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숲에서


                                    - 이시영


 


눈 덮힌 겨울숲은 아름답다


찢어질 듯 무거운 눈송이들을


온몸으로 버팅겨 인 채


따로따로 모여서서 거대한 침묵을 이루는


겨울 산이 더욱 좋다


나도 이제 내 몫의 침묵을 안고


돌아서야지


저 살아 있는 마을의  떨리는 불빛들 속으로


 


[바람속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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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꽃이 불편하다



- 박영근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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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着語 :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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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2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시다. 그 때, 함께 하던 그 사람이 소개해준... 시와 동시에 그 얼굴이 떠오르는 게 신기하다. 모든 추억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 최영철

 

세상에 나서 수세식변소만 사용해 본 딸아이는 모를 것이다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맍다는 것을

불면의 밤은 길기도 길어

새벽도 오기 전에 앞다투어 산비탈 공중변소 앞에 줄을 서서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세상에 나서 문화적으로만 놀아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누가 쏟아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똥덩어리 위에

또다시 자신의 똥을 내려놓으며

아직도 하나가 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지독한 똥 위에

더 질기고 지독한 자신의 똥을 쏟아놓을 때

그 쾌감은 난삽한 섹스와도 같이 온몸을 전율시킨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똥장군이 출렁거리며 오르내리는

햇볕 잘 드는 동네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어

벌어진 널빤지 사이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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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2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세식 변소'만' 사용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 시를 읽으면서 수세식 변소만을 고집하는 일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임을 알았다. 자신의 것도 더러워하며 못본척 얼른 물로 씻어내리는 문화인들이 정갈할가? 다른 사람의 그것 위에 자신의 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그것들을 무던하게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이 정갈할까? 아울러 여전히 이 사회에는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의 '쏘아봄'이 언젠가는 작지않은 연대의 '힘'으로 분출될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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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2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농담'인걸 지금 알았다.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시만 읽었나보다. 제목이 왜 '농담'일까? 짙은 이야기라는 뜻? (이 정도면 직업병 수준이다. ^^;)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 구절을 읽고

이정록 시인의 서시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내 몸이너무 성하다"가 생각났다.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해콩 2004-11-2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아무래도 궁금하다.

濃談-짙은 이야기? 弄談-웃자고 하는 이야기? 濃淡-짙고 옅음? 어떤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