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글은 출판할 수 없습니다
“1880년 4월 어느 날 오후, 수위인 안드레이가 내 사무실로 들어와서 편집부에 어떤 신사가 와서는 편집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체호프의 <샤냥이 끝나고>는 자못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편집부에 어떤 신사가 찾아왔다는 문장 자체에 나는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윽고 이 편집장은 귀차니즘과 불만에 쌓여 투덜대듯이 수위 안드레이에게 대답한다. “다음에 오라고 해주게. 오늘은 내가 바빠. 편집장 면담은 토요일만 가능하다고 하게.” 그렇지, 잘한다. 그래도 아무나 찾아와도 토요일에는 만나주는구나 싶은데, 다시 수위가 말한다. “그 사람은 편집장님을 뵈러 사흘째 오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거의 울 것처럼 부탁하더군요. 토요일에는 시간이 없다고.”
사흘째라니 어허라. 이런 귀찮은 인간. 안 봐도 뻔하다. 자기가 쓴 글을 봐 달라고, 출판해 달라고 하는 것이겠지. 편집장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고 펜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들어오라고 하시겠어요?” 착한 사람이로군. 이윽고 편집장의 심정이 묘사된다. 나는 여기서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의 비밀에 문외한인 초보 작가들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편집부’라는 단어에 떨리는 외경심을 느끼고서 한참을 기다려야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은 편집장이 ‘들어오라’라고 한 후에도 한참 기침을 하고, 한참 코를 풀고, 천천히 문을 열고, 그보다 더 천천히 들어오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7쪽)
나는 이 소설의 시작 부분, 체호프의 묘사에 빨려 들어가며 이 작품에 크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작품은 액자식 구조겠군, 편집실을 사흘 연속 찾아온 저 신사가 편집장에게 출판을 부탁하면서 놓고 가는 원고, 저 원고가 이 작품의 진짜 이야기겠군. 편집장은 문제의 이 원고를 읽고 출판하자고 결정할까 아닐까? 과연 어떤 원고이기에 저토록 간절히 출판을 원하는 것일까. 대작일까? 아니야 대작이면 이미 다른 곳에서 받아줬겠지.... 저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는 인간들 진짜 싫다. 요즘에야 이메일로 투고하거나 편지를 보내지만 직접 찾아와서 생떼라도 부리면 정말 곤란하겠군. 거절하는 것도 큰일이다..... 소설 속 편집장에게 심정적으로 크게 공감한다. 거절했을 때 쌍욕을 퍼붓거나 품속에서 칼이라도 꺼내 협박하면 어쩐담? 그것참....
이것은 나의 기우만은 아니다. 최근 읽은 <하필 책이 좋아서>에도 이런 걱정을 하는 이가 나온다. ‘출판계는 충분히 안전한가’라는 글에서 소설가 정세랑은 자신이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에 따르면 약속 없이 찾아와 자기 책을 내달라고 주장하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나지 않는 불안정한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그렇게 받은 원고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오던 욕설 전화와 성희롱 전화들에 대해서는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워한다.
정세랑이 말했듯이 출판사는 방송국과 신문사 다음으로 문제적 인물들이 잘 찾아오는 곳이다. 방송국은 보안이 잘 되어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출판사는? 대다수 출판사가 아무나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구조이다. 내가 다니는 곳도 그렇다. 아무나 들어와서 몇십 분 동안 떼를 쓰기도 한다. 책을 직접 사러 왔다고 하면서 둘러보는 척하다가 본인도 책을 내고 싶다고 원고 이야기로 돌변하고는 나가지 않기도 한다. 범죄 경험을 출판하고 싶다고 재소자들로부터 끊임없이 편지가 오기도 한다. 이럴 때 잘못 대응하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출소 후 출판사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고 말하는 동료 편집자도 있다. 투고 원고에 제대로 코멘트를 해주지 않는다고 몇날 며칠 떼를 써서 참다못해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며 차갑게 답메일을 보낸 적이 있는데, 급기야 그 사람은 회사로 전화를 걸어 생떼를 쓰다가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실제로 2019년 일본에서는 쿄애니 방화 사건으로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방화범은 쿄애니에서 주관한 공모전에 소설을 제출했는데 그 원고를 쿄애니측에서 표절했다며 불을 질렀단다. 그러나 쿄애니측에서 찾아보니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고 한다. 정세랑의 글에 따르면 실제로 한국에서도 자신의 책을 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 출판사에 시너를 뿌려 방화를 시도한 사건이 있다고 한다. “책은 느린 매체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첨예한 생각들을 담는다. 첨예함은 때로 폭력적인 이들의 주의를 끌고 만다. 상상하기 싫은 사람들이 상상하기 싫은 일들을 저지르려 할 때,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필 책이 좋아서>, 47쪽)라는 정세랑의 말은 출판사뿐만이 아니라 책을 좋아해서 읽고 쓰는 모든 이들이 생각해 볼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사냥이 끝나고>의 편집장도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문제의 신사를 편집실에서 맞이한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넣으며 준마처럼 품이 단단한 이 신사는 몸 전체에서 건강한 기온과 힘이 풍겨난다. 나이는 마흔 살쯤. 무엇보다도 편집장이 보기에 그는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큼 굉장히 잘 생겼다. 큰 근육형 얼굴, 그리스인 같은 매부리 코, 얇은 입술, 그리고 아름다운 파란 눈의 그 얼굴…. 이 남자의 이름은 ‘카뮈셰프’. 작가 지망생으로 현재 특별한 직업은 없다. S현에서 예심 판사로 5년 넘게 일했지만 돈도 모으지 못하고 결백도 지키지 못했다며 이 원고를 출판해준다면 자신을 크게 도와주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내민다. 그 원고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그는 그 잘생긴 외모에 예심 판사로 일하면서 왜 돈도 모으지 못하고, 심지어 왜 결백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의 이 원고는 과연 출판될 수 있을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인지라
카뮈셰프의 원고는 자전적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는 ‘세르게이’라는 인물로 불린다. 세르게이 또한 잘생겼고 직업이 예심 판사이다. 그런데 그는 대개의 러시아 작품 속 남성 인물들이 그렇듯이 심하게 술에 기대어 살고 있다. 그는 백작 ‘카르네예프’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말이 좋아 허물없는 친구 사이, 절친이지, 둘 다 똑같은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다. 사람들은 세르게이(즉 카뮈셰프)가 대체 왜 이 백작, 신분은 백작이지만 거의 쓰레기나 다름없는 방탕아와 가까이 지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하인 폴리카르프도 주인이 그 쓰레기와 어울리면서 항시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잔소리와 욕설을 퍼붓는다. 술에 젖은 세르게이는 폴리카르프의 욕설도 잘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하인의 욕을 즐기는 마조히스트인지 그냥 내버려둔다(이 인간을 한국의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국밥집에 보내면 굉장히 즐거워할 것 같다).
어느 날, 백작의 초대를 받은 세르게이는 그런 썩을 놈과 어울리지 말아라, 그런 인간과 어울리는 네놈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등등의 욕을 하인으로부터 한바가지 퍼먹고도 백작의 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문제의 여인, 올가를 맞닥뜨리게 된다. 올가는 백작의 영지 산림 관리인 ‘니콜라이’의 딸로 이제 열아홉 아름다운 금발머리의 아가씨이다. 올가를 본 세르게이의 가슴속에 고상한 감정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숲과 5월의 저녁, 반짝이기 시작한 저녁별 속에서 올가를 시인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노라고 쓴다.
그런데 문제는 아름다운 존재의 그 아름다움은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 현장에 같이 있던 백작 카르네예프 또한 올가를 바라보면서 군침을 흘린다(진짜로 입맛을 다심-_-;). 침을 흘리다 못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렇게 앳된 얼굴에 저렇게 성숙한 몸매라니!” 세르게이는 이 말을 듣고 ‘어린 시절부터 여성을 존중할 줄 모르고 타락한 짐승의 관점에서만 그들을 봐온 백작’이라고 그의 벗을 묘사한다. 결국 올가라는 여성을 두고 절친-아니 보드카친구인 세르게이와 카르네예프 두 남자가 벌이는 한바탕의 치정극인가 싶은데 여기에 또 한 남자가 등장한다. 백작의 영지 관리인인 ‘우르베닌’이 바로 그. 이제 쉰 살에 접어든 이 늙은이는 두 젊은 남자가 올가를 보면서 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벌벌 떤다. 그는 왜 공포에 짓눌리는 것일까? 그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눈 밝은 독자라면 이 늙은이 또한 열아홉의 이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저마다 김칫국 한 사발씩 크게 들이켜고 있는 이 세 남자. 올가의 꽃다운 나이에 비하면 이 추잡한 세 늙은이들의 꿈과 야망(?)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이 작품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게 된다. 올가가 셋 중 가장 잘생긴 세르게이도 아니고 부유한 백작도 아닌 애 딸린 중늙은이 우르베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왜? 싶은데 올가는 올가 나름대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보드카친구 두 남자들은 올가에게 군침만 흘렸지 술에 젖어 나날을 보내느라 정신없었는지 그녀에게 이렇다 할 구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형국에 올가가 자신에게 마음을 내보인 우르베닌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지는 않아, 올가야, 제발 구렁텅이에서 나와!)하리라.
헌데 더욱 흥미로운 일은 올가와 우르베닌의 결혼식 날 벌어진다, 기쁨에 겨울 신부가(그럴 리가 -_-) 신랑과 키스하라는 백작의 짓궂은 요청에 마지못해 중늙은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이제야 자신이 현실을 깨달았는지(키스가 별로였던 게 틀림없어....) 연회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새신랑 아니 헌 신랑을 비롯해 하객들은 당황하기 시작하고, 올가의 심리를 알아차린 세르게이는 신부를 찾아오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녀를 따라 나간다. 그러고는 정원 외딴 곳에서 거의 울상인 올가를 찾아내 갑자기 열렬히 구애를 하는 게 아닌가. 이 결혼은 잘못되었다! 너는 나와 결혼해야 한다! 나랑 살자! 엥? 그렇게 간절했으면 어제하지 그랬을까? 다른 남자와 결혼한 그날, 이런 고백을 퍼붓는 이 남자의 심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올가조차 어리둥절하다. 사실 세르게이만이 아니라 백작조차 올가가 우르베닌과 결혼하여 유부녀가 된 후로 더 눈독을 들인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고찰해보자. 정말로 똑같은 크기로 잘라 나눠준 떡인데도 인간이라는 욕심덩어리 존재의 마음속에서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보다는 누군가, 임자 있는 사람, 타인이 먼저 찜해둔 사람이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남의 것이기에 더 탐이 나는 것일까? 진짜 보석이 길에 굴러다니고 있으면 그것은 모조품취급을 받기 십상이지만 가짜 보석이 휘황찬란한 백화점 진열창에 놓여 있으면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그런 심리일까? 골키퍼 없는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은 재미도 없고 심심하므로 골키퍼 있는 골대에 공을 뻥뻥 차고 싶은 그런 심리인 것일까?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욕망에 불타는 이 두 남자는 그제야, 올가가 남의 여자가 된 후에야 강렬한 욕망에 불타오른다. 빼앗자!! 그래서 이 두 남자 중 누가 올가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과연 빼앗는 데 성공할까?
블랙아웃 또는 믿을 수 없는 화자
주취감형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술에 취한 상태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 형벌을 감형한다는 뜻이다. 술을 마시고 만취하면 심신장애 상태가 되므로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블랙아웃, 즉 과음으로 인한 단기 기억 상실 현상을 가끔 경험해 본 자로서 고백하자면 블랙아웃 상태에서 저지른 행동에는 분명 의사를 결정하거나 책임 능력에서 떨어지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아직까지도 내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블랙아웃이 하나 있는데, 대학생 시절, 선배들의 부추김으로 술 빨리&많이 마시기 내기가 붙은 적이 있다(어리석은 자들이여 이런 거에 놀아나지 말지니....) 다들 떨어져 나가고 한 여자애만 남았는데 그 애를 이기려고 잔뜩 마셨고 결국 내가 이겼으나 거의 인사불성이 된 나.... 정신이 그나마 남아 있던 선배들이 분명히 나를 좌석버스에 태워서 보냈다는데(내 문제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술에 취해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는 것), 눈 떠보니 1호선을 타고 종점에 가 있었단 말이지. 여전히 술에 취해 잠든 나를 지하철 내부를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깨워주셨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지갑은 텅텅! 여자저차 집에 오기는 했으나 대체 왜 어디서 1호선으로 갈아탄 것인지 왜 1호선을 탄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그 시절 살던 집이 1호선 라인에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보자면 실제로 블랙아웃이 된 상태에서 그가 저지른 행동을 정상적인 상태와 똑같이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불리한 행동이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해놓고 술에 만취했다고, 즉 블랙아웃 상태로 꾸며낸다면? <사냥이 끝나고>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작품 속의 화자(이자 소설 작성자)가 술에 절어 산다. 그뿐만이 아니라 백작까지도 보드카 없이는 살지 못한다. 목이 마르다고 보드카를 벌컥벌컥 마시는 인간들이니 혈중 알코올 농도 몇 %를 떠나서 혈액의 대다수가 알코올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애초에 이 작품을 쓴 카뮈셰프가 작품 속 자신의 분신인 세르게이를 일부러 그런 인물로 묘사했다면? 무언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으려고 알코올에 젖어 살며 자주 블랙아웃을 경험하는 인물로 그린 것이라면? 게다가 카뮈셰프의 소설 속에서는 자주 세르게이가 불리한 지점은 밑줄로 삭제해버리거나 알아보기 어렵게 지워낸다. 세르게이가 키우는 앵무새도 툭하면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말하는데, 앵무새는 인간이 하는 말을 따라하지, 어떤 현장을 보고 스스로 판단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는 “인간의 혀가 뱀보다 더 위험”(39쪽)다는 말이 나온다. 혀보다 펜은 더 그럴 것이다. 카뮈셰프의 이 작품은 과연 출판될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허영의 가벼움
이토록 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이제 이 작품의 윤곽이 눈에 그려질 것이다. 범인도 대충 알 것 같고, 누가 살해당하는지도 그려질 것이다. 체호프의 <사냥이 끝나고>를 읽을 예정인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실눈 뜨고 이 리뷰를 대충 읽었거나 쓱 넘기거나 읽지 않았을 것이다(예: 술파랑). 그러나 여기까지 쭉 읽은 당신은 이 책을 읽지 않을 가능성이 크므로(예: 은오), 계속해서 툭 까놓고 이야기해보겠다.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남자 작가 쓴 작품 대다수가 그렇듯이 미소지니- 그러니까 여혐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올가 말고도 나데즈다를 비롯한 여러 젊은 여성, 그리고 올빼미 노파까지 다양한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람도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남자 인물들도 거의 다 그렇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의사 ‘파벨 이바노비치’ 같은 인물은 세르게이의 비뚤어진 심성을 꿰뚫어보고 올바른 충고를 하기도 한다. 그는 세르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병든 뇌 속에는 어떤 비열한 속임수라도 쓸 수 있는 작은 못이 튀어나와 있다.”라고.
그런데 그에 비하면 여성 인물들은 하나 같이 휘유...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체호프라 해도 이것은 참으로 한계요, 그 또한 19세기 러시아 남자인 것이다. 아무튼 그런 여성들 중 올가. 세 남자의 ‘사냥’의 대상인 올가는 허영의 끝판 왕으로 그려진다. 아니 끝판 여왕? 그렇지만 이 어리석은 여자의 인생-결혼 및 사랑을 좌지우지한 게 꼭 허영뿐만이었을까? 그녀가 단지 부유한 남자, 높은 지위를 가진 남자를 이용해 자신의 신분 상승만을 추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강렬한 욕망, 한 사람에게만 안착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심리,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 한 집안 또는 한 남자에게만 속하는 갇힌 상태를 거부하는 심리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내면이 그녀를 그렇게 몰아간 것은 아닐까.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152쪽)라는 구절이 이 작품의 핵심을 말해준다.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범죄가 일어나는지보다 이 복잡한 인간 심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싶었던 게 체호프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