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

                         - 마 종 기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힌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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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21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수능 감독은 디게 운이 좋았다. 첫째 시간은 감독이 비었고, 둘째 시간은 자습이 덜컥 걸려버렸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몰래...(어~ 이거 써도 되나? 자습감독이었으니까 뭐..) 시집을 가지고 들어가 감독하는 틈틈히 읽었다. 나올 때는 한 권 다 읽고 맘이 가는 시에 표시까지.. 이 시가 그 중 한 수!!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전해주는 방문객을 기다릴 수 있는 겨울이 되길. (현실은.. 노숙자 수가 예년에 비해 엄청 늘어났단다. 2% 나눔을 실천할 때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   양 성 우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모든 들풀과 꽃잎들과 진흙 속에 숨어사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신비하다.

바람도 없는 어느 한여름날,

하늘을 가리우는 숲 그늘에 앉아보라.

누구든지 나무들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무수한 초록잎들이 쉬지 않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이 순간에,

서 있거나 움직이거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오직 하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무엇이나 눈물겹게 아름답다.

 

[일생에 단 한 번 한 사람을 위하여], 고려문화사, 2002,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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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 서재 [펌]



"살아간다는 것" - 위화, 푸른 숲, 1992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 아니며, 고소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고상함이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 선과 악에 대한 동일시이며, 동정의 눈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심정 속에서 나는 미국 민가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 속의 그 늙은 흑인 노예는 일생 동안 고난을 겪었고,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의연한 태도로 세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원한서린 말 한마디 없다. 이 노래는 나의 심금을 울렸고, 나는 이러한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사람이 고난을 감수하는 능력과 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써나갔다. 글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내 스스로 고상한 작품을 써나갔다고 생각한다.



- <머리말 중에서>






느티나무 2004-11-16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추합니다,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 저는 허삼관 매혈기보다 더 좋은 것 같더라구요. ^^

해콩 2004-11-1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겠습니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두 권 모두.. ^^
 

수묵 정원 9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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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2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력이 번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멋진 시이다. 익숙하게 쓱쓱 갈아서 푹 적시고 그려나가는 수묵화의 먹선처럼 감각이 서서히 번져나간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나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 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정 호 승 (82年, 시집[서울의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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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0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 학생의 날... 반아이들에게 코팅해서 나눠준 시. 일년 동안 잘 보관하다가 내년 학생의 날 그대로 가지고 오면 선물을 주겠다 하였다. 학생의 날도 스스로 챙기도록 하고 내년엔 고3되는 아이들 챙겨주고 싶어서.. 근데 현정이가 아이들 것 다 받아서 자기 자리 옆에 스카치테이프으로 주렁주렁 매달아놓았다. --;
 

       植木祭(식목제)

                                         - 기형도

어느 날 불현 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生(생)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식목제)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입상)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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