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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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언급 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실전에 필요한 14가지 독서법' 중에서 요즘 내가 즐겨서 하는 독서는 '같은 테마의 책을 여러 권 찾아서 읽어라' 이다. 특히나 이런 독서를 할 수 있음은 내게 낯설었던 테마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행하게 되는 독서법일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책 읽는 소리,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책만 보는 바보를 읽고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옛 공부의 즐거움, 스승의 옥편이라는 비슷한 책이 대기 중이지만 위의 책들을 읽으면서 조선 중기의 학자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흥미로워 졌다.
특히나 책만 보는 바보를 통해 만난 이덕무에 관심이 많이 쏟아졌는데 이 책에서도 이덕무 뿐만이 아닌 정조때의 선비들에 대해 많이 나온다.
'책 읽는 소리'라는 책을 읽고 비슷한 책들을 찾아 보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선인들이였고 벗처럼 스승처럼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친근해진 느낌이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선비들의 모습이 조금씩 확신을 더해가는 느낌이다.
 
내가 읽었던 책들 속에서 선비들의 모습은 학문에 대한 열정, 책을 사랑하는 마음, 벗과의 우정이 주류였다면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좀 더 포괄적인 선비들의 활동영역과 다양함을 추구하고 있다.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 피력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온전히 시대에 흡수 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많은 것을 추측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양함을 추구하다 보니 좁고 깊게 파고느는 것이 아니라 넓고 얇게 파고 들어서 진득한 깊이를 느끼려 하면 어느새 테마가 바뀌어버려 아쉬웠다.
몇몇 선인들의 특징을 알고 있어 읽는 재미도 더하였지만 중복되는 느낌도 있어 때론 너무 광범위해 선비답게 산다는 것보단 선비들의 모습이라고 치부해 버릴 뻔 했다.
그러나 시대를 뛰어 넘어 그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곧음, 열정, 순수함은 한껏 지겨움이 난무한 세상에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학문이 주류가 되는 그들의 세계에서 어려움 보다는 즐거움으로 대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내가 반듯해지는 느낌이다.
 
같은 시대를 살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정갈함이 이러할진대 연암 박지원이 말하는 벗의 의미는 현 시대에 머무르고 있는 내게 생경하게 다가온다.
한 세상을 살게 된 것 부터 같은 장소, 같은 나라. 같은 지역,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대며 인연의 오묘함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러한 오묘한 인연이 몇이나 되는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랬기에 그들의 소박한 편지와 글, 공부와 취미, 독서와 선비로써의 삶은 범접할 수 없으면서도 '이것이 바로 조선의 선비구나'라는 감탄사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 계층으로써의 시대적 배경을 떠나서 선비다움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은 잠시 제쳐 두고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열의를 보인 그들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다.
시대 격차의 공백을 비웃듯이 뛰어 넘는 선인들의 성찰은 복잡하고 첨단화된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 잠시 현실을 잊고 많은 과욕을 버리게 해주었다. 18세기 후반 백두산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은 천하만사를 모두 잊어 버리게 했다던 신광하의 충격 보다 못할지라도 잔잔한 깨달음은 나의 조재감에 감사함을 더해 주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방면의 선비들의 모습을 보여 주어 흥미롭게 읽어서 자칫 선비들을 통한 깨달음을 방치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깊게 다가오는 성찰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벗과의 우정, 독서, 공부였는데 요즘의 우리처럼 단기간에 무엇인가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지켜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의 취미든 일이든 인생이든 벗이든 평생지기를 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마음을 다듬어 보며 생각에 잠기는 이 밤이 무척이나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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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아르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4
전규태 해설 / 서문당 /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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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중에서도 자연 풍광에만 마음을 뺐기다 보니 르노와르의 그림들은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특히나 누드화가 많은 르노와르의 그림은 나의 관심 밖이였다.

고흐나 코로 등 자연의 모습이 더 많은 화가들만 보다보니 어쩜 당연한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림에 워낙 문외한이다 보니 우선 시선이 자연스러움으로 간다.

그렇게 그림만 보다 보니 조금씩 시선이 틔이는 느낌이고 어느새 르노와르의 그림도 나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테라스에서'라는 그림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 작은 도록까지 사게 되었는데 정작 이 책에는 그 그림이 없어서 아쉬움이 컸으나 오히려 '테라스에서'라는 그림에 쏠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누드화만 그리는 화가로만 인식되어 있었는데 르노와르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그 동안 내가 보아왔던 풍경들보다 더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얼핏 보면 특징이 없어 보이는 자연의 모습들은 르노와르가 절제를 했기에 그렇게 보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르노와르의 섬세함에는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

여인의 머리카락이라 든지 화려한 원피스를 얼마나 정성 들여 그렸는지 그림속에 여인이 들어 있는 모습으로 착각하기 쉽다.

 

분명 문외한인 나의 시선으로 봤다면 이것들을 느끼지도 못하고 스쳐 버렸을 수도 있다. 그림과 함께 짧막한 설명은 깊으면서도 명료하다.

때론 내가 이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질 정도다.

판본이 오래 되어서 괜히 모든 것이 낡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은 변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평론에 구애를 받을 필요도 없고 마음을 연 상태에서 그림을 보면 될 것 같다.

게을러서 그림을 보는 것만 좋아해 봐도 봐도 보는 시각이 느는 건 느껴지지 않지만 그냥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림은 내게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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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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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고느적한 분위기에서 현장독서를 하며 설국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제목만 보고 생각해낸 무턱댄 바람이였는데 막상 책을 읽어 보니 첫 장면의 모습 이후 설국에 맞는 이미지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단순하게 온통 눈으로 뒤덮인 배경이 펼쳐질거라 생각했는데 쌓인 눈을 보면 떠오르는 추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기에 눈을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레 기차를 타고 가던 것, 온청장의 게이샤 고마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요코가 차례대로 그려지며 주인공 시마무라에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설국 속의 매개체가 되어 자연스레 자연과 인간, 그리고 추억을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무척 서정적으로 보이는 분위기임에도 그들의 내면 가운대로 빠져드는 건 쉽지 않다.
<한 나라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가 짙게 배어 있는 훌륭한 작품일수록 번역도 힘들다.> 라며 번역자도 말했듯이 읽어 내는 독자도 그 공백을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고마코의 변덕과 행동들이 그랬다.
시마무라를 좋아하면서도 행동과 말에서는 그녀의 진심을 찾기가 힘들었다.
고마코의 마음을 아는 시마무라의 행동도 어정쩡하고 요코에게 더 매력을 느끼며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마을에서 고마코와 요코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더 우유부단해 진다.
고마코의 한결 같을 수 없음이 자신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런 고마코에게 어떠한 입장도 취할 순 없다. 그는 그냥 지켜보며 관찰 할 뿐이다. 고마코도 요코도 그들의 관계도.
 
그랬기에 그가 떠나는 날 마을에서 난 불로 인해 고마코와 요코의 또 다른 모습을 보며 끝나버리는 결말 앞에서 나는 멍할 수 밖에 없었다. 책 속으로 완전한 흡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해도 '우리와 많은 것이 다르니까'로 밖에 결론이 안나는 모습이 아쉬웠다.
한때 들리는 소문에 조정래님의 작품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번역의 문제이고 도저히 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들렸다.
내가 읽어 보아도 토속적인 우리의 문화와 진한 역사가 배어 있어서 수긍이 가면서도 어쩜 이 작품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의식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지만 한 나라의 고유성을 하나하나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어야 했다.
현재의 일본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일본인들의 모습은 100% 공감하기 힘든 것이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그다지 특별하다고 볼 수 없는 스토리를 보며 이런 거창함을 운운하는 것은 우리와 너무나 다른 고유의 문화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였다.
그러면서도 수박 겉핥기 밖에 할 수 없는 주석들을 보며 우리와 너무 다르다고 답답해 하거나 짜증을 낼 수 없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문학으로 이끌어 내는 저자의 역략에 순종할 수 밖에 없어서리라. 쉽게 무시할 수도 지나칠 수도 없는 멈춤이 다행으로 여겨지는 것은 문학이라는 연결 고리의 이어짐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리라.
 
시마무라의 시각이 때로는 지나치게 냉담하고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켜본다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간다. 그래서 단순한 에피소드로 보기 보다는 처음에 밝혔듯이 기억의 회귀라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메세지를 담고 있어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퍼뜩 생각이 나는 필연적인 연상이 아닌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따라가는 기억의 흡수라고 말하고 싶다.
시마무라가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든가 고마코의 앞으로의 행보, 요코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자연스레 그들의 흐름을 보아 주는 것도 어쩜 순리가 아닐까.
나의 틀에 모든 것을 맞추기 보다는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겨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모든 것이 낯설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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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예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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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씌여진 소설을 손질해서 다시 내 놓았다는 후기를 보니 내가 읽었던 책 속의 주인공들이 과거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나의 상상의 나래는 펼쳐진다. 야요이와 데츠오는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야오이와 유키노는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을까란 생각을 해보지만 금방까지 내 곁에 머물렀던 그들의 미래를 꺼내보려니(그들에겐 현재가 되겠지만)조금은 낯설다.
그래도 뿌듯함이 남도록 그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자신들에게 솔직해 졌으니 하나하나 헤치고 나와 당당하게 맞서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들을 누렸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관계, 사랑에 추구라는 용어를 써서 딱딱해 보이긴 하지만 야요이와 유키노, 데츠오에겐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다. 그래서 절망을 싣기 보다는 추구를 통해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지끔껏 잊어 버리고 억눌렸던 것들이 많았기에, 그런 세월의 흐름 앞에 그들은 방황하고 안절부절 못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들은 분명 힘들어 하고 있었지만 격하거나 극단적일지라도 차분함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며 온전이 그 모든 것들을 전해 주었다고.
 
깊은 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감성과 언어는 느끼는 그대로 나의 몸과 뇌리에 박히고 있었다. 유난히 묘사가 많은 밤 하늘과 자연은 답답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고 그들이 찾아야 할 것들은 도심의 복잡함 같을 지라도 여유로움과 단아함으로 묘사되며 다가왔다.
양녀라는 사실보다 이모로 알고 있었던 유키노가 언니라는 것, 남동생 데츠오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하는 것. 무언의 감정 속에서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인 채 현실에 충실하고 있기에 내가 느낄 우울함도 없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어 버린 유키노와 야요이의 방황은 내면을 조금씩 갉아먹어 주체할 수 없을 때 집을 나가는 행동을 보이며 안정감을 찾으려 하지만 소원해져 버린 그녀들의 관계가 결국은 돌아가야 할 종점이며 그 사실을 인정해 갈때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을 깨닫는다.야요이에게 데츠오가 그러하듯 이모와 동생을 잃은 것이 아닌 언니와 애인을 스스로 발굴했다고 결론짓 듯 복잡미묘한 상황을 서정적으로 이끌어 간다.
 
그들 앞의 현실은 수 많은 난관부터 떠오르지만 야요이의 결정에서 나는 긍정적인 희망을 보았다.
더이상 집을 나서서 이모집으로(이제는 언니지만) 도피하거나 이모를 찾아 과거의 행적을 뒤질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집을 나올지언정 지금 속해 있는 집에서 정체성 혼란도 자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어렴풋이 상상하며 책을 덮으려는 찰나 이미 나온 작품을 수정했다는 후기를 보았으니 어느새 그들은 과거의 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들의 현실을 추측할 수 밖에 없는 내가 되어 버렸지만 저자도 수정과 책을 다시 내는 과정에서 그들의 미래와 과거를 그려봤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시도를 독자들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지만 수정 이전의 이야기를 알 수 없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의 현재가 내게는 미래일 뿐이라며 긍정적인 추측만 어렴풋이 할 뿐,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이러이러 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은 드러내지 않는다.
결말은 오픈되어 있지만 충분히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야요이가 천천히 더듬어 가던 자신의 기억과 자아처럼 새롭게 펼쳐질 진정한 야요이의 미래에 긍정적인 삶을 살 의지를 보이고 있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현재건 미래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 서서히 내 딛는 야요이의 발걸음처럼 조금함도 답답함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치하지만 슬픈 예감이 지금껏 야요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기쁜 예감만이 존재해 햇살 가득한 베란다의 따뜻함처럼 혹은 밤의 맑은 공기처럼 상쾌하기를 바랄 뿐이다.
달이 차오르듯 바람이 흘러가듯 야요이가 느꼈던 공허를 안정됨으로 채우고 더이상 잃어 버리지 않기를....... 그 곁에는 데츠오와 유키오가 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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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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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0이라는 숫자와 전쟁을 인식하는 순간 성경에 나오는 기드온의 300 용사가 생각났다.

하나님의 이끔에 따라 300이라는 숫자로 엄청난 수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사건.

300을 보는 순간 그 사건이 생각나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지만 기드온의 300용사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 보다는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있음에도 도통 흐름을 잡을 수가 없었다.

늘 글씨만 빽빽히 들어찬 책들을 읽고 상세한 설명과 묘사를 접하다 보니 배경 그림 가운데 띄엄 띄엄 들어찬 말풍선의 대화와 설명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였다.

 

책을 덮고도 멍했고 무언가 휩쓸고 지나 갔는데 도통 그 느낌을 적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바다에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날림으로 읽었던 첫 번째 읽기와는 다르게 공백의 비워짐속에 상상력을 집어 넣고 천천히 보았다.

마치 말풍선들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존재 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글씨로 채워진 책들 속에서의 상상력 부족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첫 번째 읽기의 헛점을 인식하고 읽었더니 조금씩 책 속으로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졌지만 보통 그림책보다 길고 빽빽한 배경속의 여백이 처음엔 낭비라고 생각되던 것이 두 번째 읽을 때는 무한한 상상속의 실제 공간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니다스 왕과 그들의 군대는 전설이 되었다.

 

불가능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게 더 쉽고 불가능을 뛰어 넘기엔 몇 안되는 가능성을 끌어 모아야 하고 그건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을 뛰어 넘을 때의 그 만족감 또한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그 불가능을 뛰어 넘고자 할 때 정의감이 살아 있다면 이들처럼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알면서도 맞서는 이들, 맞수가 안되는 상황에서도 불복하지 않고 당당한 그들 그들을 그렇게 불타게 만들었던 건 무엇이였을까.

옳지 않는 것에 복종할 수 없는 스파르타인의 기질이였을까?

무엇이라 뚜렷이 말할 순 없지만 가족을 버리고 지위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전쟁을 강행했던 그들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굴욕적인 삶을 선택 하느니 정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되려 경이로울 뿐이다.

 

도망치지 않는 왕, 그런 왕을 따라 끝까지 싸우는 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멀리 내가 사는 세계까지 올 필요도 없이 레오니다스에게 복종을 권유했던 오만한 크세르크세스와 탐욕만 일삼는 사제들만 보더라도 절대 그들 앞에 무릎 꿇으며 모욕을 받기는 싫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전면전을 선택한 것은 어리석다고 얕보고 깔보는 그들에게 우리의 신념은 불타고 있으며 의지는 하늘을 향하고 손에 쥐어진 창은 너희들 가슴을 찌를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 함이 아니였을까.

 

레오니다스가 출전하기 전 딜리오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는 스파르타 법에 따라 싸우다 죽을터이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고. 그것은 위대한 행동의 시대, 이성의 시대, 정의의 시대, 법의 시대이고 그것을 지키고자 삼백 명의 스파르타인이 마지막 숨결을 바치게 될 것을 누구나 알 것이라고 레오니다스는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싸우며 의로운 죽음을 향해 갈 뿐이였다.

레오니다스의 말대로 그들의 싸움은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어 그리스인들 사이에 퍼졌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딜리오스는 전쟁을 준비한다. 수수께끼 같던 왕의 승리를 그제서야 인정한 채 레오니다스의 뒤를 이어 정의로운 죽음, 승리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죽었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늘 살아 있는 것 같다.

이름 모를 용사들이라 할지라도 300이라는 숫자에 감추어진 개인들일지라도 그들에겐 의로움이 남았다. 진정 죽음을 선택하고 상상할 때 이러한 죽음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정의의 총대를 메고 전진하는 사람의 뒤를 따른 적이라도 있는가.

그들 앞에 나의 생명은 한 없이 차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뜨거웠던 그들의 열기는 나의 생명을 비웃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싸웠을 뿐이라고 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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