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뮌헨올림픽,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당했다.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1972년 뮌헨올림픽. 모두가 스포츠의 환희와 감동에 열광하는 가운데 끔찍한 인질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가 되고,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검은 9월단은 인질로 잡았던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살해한다.
전 세계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고, 팔레스타인은 이제 세계가 그들의 목소리로 귀기울이게 되었다고 자축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보복을 결심한 이스라엘은 검은 9월단이 했던 것처럼 세계인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비밀 공작을 준비하게 되고...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최정예 요원들을 소집, 기록조차 없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검은 9월단에 대한 복수를 명령한다. 조국애가 깊은 모사드 출신 비밀 요원 아브너를 리더로 도주, 폭발물, 문서위조, 뒤처리를 담당하는 전문가들로 암살팀을 구성한다. 뮌헨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팔레스타인인은 모두 11명. 이스라엘 비밀 요원들은 이들을 한 명씩 찾아내 치밀한 복수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물을 제거할수록 조국의 임무와 복수의 정당성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하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동시에 자신들 또한 누군지 모르는 암살팀의 표적으로 쫓기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져든다. 아브너와 비밀 요원들은 점점 더 큰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가는데...



유명하다는 감독, 배우 이름을 도대체 나는 외우지 못한다. 간혹 있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외우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미 외우고 있음을 알게 된 감독이 바로 그, 스필버그다.

내맘대로 친구하기로 작정해버린 제자에게 며칠 전 문자가 왔다. "내일 뮌헨이랑 썬데이 서울 보러갑니다" [랜드 오브 프리덤]이나 [화씨 911]같은 영화를 구워 내게도 권하는 녀석이기에 별 생각없던 이 영화가 확 땡겼다.

유명하다는 배우들의 연기나 내용.. 후반부로 갈수록 확연히 드러나는 반테러리즘, 반폭력이라는 주제... 딱 꼬집어 흠잡을 데 없는 이 영화가 내게 썩 와닿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다큐멘타리를 보는 듯 착각할 정도로 1970년대를 완벽하게 재연했다는 유럽 여러 나라의 풍경과 자막처리 하지 않는 각 종 언어들.. 감독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졌을 영화의 찬란한 장점들 조차도 나를 영화에 이입하거나 집중하게 하지 못했던 이유, 그건 바로 감독과 그의 국적 때문이 아닐까?

영화감독이란 소재나 주제에 있어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그 신념대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물론 평가도 작품 하나로 해야한다는 것도! 그러나 스필버그가 유독 나에게 껄끄러운 감독이 되어버린 건 다른 나라의 문화적 권리를 '자유무역'이라는 경제논리 하나로 쥐락펴락하는 그의 국적만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체제 안에서 많은 시혜를 받아가며 거대한 자본의 힘으로 만든 영화도 이 영화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소재한 영화이다. '폭력은 폭력은 낳는다.' '피는 피를 부른다', '폭력은 폭력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이'는 판에 박힌 주제를 양비론 비슷하게 끌어가는 것, 다른 나라, 다른 감독이라면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속에서 '미국'과 '자본'과 '스필버그'가 떠나질 않았다. 나는 고까운 것이다. 이스라엘의 단짝인 미국, 그 속에서 거대 자본 거머쥔 감독이 그런 주제를, 신념을 주절거리는 것이 무쟈게 고까운 것이다. 그들만의 화려안 찬사 -골든 글러브 몇 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등등 - 에 콧방귀가 나오는 것이 나의 편견이라 하더라도 그 감독의 신념이라는 것에 불신의 눈빛을 거둘 수 없다. 혹시 모르지 그가 돈 안되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화씨 911]쯤 되는 영화를 만들어 국가에 미운털이 박히는 무모함을 감행한다면... 그  완고한 가족주의쯤은 눈감게 될런지...

요즘 들어 총 제작비가 얼마라는 둥, 올로케이션을 했다는 둥, 또는 [게이샤의 추억]처럼 셋트를 지어 촬영했다는 둥... 돈을 때려부었다는 이러저러한 광고들조차 고깝다. 허리우드식 영화를 안 보는 수밖에...

하나 더.. 그 치밀하다는 암살 과정이 내겐 허접하게만 보이는 까닭... 현란하게 꿰어맞춰진 첩보스릴러물에 너무 길들여져있는 건 아닐까? 돌연 이런 반성을 하게 해준 것에 대해서는 이 영화에 감사해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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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2-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셨나요? 유태인 냄새가 너무 나는 것 같아서 좀 보기 싫던데... 평이 없네요.

해콩 2006-02-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을 썼는데..다 날렸어요... 이런..ㅠㅠ 의욕이 생긴다면 다시 시도를...ㅠㅠ

해콩 2006-02-1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대충 다시 썼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포기할 것 같아서요. 저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 재미있으면서도 고된 작업이네요. 이젠 자야겠어요. 내일 수업... 어쩌지?

글샘 2006-02-1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삶은 고도의 추리물보다는 이경규의 몰래 카메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물렁하고 쉽게 속는 그런 삶...
 



 

…. ))<>(( …. 앞뒤로… 영원히 사랑하고파 ^^

엉뚱 명랑한 비디오 아티스트 크리스틴은 신발가게에서 일하는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껴 적극적으로 접근하지만, 갓 이혼 당해 패닉 상태에 빠진 리처드는 그녀의 갑작스런 호의를 받아들일만한 여유가 없다. 크리스틴과 리처드가 어설프고 서투르게 새로운 사랑을 향해 조심조심 다가가는 동안 리처드의 십대 아들 피터는 성적 호기심이 가득한 동네 소녀 헤더와 레베카의 오럴섹스 경쟁에 실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하고, 여섯 살 난 둘째 아들 로비는 인터넷 성인 채팅방에서 수위를 넘는 과감한 대화로 건너편 상대를 자극한다. 이에 로비의 채팅 상대인 외로움에 사무친 40대 커리어우먼 낸시는 로비를 완벽한 섹시가이로 착각하고 일회용 섹스를 제안해 기대에 부풀어 약속장소에 나가는데 과연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

먼저 다가가느니… 차라리 외롭고 말아?
: 디지털 시대,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나

영화의 초반부에, 노일들을 위한 대리운전을 해 주는 크리스틴이 운전하던 중 금붕어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얹고 가는 자동차를 발견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금붕어를 싣고 가는 차 앞을 일정속도로 가로막으며 운전해 금붕어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결국 비닐봉지는 떨어지고 크리스틴은 금붕어의 마지막 순간에 조의를 표한다. 이 장면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엷어져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아쉬움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갈수록 생소하게 느껴지는 요즘 그 순간만큼은,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같은 긴장과 같은 바람, 같은 안타까움을 겪는 짧지만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된다.

금붕어 장면의 강한 여운에서도 나타나듯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이런 단절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명상집과도 같다. 직접 얼굴을 보는 만남이 힘들어지고, 사람들은 온라인 채팅방이나 행위예술을 통해서만 만나고 이것들조차 실패하면 공상 속으로 빠져들어버리는 지극히 개인화된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그 어느 곳과도 다르지 않게 평범한 미국의 소도시, 젊은이도 나이 든 사람도 점점 파편화 되어가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디지털 시대에서의 소통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줄라이 감독은 놀라운 직관과 섬세함, 그리고 기막힌 유머로 이런 주제에 능숙히 다가간다. 관객들이 배꼽을 잡는 여섯살짜리 로비의 ‘앞뒤로 한다(poop “back and forth”)라는 표현과 ))<>(( 라는 이모티콘은 인터넷 채팅문화를 단박에 표현하는 은유로 쓰이면서 미란다 줄라이가 지닌 특유의 참신하고 독창적인 관찰력이 얼마나 유머러스 한가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등장하고 화사한 화면과 싱그러운 음악이 내내 흐르는 이 영화는 일견 귀여운 영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줄라이는 무조건적인 낙천주의에 기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녀가 바라보는 디지털 시대의 삶이 무조건 시니컬하게 나타나는 것만도 아니다.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기형적인 욕망을 풍자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지닌 톤은 냉소라고 보기엔 너무 밝고 따뜻하다. 오히려 그 안에서 유쾌하고 명랑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 사랑스러운 텍스트로 읽히는 지점이다.


당신이 꿈꾸는 찬란한 우주는 삶의 작은 순간들 속에 숨어있다
: 불확실한 삶을 응시하는 당차고 유쾌한 시선


이 영화는 외롭고 상실감에 젖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교차하며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매그놀리아> <크래쉬> <숏컷>의 전통을 잇는다. 이 전통대로 영화 속 주인공들의 당면과제는 영화가 끝나는 무렵에도 해결되지 않고 감독도 굳이 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단절된 일면을 그린 요즘 영화들이 주로 견지하는 냉소적이고 건조하게 삶의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태도와는 달리 미란다 줄라이는 아이처럼 순진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감독이 직접 연기하는 크리스틴은 귀에 양말을 걸거나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엉뚱한 말을 건네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참을 수 없이 썰렁해진 상황도 자기친화적으로 바꿔버리는 능력을 보여준다.

영화 속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매우 평범한 소도시의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어느 순간 이 흔하고 진부한 일상이 한 편의 시가 되는 진귀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 특별한 점은 일상에서 남다르게 빛나는 순간들을 발견하는 능력이 이제까지 본 다른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훨씬 탁월하다는 점인데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들이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흥미진진한 볼거리로 탈바꿈하고 관객은 예측하지 못한 장면에 마음을 푹 빼앗겨버리게 된다.

이는 미란다 줄라이 감독이 일상이 지닌 얄궂음보다는 그 안의 부드러움과 유머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함 속에서 헤메는 주인공들은 어딘지 좀 무능해보이고 나약하기 그지없지만,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노력이 당차고 유쾌하기까지 한 감동을 준다. 새로 관계를 시작하려는 크리스틴과 리처드는 훗날 또 한번의 상처를 서로에게 주고 이별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직 반도 안왔기” 때문에 즐거운 관계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고, 설령 관계의 유한함을 알려주는 이정표인 “아이스 랜드”를 만나다 해도 적어도 이전처럼 손에 불을 지르는 유아적인 행동은 거듭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준다.


어른들은 아이처럼 굴고, 아이들은 어른처럼 말하고…
: 성숙한 척 하는 아이들과 퇴행적인 어른들의 기묘한 공생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공식보다는 모두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결정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충동이나 감정을 관리하는 방법에 점점 더 서툴러지는 것이 현대인들의 특징인 것일까… ?

모든 매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어른의 말을 가져다 사용하고, 반면 어른들은 아이처럼 서투르게 행동하고 후회하고 당황하기 일쑤다.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남편은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의 남자친구가 어때 보이냐며 두서 없는 말을 지껄여 아이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당하고, 자기 손에 불을 지르는 무모한 자해를 저지르기도 한다. 겉으로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지만 무표정으로 일관된 건조한 삶을 사는 큐레이터는 사무치는 외로움에 인터넷 채팅방을 기웃거리다 자신을 성적으로 완벽히 자극하는 남자(?)를 발견하지만 그 상대가 여섯살 꼬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리처드와 크리스틴 또한 그 어느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보다도 서투른 구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성(性)에 적극적으로 현혹되는 것은 아이들의 몫으로 그려진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소도시의 일상에는 열 여섯 살 소녀들의 오럴 섹스 경쟁에 자원하는 열네살짜리 남자아이가 있고 또 인터넷 성인 채팅 방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컴퓨터 저 편의 상대를 성적으로 자극시키는 여섯 살 짜리 꼬마도 있다. 또 열 살짜리 여자아이는 미래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주겠다며 생활용품들을 자신만의 혼수함에 모아두는 집착을 보인다. 항상 킬킬대고 능숙한 척 하지만 사실 겁 많고 어릴 뿐인 십대 헤더와 레베카는 서로를 부추기면서 잡지나 영화,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대로 ‘연기’ 하면서 섹스를 실험해본다.

하나도 성숙하지 않은 채 방치될 뿐인 아이들도, 여전히 자신의 감정 하나 다스릴 줄 모르는 어른들도 디지털 만능의 시대에 살면서 모두 저마다 우울하고 고독하고 소외에 시달린다. 이들의 외로운 행동들이 다른 영화에서라면 자기파괴적 행동이나 자살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미란다 줄라이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상한 유머로 절망적인 상황이 서서히 밝아지는 톤을 만들어간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 냉소를 띄우거나 투덜거리지 않는다. 삶이란 명랑하면서도 우울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가끔 끔찍하기도 한 것이기에..



2006. 2. 3. 동숭동 아트시네마. 보고싶은 영화이긴 했는데 서울까지 가서 보게될 줄이야.. 아트시네마가 아트홀이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95년이었나... 개관하고 아트홀에서 아주 훌륭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무료상영하는 등 좋은 아이템으로 쉽게 예술 영화에 다가갈 수 없었던 유학생에게 문화를 접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곳에서 넬슨 만델라가 출옥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을 그린 다큐도 보고 아직 뜨기 전 윤도현도 보았다. 장발을 하고 "나는 타쟌~" 노래를 했었지.. 임용시험 두번째 떨어지고 나서는 그곳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향기'를 보았다. 1/3은 졸았으면서도 극장을 나오면서 '그래, 체리향기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살만하다. 다시 도전하자'라는 용기를 갖게 된.. 내게 그곳은 아주 감사한 공간이다.

거의 10년만에 들어선 그 공간은 너무나 달라져있었다. 그전에 어땠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어쨌든 훨씬 더 상업적이 되어버렸다는 느낌. 6시 50분 영화였는데... 친구랑 극장에 들어서니.. 예전의 이층짜리 커다란 공간은 간 데 없고 아담하게 꾸며진 소박한 극장. 오른쪽으로는 창 밖으로 소담한 장독대가 보이도록 꾸며놓았다. 영화가 시작될 때 자연스럽게 커텐이 드리워지도록. 좌석에는 그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라는 표시인지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재미도 있었지만 조금 유치한... 자본은 유치하다.

 

어려우면서도 좋은 영화라는 느낌이다. 좋은 영화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화를 보기 전과는 달라진 나의 내면을 확인하게 하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이 영화의 대화의 방식은 시를 읽는 듯하다. 알송달송하다. 직접적인 듯 하면서 우회적이고 우회적인듯 하지만 아주 노골적이다.

미앤 유앤 에브리원.. 그들은 모두 허망항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스스로가 의식하든 그렇기 못하든 '소통'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소통은 일방적으로 나만의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나, 소통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유한하다는 결함을 늘 안고 있다.

크리스틴은 리차드를 첫눈에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느낀다. 그건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말로 표현된다해도 상관없다. 실제로 그들의 대화는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알아듣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은 통한다. 그 가능성하나에 크리스틴은 확신하고 리처드의 냉냉함을 무릅쓴다. 용감하다. 그 두려움 없는 돌진으로 결국 나중에는 '소통'에 성공하는..

결국 '소통'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아울러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과 선택한 것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이 '소통'이 끝난다고 해도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삶에는 또 다른 '소통'이 반드시 있다는 희망! 그 힘으로 …. ))<>(( …. 앞뒤로… 영원히

이 영화가 있어서 이번 서울여행은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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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2-0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들었던 장면이 몇 된다. 크리스틴이 처음 리처드를 찾아가 우연을 가장해 주차해둔 곳까지 함께 걸으면서 주고 받았던 말들... 크리스틴을 집으로 초대한 리처드가 둘째아들 로비가 낙서해서 엉망이된 새 사진의 액자를 나무에 걸고 그들이 소통에 성공하는 장면. 엄마는 컴퓨터 고치는 소리라고 설명한 그 '소음'이 실은 버스를 기다리는 아저씨가 시간을 보내는 소리, 가로등에 동전-또는 돌맹이 두드리는 소리였고.. 그것이 또 로비에게는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소리가 되는 장면.. 아! 크리스틴의 작품이 소개되는 장면도 신선하다. 사진과 나레이션으로 추억과 사랑과 죽음이 완성되는..
 

신비한 눈동자의 소녀에서 최고의 게이샤로…
모든 화려함과 바꿔서라도 꼭 이루고 싶었던 사랑
신비로운 푸른 회색빛 눈동자를 지닌 소녀 ‘치요’는 가난 때문에 언니와 함께 교토로 팔려가게 된다. 자신이 게이샤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녀를 시기하여 함정에 몰아넣는 ‘하츠모모’(공리)에게 겪은 갖은 수모 속에서 유일하게 친절을 가르쳐준 회장(와타나베 켄)을 마음에 담고 게이샤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마침내 그녀를 수제자로 선택한 마메하(양자경)에게 안무, 음악, 미술, 화법 등 다방면에 걸친 혹독한 교육을 받고 최고의 게이샤 ‘사유리’(장쯔이)로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아름다움과 비밀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세계,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가져도 사랑만은 선택할 수 없는 게이샤의 운명…

은근히 그녀를 사모하는 기업가 노부(야쿠쇼 코지)와 남작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구애도 거절한 채 회장을 향한 사랑을 지켜가던 사유리. 하지만 더욱 집요해진 하츠모모의 질투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회장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던 사유리는 게이샤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가질 순 있어도 사랑만큼은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일생의 모험이자 배우로서 꼭 도전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던 장쯔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중국배우이기 때문에 일본 기녀 역할을 사양한다는 애국심이란.. 글쎄? 그보다는 예술가적 욕심을 앞세운 선택을 좇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집으로 가는 길' 이후 장쯔이의 단단하고 다부진 아름다움을 아주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나 이 영화가 '집으로 가는 길', 혹은 '와호장룡' 아니 '영웅'에서 보여준 역할보다 뭐가 더 '모험'스러운건지 솔직히 모르겠다. '허리우드' 영화의 주연급 여배우라는 타이틀을 얻는 것과 그 화려함에 매혹된 게 아니라면... 이건 100% 허리우드식 영화였다.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의 기녀, '성'을 그저 신비롭게 바라보고자했으며, 따라서 그 속의 여성들의 눈꼽만큼도 자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의 슬픔이나 비애조차 비껴간다. 오로지 최고의 게이샤가 되기 위한 암투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택되기 위한' 몸부림.. 그뿐이다. 젠장... 조금의 주체성만이라도 보였으면 그 화려한 화면빨 때문에 조금은 화가 덜 났을지도모르지..(사실 본전 생각은 안났다. 생각의 여지는 많았으므로)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일본으로 대변되는)동양, 일본 남성들이 바라보는 (게이샤로 대변되는) 여성.. 먹이사슬처럼 연결된 그 노골적이고 편협된 시각 때문에 민족주의자도 아닌 내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음이 불편했다. 이건 미국 남자들에 의한, 미국 남자들을 위한,  미국 남자들의 영화다.

도대체 시나리오상의 일관성도 없다. 게이샤는 몸을 파는 기녀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핏대 세우면서 그 다음 장면에 바로 처녀성을 높은 가격에 경매붙여 팔아먹는 건 뭐냐. 열 살도 안 된 소녀가 빙수 하나 사주는 친절함에 아버지뻘은 됨직한 남자를 첫눈에 사랑할 수 있냔 말이다. 평생을 그 남자만을 바라볼만큼... 그 사장 역시 마찬가지라니...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말을 믿긴하지만 이건 개연성이 너무 없다. 서양 남자들이 동양여자에 대해 성적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중국배우들은 참 작품을 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 물론 긍정적인 면을 포함해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주연급 배우라고 해서 조연을 사양하거나 무명 감독의 작품을 거절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런데... 장쯔이 뿐만 아니라, 공리, 양자경의 '작품 보는 눈'에 정말 실망했다. 중국에서 상영금지를 한 이유와 같은 관점에서 싸잡아 하는 비난이라는 혐의는 절대 거절이다. 이 영화는 화려함만 있을 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눈씻고 찾아볼래야 없다. 심지어 게이샤, 아니 동양여자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영화인지조차도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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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2-0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데 어린 '사유리'를 역할을 맡은 소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히피드림~ 2006-02-0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두 해콩님 생각에 동의해요.^^

해콩 2006-02-0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punk님!! 공감해 주신다니 감사~ 근데 솔직히 하츠모모 역의 공리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 서늘한 허무와 상실.. 거기서 느껴지는 카리스마.. 대단하더군요. 에로스에서 보여준 연기에 값하는... 멋진 연기자인 것 같아요. 동의하시죠? ^^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고 부산에도 눈이 오다가 지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네요... 님이 계신 그 곳에도 눈이 오고 있나요?

히피드림~ 2006-02-0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너무 늦게 봤네요. 그동안 컴이 고장나서 알라딘에 통 못들어와 봤거든요,^^;; 정말 공리 너무 연기 잘 했죠? 장쯔이 주연이 아니라 두 사람의 공동주연같았어요. 장쯔이의 해사한 얼굴도 보기 좋았지만, 양자경과 공리의 '연륜'도 빛나던걸요.
눈은 이곳도 조금 오다가 말았어요. 다행이죠 뭐,,,^^
앞으로 자주 뵈요,
 

월트 디즈니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치킨리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에 의해 머리를 강타당한 치킨 리틀은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고향 마을인 오우키 오크를 대혼란으로 몰고간다.
허나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도토리...
이로 인해 1년간 모든 이들의 놀림감이 된 치킨 리틀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결심을 하지만,
마음먹기가 무섭게 또다시 치킨 리틀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데...

이번에는 진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일까?!
마른 하늘에 구멍이 뚫린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치킨 리틀과
그의 절친한 친구인 런트, 애비 말라드, 피쉬의 깜짝 놀랄 이야기...

 



캐릭터들이 귀여울 '뿐'이다.

허리우드식 가족주의에 평범하고 작은, 그러나 비일상적인 영웅 보여주기.

외계인? 식상하다.

아이들은 좋아하겠지만 앞으로 만화영화도 허리우드, 디즈니 영화는 재고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되었다. 슈렉정도 된다면 모를까...

아기양과 늑대의 험난한 우정 만들기를 그린 '폭풍우 치는 밤에'가 상대적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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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온 젊고 아름다운 남자, 그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다...

오래 전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게이 아버지를 증오하는 사오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녀에게 어느 날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찾아온다. 그는 아버지의 연인 하루히코. 하루히코는 사오리의 아버지 히미코가 암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그녀에게 아버지가 만든 게이들을 위한 실버타운에 와서 일을 도울 것을 부탁한다.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살아왔지만, 유산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얘기에 매주 한 번씩 그곳에 가기로 결정한 사오리. 일요일 아침, 사오리는 '메종 드 히미코'의 문을 두드린다.

메종 드 히미코, 영원한 우리 모두의 안식처

바닷가에 접한 유럽의 작은 성을 연상시키는 게이 실버타운 메종 드 히미코, 그 안에 살고 있는 각각의 개성과 사연을 간직한 다양한 사람들.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으로 거리를 두던 사오리는, 점차 그들의 꾸밈없고 순수한 모습과 그 이면에 숨은 외로움과 고민을 접하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하지만 평온한 이곳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아버지와는 완전히 연락을 끊은 줄 알았던 죽은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하는 사오리. 게다가 항상 티격태격하던 하루히코와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영화를 보면서 머리 한 구석으로 '한 번 더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게하는 이런 영화는 내게 아주 드물다.

개인적으로 '당당한 여성스러움'을 최상의 '인간다움'으로 여기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여성스러움을 선망하는 남성들-호모? 게이? 동성애자? 무엇이든-이 대거 등장한다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난 느낌은 만족! 별 다섯 개! 여주인공 사오리의 캐릭터가 여전히 '귀엽고 깜찍함'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에 부합하려는 오버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대로 씩씩했고, 여성성의 덜 보편적인 면-예를 들어 모든 여성들이 그들처럼 드레스나 화장, 화사한 색깔, 연속극 등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을 지나치게 표현했지만 '여성스러운 남성'의 캐릭터는 그럭저럭 흡족했다. 그들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남자는 동성애자였다. 그러나 커밍아웃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는다. 사랑을 찾아 남편이 떠난 후 남겨진 아내와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동성애자, 좋아, 인정한다. 타고난 성적 취향을 어찌하리... 그러나 최소한 아이에 대한 책임은 져야한다.' 그러나 히미코를 보면서, 루비를 보면서.. '그들도 어쩔 수 없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성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유럽과 여전히 가부장적 문화가 당연시되는 일본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해'는 아닌 것 같다. 나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면 남-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의 행복과 안락만을 위해 끝까지 나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히미코처럼 돌아오는 원망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또 사과할 '용기'가 있다면 그런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감정은 '우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히미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늘 외토리였다'는 하루히코, '나는 지금도 외토리다'라는 독백 아닌 독백을 하는 사오리... 그 외로움과 상처를 매개로 서로에게 느낀 따뜻함이 육체적인 사랑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과연 더 오래 그런 따뜻함을 나눌 수 있었을까? 서로 상처가 되지만 동시에 서로 위안이 되고, 서로 미워하면서 또 서로 아껴주는.. 그런 관계는 아마 '우정'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 어처피 삶이란 아픔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마음을 서로 나눠갖는 것것일테니까...

그래서 '분명, 사랑은 그 곳에 있다'를 '분명, 사람이 그 곳에 있다'나, '분명, 우정이 그 곳에 있다'로 바꿔 읽을 수도 잇을 것 같다. 하여 결국은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들여다 보는 것처럼 '분명, 희망이 그곳에 있다'고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준 상처-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때문에 남이 아파하는 것을 보며 이미 아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서로 위로가 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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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2-06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다른 것에 대해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일본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은 배워야 할 거 같애요.

해콩 2006-02-07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정말 그래요..^^ 보셨나요, 이 영화? 늦기 전에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