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면?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에 바로 그런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뽐므’-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게도, 친구에게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도 뽐므는 단 한 순간도 뽐므 그 자체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설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의 어떤 이미지를 보고 접근하게 된다. 그 또는 그녀의 실체는 뒤로한 채 순전히 그 상대방의 이미지에 반해 다가선다. 그리고는 자신이 느낀 이미지의 정체를 밝히고자 온갖 노력을 하게 된다. 저 사람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실체에 다다르기 위해 보통은 ‘대화’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상상 속 이미지와 그 사람이 일치한다면 호감은 더욱 증폭하여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상상과는 달리 추악한 실체를 만나게 되면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더욱 사랑을 하게 되든, 등을 돌리든 그 모든 결과는 그 또는 그녀를 알고자 노력한 끝에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하지도 않은 채 타인을 영원히 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다 ‘그 혹은 그녀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등을 돌린다면 그 타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울 것인가. 게다가 한때는 나의 연인이라 부르던 사람이 그렇게 등을 돌린다면.

레이스 뜨는 여자 ‘뽐므’의 사랑이 그렇다. 태어난 환경도 자라온 환경도 비루한 그녀는 제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아니 배운 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녀의 집안은 늘 적막하고. 하나뿐인 가족인 ‘엄마’마저도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드물다. 그런 그녀가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먹는 것으로 치환하여 유난히 단 것에 집착하는 행동을 보일 뿐이다.

그런 뽐므에게 사랑을 느끼며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에므리’. ‘뽐므’와는 달리 상류계급 출신에 배울 만큼 배운 남자다. 그런 에므리가 뽐므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통통히 살이 오른 뽐므의 젊음? 신선함?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무심한 듯한 표정? 어쨌든 에므리는 그녀에게 반하고, 다가서고,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함께 살수록 뽐므는 에므리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어쩐지 다른 여자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 신선하고 신비롭게 보였던 그녀의 ‘침묵’이 이제는 ‘답답함’으로 느껴진다.

에므리는 점점 그녀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당연하지! 그들이 함께 사는 장면을 보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대화’). 이 소설 속의 두 주인공 ‘뽐므’와 ‘에므리’는 단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뽐므와 에므리 뿐만이 아니다. 뽐므의 엄마도, 뽐므의 친구 마릴렌도 그녀들의 남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그녀들의 남자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뽐므와 함께 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피상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겉모습만 훑다가 서로 멀어져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비교된 한 영화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 그 영화는 처음 만난 여자(셀린느)와 남자(제시)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누가 누가 더 수다스러운가 내기를 하듯 삶과 사랑 예술에 대한 대화가 끝없이 오고 간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사랑에 빠지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그런 사이가 된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만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므리와 뽐므가 함께했던 긴 시간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설정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그렇게 에므리에게 버림받다시피 이유도 모른 채 팽개쳐진 뽐므는 결국 서서히 망가진다. 그토록 음식을 좋아하던 그녀는 이제 음식을 거부한다. 거식증에 걸린 채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젠 그나마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던 하나의 방식, 음식을 먹는 행위조차도 그만두게 된 것이다. 만약 에므리가 뽐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그것이 꼭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처럼 수다스러운 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서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툴러 침묵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뽐므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녀의 방식으로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레이스를 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동작과 달리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반복되는 동작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반복되는 그 동작처럼 끊임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에므리는 뽐므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레이스를 뜨고 있는 여자’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끝으로 계급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사랑하다 헤어지는 어찌보면 한없이 통속적인 이 이야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매혹되었던 까닭은 아마도 파스칼 레네의 독특한 서술방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래서 마신 물이 소금물이라면,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물이라면 갈증은 더 심해질 뿐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의 주인공 에쓰코는 그런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자다. 그것도 ‘사랑’의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인. 그러나 에쓰코를 보면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어떤 뚜렷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물조차 찾지 않으니, 그 갈증이 해소될 리가 있을까. 그나마 가끔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소금물을 마신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표지만 보면 삼류 로맨스 소설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물론 그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책 표지는 책을 읽고 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꿈꾸는 듯한, 목이 마른 듯한 여자의 표정, 안개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뿌연 여자의 실루엣. 표지의 여자는 분명 ‘에쓰코’ 그녀일 것이다.

에쓰코는 젊은 미망인이다. 도시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그녀는 료스케를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그런 삶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이 죽고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가 사는 집으로 들어간다. 야키치는 은퇴한 회사 사장으로 현재는 한적한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 집에는 야키치의 장남  겐스케 부부, 전쟁 포로로 아직 귀환하지 못한 셋째 아들 유스케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다. 에쓰코는 야키치의 둘째 아들이었던 남편 료스케의 죽음 이후, 시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스기모토 일가에는 이런 가족 구성 외에 일꾼인 사부로와 하녀 미요가 함께 산다.

그런데 이 집의 분위기는 참으로 기묘하다. 도시에서 살던 젊은 여자가 남편이 죽었다고 시댁으로 들어와 산다는 것부터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선택인데, 에쓰코는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의 ‘애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에쓰코는 시아버지와 한방을 쓰고 시아버지인 야키치의 손길을 밤마다 받는다. 그런 손길에 별다른 저항도 없고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도 없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시댁으로 들어올 때부터 어쩐지 일어날 일이었고 그렇게 되어있던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 뭐라 한마디 하는 가족도 없다. 룸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장남은 장남대로 또 그의 부인은 부인대로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에쓰코 그 여자가 더 대단’하다며 구경꾼처럼 그 둘의 관계를 지켜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은 물론 일꾼인 사부로와 미요마저 에쓰코와 야키치의 관계를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쓰코, 그녀의 갈증은 어디서 기원할까? 그녀의 사랑은 한 번도 제대로 채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은 그녀를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상처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지금 밤마다 에쓰코의 육체를 탐하는 시아버지 야키치는 애당초 에쓰코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다 보니 어느새 사랑이라는 게 생기더라’는 이야기 전개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에쓰코의 시선은, 욕망은 이 집의 일꾼 사부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로와 에쓰코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진다. 시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나 사부로와 밀회를 즐기는 에쓰코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그런 통속성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인데, 그 통속성의 한껍질을 더 벗기면 그다지 통속적이지 않다는 데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에쓰코가 사부로를 욕망한다는 것을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야키치 역시 자신이 탐하는 며느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에쓰코 그녀가 사랑하는 ‘사부로’ 뿐이다.

에쓰코가 사랑하는 걸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부로’- 이 둔감한 남자 때문에 에쓰코의 욕망은 또 채워지지 않는다. 갈증은 계속 남을 뿐이다. 에쓰코는 사부로를, 그런 에쓰코를 또 야키치는 ‘갖고 싶어’하고 이런 서로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이 작품을 지배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충분히 서로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기에 <사랑의 갈증>은 서걱서걱하고 메마르다. 촉촉한 감정의 교류는 없고 욕망과 질투, 가학적인 괴롭힘, 그로 인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베어져 나온다.

<사랑의 갈증>은 1950년 미시마 유키오가 무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에쓰코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분명 남자인데도 혹시 그 안에 여자가 존재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랍도록 섬세하게 젊은 미망인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시아버지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일꾼을 탐하는, 그래서 도덕적 잣대로 보면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 여자, 에쓰코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놀라운 글 솜씨 때문이리라.

읽는 동안 서걱서걱 모래 밭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드는 작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말라오는 <사랑의 갈증>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흔히 미시마 유키오를 탐미주의자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탐미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여기 저기 문장에 밑줄을 그어지고 싶어지는 작품. 그런 문장들을 다시 음미하며 읽다 보면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살아간 인생 내력을 떠나 작가로서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친구, 아니 책을 ‘많이’ 읽는 친구를 만나면 반가웠다. 또래에 비해 내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강 짐작으로 나보다 많이 읽는 친구, 혹은 나보다 폭넓게 독서하는 친구를 만나는 일만큼 기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돌아보면 딱히 그런 기쁨을 맛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준을 살짝 낮춰서, 조금이라도 책을 좋아하는 기색이 보이는 친구라면 다른 아이들보다 마음속으로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는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앙케트’라는 게 유행했다. 적게는 30문항에서 많게는 100문항까지 질문이 있고 그걸 아이들이 돌려가면서 답을 하는 놀이였다. 이 앙케트는 반에서 반을 돌아다녔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아이의 답변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앙케트도 누군가 그렇게 읽어 주길 바라면서 정성스레 쓰고는 했다. 나 또한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앙케트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좋아하는 책은?’ 또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혹은 더 나아가 ‘좋아하는 작가는?’ 등등과 같은 질문, 또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음악은?’처럼 음악과 관련한 문항.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이 질문들만큼은 모든 앙케트의, 모든 아이들 것을 관심 있게 보았다. 혹시라도, 어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늘 어긋났다. 책에 관한 질문은 보통 그 나이에 나올 수 있는 평범한 대답들로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간혹 음악에 대한 질문이라면 당시 유행하던 팝이나 가요 리스트가 빼곡한 가운데 간혹 록음악을 쓴 답변이 보여서 ‘오호? 얘가 이런 음악을 듣는구나.’ 하면서 조금 다른 발견을 했던 기억은 있지만 아쉽게도 책에 관해서 그런 짜릿한 기억은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책 때문에 사람에게 처음 ‘앗!’하는 전율이 받았다. 몹시도 무더웠던 여름, 야간자율학습을 기다리던 그 저녁에 한 친구가 1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을 읽고 있었다. ‘문지 시집!’이었다. 내 눈은 번쩍 뜨여 책의 제목을 찾았다. 놀랍게도 ‘황지우!’였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고 있던 그 친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까지는 그다지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아이였는데, ‘너 황지우 시집 읽는구나?’하면서 쪽지를 내가 먼저 보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대입 수능 문학 시험 때문에 황지우 시를 배우기도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수능이 실시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시험에 ‘황지우’가 나올 일은 제로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 저녁에 황지우 시집을 읽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자발적인 읽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그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예상대로 역시나 꽤 많은 문학 작품과 시를 읽어왔었고, 황지우는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단다. 그때 그 아이는 당시 국어국문학으로 나름 유명한 모 대학을 가고 싶어했고, 결국 고3 말미에 그 꿈을 이루었다.

편지로 주고 받은 내용은 주로 책 이야기였다. 서로 뒤질세라 이 작가 저 작가, 이 작품 저 작품 소개하기 바빴던 것 같다. 대학 진학 이후 서로 편지 왕래가 흐지부지 되면서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와 책 이야기를 했던 그 순간들은 굉장히 즐겁고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요즘도 황지우 시를 보면 그 친구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사회에 나와서도 책을 좋아하고, 꾸준히 읽는 사람들을 보면(특히 읽는 책 목록이 내가 보기에 매력적일 수록) 전에는 없던 호감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 사람이 사랑해 마지 않는 대상이 소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쓸모 없다는 ‘문학’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더 괴팍하고 고약한 성미를 가진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든 그 손을 보면 황지우 시집을 들고 있던 그 친구를 봤을 때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를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아닌, 책이라는 물건인데도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열아홉 그때, 황지우 시집을 읽던 그 친구에게 불쑥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것처럼, 이 책을 보는 순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되는데…..’하다가도 ‘아니야 내용이 너무 궁금해! 도서관에 들어올 때까지 언제 기다려?’ 이런 갈팡질팡 속에 결국은 사버린 책. 그리고 집에 와서 허겁지겁 읽은 이 책.

이 책을 읽다 보니 바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지우 시집 때문에 친해진 친구. 책 이야기로 수다 떠느라 무척이나 즐거웠던 그 친구 말이다. 저자 샤를 단치는 나이도, 국가도 나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저 먼 나라의 사람인데 단지 책에 미쳤다는(분명 나보다도 훨씬 미친) 점 때문에 어쩐지 이야기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밤새 책 이야기만 한 뿌듯한 기분이랄까.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그는 책에 미친 사람들의 심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뿐만 아니라 광적인 독서가 사람에게 주는 피폐함까지도. 그럼에도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어쩌면 병적인 그 심리까지도. 샤를 단치는 자신이 독서광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독서하는 사람들을 예찬하지도 않는다. 독서광들의 뒤틀리고 괴팍한 모습까지도 가차없이 꼬집는데 그 내용이 무척 공감되면서 낄낄대고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난 수영을 좋아한다. 좋아하지만 짜증난다. 짜증이 나면서도 좋아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기를 원한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본성 때문이다. (194쪽)”

샤를 단치는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짜증이 나기도 한다면서 위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위 구절을 읽으면서 엄청나게 공감했다. 좋아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그 심리를 이 사람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면서도 짜증이 날 수 있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좋아하는데 어떻게 짜증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다. 하지만 좋아하는데도 그 대상에 어떤 부분에서는 짜증이 날 수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서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박수 치며 호들갑을 떨면서 낄낄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끔 나는 어릴 때부터 괜히 책을 많이 읽어서 인생을 피곤하게 산다고, 책에 빠져 살아왔던 인생을 후회하기도 했다. 요즘도 종종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도피한 채, 책으로만 파묻히지 않았다면 인생이 좀 더 평범하게, 쉽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책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한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겠소?’하며 작은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257쪽)


왜 책을 읽는가? 내게 독서란 걷는 일과 같다. (11쪽)

문학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유일한 글쓰기 형태이다. (13쪽)

독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내면의 은밀한 것들을 드러낸다. 추잡한 것, 소중한 것, 혹은 약한 것들까지. 아무 말 없이 문장 속에 온몸을 파묻고 책과 단 둘이 마주하게 되면, 내 안의 정직하지 못하고 거친 모습, 화내기 좋아하는 바보 같은 모습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22쪽)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이타심이다….. 펼쳐지지 않은 책은 존재할 뿐 살아 있지 않다. (39쪽)

처음엔 등장인물을 사랑하고, 이어서 작가를 사랑하게 되며, 결국엔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44쪽)

우리는 흔히 책을 읽는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바보들도 없지 않다. (52쪽)

그러나 독서하는 동안엔 오직 책과 독자 단 둘뿐이다. 때때로 독서는 이 둘의 고독한 전쟁이기도 하다. (56쪽)

독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심각한 행위다. 심지어 나는 책을 읽는 이유가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103쪽)

작가가 될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대해 타는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탐욕과도 비슷하다. 방실방실 웃는 귀여운 아가가 가짜 허기에 사로잡혀 먹을 것에 집착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217쪽)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 그는 결국 꿈은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독서광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슬퍼하지만 않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작가가 되지 못해 씁쓸해하는 위대한 독자들보다는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아 슬퍼하는 고만고만한 작가들이 훨씬 많다. (217쪽)

나는 대중 앞에서 내 책이 낭독되는 것을 주저한다. 내게 문학이란 소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침묵과 침묵 아닌 것 사이에 놓여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다 읽은 책은 웅변적인 침묵으로, 읽는 중에 있는 책은 너그러운 침묵으로 존재한다. 특히 시가 그렇다. (227쪽)

대담이란 마치 테니스와 같아서 응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품질도 좋아지는 법이다. (23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장장 500페이지에 걸쳐 쓰인 내용은 퍽 단순하다. 주인공 프라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고 온 이틀 후 부모님과 형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단 사흘 동안의 기록이다. 그 사흘 동안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회상, 주변 인물 및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과 기록으로 500페이지를 채운다.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소멸’의 무라우 역시 부잣집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며 ‘정신적인’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혐오’ 그 자체다. 특히 그의 혐오는 가족을 향할 때 절정에 다다른다. 나치의 수하로 살아왔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한 두 여동생,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순하기만 한 형- 이런 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고향집 ‘볼프스엑’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볼프스엑이 우리 가족의 손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오로지 이익을 챙기는 일에만 신경 썼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생산지, 즉 농경지-지금도 2천 헥타르나 된다-와 광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늘 경제적인 이윤 추구 외에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는 척하면서 문화, 심지어 예술 같은 것에 관심을 두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사실 보잘것없어 부끄러울 정도였다. (21~22쪽)


가족 외에 그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혐오도 굉장하다. 실제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을 저작권법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스스로 금했다고 하니, 고국에 대한 혐오가 어찌나 컸는지 짐작가능하다. 그런 그의 분신이 주인공 ‘무라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한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할 수밖에 없으며, 이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고, 불가피한 경우라면 절대 필요한 선에서만 관계할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 국가는 더 이상 국가로 인정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성을 잃은 비굴함을 종종 입증해 보였고, 매일같이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기회에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나라이며, 언제나 하는 말처럼 민주주의 국가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은 가공스럽고 비굴하며 수치심을 모르는 국가이고, 자신의 가공스러움과 비굴함, 수치심을 모르는 철면피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끔찍함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기까지 한다. (341쪽)


가족과 고국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도 엄청나다. 무라우가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인물들의 특징은 하나 같이 비정신적인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즉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사치와 허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문학과 예술처럼 정신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특히 반(反)정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인물인 ‘어머니’에 대한 혐오는 엄청나다.

하지만 무라우가 혐오하는 세계, 그가 쏟아내는 거짓과 위선, 허영에 가득 찬 인물에 대한 독설이 통쾌하다가도 ‘그런데 이건 좀 아닌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특히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볼프스엑’에 있는 정원사 집단과 사냥꾼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그 집단에 대해 갖는 느낌이 특히 그렇다. 식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고 동물 사냥이나 하는 사냥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다분히 실망스럽다. 게다가 무라우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과 무라우가 비정신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지나친 선민의식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은 역겨워졌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추구하는 ‘정신적인 세상’은 역시 나치에 협력하며 가문을 지켜 온 부모의 재력에서 비롯된다(이것은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읽을 때도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나쓰메 소세키의 ‘한량’ 주인공들 또한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일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었다). 무라우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굳어버린 세계를 도망쳐 이탈리아처럼 자유로운 곳에 머물며 독문학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결국 비싼 집을 구하고, 문학과 예술로 대표될 수 있는 정신적인 세계로 끊임없이 도망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던 것은 그가 그토록 혐오한 ‘볼프스엑’의 부유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무라우가 ‘볼프스엑’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욕하는 태도에 나중에는 좀 질려버리더라. ‘그렇게 혐오스럽다면 경제적인 지원을 비롯하여 아예 다 끊어버리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결국 부모와 형의 죽음으로 졸지에 모든 재산의 상속인이 된 무라우는 본격적인 ‘소멸’ 작업에 들어간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159쪽)’라는 생각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한량’ ‘선비’형 주인공들을 볼 때처럼 ‘무라우’라는 녀석을 보면서 ‘하이고, 그래 너 혼자 고결하신 지성인이다.’라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자기만 잘났다는 거야 뭐야? 이런 심정. 그러나 결국 무라우 역시 자기 자신조차도 혐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냉소와 혐오, 까칠함과는 다르다고 느낀 것은 무라우의 혐오는 분노에 가까운 혐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나약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혐오스러운 주변 인물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일은 거의 없는 느낌. 무라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 끊임없이 상처받았다고 서술하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베른하르트에 비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그래도 인간에 대해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구나 싶어지기도 하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오스트리아’는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에서 무라우가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자기반성, 수치를 모르는 채, 거짓과 위선, 사치와 허영, 경제적인 것에 모든 것을 바친 삶을 사는 그런 사람들. 덧붙여 자기가 태어난 집과 가족, 그리고 고국을 멀찍이 떨어져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사람에게는 분명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느껴본다.

괜찮은 작품임에도 살짝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초반의 충격이 갈수록 약해졌던 이유는 너무 방대한 분량 때문인 듯하다. 특히 막판에 좀 괴로웠던 이유는 무라우가 지나치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서랄까. 250페이지 정도는 덜어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사진이란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지 못한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든 상관없이, 사진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손상하고 자연을 엄청나게 왜곡하여 인간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24쪽) 

네 아버지는 언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대학 졸업장이 바로 고도의 정신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단다. 잘못된 생각이지. 나는 평생 동안 이런저런 타이틀을 지닌 자들을 증오했단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더구나. 대학교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하단다. 타이틀이란 대부분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지. 대단할수록 그만큼 멍청하다는 거야.  (42쪽)

네 아버지가 읽는 신문은 ‘오버 오스트리아 농민지’뿐이고 읽는 책이라곤 <회계장부>뿐이란다. 그들은 정기 회원권을 이용하고 있어서 연극을 보러 린츠로 가서는 끔찍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언제나 볼륨을 최대로 올려서 음향이 엉터리로 울리는 브루크너 하우스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콘서트도 보러 간단다. 이 사람들은, 너의 부모 말야, 연극이나 콘서트 때문에 정기 회원권을 쓰는 게 아니었단다. 그들은 삶 전체의 근거를 정기 회원권에 두고 있지, 매일 같이 극장에 가서 끔찍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단다. 엉터리 음향만 울려 퍼지는 역겨운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그들은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란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정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을 정기 회원권으로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지, 극장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듯이 그들의 인생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는 셈이지. 콘서트에서 환호하듯이 살면서 환호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계속 환호한단다. (47쪽)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경시하면서 졸업장이나 타이틀만 보고 그 밖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다. 졸업장이나 타이틀은 거실의 벽에 걸어둔다. 도축 장인, 철학자, 보조 요리사, 변호사, 파나는 집 안에 증서를 걸어 놓고 평생 동안 탐욕스럽게 응시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 망설임 없이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이나 타이틀끼리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터놓고 말하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졸업장과 타이틀이다. (63쪽)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날의 20대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무분별한 향락 말고는 얼마나 만사에 무관심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춤을 추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멍청할 정도로 빈둥거렸고, 평생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결국 치명적이 될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부터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면서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렸고 온통 직업과 여자, 쓸데없는 외형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형편없는 천박함과 특히 앞으로 받게 될 노후의 연금과 자동차 생각뿐이다. (261쪽)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나면 기뻐서 악수를 청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그가 이젠 한낱 멍청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대개 나이 든 사람은 최소한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도 있지만,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멍청하다. 우리 자신이, 어떤 쪽으로든 발전해 온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든 전혀 발전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한 것도 없이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 정말 어느 한구석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들이다. (263쪽)

다른 사람들이 멍청한 표현들을 사용하면 우린 계속해서 흥분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형편없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감베티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364쪽)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반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내 취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는 항상 그러지 못했으며 그들의 허풍이 역겨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값비싼 의상은 틀림없이 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입한 것으로 지금 그들은 말하자면 마지막 리허설 무대에서처럼, 남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이 의상을 입고 나와서는 우쭐거리며 대단히 교만을 떨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자만심에 차 있었다. (372쪽)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495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6-02-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소설에 몰두하는 내공이 깊은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

잠자냥 2016-02-17 18:01   좋아요 0 | URL
네~ 문학을 좋아하고 소설 읽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 서가 속 열린책들' 이벤트를 보며 이웃들 서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도 몇 권 있지.... 하다가 한 번 모아봤다. 집 책꽂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녀석(?)들을 모아보니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 읽고 나서 지인에게 선물하며 넘긴 것도 있고, 책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알라딘 중고서적에 다시 판 책들도 있고.... 이런 이벤트 할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떠올랐다.



한 군데 나란히 모아봤다. CD장 위에 모아봤더니 금세라도 쓰러질듯 위태위태하다. 평소에 저 아래칸은 저대로 꽂혀 있고, 위에 쌓아올린 책들은 다른 책꽂이에 꽂혀있던 것들을 임시로 가져왔다. 사진 촬영 후 다시 흩어짐. 다 모아놓고 보니 역시 열린책들은 화려~하다. 같은 시리즈가 판형을 계속 달리하기도 한다. 이건 좀 사실 열린책들에게 불만이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들은 줄리언 반스 작품들이다. 줄리언 반스가 요즘처럼 우리나라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전부터 그의 책을 사봤다. 생각해보니, 반스의 다음 작품은 또 언제 나오는지 열린책들 출판사에 직접 메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물론 출판사로부터 친절한 답변을 곧 받기도 했다.


한 권 한 권 출간되어 나올 때마다 반스의 작품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길 바랐는데, 정작 반스를 크게 알린 작품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바람에 좀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사람이 챙긴 듯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신재실 선생 번역본으로 읽은 반스가 내겐 어쩐지 더 익숙하다.


<태양을 바라보며> 라든지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같은 작품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나중에 사서 소장하려고 했는데 그 새 절판되어버려서 무척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긴하다. 이 두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싶다. 알라딘 회원들이 중고로 팔기는 하던데... 반스의 인기가 오른 뒤 중고 가격을 좀 터무니 없게 받고 있어서 그걸 사긴 좀 그렇다.... 저 가운데서도 절판된 책이 몇 권 있다.


그리고 재미난 사실은...... 난 책을 읽을 때 겉표지는 분리해서 읽는 습관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발견한 사실 하나....



이 책도 이렇게 받아서는......



책 겉표지를 걷어내고 읽던 중이었는데!!!!!




<메트로랜드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걸 어쩐담.....



내가 가진 책은 2007년 초판본...


저 사실을 발견하고 열린책들에 메일을 보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전국 도서관에 <메트로랜드>는 <메트로랜드봐>로 꽂혀있을 걸 생각하니 크게 웃었던 기억이난다(보통 도서관은 겉표지를 떼어내고 저렇게 양장 상태로 꽂혀있다. 때문에 도서관에서는 보통 열린책들 책을 찾을 때, 파란색 양장, 노란색 양장, 검은색 양장, 또는 저렇게 회색 양장을 찾으면 된다).


아마도 <메트로랜드>를 여러 사람에게 꼭 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메트로랜드 봐> 라고 표기한 게 아니겠느냐고 친구들끼리 우스개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는, E.M. 포스터 전집이다. 전집을 한번에 구입한 게 아니라 하나씩 사 모았더니, 책 판형이 조금 다르고, 책 등의 저 우아한 'F.O.R.S.T.E.R'를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크흑.


<전망 좋은 방>은 두 권이다. 두 권인 이유는 ㅎㅎ 서재를 합치다 보니 저렇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한 권을 보통은 처분하기 마련인데, 포스터니까! 차마 그러고 싶지 않더라. <전망 좋은 방>도 좋긴 하지만, 저 작품들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모리스>다.



그리고 또 내가 아끼던 시리즈 중 하나는 조르주 심농의 일명 '매그레 시리즈(Maigret Series)' 이 시리즈를 모두 발간한다고 해서 역시!!! 열린책들 하면서 크게 기뻐했는데 중간에 무산되고 말았다. 국내 출판 시장이 그토록 열악하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아쉽긴하다. 저 시리즈 중 내가 산 책은 사실 얼마 되지 않지만 읽기는 거의 다 읽었습니다(네네. 빌려 읽었...;)


이렇게 돌아보니 열린책들은 참, 그때로서는 다른 출판사에서 선뜻 도전하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해서 전집으로 내놓는 일을 턱턱, 용기있게 잘도 했다 싶다. 도스토예프스키 시리즈야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아끼는 줄리언 반스도, 포스터도 열린책들이 아니었으면 어찌 알았을까 싶다. 모두 완간되지는 못했지만 조르주 심농 시리즈를 발간한 것도 그렇고....


최근 나온 전집 가운데 탐나는 시리즈는 로베르토 볼라뇨 컬렉션.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전화> 한 권 뿐이지만.... 언젠가는 꼭 갖고 말리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별이랑 2016-02-1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서가속 <열린책들>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시리즈를 주로 읽고 소장 했었는데, 잠자냥 님은 애정하는 작가님이 `줄리언 반스` 였군요.
타 출판사에서 지난해 출간된 [용감한 친구들]이 제가 갖고있는 유일한 작품인데, 저도 다른 작품 찾아 읽고 싶어지네요. 특히, 가장 먼저 [메트로랜드 ...봐..] 를 !

잠자냥 2016-02-16 14:50   좋아요 1 | URL
제 기억으로... 저도 아마 베르나르 베르베르로 열린책들을 처음 만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갖고 있는 책은 얼마되지 않지만...

그러고보면 열린책들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좋은 작가들을 참 많이 발굴, 소개했죠. `줄리언 반스`도 그렇고요. 열린책들에서 나온 줄리언 반스 작품 가운데 <내 말 좀 들어봐>와 그 후속작인 <사랑, 그리고>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메트로랜드>는 반스의 초기작이라 그의 유년시절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랍니다. 언젠가 꼭 한번 <메트로랜드... 봐>요. ㅋㅋㅋ

별이랑 2016-02-1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주신 작품들은 신간으로는 볼수없는 몸값 귀하신~ 책이 되었네요.
출판사 대표 저자 소개에도 빠져있고... 저작권 계약이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느긋하게 재출간 기다려봐야겠어요. 일단 재출간 + 중고 저렴이 ^^ 알림 신청은 해놨어요.

잠자냥 2016-02-16 15:58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짐작으로는 판권이 만료되어서 더 연장하지 않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는 사이 반스는 국내에서 유명해져서~ 중고 가격도 껑충 오르고요. 아쉬운대로 동네 도서관을 이용해보셔도 좋을 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