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검은꽃' 을 읽고 단박에 김영하님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김영하님의 작품이 나올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검은꽃' 이후로 장편이 나오지 않아 내심 기다리고 있던 차에 '빛의 제국'이 나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로 구입하고 읽었는데 나는 잠시 멈칫 해진다.

책을 읽은 느낌을 쓴다는게 애매해지고 난해해지는 느낌이다.

민감한 남북관계의 묵직함 때문일까?

아니면 '검은 꽃'의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함이였을까?

그 어떤것도 이 느낌의 잔상이 아니라는걸 인정하지 못한채 나는 그렇게 빛의 제국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남자가 있다.

남파간첩으로 내려왔지만 활동이 없었던 10년만의 메세지가 귀환이라니...

이미 자신에게 연결된 선도 끊어졌고 자신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그였다.

그는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북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이대로 남아야 하는지,아니면 제 3국으로 도망을 칠것인지, 혹시 숙청 되는 건 아닌지 수많은 고민과 걱정속에 아무런 결정을 못하는 가운데 그려진 하룻동안의 이야기다.

책이 두꺼운 반면 쉽게 읽혀질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자꾸 미련이 남았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생각하게 되고 서서히 다가가는 결론에 조바심이 날법도 한데 오히려 결론을 만나고 싶지 않은채 이대로 머무르고 싶은 느낌들이 밀려왔다.

기영이 선택한 결론의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난 두려웠다.

그래서 자꾸 기영의 주변을 멤돌았는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의 아빠, 자기만의 일을 가지고 있고 애정이 깊진 않지만 아내도 있는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간첩이고 이젠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을땐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결국 딸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부득이 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내 마리는 냉담하다. 과연 15년동안 살을 섞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며 젊은 애인과의 정사를 드러내고 난 이런 여자라고 말하는 아내.

그는 배신감 보다 혼란스럽다.

그런 아내를 보아도 도무지 어떠한 결정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하룻동안의 시간속에 오로지 자신의 결정만이 모든걸 뒤집을 수 있었을 상황임에도 기영은 결국 좁은 선택의 폭 속에서 갇히고 만다.

책의 끝을 맞이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만나고 마는 결론은 조금은 허무했다.

그가 하루종일 용을 쓰고,머리를 굴리고,정보를 모으고 고민하던 과정을 봐왔기에 기영이 당면하게 되는 위기와 결론은 팽팽한 풍선이 바람이 빠지는 듯한 허무였다.

기영은 또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리도 알아버렸고 이제 자신의 존재를 알아버린 정보기관이 있는한 그 전의 평범은(간첩이라는 사실을 덮어두더라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젠 평범을 가장한 평범을 연출해야 할지도 모르겠기에 그는 제 3의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단 하룻동안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속도감을 기대했던것도 사실이였다.

하루라는 시간속에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만나리라 기대하며 펼친 빛의 제국은 하루라는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박함 속에 수많은 것을 펼쳐놓은 하루가 아닌, 하루이면서 10년 2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이런 느낌의 가운데에는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분단의 역사가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민족의 비애가 현실속에 때로는 무덤덤하게 때로는 실감나게 다가와서 넘어가면서도 찜찜한 느낌들이 담겨 있었다.

기영이 남파하던 80년대와 2000년대는 분명 차이가 나지만 분단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에 대응하는 방법이 달라졌을뿐 그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그런 무게감이 짓눌렀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또한 긴박하게 흘러감이 아닌, 절제가 보였기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무게감이였다.

한층 더 묵직하고 신중하게 다가온 빛의 제국은 저자의 다음 작품에서의 노련함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지만 진보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한 작가의 그런 과정을 만끽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기에 기꺼이 동참하려고 한다.

저자가 바라보고 향하는 방향으로의 동행이 그래서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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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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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읽으면서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이 생각났다.

비슷한 양상이면서도 다른 느낌을 자아냈기에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책을 읽을때는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라 무척 지루한 기억이 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방대한 분야의 함축된 지식들이 넘쳐나 시원스레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낯선 국외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라서 그런지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팩션이라는 장르는 국내 작품보다 국외 작품을 더 많이 접했고 흐름이 무척 빨라 이 책도 쉽게 읽힐거라 생각하고 조금은 가볍게 봤던게 사실이였다.

그러나 쉽게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저자의 노력과 노고가 구석 구석 배어 있어 자연스레 책을 자세히 읽으려고 했고 내게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저자가 이걸 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었다.

저자는 오랜시간 준비하고 많은 수정을 걸쳤다고 했다.

글이란게 참 신기해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느낌으로도 스르르 묻어 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책이라고.

그리고 국외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사건을 해결해 가고 비밀을 풀어가는 가운데 거대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미 모든것은 드러났고 모든것은 예견되어 있어 결과는 차분했다.

집현전 학자의 계획적이고 비밀이 담겨있는 살인에서 발견되는 지식은 거대했다.

단순히 속국으로서의 자체적인 글자,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숨은 뜻은 무궁 무진했다.

비밀을 풀어가는 겸사복 강채윤이 지식을 흡수하는 능력, 비상함, 끈질기면서도 탐구적인 그의 태도를 따라가지 못해 어질할 정도였지만 독자에 가까운 강채윤이란 인물은 사건을 해결하기에는전형적인 인물이였다.

강채윤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최고의 지식의 샘터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을 어찌 따라갈 것인가.

따라오라는 이끔이 아닌 설명하고 전파하는 지식이였지만 어려웠다.

그런 지식을 사대부들만 습득하고 있으니 그 고립은 어떠할 것인가.

세종은 그런 편견과 권위주의를 타파해서 다양한 인재등용을 하고 백성들의 설움과 비애를 없애고자 한글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비밀스러워야 했고 수없는 시간을 투자하고 인내를 겪어야 했고 엄청난 인재손실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추진해 간다.

진정 백성을 생각하고 미래를 꾸릴 줄 아는 인에서 나온 처사이리라.

그래서 그렇게 힘겹게 한글을 만든 것이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친 사람들은 얼마나 많으며 그러한 프로젝트를 막으려 명나라까지 끌어들이며 막으려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부와 명성, 권력을 쥐고 안주하기 위해 왕의 목숨까지 노리는 이들은 어떠한 이들이였을까? 어느 세대나 그런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 또한 훈민정음을 만드려는 세종대왕과 학자들 만큼이나 끈질기고 집요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을 알기에 그들의 음모 또한 처절하다.

속국으로써의 자체적인 글자 반포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마는 가장 강력한 적은 늘 가까이 있는 법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글자, 그리고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기에 그 과정과 마음은 감동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부분에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글자를 만드려는 의의와 노력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완성도 높은 이 작품에서 그것 하나만 깊이 느끼더라도 내가 느끼었던 난해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것이라 사려된다.

 

누구나 글을 읽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세종대왕과 수 많은 학자들은 노력하고 이루고자 했다. 그러했기에 수 많은 역경을 거치며 지금까지 한글은 우뚝 솟았다.

그러나 한글을 쓰고 있음에도 여전히 한자,영어,식민지시절의 일본어까지 수많은 언어가 통용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 언어들이 사라질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언어속에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한자나 당연시 되는 영어나 세계화 시대를 맞이 한 우리들은 그 언어의 습득이 지식의 한 단계 상승한듯한 이미지 속에, 또한 사회에서 그렇게 요구하기에 익히지 않을 수가 없다.

한글날과 그러한 역사는 형식적으로 기억할 뿐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히 하지 못한게 현 실정이다.

새로운 구성과 시대적 배경이 짙게 우러나오는 탁월한 언어로 씌어지고 수많은 지식속을 헤엄치게 만드는 치밀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이 책은 단순한 우리의 글자 훈민정음 창제가 아닌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음미하면 할수록 짙게 배어나는 여운과 의의는 현재의 나를 잊을 정도였다.

또한 짧은 어휘력과 감성이나마 이렇게 느낌을 남길 수 있게, 글로 남길 수 있게 우리만의 글자를 남겨주신 선조들의 노고와 뜻이 이렇듯 뿌듯할 수가 없다.

이러한 한글을 지켜가고 가꾸어 가고 아름답게 쓰며 다음 세대에 남겨주는 일은 지금껏 해왔듯 이젠 우리의 몫이다.

이러한 글자와 언어를 흐리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좋은 말, 예쁜 말, 깨끗한 글자를 쓰는 것이 어찌 그 지킴의 일부가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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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방문했습니다
장태호 지음 / 종이심장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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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석 연휴 내내 시골집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었다.

푸른 하늘이 제대로 펼쳐진 가을의 언저리에 이런 여유를 누리며 책을 읽을 수 있다는게 너무나 좋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보고 있는 하늘이 책 속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하늘은 어디나 비슷해서 낯섬이 덜할 것 같으면서도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아프리카의 하늘을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황량할 것 같은 대륙을 닮아 하늘도 황량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프 타운의 하늘은 더 푸르렀다.

 

내가 생각했던 아프리카는 어떤 모습일까.

가난과 억압과 고통의 대륙이라는 인식 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아름다운 자연은 그들에게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여행하면서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들에게 사치가 아닌 케이프 타운을 차지해 버린 백인들에게(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이면서 확실히 백인들의 도시였다.)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도 기꺼이 그 사치를 누려보고 싶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케이프타운은 이상적인 도시였다.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지만 북적 대지 않는 곳. 그리고 여유와 고독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곳.

사진속의 케이프타운은 그래 보였다.

늘 유럽을 갈망하던 나는 단박에 케이프타운으로 마음을 돌려 버렸다. 유럽처럼 무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구경거리는 부족할지라도 케이프타운은 자연과 가까운 도시, 그래서 자연스럽고 숨통이 틔이는 도시였다. 그래서 저자의 소소한 경험담들은 이미 내 마음속에 케이프타운을 상상하기에 충분해 졌고 갈망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이 구별되지 않는 시그널 힐에 서서 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고 아틀란티스 샌듄에서 모레 스노보드를 타고 셋지 필드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희망봉에 올라 나의 희망을 꾸려 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케이프 타운을 꿈꾸고 있었다.

하루 종일 널부러져 책을 읽을 수 있고 다리가 아프도록 아름다운 자연 속을 산책하고 혹여 저자처럼 무서운 펭귄들을 만나더라도 아프리카의 펭귄 구경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상상이나 했는가. 남아공의 펭귄을?)

한없이 평화로워지고 순조로워지는 시간이였다.

케이프타운의 하늘을 볼수 없다면 고개를 들어 그와 비슷한 한국의 푸른 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던 시골의 마당은 그대로 케이프타운에 닿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런 편안함을 즐기게 해주었던 요인중 하나는 저자의 글이였다.

멋을 내지도 않고 숙련도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늘 내가 하는 생각, 늘 내가 품는 마음과 비슷한 언어를 토해내고 있었다.

스스로 감상에 젖고 스스로 케이프 타운에 빠진 모습을 보면 내가 거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기에 충분했다.

미흡함이 아닌 나와 비슷한 혼을 가졌다고 할까...

저자의 소박함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랬기에 케이프타운의 여행을 마치면서도 아쉬움이 들거나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책을 펼치면 볼 수 있듯이 케이프타운은 그냥 그렇게 있어 줄거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언제든 케이프타운을 만나 여행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케이프타운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향한 펭귄의 방문을 기꺼이 반갑게 맞아줄까.

 

하늘...

그 오묘한 하늘을 기억하고 있을께.

부디 나를 마중나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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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심 - 상 - 파리의 조선 궁녀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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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아갔고, 흘렀으며, 다시 돌아왔다.

19세기 말의 그녀가 어떻게 일본, 프랑스, 탕헤르(모로코)를 여행하며 어떻게 조선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그것도 궁녀의 신분으로. 그녀의 삶의 행적을 좇자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랑이 모든걸 이겨내 주었을까?

리심에겐 사랑이 그래주질 못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맏았지만 오히려 그려는 배꽃이 되어 하늘 하늘 흩뿌려 진다.

 

그녀의 마지막 행위를 나는 극단적이고 비극적이였다기 보다 그녀가 견디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였다고 본다. 그래서 많은 부분 아쉬움이 들고 허망하였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마음은 슬픔이였다.

분명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그 사랑의 절정을 향해 던질 수 없는 현실, 그리고 그녀가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던 난간함 위치의 남자들.

그랬기에 이 소설은 로멘스를 벗어나 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불꽃 같은 삶을 태우고 간 리심.

그녀는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처음의 리심도 아니지만 그 누구의 리심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리심으로 말이다.

그녀가 하늘을 날고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춤을 출 수 있는 리심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것 같다.

 

세권으로 된 리심을 간추려 보자면 첫권 나아갈 진(進)에서는 궁녀로서의 삶, 과거의 아픈 기억, 고종과 프랑스 공사관 빅토르 콜랭과의 만남으로 인해 조선을 떠나는 운명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두번째 흐를 류(流)에서는 빅토를 따라 일본, 프랑스, 탕헤르를 여행하며 겪은 여행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조선 여인으로써 그런 나라들을 여행하고 또 여행기로 채워져 있다는게 독특했지만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그녀의 여행은 그렇게 호락 호락 하지 않았다. 동양인으로써 프랑스 여행이 얼마나 위험하고 상처 투성이인지 그리고 외교관인 빅토르의 신분때문에 정치적으로 얼마나 묶여 있는지 색다른 여행기 밖에는 그 많은 상처와 음모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3권 돌아올 회(回)에서 그러한 복선들이 절정을 이룬다.

조선의 외교관으로 다시 돌아온 빅토르를 따라 리심 역시 돌아오지만,좋아하지 않으면서 미워할 수 없는, 빈자라를 보고 그제서야 존재의 의미를 찾는 민비는 일본에 의해 살해된 후다.

조선을 지배하고자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 진을 치고 있고 그 가운데 고종을 두고 갈리어진 정치적 이념과 혼란 속에 리심은 붙들리고 만다.

빅토르가 고종의 부탁을 거절하자 고종은 리심을 원래 자기 것이였으니 다시 가져 간다며 다시 궁중의 무희로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춤을 춘다. 고종과 빅토르가 있는 황제 즉위식 특별 공연에서 어느 누구의 리심이 아닌, 춤을 추는 리심이 되어 그녀는 그렇게 사리지고 만다.

 

나라와 시대를 뛰어 넘는 러브 스토리, 혹은 최초의 조선 여인으로써의 여행기 등등이라고 생각할 뻔 했다. 그러한 사실들을 배제할 수 없으나 리심, 그녀의 처연했던 삶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세상은 그녀의 편이 아닌듯 냉정하고 그녀는 아름답지만, 슬퍼야 하는 이유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조선으로의 돌아옴은 프랑스에서 보다 더 처절했다. 그녀를 이용하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늘 안일한 그녀의 태도가 진부하기도 했다.

왕, 외교관이란 신분의 거대함의 어두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마음을 따라갔을 뿐인데 그래서 그들의 전부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그들에겐 그녀가 전부가 될수 없었다.

탕헤르 사막에서 길을 잃었듯이 그녀는 그렇게 홀로 사막을 걸어 가고 있었다.

 

팩션이라는 전제하에 펼쳐진 리심의 불꽃 같은 삶을 재연하기 위해 저자는 직접 그녀의 흔적을 좇는다.

그러나 조선 여인을 정식 부인으로 맞이하자면 외교관의 신분을 버려야 하기에 어디에도 리심의 흔적을 찾기 힘들고 빅토르 콜랭의 흔적 뿐이다. 그 사실이 아쉬우면서도 씁쓸하긴 했지만 그녀도 감수한 삶이기에 크게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존재했을까란 의문부터 왜 그렇게 사라져 버렸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아쉬움이 꾸물 꾸물 올라온다.

증거의 대질이 아닌 그녀의 삶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조금은 특별한 삶을 택한 댓가 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궁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과거 지향적인 안타까움을 뱉어 보지만 그녀가 꾸렸던 삶이였다.

빅토르 콜랭을 따라 이루어진 삶이 아닌 그녀가 선택하고 그녀가 이루어나간 삶이였다. 그랬기에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아쉬움이 왜 남지 않았겠냐만은 그랬기에 더 아름다운 삶이였다.

안정적인 삶, 불꽃같은 삶.

그 중에 과연 나는 어떠한 삶을 택했을까. 기회와 운명을 떠나 불꽃같은 삶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안정적인 삶을 택했을 것이다.

그녀처럼 세상을 향해 부딪힐 용기가 내게는 없었을 것이다.

이 가을, 파리지엔의 리심도 사막 위의 리심도 아닌 시를 읊고 춤을 추는 리심을 기리며 그렇게 꿈을 꾸어 본다.

과연 내겐 큰 세상이 존재하는지를.

 

 

p.s: 오타 발견.

     리심 中 p. 68

     '1991년 6월부터 1993년 3월까지,'

     1891년 1893년으로 바꿔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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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백 - 소유할 수 없는 자유에 관한 아홉 가지 이야기
바히이 나크자바니 지음, 이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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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언어는 몽롱하고 사막의 모레가 씹히는 듯한 낯섬은 늘 빠른 속도로 책 읽기를 갈망하던 내게 치명적이였다. 첫장 '도둑'에서 책을 얼마나 덮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책장이 잘 안 넘어간다고 포기해버리긴 싫었다. 그럴수록 꼭 읽어봐야 겠다는 갈망이 피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갈망이 없었다면 이 책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이 서서히 스며 들어가며 몽롱함의 한가운데를 파고든 느낌.

그렇게 책이, 그리고 나의 느낌이 변해가고 있었다. 신기했다.

 

총 9편으로 나뉘어진 차례를 본 터라 1장 '도둑'을 읽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면 안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각각 9편의 이야기가 나뉘어 진다면 읽어야 겠다라는 갈망이 또다시 무너지는게 아닌가 하는 섣부름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2장 '신부'를 읽고 3장 '두목'을 읽을즈음에 나의 판단이 얼마나 어릭석었는지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각장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가면서 맞게 되는 이야기는 점점 흡인력을 갖춰가고 있었다.

9장으로 나뉜 이 책은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라 옮긴이의 말처럼 씨실과 날실이 만나듯 잘 짜야진 하나의 거대함이였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아홉 사람의 사연의 중점에는 새들백이 있었다. 순례자의 새들백을 베두인이 훔치고 그 새들백으로 인해 차례 차례 신비함을 맛보아 간다.

함께 여행했다는 이유외에는 특별히 공통점이 없는 그들이였다.

그러나 새들백을 통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변해간다.

그런 욕망은 그 전의 모습들이 아닌 무엇에 홀린듯한 몽롱함과 열정이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잊은채 새들백을 통해 느끼게 된 자신의 의지 하나만 밀고 나간다. 신비하달 수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도대체 그 새들백에는 무엇이 있기에....

고결한 서체로 씌여진 글이 있었지만 그 글의 의미는 읽을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새들백이 그들에게 미치는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공통된 것이 없는 그들이기에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몽롱하고 신비한 그 무엇의 분위기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사막을 건너고 새들백을 마주하게 된 과정보다 마주하게 된 후가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런 신비함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큰 역할은 아무래도 글의 양상이겠다. 1장 '도둑'에서 새들백을 안고 절벽에서 뛰어 내린 베두인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리고 시각이 다르듯 느끼는 바와 미치는 영향 또한 각양각색이다.

베두인의 행동을 보며 천사라고 생각하는 신부, 암시라고 생각하는 탁발승, 어리석다 생각하는 두목등 그들의 이야기에 펼쳐지는 조연같은 사건과 인물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짜여있다.

어떤 이의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그 행동은 파헤쳐지고, 또 본인에 의해서 한번 더 밝혀진 후 또 다른 가능성의 여부를 낳는 글의 양상, 독특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알아가는 과정이 쉬웠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공간과 문체의 낯섬은 나와 작가가 펼쳐놓은 세계와 일체가 되지 못했고 계속 겉도는 느낌이였다. 그러나 나는 과감히 저자의 농락 속으로 빠졌다고 인정하리라.

서서히 옥죄어 오는 저자의 세계는 더디게 내딛었지만 구석 구석을 훑고 맛보는 걸음의 시작이였던 것이다. 그러한 녹록치 않음에도 나를 이끌어 주었던건 저자의 세심함 때문이였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부터 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끝까지 맛볼 수 있을지 저자는 알고 있었고 그렇게 길을 만들어 주며 친절히 정리까지 해주고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도 몽롱함은 가시지 않는다.

사막을 둘러싼 낯선 나라들의 문화와 생활방식만 해도 정신을 차릴수 없을 정도인데 사막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그런 몽롱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꿈을 꾼 듯, 그 꿈이 나빴다, 좋았다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분위기는 사막이라는 배경도 새들백을 통한 신비함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 완벽함에 헤메느라 온전히 부응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 분위기에 취한것만은 확실하다. 

내 기억의 언저리에나 존재할법한 스쳐가는 생각을 저자는 이렇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 역량에 놀랄 뿐 나는 여전히 사막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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