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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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백석이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그러면서도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나는 선생이 아니다.

                                                                                               - 김수열


오른쪽 손목 아래가 없는 우리 반 이윤이의 그 손을 덥석 잡고

손이 없는 뭉툭한 손목에 입맞춤하기 전에는 나는 선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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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강렬한.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사람의 인상 중에서 심상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그건 타고나는 것도 무시못할 것 같다.(성장과정에서 몸에 익어버린 습관이라해도) 아무리 단도리를 하여도 가끔 삐죽이 머리를 내미는 불량한 마음.. 이윤이의 손.. 정말 아무 꺼리낌없이 입맞춰줄 수 있을까? 다른 손들과 구별, 차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개학 첫날

- 박일환

 

여름방학 끝나고 다시 출근했더니

등꽃이 먼저 반겨 주더군

다른 놈들은 이미 서너 달 전에 피었다 졌고

휘감아 올라간 넝쿨마다

기다란 씨주머니들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어쩌자고 뒤늦게 몇 놈

수줍게 고개 내밀고 있더군


늦된 게 부끄러운 줄 알기는 아는 모양

무성한 이파리 틈새에 숨어 있는

보랏빛 꽃송이를 보고 있자니

꼭 그런 놈들이 떠오르더군


수업시간 내내 졸다가 끝날 무렵

엉뚱한 질문이나 해 대는 놈

남들 다 해 오는 숙제

미루고 미루다 막판에 내는 놈

몇 박자씩 꼭 늦는 놈


하지만 그런 놈들도 꽃은 꽃 아니냐

남들보다 서너 걸음 뒤졌지만

언젠가 한번은 꽃 피는 인생 아니냐


개학 첫날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군

선생 노릇 다시 돌아보게 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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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아이들을 참아준다'는 표현을 하게 된다. 자라는 속도가 아이들 별로, 또 아이들 개개의 특성도 다 자라는 속도가 다른 것 같다. 어떤 아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빨리 자라는 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늦게 자라고 또 다른 아이는 성실성은 빨리 자라면서 사회성은 늦게 자라는 등... 이런 성향들로 개성이라는 것이 형성될텐데..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과 기다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들 언젠가는 꽃필 아름다운 인생들일테니...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샘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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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읽으면 늘 '새벽 편지'를 꼭 함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며... 그래도 이 세상 깊은 어딘가 마르지 않고 있을 희망의 샘에 관해 길고 긴 편지.. 사바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말 "희망의 세계화"..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 이해인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균형을 유지하면서 쉽게 타오르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겸손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낮은 자리와 낮은 목소리를 즐거워합니다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에게는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패배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귀하고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관심이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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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야자를 띵구고 도망갔을 때, 그저 말로 감정 실은 야단을 치다가 어느날 문득 안희숙샘 덕분에 알게된 이 시를 외우도록 했다. '다 외우면 바로 보내주고 아니면 1시간 남긴다.' 토요일 오후 한 시간 남는 것은 어떤 형벌보다 무서워서 아이들은 틈틈이 이 어려운 시(물론 다른 시도 있었다)를 다 외워서 검사 받았다. 심지어 아난이는 2교시 마치고 검사를 받았다. 미운 말 암팡지게 뚝뚝 내뱉던 고 입에서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를 술술 외워내던 그 작은 감동.. 지난 주엔 왜 시외우기 시킬 생각을 못했지? 주제 주고 글짓기나 시외우기를 시켜야겠다. ^^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귀하고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관심이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