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
한승원 외 지음 / 예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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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저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어야지 생각하는 순간 두통이 밀려온다.

최근 들어 잦은 두통이 신경 씌인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일까. 책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아야 겠다라고 다짐했으나 그 다짐은 내 방문을 여는 순간 허물어진다.

나의 읽힘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책들. 그 다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는 책을 펼쳐 든다.

오늘은 '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 차례다.

 

무척이나 아꼈던 책이다.

차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에세이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사람을 듬뿍 받았다. 더군다나 어디선가 익숙한 '와온'이라는 단어가 나를 이끌었는데 알고 보니 좀 떨어져 있긴 해도 나의 고향시에 포함되어 있는 면소재지의 바다 이름이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큼지막한 글씨로 써 있는 버스를 본 기억이 있던 와온. 그렇게 덧붙여진 사실 하나가 책을 더 아끼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비는 주룩 주룩 내리고 창문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는 나의 감성을 자극했다. 두통이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의 책 읽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녹차를 우려 놓고(숯가마에서 구운 다기와 나름 대로 맛 좋은 녹차가 있었기에.)읽고 싶었으나 책을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차를 마시는 효과를 맛보아 버렸다.

차 향이 그윽했고 입안에 그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지고 차를 마시고 난 후의 개운함이 어느새 안착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차를 마시고 난 후의 느낌인데.

빗소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 온 몸을 감싸고 도는 개운함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벌렁 누웠다.

너무나 편안했기에 스르르 잠이 밀려 왔다. 눈을 떠보니 30분 정도 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을 이루면서 녹차의 그윽함을 분명 맡은 것 같았다. 꿈에서든, 책에서든, 나의 상상에서든.

 

한비야씨는 '중국견문록'에서 그런말을 했었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원서로 읽는 책보다 한글로 된 책을 만날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단박에 속도부터 차이가 나고 뻥 뚫리는 느낌이라 했다.

원서로 읽어 본 경험은 없지만 번역본과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에서의 차이는 나름대로 감지하고 있다.

이렇게 핵심을 겉도는 이유는 이 책에 실린 11명의 문장가들의 언어가 너무나 단하 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비야씨가 중국에서 어학 연수를 할 당시 친구를 통해 받아 본 한글로 된 우리책을 읽을때의 느낌이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짐작을 해본다.

어찌보면 차 라는 주제 안에서 어느 정도 압박감을 느끼며 펼쳐놓은 글임에도 그들은 자유분방 했다.

자신의 직업이나 인생이나 여유나 추억을 꺼내서 차와의 만남을 연결해야 함에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다양했다.

그 경혐은 때론 청아하고 단아하고 씁쓰레 하면서도 정갈있는 여러 가지의 차 맛처럼 편안했다.

단지 그들의 언어 속에서 차를 받아들였을 뿐인데 우리의 말이 이처럼 맛깔스러울 수 있었던가. 이처럼 아늑함이 들었던가. 또한 이토록 맑고 다정 다감할 수 있었던가.

수없이 되뇌어 보아도 책에 대한 나의 취함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차를 가까이 하면 그리 되는 것인가. 그들의 글 속에 삶 속에 푹 빠지면서도 억지로 차를 끓일 필요를 못 느꼈다.

 

한잔의 차를 통해 철학을 넘나들고 영화를 넘나들고 생활을 넘나드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함에도 차를 마시는 그들에게는 차의 그윽한 향이 느껴졌다.

차에 대한 남다른 애정, 감출 것 없는 자신의 전부를 털어 놓음에도 소박함이 방대함으로 바뀌지 않는 절제가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정갈하고 담백한 수필들이였다.

차를 통한 여유와 삶의 향기가 편안히 밀려오는 우리의 정서에 딱 맞는 글들이였다. 그런 글들로 인해 내 몸과 마음은 맑아졌고 차에 대한 애정이 더 진하게 솟아났다.

 

찻잔의 소박함에 멋들어지는 수묵화들. 그리고 시들.

차를 마시는데 이것 말고 정말 무엇이 더 필요하랴.

나를 느끼고 너를 느끼고 존재감을 구분 짓지 않음에 차 한잔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랴.

책을 덮고 나서도 그윽한 그 향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입안에 머금은 한 모금의 따스한 차 향은 그대로 온몸으로 퍼져 내 안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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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 그림 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2
토마스 다비트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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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때 부터 그림은 젬병이였다.

지금도 사람을 그려 보라 하면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 내고 조카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림은 내게 이상적이였다. 다행히 열등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그림을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림을 좋아 하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림에 대해서 아는건 없고 우연히 고흐를 좋아하게 되면서 서서히 그림에 대해 친밀감을 갖게 되었고 미술관도 좋아하게 되었고 일반 책들보다 조금 비싼 미술책들도 구입해서 보게 되었다.( 그림을 좋아하기 전에는 그림책을 사서 보는게 이해가 안갔다.)

화가에 대해서나 그림을 통한 해석 뭐 이런것들은 지금도 여전히 문외한이여서 '누구의 그림이구나' 라든가 그냥 '좋다' 이런 정도의 수준이지만 여전히 그림 감상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고 존재감을 끌어다 주는 요소이다.

예전부터 알아오던 고흐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림은 영영 내게 그렇고 그렇게 남아 있었을 텐데. 참 신기하며서도 아이러니하다.

 

각설하고,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같은 네델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나온다. 어디선가 '빛의 화가' 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렘브란트의 그림을 기억하거나 관심을 둔적은 없었다.

그러나 늘 다른 화가들에 대한 호기심은 팽배하기에 이번엔 렘브란트를 골라봤다.

 

어디선가 주어들은 빛의 화가라는 말에 걸맞게 겉표지의 그림은 빛이 난다. 빛이 비추는 것인지 황금 스스로가 빛을 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빛이지만 따스한 빛 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림속 주인공은 놀라고 있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씌여진 글자가 아마 그런 원인인 듯 하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성서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 왕이다.

그는 왜 저렇게 놀라고 있는 것일까.

렘브란트의 첫 이야기는 벨사살 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선왕이 닦아놓은 나라를 이끌어 가기는 커녕 놀고 먹고 마시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왕이였다. 그런 왕의 횡포는 심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날 엄청나게 큰 궁중연회가 벌여진다. 또 놀자판인 것이다. 벨사살 왕은 술에 취해 선왕때 예루살렘에서 약탈해온 성배에다 술을 마신다. 그리고 연회가 절정에 무르익었을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불쑥 튀어 나와 벨사살 왕이 앉은 뒤쪽 벽에 낯선 글씨가 새겨진다. 연회장은 혼란의 장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언어는 낯선 언어였다. 그 누구도 그 글시를 해석할 수 없었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그는 바로 다니엘이였다.

그 글이 해석된 저녁 벨사살 왕은 침소에서 살해 당한다.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고 마감하셨다. 그리고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그리하여 왕의 나라를 이웃나라에 갈라 주신다.'

 

즉, 벨사살 왕은 이젠 왕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우리는 자칫 커다란 의문을 지나치기가 쉽다.

수천년 전의 일, 게다가 성서에 글로만 존재하는 벨사살 왕의 연회를 어떻게 그렸으며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는가이다.

그림 솜씨도 솜씨지만 렘브란트는 상상력이 뛰어난 화가였다.

그리고 그 지역의 문화와 풍토를 연구하고 모델들로 하여금 그 연회처럼 하도록 자기의 화실에서 한편의 연극을 하도록 하였으니 이토록 사실적일 수 밖에.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모두다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베껴오는 그림조차 원작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니 얼마나 노력했고 얼마나 재능이 있는 화가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이였다.

그림 속의 인물이나 사물들은 움직임의 한 조각을 떼어온듯 서로 어울려져 있고 따뜻한 느낌조차 든다. 물감을 두텁게 쓰는 그의 화풍의 영향도 있고 책 속에서의 그림들이라는 실재감이 떨어지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의 그림들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또 그의 그림에는 빛도 있다.

겉표지 <벨사살 왕의 연회>처럼 빛인지 금빛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의 따뜻한 빛은 렘브란트의 그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빛은 빛이 비추는 곳을 돋보여 줄뿐만 아니라 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 속을 더 잘 보여주는 효과까지 안고 있다.

 

자신의 변해가는 자화상 속에서도 그는 비처럼 따스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의 노년은 그다지 평탄치 않았다. 화가가 되면서부터 경제적 어려움은 당해보지 않은 그였기에 무절제한 씀씀이로 어려운 노년을 보냈다.

다행히 그의 화가 인생에서 경제적 어려움은 별로 없어 마음껏 재능을 펼쳤지만 경제적 부의 유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 같다. 또한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세명과 부인이 모두 일찍 죽고 두번째 부인격인 유모와 마지막 남은 아들도 렘브란트보다 모두 먼저 죽었으니 렘브란트는 몹시 외로웠을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겐 그림이라는 평생의 동반자가 있었으니 그가 불행했노라고, 노년은 불후했다고 단정짓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이 책은 렘브란트의 삶과 그의 그림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렘브란트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내가 미술에 관심을 갖고 책을 사서 볼때 그 화가에 대해서 모든걸 알고 싶었다. 그런데 겉핧기만 하는 책이 많아서 실망한 책도 적지 않았는데 이 책 '내 손안의 미술관' 시리즈는 그런 책보다 훨씬 무게감이 있었지만 책의 두께와 시리지의 이미지상 렘브란트 외에도 다양함을 싣고 있다.

17세기의 네델란드의 배경이라든가 역사 등 렘브란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렘브란트에 올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노파심에서 던지는 염려리라.

그러나 렘브란트에 푹 빠져 있거나 관심이 있다면 입문서든 소장용이든 나름 괜찮다는걸 말해주고 싶다.

이 시리즈가 너무 괜찮아 고흐의 책이 세권임에도 또 고흐책을 사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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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n Joy - 이탈리아 스타일 여행기
칼라 컬슨 지음 / 넥서스BOOKS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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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건 곤돌라, 피렌체,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 죽음 이 정도다.

얼마나 이탈리아에 대해서 무지한지 떠오르는 것들만 보더라도 대충 짐작이 갈것이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유명한 나라이기에 가보지 못한 질투심에 뭐 그냥 그러겠지 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책 겉표지를 펼치면 포스터가 되는 신기함이 독특해서 그 사진속의 사연들이 궁금했다.

그러나 삐딱한 질투심이 있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이탈리아에 쉽게 빠져들지 못했다.

13년동안 일을 하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탈리아에 건너온 저자의 경력은 그래도 내게 왠지 모를 비틀림을 주었다. 본국에서의 안락함을 버리고 오면 타국에서 힘들다는 걸 알지만 호주에서의 일한 시간들이 힘들고 외로웠을 지라도 그 결과로 인해 어느정도의 안락함을 이탈리에에서 누릴 수 있다는 열등의식이 꾸물 꾸물 피어 올랐다.

젊은 나이도 아니였고 큰 결정을 하고 온 것인데 타인의 절망을 절망으로, 희망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 현지인도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람이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경험하고 찍고 쓴 글이니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우리의 정서와 안 맞았다는 표현 혹은 변명이 매끄럽지 못햇다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열등의식, 뒤틀림, 색안경으로 보아버렸던 그녀와 이탈리는 이렇게 악조건 속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가 애정을 갖고 대하는 이탈리아의 찻집이나 바 같은 곳들이 내겐 어색하고 낯설었다.

이탈리아에 대해서 무지하기에 유명한 곳곳을 살피며 찍은 사진들 그리고 역사 뭐 이런것을 기대했으나 점점 나의 예상을 깨고 있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겉모습이 아닌 진정한 이탈리아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애정이 느껴졌다.

그걸 발견하는 순간 내 마음의 독이 사라졌다.

그녀처럼 이탈리아를 느끼고 이탈리아에 대한 편견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피렌체에서의 그녀의 생활, 그 속에서 하나 하나 느껴가고 사람들을 사귀고 사랑해 가는 과정이 보기 좋았다.

 

시장을 구석 구석 누비고 파스쿠알레의 바에 찾아가서 차도 마시며 밥도 먹으며 수다를 늘어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과 휴가도 가고 처음에는 그녀 위주의 삶에서 천천히 주변 사람들, 이탈리아 인들과 동화되어 가는 모습이 점진적으로 늘어진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이해하고 친구와 가족으로 받아 들이고 그들의 특징을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그녀의 변화가 이젠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에 못지 않게 이탈리아의 독특한 면과 편견에 휩싸여 두리 뭉실 생각 되어지던 이탈리아가 정겹게 다가왔다.

 

휴가철이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문 닫고 떠나는 그들..

10년이든 20년이든 같은 휴가지를 가는 열정 또한 우리가 맛보지 못한 여유가 잇었다.

그런 여유 속에 먹는 것을 참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1시부터 3시까지는 무조건 점심을 먹고 세시간이고 네시간이고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과 요리에 대해서는 거품을 물고 얘기하는 거며시장에서 재료를 살때 요리 걱정을 안해도 되는 것이며(그들은 정확하게 자세하게 요리법과 재료를 알려 준다.) 요리에 관한 것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한 여유와 사랑은 참 부러웠다.

늘 빨리 빨리 대충 대충 먹는 나의 모습과 우리에 식습관에서는 온 가족이 모여서 푸짐하게 먹더라도 그런 여유는 찾아 보기 힘들었다. 조금 여유 있게 먹다가 밥상 머리에 혼자 앉아서 눈총을 받은 적이 많은 나는 그들이 식습관이 이해가 안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부러웠다.

또 집집마다 빨래 건조대가 없다는 것과 가전제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도 독특햇다. 이건 이탈리아라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가본적도 없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빨래를 널리라곤 생각할 수 조자 없었다. 그것도 집안에 빨래 건조대를 갖추지 않고 속옷이며 슬리퍼며 모든걸 빨래 줄에 다 보이게 널어 놓은게 무척 독특했다.

도심의 하늘이 빨래로 채워진게 친근하면서도 이국적이였다.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하는데 왠지 그들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도대체 뭘?) 편견속에 가둬둔 사실이 무척 어색했지만 이 책을 통해 이탈리아의 유명한 곳곳이 아닌 가장 진실된 이탈리아 있는 그대로를 본 것 같다.

그녀도 이탈리아의 이런 모습도 좋지만 가장 좋았던건 사람들의 친절과 다정함, 열정이라고 했다. 그녀의 모습에 비친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두다 정이 넘쳤다.

가족을 그리워 하는 모습조차 외로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 부러워서라는 그녀.

왠지 서서히 이탈리아에 젖어 드는 느낌이였다.

 

책을 대충 훑어 볼때는 사진이 중점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사진 옆에 나온 그녀의 설명이 잘 보이지 않아 무척 짜증스러웠는데 그녀의 글로 인해 상상을 하고 사진은 참고가 되었다.

나중에는 사진속의 짧막한 제목을 놓치지 않으려 발악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이탈리아에 매료 되었나 보다.

 

그녀의 글이 뛰어나거나 서정적이거나 특별해 매료되었던 건 아니였다. 앞에서 언급했다 싶이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지 아님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은지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느낀 그대로에 충실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이탈리아를 본 것 같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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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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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게 아디안텀 블루인가요?'

'아디안텀 블루? 아닌데... 정확한 이름이예요?'

'네'

'잘 모르겠는데...'

 

우연히 들어간 화원에서 아디안텀 블루와 비슷한걸 발견해 물어보았더니 잘 모르겠단다.

내 기억 언저리로 그렇게 아디안텀 블루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분명 아디안텀 블루를 만났더라면 확실했을 기억들.

망각 속으로 가라 앉아 버린 아디안턴 블루를 나는 건져낼 수 있을까......

 

그녀가 사과를 한다.

펜션 주인인 미셸에게 실은 여행이 아니라 죽으로 왔다고 사과를 한다. 미셸은 편히 있으라며 안됐다며 도리어 요코와 야마자키를 위로한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익숙한 러브 스토리에 이 정도 가지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무덤덤 했는데 요코가 미셸에게 사과하는 장면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곧 죽게 된다면 그렇게 사과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원망이 아닌 '나 여기서 죽어요.. 그래서 미안해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부한 대입을 떠나, 나는 그럴 수 없기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코가 했기에 나의 마음은 어느새 허물어져 버렸다.

 

파일럿 피쉬의 연작격인 아디안텀 블루를 만났을때 친숙함 그 하나만으로도 편안했다. 글의 형식도 비슷해서 야마자키가 사랑했던 요코의 죽음이 처음에 나왔을 때도 조급해 하거나 상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나오겠지란 생각으로 읽어 나갔던 것인데 전혀 예상밖의 죽음이 원인이 책의 양상을 뒤집어 버렸다.

아파서 죽었다?

왠지 요시오의 소설 특징상 너무 서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작품을 한편 밖에 읽진 않았지만 죽음의 원인이 서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건 왜 였을을까....

죽음의 원인이 진부하다는 느낌 아니면 너무 빤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까.. 그러나 그런 드러남에도 소설은 뻔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면 눈물을 펑펑 쏟고 세상을 향해 발악을 하는 등 익숙치 않은 죽음임에도 익숙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야마자키, 요코 그 주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진부하기라도 하듯 아니면 이것이 일본적이다 라고 말하듯 절제가 있었다.

요시오가 만들어 내는 세계에서는 진부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픈 과정, 야마자키의 절망, 요코의 슬픔등이 구구 절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늘 충실했다.

그렇기에 요코가 죽고 싶다던 니스로 행할 수 있었고 야마자키는 요코를 위해 기꺼이 동행했다.

그녀는 행복했을까.....

행복했을 거라고 단정짓지 못하는 나는 섣불리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죽음을 맞이 하는게 병원의 시트가 아닌 그리워 하던 니스의 하날과 바다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지만 그녀는 행복했을까.....

 

추억은 사라지진 않지만 닳는다.

야마자키가 기억하는 요코, 사랑,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닳고 닳아 기억의 파편들만 남을지도모른다. 오히려 요코가 그렇게 찍어 댔던 웅덩이를 보았을때 요코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런 요코를 기억하는게 야마자키만이 아닌 유카, 다카키, 미셸, 프레드릭 등등 그녀의 죽음을 위로해준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요코의 행복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외롭지 않았을 거라는 건 단정할 수 있다.

야마자키는 요코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야마자키가 할 수 있었던 건 없었다고 본다.

그녀가 죽고 싶다던 니스로 데려다준 것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대처하는 야마자키의 모습이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절제였든 아니였든 야마자키와 요코의 모습은 죽음을 앞두었다는 사실이 덤덤할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지킬 수 있을까...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따스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하면 죽음 앞에서 오히려 욕심이 많아지고 원망이 짙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아름다워 진다.

사람이 아름다워 지고 행위가 아름다워 진다.

그런 아름다움을 요코와 야마자키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요코는 니스의 하늘에서 야마자키는 도큐 백화점 옥상에서 서로를 바라볼 것이다.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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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내게 온 순간부터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인문학에 약했고 두께도 만만치 않았고 거기다가 앨빈 토플러의 명성까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겪어 보지도 않고 기가 죽는건 겉모습으로 본 시각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내가 다 읽은 걸 보면 편견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두고 있는지 또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책의 내용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냐 만은 그렇게 겁먹던 부의 미래를 다 읽었고 또 한번의 편견의 벽을 이 책을 통해 많이 부수게 되었으니 분명 책이 나를 짓누른것만은 아니였으리라 생각된다.

우선은 두꺼운 책을 다 읽었다는 해방감, 그리고 무언가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정리해야 겠다라는 의무감이 뒤섞인 감정들이 일어나지만 그 감정들은 결코 무겁고 암울하지 않다. 앨빈 토플러의 긍정적인 사고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이 두꺼운 이유가 있었다.

앨빈 토플러가 말하고 있는 부의 미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광범위 했다.

12년의 집필 과정은 그렇다 치고 이 많은 분야를 속속들이 파 헤치고 연구하고 알려주고 피력하는 과정이 대단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자 너무나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책이 두꺼워 지고 세세해 질수도 있겠지만 광범위함 속에서 멋대로 헤엄치고 다니는 것들이 아닌 축약된 느낌을 받았다.

앨빈 토플러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무척 많았고 예시들도 엄청났지만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혹은 많이 들어왔던 것들이라 많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자주 생각해 보는 것들이 아니였고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였기에 낯설었을뿐 부의 미래라는 제목하에 낯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얇은 나의 지식이 드러나더라도 부의 미래라고 했을때 단순히 물질적인 것들을 생각했고 미래라는 언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막연했다.

일상 생활속에서도 우리는 늘 미래를 막연하게 생각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부의 미래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라는 우물 안에 갇혀 타인을 보지 못했고 울타리를 보지 못했고 세계를 보지 못했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존재가 무척 미미했다.

또한 앨빈 토플러가 말한 부는 유형적인 것뿐만이 아닌 무형적인 것 그리고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것들도 다루고 있어서 나의 존재감은 잠시 접어도 될듯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나의 생각의 많은 것들을 뛰어 넘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게 미국이 되었든 우리나라가 되었든 무조건적인 부정은 삽입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앨빈 토플러는 껄끄러운 부분까지 거리낌 없이 말하였기에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감정도 이리 저리 치우쳤던것도 사실이였다.

내가 이해하는 부분이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든 주제는 넘쳐났기에 부의 미래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잊지 않으려고 했었다.

 

저자가 이토록 장황하게 말하고자 함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무엇을 간추려야 하는 것일까....

그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했으나 저자의 글에 휩쓸리다 보면 망각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저자는 대미를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것도 한번 살아볼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라고 말이다.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미래지향적인 것들, 현재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것들,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들이 복잡 미묘하게 얽혀 우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라도 저자는 그렇게 외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얼핏 자기 계발서가 아닌가 결론만 보고 착각할 수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결론을 보여주진 않는다. 과거지향적인 것들을 말할때에도 표면적인 결론은 드러났지만 정의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때 바뀌는 것이 상황이고 역사이기에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을 아낌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 전부를 말한다는 게 효과적이지도 않겠지만 나의 능력 부족으로라도 무엇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어줄 순 없다.

번역자도 역주를 많이 달아 송구하다는 겸손까지 곁들인걸 보면 역시 읽고 부딪히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잠시 내 자신을 잊고 유한함과 무한한 속으로 빠져 보는 건 어떨까..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유쾌할순 없겠지만 저자의 대미를 장식한 말로써 앨빈 토플러는 긍정적이라다고 판단하는 나를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는 구나를 한번쯤 느껴보았으면 한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관념의로의 접근이라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 또한 넘어가는 페이지수가 신기했을 정도였다.

내 현실을 직시시켜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우울해 지는데 그 이상을 넘어 파헤치고 헤집어 놓음에도 생각보단 희망적이였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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