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빈을 위하여

                                                        - 김석규

 

방어진으로 와서 만호장안의 바다를 소유하기로 한다.
옆구리에 끼고 온 것이란 때 묻은 담요 한 장과
고단한 몸 눕혀 아름다운 꿈 청하기에 넉넉한 베개
이제 와서 보니 이것도 한갓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밤마다 뒤척이는 바다를 베고 잠들 수 있고
아무래도 시린 어깨는 한 자락 파도를 끌어다 덮을 수 있으니
가난은 나의 고향
가난만이 살림의 밑천이었던 어머니의 무덤
기둥에 머리를 처박고 마루 끝에 앉아 있던
번번이 남루의 헌 보따리를 들고 오는 가난이여
오늘은 내가 가진 바다를 죄다 돌려주려 한다
해 돋는 아침과 달 오르는 저녁의 바다 봉두난발이 되기 전에
언제라고 풍족하게 머물다 가도록 자리 비워 두었으니
어려워 말고 문을 두드려라. 밤새 불을 밝힐 기름도 있으니
그러나 어쩌랴 저 무변의 바다를 다 소유하고도 빈주먹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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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저승갈 때 무얼 갖고 가지요?

남쪽 바닷가 마을에 어떤 가난한 한 어부가 살았다지요. 그래서 가난을 이기지 못해 아들은 일찍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답니다. 세월이 흘러 스님은 큰스님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어느날 늙어 돌아가시게 된 어부 아버지가 찾아왔더랍니다. 한 잔 곡차를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내가 네게 한 평생 아무 것도 물려주지 못해 가슴 아팠다. 다만 내겐 저 바다밖에 없으니 저 바다를 다 네 것으로 해라” 하시더란 얘기입니다.

어떤 큰스님께 이 말을 전해 듣고 저는 크게 깨친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이 세상에 나올 적에 벌거벗고 나온 것 아닙니까? 이른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구나 다 자기 앞에 가로놓여진 생의 바다, 업(業)의 바다를 헤쳐갈 수밖에요.

그래서 김석규 시인도 이런 시를 썼는가 봅니다. 우리 모두 다 벌거벗은 적빈(赤貧)의 삶, 비인 생의 바다를 살다 가는 것이지요. 〈방어진으로 와서 만호장안의 바다를 소유하기로 한다//…중략…//그러나 어쩌랴 저 무변의 바다를 다 소유하고도 빈주먹뿐이다〉라는 이 시의 핵심은 바로 빈손으로 와서 뜬세상을 가득 안고 살아가다가 결국 빈손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허무한 생애, 슬픈 삶을 잘 말해주는 것이지요.

흔히 말하듯이 우리들은 저승갈 때 무얼 가지고 가겠습니까. 태어날 때 불끈 쥐고 나온 빈주먹뿐이지요? 우리 모두 헛된 소유를 탐하고 누리려 아둥바둥할 것이 아니라 텅빈 충만, 따뜻한 청빈을 아름답게 껴안고 살다가 떠나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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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메일 중에서...

―비속어의 리얼리티를 아시나요?

쌍말 또는 욕설의 리얼리티를 아시는지요? 일상적이고 교양적인 말투보다 때로는 더욱 강렬하게 사실감을 표현하고 설득력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욕설의 시학입니다. 흔히 판소리계 서민소설에서 토박이말에 곁들인 쌍말과 욕설적인 표현들이 작품에 맛깔스런 사실감을 더해주고 설득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한 비속어들에는 살아있는 감정들이 진하게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쌍말과 욕설, 즉 비속어들은 표준어처럼 다듬어져 있지는 않지만 그 속에 민중적인 생활감정이 적나라하게 굽이치고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도 그렇지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이라는 노골적인 감정이 직설적으로 담겨있는 이 토막말 속에는 그리움의 감정과 자기 카타르시스의 욕구가 함께 절절하게 표출돼 있는 것입니다. 점잖은 표현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그리움의 감정, 그 리얼리티의 절실함이 애절하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절실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외마디소리를 하늘더러 읽어달라는 듯이 모래사장에 대문짝 만하게 써놓고 썰물지는 가을 바닷가에 쓸쓸히 서있는 게 혹 당신 모습은 아니신지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가 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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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김용택 아저씨의 시. 우리 교실 앞 게시판에 코팅해서 붙여주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당신께 드립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서...쓸데없이 늘 이렇게 '고백'을 하고 싶은데 녀석들은 몰라준다. 즈들 바라보며 내가 하는 인사, 넋두리, 고백들... 내 마음을 전하는 것, 부질없다 생각하면서도 늘 그러고 싶다. 녀석들로부터 어떤 비판을 되돌려받더라도 모의고사와 야자와 보충 등등에 대한 내 마음, 생각을 맘껏 얘기하고 싶은데, 스스로의 검열이 더 지독하고 무섭다. 그저 이 시를 읽어주듯이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두/렵/다. 나는 겁이 많다. 그리고 욕심도 많다. 잃고 싶지 않아서... 바보처럼.. 복잡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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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보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ㅇㅆ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혔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기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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