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사랑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송이 눈.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93.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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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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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3-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 상 포 인 트 ―상상력의 운동성과 자유로움

새 봄 상상력의 운동성이 청신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언어/꽃잎/나비’, 그리고 ‘깃발/불꽃/꿀벌’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연쇄체계가 아름다운
언어미학의 울림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시인들에게 언어란 단순한 소리와 의미의 모임만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우리들 꿈의 물결이고
희망의 불길이며 상상의 파도인 것입니다.
또 상상력의 바다를 항해해가는 돛단배이고,
들녘을 불어가는 바람이고,
하늘을 날아가는 새떼인 것입니다.
언어는 이미지이자 상상력이며, 자유이고,
희망 그 자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시는 상상력과 자유,
생명과 희망이 어울려 추는 정신의 춤이고
영혼의 노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언어와 사물의 관계, 시와 존재를 연결해서
언어의 본성, 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여울 2005-03-1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명이 너무 훌륭한 것은 아닐까요? 그냥 멋진데요. 언어보다 왠지? 몸짓이나 다른 말도 어울릴 듯합니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제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정희성, [시를 찾아서],  창작과 비평, 200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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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2-1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의 주제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이 대사(영화 2046에서 왕조위가 주절거리던 대사)가 생각났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공사장 끝에

                                                - 이시영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자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바람 속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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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0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눈물난다. 그 여자도.. 그 여자의 어린 것들도.. 그리고.. 허물어버리지 못하는 공사장 인부들의 마음도.. 눈물난다.. 그러나 나는 울어주는 것 외에 무얼하였는지.. 그래도.. 이젠 최소한 외면하진 않을테다.
 

쓸쓸한 세상

                                         -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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