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깎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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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5월 29일 '허'가 결혼했다. 샘들과 '남산 달빛산행' 가느라 결혼식에 못가서 이 시로 마음을 대신했다. 두 사람이 이 시처럼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함께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 랑


                        - 박 형 진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안도현 엮음. 나무생각.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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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2년 정보여고에서 만든 교지를 뒤적이다 발견. 그때 이 시가 너무 좋아서 교지 젤 뒤 빈 공간에 이시를 넣었었군. 손모현 샘이 그린 그림 밑에다가... '모든 살아있음의 제 자리'와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이 구절이 너무 좋아서.. 지금 다시 읽어도 참 좋다.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해콩 2004-12-04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샀다. 1994년 창자과 비평사. 꼭 10년 전이다. 부안에서 농사도 짓고 글도 짓는다는 시인은 후기에서 "난생 처음 시집을 엮"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무얼하고 있을지, 쌀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함께 젖다 1

                                      -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이 아닌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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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축축하다. 가을비.. 오늘은 머리나 하러갈까 하다가 날씨가 너무 아까왔다. 옆에 있던 현옥샘도 오늘 '오빠가 벌초 가서' 시간이 있단다. 눈빛을 교환한 우리는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건수'를 만들었다. 늘 따뜻한 경희샘이 합세하고.. DMC에서 '연인'을 함께 보고 모르는 길 물어물어 내원사에 도착한 시간이 6시 10분전. 아저씨게 부탁부탁해서 오천원 내고 계곡을 10분동안 드라이브했다. 아~ 여기저기 자그마한 폭포를 이루고 있는 골짝골짝.. 이 시처럼 흠뻑 젖었다. 가을비에, 가을 운치에, 천성산 내원사 계곡에, 그리고 언제나 끊이지 않는 우리 아이들 이야기에... 가을이 더 깊어지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계곡을 걸아봐야겠다. 그땐 침묵에도 젖어봐야지. 마침 선물로 받은 이 시.. 마치 내 기분 알고 보낸 듯한..
 

풀잎과 거미줄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풀잎이 되고 싶다

흔하디흔한 빗방울도

반짝이는 보석이 되게 하는

 

나는 눈부시지 않아도

너를 눈부시게 하고

나는 반짝이지 않아도

너를 반짝이게 해 주는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거미줄이 되고 싶다

어두운 풀숲 그늘 속에도

반짝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해주는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7쪽, 우리교육,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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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다가 아이들이 생각나서, 이런 생각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반 전체 멜을 보냈다. 짧은 편지와 함께..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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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딘가 잡지에서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정보여고 3년차였다.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내려 형제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눈발이 아니라, 마치 우리 아이들 같았다. 정말 그랬다. 나의 일부분으로 살얼음을 깔아 보듬어주고 받아줄 수 있을까? 생각을 그렇게 말짱했는데 돌이켜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상처도 준 것 같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긴 지금 가끔 너무 읽찍 삶을 알아버리고 온 몸으로 힘겨워하던 그 아이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