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 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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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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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은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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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9-0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관 옆 동물원...

해콩 2004-09-05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더분한 심은하가 액자처럼 생긴 창가에 앉아 읽어주었었죠. ^^ 나중에 알았어요. 그게 이 시였다는 건.. 마지막 부분까지.. 참 좋은 느낌.
 

우리는 깃발이 되어 간다

-안도현


처음에 우리는 한 올의 실이었다

당기면 힘없이 뚝 끊어지고

입으로 불면 금세 날아가버리던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나뉘어진 것들을 단단하게 엮지도 못하고

옷에 단추 하나를 달 줄을 몰랐다

이어졌다가 끊어지고 끊어졌다가는 이어지면서

사랑은 매듭을 갖는 것임을

손과 손을 맞잡고 내가 날줄이 되고

네가 씨줄이 되는 것임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한 조각 헝겊이 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을 막아보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곳을 겨우 가리는 정도였다

상처에 흐르는 피를 멎게 할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온전히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아아, 우리는 슬픈 눈물이나 닦을 줄 알던

작은 손수건일 뿐이었다

우리들 중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깃발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이라면

한 올의 실, 한 조각 헝겊이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서히 깃발이 되어 간다

숨죽이고 울던 밤을 훌쩍 건너

사소한 너와 나의 사이를 성큼 뛰어넘어

펄럭이며 간다

나부끼며 간다

갈라진 조국과 사상을 하나의 깃대로 세우러

우리는 바람을 흔드는 깃발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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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에서, 조각천으로, 손수건으로.. 결국은 깃발로. 너무나 참신한 발상이라 처음 보는 순간 반한 시 중의 하나이다. '너와 나의 사이를 성큼 뛰어넘어 바람을 흔드는 깃발' 혼자서는 안된다. 너와 내가 씨줄과 날줄로 얽히지 않고서는...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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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탄'... 어릴 적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건이다. 구멍이 뻥뻥 뚫려 잘 맞춰줘야 불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는... 만약 불이 꺼지면 석가탄(?)이란 걸 써서 매운 연기 마셔가며 연탄에 불을 붙여야했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 또하나 잊을 수 없는 건 그 가스를 마셨던 기억.. 혼미한 상태에서 해독제로 마셨던 물김치의 알싸한 맛.. 다 부려먹은 연탄은 집게로 살살 짚어야 부스러뜨리지 않고 대문밖에 가져다 재여둘 수 있었다. 연탄재는 비 온 날 진창에, 학교 운동장에, 정말 간혹 눈이 내린 겨울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연탄 화덕... 옛 물건들은 다들 아련한 추억과 함께 떠오른다. 그땐 한밤중에 그거 갈아 넣는거 진짜 귀찮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