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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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여고 2002년 윤인숙샘이 우리 학교로 오셔서 처음 모임하 던 날, 이 시를 읽어주셨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마음에 담았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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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 신경림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마

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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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인숙 샘의 나이쯤 되면 나 역시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이 핑~ 돌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이 돌았던 건 샘께서 그토록 치열하게 사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낮은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자유롭게 맘놓고 '구걸'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이제는 가지고 싶으셨던 것일까? 한 10년 쯤 뒤엔 나도 이 시를 읽으며 목놓아 펑펑 울어볼 수 있을까?
 

어릴 때 내 꿈은

                                           -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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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라면 누구나 다 좋아할 '시', '노래'이다. 이 노래를 꼭 배워보고 싶은데 아직도 아직이다. 꼭 다 외워서 불러봐야지. 다시 읽어보니 누구나 다 좋아할 시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서 있지나 않은지... 그건 아니라 하더라도 '나의 입장' 때문에 어떤 강요를 구걸하고 있지나 않은지... 함께 (또는 대신)싸울 용기가 없다면 '담임'을 신청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이런.... 늘 자책이라니... 행동하지 않는 반성 역시 나를 위한 것일뿐!
 

대학 시절

                                     -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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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입... 이 시는 힘들었던 시절 채영성샘이 좋아했다는 시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딱 이 분위기였단다. 더 힘들었던 건 자기 앞가림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무관심했던 그 분위기였단다. 무한 경쟁체제.. 샘은 대학생활을 '나처럼'보내도 한 방에 시험에 붙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단다.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단다. 그는 지금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인간미 넘치는) '국사' 선생이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그가 주위에 있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