질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심장’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아픈 곳’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온통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는 때문입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입니다.  세계의 중심 또한 전쟁과 기아와 빈곤으로 인하여 ‘아픈 곳’ 입니다.  ‘아픈 곳‘에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예술가에게 그것은 숙명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가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결‘, 평화와 통일의 ’결‘을 만들어 가야하는 시대의 요구에 더 이상 국가보안법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며, 정성과 사랑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7. 5. 1.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이 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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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보안법이 아직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다니요.
이시우작가의 일, 참 안타깝더군요.

글샘 2007-07-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아가던 까마귀도 웃을 일이지만... 그만큼 사람 목숨 가벼이 여기는 법이 저 법이죠. 국보법.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기득권자. 사용자, 정부, 이런 것들의 발광이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듯 해서 속이 쓰립니다.
 

 


 
"조센진, 조센진... '왕따' 때문에 피해왔건만"
[함께가요 우리학교-공동기획] '에다가와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웃음을 ④
     오마이뉴스(news)   
 

 

일본 정부에 의해 쓰레기매립지로 강제이주 당한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도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난 2003년 도쿄도 정부는 "수십 년간 무상으로 사용해온 학교 부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시대, 강제 이주시킨 일본의 원죄는 배제시킨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다행히 재판부는 '도쿄도 정부는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합의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문제는 남았다. 학교 부지를 계속 사용하려면 시가의 1/10 가격인 14억원을 도쿄도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정희성 이사장, 김용택 시인 등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을 결성했다. 오마이뉴스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의 뜻에 공감해 '함께가요 우리학교' 캠페인에 참여한다. 앞으로 해당 학교 교장과 교직원, 학부모와 학생들의 글이 차례로 실릴 예정이다. 네번째 글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어머니회 상담고문 김경란씨가 썼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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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이 : 에다가와 조선학교 기자
방송일 : 2007.06.27
방송시간 : 4분
대역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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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제공
저는 1956년부터 에다가와에 사는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저는 도쿄조선제2초급학교에서 46년 동안 어머니회 회장을 하였고 현재는 어머니회 상담고문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쿄도에게서 에다가와 이죠메에 있는 자택의 토지를 불하 받은 사람 중 한명입니다.

최근 주민들의 불하협상이 겨우 끝났으며 앞으로는 학교 토지의 불하가 진행되는 줄로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도쿄도는 학교측과 성의를 가지고 교섭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학교 토지를 양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에다가와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에다가와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거주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도쿄도의 쓰레기 매립지였기에 악취가 나고 모기나 파리가 모여들어 인간으로서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 때에는 밥에 파리가 모여들어 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하수 시설이 없어 비가 많이 내린 후에는 공동화장실의 오수가 넘쳐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럴 때에는 남자들이 펌프를 가지고 오수를 퍼 냈습니다.

에다가와의 주민들은 조선인 부락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차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위생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건소에 가서 소독액을 달라고 부탁해도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부락민이라고 차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일본인 어머니들에게 협력을 요청해 어린이들을 엎고 함께 보건소에 갔습니다. 겨우 소독약 4통을 받았는데 소독약을 뿌릴 펌프가 없어 다시 보건소에 요청을 했는데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달에 4번이나 보건소를 방문, 겨우 소독약을 뿌릴 펌프를 2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쿄도나 구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이러한 행정처리를 해 준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교대로 에다가와죠 내를 소독하여 겨우 모기나 파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인데, 어느 날 오수 때문에 균이 발생하여 저의 아기에 몸에 발진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4살이 된 우리 아이는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병원에 실려가 격리된 상태였습니다.

에다가와는 택시를 타도 '그곳은 냄새가 난다' '파리가 난다' '병에 걸린다'는 등의 악선전 때문에 택시가 잘 가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에다가와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포기 않은 학교인데...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언어 역사, 문화를 가르쳐 조선인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희망해 조선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조선학교는 우리들의 몸의 일부이며 보물입니다. 어린이들은 우리의 희망이며 민족교육은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저는 2세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학교에 가서 "조센진, 조센진"이라고 차별을 당하고 도시락 속에 모래를 넣는 등의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해방된 민족으로서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2학교의 초급부부터 중급부까지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50년 가까이 제2학교에서 어머니회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학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학교는 '인보관'을 빌려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제2초급학교는 도쿄도 내의 조선학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였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여 스스로 학교를 수리했습니다.


 
▲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선생님과 아이들.
 
ⓒ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제공
 
1960년을 전후해서 학생수가 늘고 학교 건물이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63년에 재건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토지를 살 돈이나 건축비용이 부족해 낡은 건물을 부수는데 학부모들이 해머를 가지고 공사일을 직접 도왔습니다. 비가 내리면 물이 고이고 웅덩이가 생겨 운동장은 다른 지대보다 1미터 이상 부지를 높여 특별한 모래를 쌓아 물이 고이지 않게 정비하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일주일 정도 일을 쉬고 돈을 모아 차 수백 대 분의 모래를 운반했습니다. 어머니들은 밥을 지으면서 응원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자력으로 해 냈습니다. 건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어머니들은 낡은 신문지나 우유병, 못 등을 모아 팔았습니다.

저도 힘든 생활 속에서 건축 기부금을 매월 지불했습니다. 토지를 사고 학교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학교 운영이 힘들어지고 선생님들의 월급은 지연되거나 지급할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1970년 당시 2만7천엔 정도의 월급조차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열심히 일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고 학부모들이 교대로 자기 집으로 선생님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조성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토지와 건물의 증개축 비용과 학교 운영비를 걷기 위해 재일조선인들이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운동회와 같은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닭고기를 끓이거나 계란 수백 개를 삶아서 같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의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했을 정도로 끈끈한 공동체 생활을 해왔습니다.

주민 모두의 관심과 애정으로 커온 조선학교

바블 붕괴 후에는 학교 운영이 더욱 더 힘들어졌습니다. 학교를 지원하는 어머니회는 매년 바자나 마쯔리(축제)에 가서 김치나 지짐 등의 조선음식을 팔아 그 수익을 학교 운영을 위해 썼습니다.

그런 저한테 올해 50세가 되는 장남은 '어머니는 운동회에도, 수업 참관날에도 한번도 와주시지 않았다. 정말 어머니의 인생은 학교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앞으로 80~90세가 되어도 우리학교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어린이들의 민족교육을 지켜 나가겠습니다. 도쿄도 지사는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번 도쿄도의 재판을 반대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교의 토지문제와 에다가와 내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하여 1만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학교 주변에 사는 일본인들의 집을 한집 한집 방문하면서 서명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많은 시민들이 '왜 조선학교 운동장만이 문제시되어 불법점유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에다가와 내에 사는 사람은 물론 타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이 문제를 알게 되어 우리가 펼쳐 온 서명운동은 한달만에 1만 5천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학교의 운동장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도 이용하고 있습니다.

현장을 보시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에다가와는 운하로 둘러싸여 있고 다리가 많습니다. 혹시 지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학교 밖의 피난 장소가 없습니다. 운동장은 에다가와 주민들의 피난 장소인 동시에 에다가와 주민들이 야구나 축구를 하는 교류의 장입니다.


 
 
 
ⓒ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제공
 
모두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바자회나 마쯔리 등에 참가하고 있고 조일우호의 분위기 속에서 조선요리를 먹거나 조선의 무용을 관람하면서 제2학교를 자기들의 학교처럼 사랑해 주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학교는 항상 조일 우호의 풀뿌리 운동의 귀중한 장소였습니다.

에다가와 주민들의 불하문제는 5년에 걸쳐 거의 해결되었습니다. 역사적 경위에 따라 주민들의 요구대로 해결이 된 것은 모두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힘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단결된 힘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옛날 에다가와 부락에는 공원이 없어 어린이들이 길가에서 뛰어놀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3~4살의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숨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이 단결하여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행정과 협상을 한 결과 겨우 공원이 생겼습니다. 그 공원에 있는 나무가 크게 자랄 때마다 그 당시 일들이 생각나 단결력의 귀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교의 토지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목욕탕에 가는 길에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학교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으며 이곳에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사람들도 모두가 단결하여 학교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학교문제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제2학교의 용지를 양도하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단결된 힘으로 싸워 권리를 획득하여 민족교육을 지켜왔습니다. 에다가와 학교용지 문제에 대해 부디 에다가와 지역 형성의 역사적 경위를 존중하고 또 민족교육을 보장하는 견지에서 공평하고 적절한 판단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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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계좌: 신한은행 330-03-004075(예금주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사무국: 02)336-5642(www.edagawa.net)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을 위한 유명인사들의 기증품 경매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와 옥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일부터는 종로구 원서동 비원 옆 '살롱 마고'에서 기증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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