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유언장
도종환.황금찬 외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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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 게다가 문인들은 유언장을 과연 어떻게 쓸지 무척 궁금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딱 한번 써 본 유언장을 고쳐 보리라 다짐을 했건만 다시 쓸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짜증이 솟구치는 것일까....

죽음은 내게 아직 멀었다는 데서 오는 막연함일까?(어리석게도? 죽음에 과연 순서가 있었던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전혀 다른 데서 오는 유언장들의 모습을 보아서일까...

101명의 문인들은 '가상 유언장'을 하나의 문학으로 표현하려는 노력, 그리고 가족자랑, 자신의 돌아봄, 혹은 장례절차 등등(재산 분배에 관한 것은 거의 없었다. 하나 같이 나는 물려 줄 재산이 없다고 말한다.) 까칠해진 나의 시선으로는 이렇게 까지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극단적인가? 라는 생각이 수없이 들 정도로 유언장들을 읽어 나가면서 인상을 찌뿌리고 있었다.

틀에 박힌 유언장들만 생각했던 나의 모습 속에 이런 유언장들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가상 유언장'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음에도 나는 너그럽지 못했다. 유언장이라는 생각보다 문학적 시도가 더 엿보였던게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한 것 같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쓴 문인들도 있었지만 죽음과는 거리가 멀게 남에게 죽음을 보이기 위해 쓴 글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101명의 유언장을 봐야 한다니...  이건 책 읽기가 아니라 곤역이라는 아득함이 밀려 왔다. 그러나 마음 저 밑바닥에서 한가지 생각이 꾸물 꾸물 올라왔다. 분명 너를 이런 편견속에 가둬버린채 책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래서 읽기를 멈출수가 없었다. 나의 이런 짜증스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정말 믿기지 않게도 그런 생각은 명중하고 말았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쯤,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짜증이 말끔히 사라진 건 아니였지만 평안해지는 느낌, 그 느낌이 밀려왔다.

평안이라는 느낌을 가져 봤다면 내가 느꼈을 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리라. 평안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게 아니라 어떤 깨달음이 스며 들어와 중화를 시켜 준다는 느낌이라는 것을.

내게 들어온 깨달음은 책을 읽는 내내 잊고 있었던 나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부터였다.

'내가 죽는다면?'

아주 당연한 생각이(다른 사람들의 유언장이니 그런 생각은 당연히 들 터였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통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두고 자녀를 두고 혹은 배우자를 먼저 보내버린 문인들이였고 그들에겐 한결같이 무형의 사랑 문학이 있었다. 유언장에 자기가 사랑한 것들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그득한데 나는 그것들을 문학적인 시각, 가족사랑, 자화자찬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죽음을 앞두고 아니, 가상 유언장이라는 전제하에 유언장을 쓰게 된다면?

 

그들처럼 간단하게 쓸 자신도 사랑을 담뿍 담아 가족이든 문학이든 예찬하며 쓸 자신이 없었다. 처음 내가 썼던 유언장을 기억한다.

번호를 매겨 내가 가진것들의 처분이 주류였고 무언가 글을 남겨야 겠는데 도저히 눈물이 앞을 가려 간단하게 밖에 쓰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제서야 내가 문인들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들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할말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남길만한건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데....) 과연 내 자신이 아닌 누구 이름을 부르며 유언장을 쓸 것인가. 또한 누구에겐들 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인가.

 

'그래, 이런 유언장이 오히려 더 홀가분하고 차라리 멋지구나.'

라는 생각이 든 것이 그때였다.

여전히 내가 이 책에 가지었던 처음의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는 내 자신 앞에서 그런 깨달음 하나를 던져준 계기였다는 것을 높이 사려한다.

다른 사람의 유언장보다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고 쓴 내 유언장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과 늘 죽음을 염두하고 열심히 살라는 말 밖에 무엇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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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광 이야기 범우문고 192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민정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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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아진다.

책 그 자체에 대한 얘기. 그리고 책 내용에 대한 얘기. 책의 겉모습과 책 내용이 이렇듯 대립하는 경우를 만난 것이 언제이던가.

우선은 책 속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

 

요즘 책들을 보면 책에 관한 책이 참 많다. 요즘에만 그런 책이 많이 나오는 거라 생각했는데 책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런 책이 늘 공존해 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런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제목만 봐도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비단 나뿐만이 아닌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온통 책에 미쳐버린 사람들. 희귀한 책을 구하지 못해 목숨까지 잃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애서광들의 이야기. 분명 시대만 다를 뿐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애서광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나는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런 영향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긴장감 그리고 섬뜩함(나와 너무 비슷해서 느껴지는....)이 덜 느껴지는 탓도 있겠지만 그들은 오로지 책에 올인한 사람들이였다.

많은 것을 즐기면서 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감수할 수 있는게 애서광 그들이였다.

책을 차지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결혼을 하고 세상에 단 한권의 책이 존재하게 하기 위해 다른 책을 없애버리고 그 책을 구할 수 없음에 절망하며 목숨을 놓아버리는 등.

그들의 삶의 목적은 책 그 자체였다.

 

읽기의 책 보다 수집의 경항이 더 짙었지만 책에 관한 광적인 집착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나름대로 나도 책을 참 좋아한다고 생각 했었는데 그래서 모든걸 책으로 보고 책으로 생각하고 책 읽는 시간을 뺏기기 싫어 안절 부절 하지 못한 나였는데 그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책에 집착하는건 그나마 낫다는 위로도 소용 없을 정도로 그들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애서광 이야기가 무척 얇고 작아서 금방 읽어 버릴거라 생각했다. 한시간도 안되어서 후딱 읽어 버리고 독후감 쓰자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책을 집어 들어 보니 결코 나의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은게 이 작은 책이였다.

일반책의 반페이지 밖에 안되는 한 면을 읽을때도 다른 책과 똑같이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100페이지가 넘는 양을 '다른책의 절반쯤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100페이가 넘는 책이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이야기가 '애서광 이야기'라는  한 개의 이야기였으면 참 짧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는 플로베르 외에 여러이야기가 실려 있었고 그 이야기의 안에서 또 이야기가 쪼개지는 것들도 있었다.

아주 짧은 이야기 임에도 왠만한 단편집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건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이였을 것이다.

 

여튼 소책자 였음에도 이런 다양한 기분과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이 책에 대한 매력에 제대로 빠졌던 것 같다.

이런 형태다 보니 아껴 읽고자 책을 자주 끊어서 읽었고 그래서 흡인력은 조금 부족했지만 다양한 애서광들을 만나고 고서적을 들추는 듯한 느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케케묵은 냄새가 내 코를 간질이는 것 같았지만 점점 그들처럼 애서광이 되어가고 있는 나를 언젠가 발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나의 책 꽃이를 기웃거리며 익숙한 책 냄새를 맡아본다.

썩지 말아달라고, 좀 벌레에 정신을 놓아버리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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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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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 식스 센스가 연상 되는 소설이였다.

식견을 넓히지 못해 작은 예시들로 이 두 작품을 연상해 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읽어버린 탓인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보다. 그러나 400페이지를 순식간에 읽게 만드는 마력은 분명 있었다.

책의 제목과 겉모습과는 달리 그리고 줄리에트와 샘의 만남에서는 전혀 이런 결론과 과정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런 반전과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가 있었기에 그리고 글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의 문체도 한 몫해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그러나 저자가 바란 대로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큰 행복에 휩싸이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책과 영화가 바로 연상이 될 만큼 어느정도 결과가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미세한 헛점에 정신을 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에트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왜 이어지지 않았을까...

최소한 가족에게 생존해 있고 어떻게 된 연유인지 뒷 이야기로나마(알고 있겠지만..) 나타났어야 할텐데.. 그리고 조디의 구출과정과 조금은 허무하게 사라진 마약상인들의 모습이 아쉬웠다.(정말 자질구레한한 것들인가...) 그러나 이렇게 옆길로 한정 없이 새면 안된다. 나의 말처럼 미세한 것들을 들추고 있다가는 본질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레이스가 왜 샘과 줄리에트의 사이에서 방황하는지 그리고 줄리에트를 왜 하늘나라로 데려가야 하는지 조금은 쌩뚱맞았다. 불쑥 튀어나온 무언가가 자꾸 걸리는 듯한 느낌.

그레이스가 그랬다.

그래서 초반에 샘과 줄리에트의 사랑만으로 꾸려질거라는 상상을 뒤집어 주었지만 끝을 보기 전까지(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레이스가 낯설었다. 10년전에 죽은 전직 형사였기에 자꾸 과거를 들출 수 밖에 없었고 샘도 아내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얘기 하자면 과거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영혼이였고 샘은 그런 그레이스를 죽인 사람이였다. 둘다 그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기에 그들의 만남이 낯설고 엉뚱해 보였던 것이다.

샘은 죽은 아내 페데리카를 구하기 위해 마약 상인을 찾아갔고 그 마약상인을 검거하기 위해 그레이스는 변장을 해서 그 소굴로 들어간 것인데 샘은 마약상인을 죽여야 겠다고 판단한 순간 총을 발사했고 마약상인은 방패막이로 변장한 그레이스를 죽게 한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죽었기에 자신의 죽음이 기억나지 않았고 샘의 행도에 대한 뒷처리를 친구 셰이크가 했기에 누구를 죽인지조차 모른 상태였다.

 

과거의 상처에 치유되지 못한채 희망 없이 살아가는 샘에게 줄리에트와의 만남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줄리에트를 그레이스가 데려가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줄리에트까지 잃어 버리면 더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빈민가에서의 힘들었던 유년시절. 그 과거를 뚫고 의사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페데리카는 끝내 구하지 못했다. 그 죄책감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죽인 형사가 가까스로 찾은 희망 줄리에트를 데려가려 한다니. 운며은 샘 앞에서 절대 호락 호락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도 자신이 줄리에트를 데려가야 한다는 신념은 있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기까지 왜 줄리에트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레이스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줄리에트가 아니였다. 그레이스를 사랑하고 있던 동료 형사 루텔리가 그레이스를 따라 갔다. 루텔리가 죽자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린 그레이스의 딸 조디를 자연스레 샘이 도와준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 꾸며 프랑스에서 건너온 줄리에트는 프랑스로 떠나기 며칠 전에 만난 샘과 그렇게 뉴욕에서 살아갈 것이다.

 

과연 사랑에 운명이 있을 것인가.

지금의 진실한 사랑은 만나기까지 과정을 단순히 운명의 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흘러가는 책을 읽으며 그런 구성에 덤덤하면서도 늘 익숙한 그런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주고 있었다.

단숨에 읽어 버리는 마력이 숨겨 있는 책이였지만 함께 하게 된 샘과 줄리에트의 삶을 온전히 축복해 줄 수 많은 없었다.

거대한 도시 뉴욕이 안고 있는 삶의 본질하며 더 넓게 세계를 돌아 보고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단순히 그 둘의 행복만으로 귀결될 수는 없었다.

삶의 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역경과 상처, 사랑, 죽음등 그것들을 내 자신이 뚫고 가지 않는 한 스스로 바뀌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만남은 분명 존재감을 덧 입혀 줄 것이다.

그런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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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 삶을 재발견하는 최고의 법칙
척 마틴 지음, 김명신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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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관심이란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만 쏟아붓기 마련이고 그것 중에서도 편파적인 관심이 주류였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러한 과심을 거둬 들일때는 순식간이였다.

지대하고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게 무엇이던가. 장시간 생각해 보아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 한가지 사실 만으로도 이 책이 내게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자기 계발서를 몇권 읽어 본 사람이라면 '관심' 이라는 책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책들과 너무 비슷해서 진부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이런류의 책을 읽어 오면서 나름대로 면역이 되어 있기에 늘 이런책을 읽고 느꼈던 마음을 지키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말하는 믿음과 행하는 믿음이 다르듯이 나는 늘 지체하고 있는 행함이 안타까워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으나 이젠 정말 실천해 보자고 간곡히 말하고 싶어진다.

이 책에서는 늘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위주로 멈춰서 생각하고 진단하고 변화하고 전달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로지 그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랴.

그다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는 나에게도 충분히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분명 나는 내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다고 생각 했었다. 사무실에서의 업무가 그리 빡빡한 편이 아니였고 개인적인 시간도 여유가 있어서 일을 하는지 마는지 그런 상실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일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단계 멈춤에서 생각해 보니 이런 비효율성이 바로 드러났다. 사무실에서도 비효율적이였고 집에 돌아와서도 비효율적이였다.

 

집에 돌아오면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바로 책을 펼쳐든다. 책에 대한 욕망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책을 빠르게 읽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 보니 늘 책 읽을 시간과 리뷰 쓸 시간이 부족했다.( 일과의 비유보다 나의 책에 대한 열정의 비유가 이 책하고 더 잘 들어 맞는 것 같다.)

사무실에서의 생활과 나의 독서 습관에 대해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무실에서의 나는 좀 더 일에 열정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오늘 꼭 처리해야 할 일과 내가 해야할 일을 명확히 구분해 내고 대충이 아닌 성의껏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난 후의 시간을 온라인 개인 홈피 관리나 짬짬히 하는 독서와 리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집에서는 나의 개인적 욕망를 채우기 위해 무조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도와야 할 집안일은 무엇이며 꼭 읽어야 할 책이나 써야 할 리뷰를 따져보는 게획성이 필요했다.

이런식으로 정리해 나가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투정도 식구들과 집안일에 무관심하다는 무거운 마음도 사무실에서 나의 일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는 상실감도 어느 정도 사라지리라 생각된다. 그 계획들을 추구해 나가며서 마지막 단게 전달하기가 내게 어떤 식으로 응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사무실에서와 집에서 달라진 나의 모습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조금 편해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런 애정은 쉽게 전위 될 것이다. 그렇다고 독서와 리뷰를 소홀히 할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업무 과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었을때 또는 효율성 있게 움직이도록 배려해 주었을때 어떠한 반응이 나타났던가. 능률이 더 올라갔다.

나의 소망은 하루 종일 책만 보는 날을 갖어 보는 것이지만 퇴근후에 집에 와서 잠들때까지 독서를 해 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아 독서가 잘 안될때가 허다하다.

계획을 세워도 기분에 따라 이책 저책 보기가 일쑤이고 쌓인 책들에 대한 푸념도 나온다. 그런 시간들을 집안일을 돕거나 가족들에게 관심을 갖은 후에 하는 독서는 어떨까?

상상만 해도 훨씬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이 든다.

마음이 가벼워서 즐겁게 독서할 것이고 리뷰도 밀리지 않게 할 것이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 지다보면 오로지 책만 아닌 다른 것에도 관심을 쏟아 고립감이 들지 않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의 변화된 모습을 만들어 가면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바이러스처럼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침투한다면 좀 더 밝고 즐거운 삶이 되지 않을까?

나의 문제점과 변화의 과정, 그리고 결과를 유추해 보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벅찬데 실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흔히 읽어와서 분명 진부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얘기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

나의 현실은 이렇듯 호락 호락 하지 않다고 푸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시도해 본적이 있는가.

줄줄이 읽어나가는 책 속의 인물들처럼 노력하고 생각하고 난관을 부딪혀 가며 목표를 잊지 않으려 한 적이 있는가.

드물 것이다.

나조차도 뒷통수를 강타할 충격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도 실천하기 보다 변화하기 보다 포기하는게 더 빠르고 안주하는게 더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이런 결과를 보면서도 이러한 책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을 나누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부터 진지하게 그런 나눔에 동참해 보려 한다.

약을 때로 약아 버린 나이지만 포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아는 나이지만 이제는 나도 변화해 보려 한다.

말하는 믿음이 아닌 행하는 열정을 갖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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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임정진 글, 원유미 외 그림 / 깊은책속옹달샘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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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는 순간 너무나 예쁜 포장과 탐나는 다이어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먼저 읽고 조카를 읽히게 한 후 다이어리는 내가 가질 심산이였다. (욕심많은 이모..) 그러나 책을 읽고 나니 내가 가져야 겠다라는 욕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바로 조카에게 다이어리를 주고 열심히 용도까지 설명해 주었다. 책을 읽고 나서 스스로 느끼고 계획을 세우고 좀 더 많은 가능성을 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 것인데 이 많은 소망에 비해 다이어리는 심히 소박했지만 책은 꼭 읽히게 하고 싶었다.

책 머리에 글까지 써서 통째로 주어 버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조카에세 무얼 바라는 마음도 없어지고 나도 알 수 없는 뿌듯함만이 남았다.

 

우선은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조카에게 책을 주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 동생들에게도 읽히게 했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조건에도 군말없이 냉큼 집어 갔다. 내 독후감 쓰기 편하자고 조카에게 독후감을 쓰게 한 것인데 역시 이 방법은 좋지 않았다. 차리라 물음으로 궁금한 건 없었느냐 무얼 느꼈느냐라고 물었다면 나았을 텐데 초등학교 4학년이라면 어느정도 학교 숙제에 길들여진 상태라 숙제 형식으로 독후감을 써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독후감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단락 끝에 정리된 애니메이션을 중점으로 쓴게 아닌가.

당장 불러서 이모가 원하는 건 이런게 아니다 만화가 중점이 아니라 제니퍼와 아빠의 대화를 중심으로 형식 따지지 말고 편하게 쓰라고 했더니 바로 '간다하게 써도 되지?' 라는 질문과 함께 축소된 숙제 형식의 독후감이 날라왔다. ㅡ.ㅡ;;

형식없이 라는 말은 말은 초등학생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이였나 보다. 나와의 의사소통도 제대로 전달이 안되다니....

책속의 제니퍼와 아빠의 대화, 그리고 인내가 조금은 가볍다라는걸 조카의 반응을 통해 바로 느껴버렸고 현실과 책과의 일치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뒷따라는 것인지 예상이 팍팍 되는 계기였다.

간단하게 던지면 제니퍼의 반응들이 나올줄 알았는데 역시 되돌아 오는 건 기브 앤 테이크가 강하게 내제된 전달이였다.(벌써 나의 조카가 이런 생리를 알아 버렸단 말인가. 아니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조카는 나의 뜻을 정확히 전달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조카는 제니퍼의 행동을 보면서 반성을 하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제니퍼의 변화된 모습을 닮아가겠노라며.

책을 읽고 바로 변화가 되겠나만은 우선 다이어리 검사를 해보았다. 오늘의 할일 목표를 정해놓고 착실히 이행시켜 가고 있었다.(빈공간의 해괴한 그림들이 조금은 거슬렸지만...)

세상물을 많이 먹어버린 나의 시각으로 조카의 독후감을 봤을때 오히려 내가 조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바로 바라는 나의 조급증이 어쩜 그런 순수성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카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천천히 질문할 것이고 가끔 다이어리를 살펴 볼 생각이다. 어쩜 조카가 나보다 더 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 책을 읽을때 재미나게 읽었고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나도 어렸을때 이런 책을 만났다면 좀 더 계획적으로 미래를 꾸릴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중에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더 짙게 올라 왔기에 제니퍼처럼 조력자가 없더라도 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정말 가슴 뻐근할 정도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자신감이 가득 찼었다.

그러나 조카에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수 있는 이틀 동안의 시간동안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책의 내용과 나의 다짐들은 지난밤 꿈처럼 아득했고 조카에게 대리 만족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조카를 통해 다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나니 무척 부끄러웠다. 바로 나를 변질시켜 버리면서 조카에게는 이것은 잘못 되었다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니퍼의 아빠처럼 자상함과 인내심과 현명함이 부족한 이모였고 제니퍼 보다는 좀 더 속이 깊은 조카였기에 빠른 결과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을 단숨에 읽었기에 제니퍼의 변화가 빠르게 느껴졌을지라도 쉬움은 아니였다.

깨달음, 인내, 노력이 있었을때 비로소 조금씩 조력자의 효과가 나타났다. 조급함, 무관심, 결과만을 바라고 행했기에 조카의 반응이 그랫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통찰력을 갖고 실천의 꾸준함을 잃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과 그리고 조카와 타인과 함께 말이다.

그러했을때 그 시작의 물꼬가 큰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게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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