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詩 : 정  호  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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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담임했던 2-7반 녀석들에게 붙여주었던 시로 기억하는데.. 늘 그렇듯이 실은 나에게 주었던 시였다. 그 아이들은 너무나 그늘이 많아서 자신의 그늘에 몸을 숨겨버린 그런 아이들 같았는데.... 녀석들 때문에 눈물은 내가 더 많이 흘린 것 같다. 한 번은 아이들이 우루루(7명) 무단 조퇴를 해버린 다음 날이었는데 녀석들을 야단치고 와서는 앞자리 샘께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늘 학교에 와야만 하나요? 왜요?" 녀석들의 논리에 말려버린 것이다. 그리곤 교무실에서 나이 서른이나 먹어서 울어버렸다. 주위에 친한 샘들이 얼렁 수습해서 여교사 휴게실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날 저녁은 녀석들 욕을 진창하며 술도 진창 마셨더랬다. 가끔 전화하던 녀석들... 작년까진 연락이 닿았는데 올해는 다들 시집을 갔나? ^^
 

금 강 하 구 에 서

 

안도현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을 떠나리라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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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강 하구에 서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 내 바라보고 싶다. 갈대 옆에 조그만 자리 빌려서..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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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숲이 되어 더불어 지키자. 더불어 숲!! 싱그러운 나무들과 함께라 늘 행복하다. 앞으로도!!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정일근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제四宜齊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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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의 고독. 기나긴 그 유배기간 동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굽이 돌아가는 길

                    -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따라 물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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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학생의 날에 2학년 아이들에게 나눠준 시! 1년 뒤 학생의 날을 기억하고 그때까지 잘 보관했다가 내게 가지고 오면 뭔가 훌륭한 것과 바꿔주겠다고 했다. 2학기 개학하고 나서 3학년이 된 그 아이들이 복도에서 나를 불러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선생님, 저 아직 그 시 가지고 있어요. 뭐 주실꺼에요?" "그래? 언젠지는 기억하고 있지? 날짜 맞춰서 가지고 와야한다.~" 뭘 주지? 1년 내 숙제로 고민이다. 학생의 날은 물론 17일 수능에도 힘이 되는 의미있으면서 그렇게 부담은 되지 않는 것을 주고 싶은데... 몇명이나 이 시를 가지고 나를 찾아올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 뭘 주지? 그 시는 다시 받아서 2학년들에게 나눠줄까 생각중이다. 훼손된 것만 더 만들어 내면? 그래도 많이 만들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