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事物)의 꿈·1

                                               - 정 현 종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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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5


세상에는 우리들이 더 미워해야 할 잘못과
스스로 뉘우침 없는 내 자신과
커다란 잘못에는 숫제 눈을 감으면서
처벌받지 않아도 될 작은 잘못에만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우리들



- 김명인, '동두천5',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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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꼬마리씨 하나

                          -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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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운명과 자유, 그리고 우연

아하, 그렇군요. 사람의 인연, 특히 부부 사이를 이렇게 재미있게 노래한 시도 있군요. 어느날 산행길에서 문득 바지가랭이에 묻어온 도꼬마리씨 하나, 그것은 우연같지만 어쩌면 필연이고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르지요. 부부란 그렇게 우연인 듯 또는 필연처럼 이러구러 한 평생 서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대체로 운명과 자유, 그리고 우연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몇째 아들 또는 딸로 태어난다는 것은 운명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학교를, 사람을, 직업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 선택이란 바로 자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로서 우연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지요. 운명과 자유, 그리고 우연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한 평생이 이어져 가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바로 운명과 자유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우연의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이 시는 바로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쳐 온 삶과 인연의 문제들을 기발한 착상으로 형상화하여 삶의 본질의 한 측면을 깊이있게 투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나무가 바람을

                                - 최정례

 

나무가 바람을 당긴다
이 끈을 놓아
이 끈을 놓아
끌려가는 자세로 오히려
나무가 바람을 끌어당길 때
사실 나무는 즐겁다
그 팽팽함이

바람에 놓여난 듯
가벼운 흔들림
때론 고요한 정지
상처의 틈에 새 잎 함께 재우며
나무는 바람을 놓치지 않고
슬며시 당겨 재우고 있다

세상 저편의 바람에게까지
팽팽한 끈 놓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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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시 쓰는 일은 세계의 주인되는 일

주체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니 발상의 전환 또는 뒤집어 보기나 거꾸로 보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기왕의 관습이나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뒤집어서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창조적,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에서도 그렇지요. 바람이 나무에 불어서 나무를 흔든다는 것이 보통 관습적인 인식이고 상식적인 표현법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나무가 바람을 당긴다/이 끈을 놓아/이 끈을 놓아/끌려가는 자세로 오히려/나무가 바람을 끌어당길 때/사실 나무는 즐겁다/그 팽팽함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바람이 아니라 나무가 주체가 되어 바람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오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김수영이 시 「풀」에서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고 노래하여 바람(지배세력)의 관점이 아닌 풀(민중)의 세계관으로 주체전환을 의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체의 전환은 바로 부정정신의 발현이고 반역의 정신을 표상한다고 하겠지요. 뒤집어 보기, 거꾸로 보기란 바로 새롭게 보기이고 자유롭게 보기이자 창조적으로 보기이고 동시에 주인돼서 세상 살아가기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면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이 새롭게 보고 자유롭게 봄으로써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주체적인 노력, 창조적인 의지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군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낙산사 가는 길

                 - 유경환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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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어

<물처럼 맑은 심경 티끌 하나 없는 밤/철창에 새로 돋는 달빛 고와라/근심 걱정 모두 허공 마음만 있나니/석가도 원래는 보통 사람인 것을〉이라는 만해의 한시 「옥중감회」가 있더군요. 제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제자리 못잡고 있을 때 눈감고 가만히 읊조리는 시입니다. 몇해 겨울씩이나 감옥에 갇혀 모진 추위와 고문,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와 신의를 지킨 만해의 그 마음을 생각하노라면, 어느새 제 근심걱정은 참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문득 마음이 맑고 밝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는 것(一切惟心造)입니다. 마음 하나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지구라도 깃털처럼 가벼울 수 있고, 지옥 또한 극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그것을 잘 말해주는군요. 우리가 어떻게 무슨 수로 천근만근 깊이의 고요를 저울로 잴 수가 있나요. 아니 산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이 세상 어디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뿐 〈하늘 저울/마음일 뿐〉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깨침이고 놀라운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세월 면벽수도한 고승의 오도송(悟道頌) 수준인 것이지요.

아, 저는 과연 제 마음 속 고요의 바다물을 됫박으로라도 되질해서 언제쯤 속모를 그 깊이를 한길이라도 재어볼 수 있게 될 것인가요? 그냥 제 마음 하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면서 등불삼고, 지팡이 삼아 살아가다보면 그 깊이를 조금이라도 어림짐작하게 되지 않을까 싶군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