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사랑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송이 눈.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93. 126쪽.
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된다.언어는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펄럭이다가쓰러진다.꽃의 둘레에서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불꽃처럼 타다간꺼져도,어떤 언어는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된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제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정희성, [시를 찾아서], 창작과 비평, 2001. 20쪽
공사장 끝에
- 이시영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자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바람 속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6.
쓸쓸한 세상 -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