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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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문학의 정점”
어린 시절부터 2006년까지 살아온 “그녀”의 개인적인 역사와 사회적인 역사가 세월을 직조한다. 그녀의 세월은 공동의 기억에 스민 내밀한 기억의 총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 기억은 사회적으로 자주 조작되고 개인적으로는 미화되기 쉽다.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 “이 아니 에르노가 택한 도구다.

다음 세대들이 DVD와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들의 가장 사적인 일상의 모든 것, 몸짓, 먹고 말하고 섹스를 하는 방식, 가구들 그리고 속옷들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진관 삼각대 위에 놓여 있던 카메라에서 침실의 디지털카메라로, 지난 세기의 어두움이 조금씩 떠밀려 완전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부활했다. - P299

그녀는 미래에 대한 감정을 잃었다. 가을에 마른 대로를 걸어 대학에 갈 때, 『레 망다랭」을 덮을 때, 나중에 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오스틴 미니"로 뛰어 들어갈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시간이 더 흘러 이혼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처음으로 조 다상의 <라메릭>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미국으로 떠날 때, 3년 전까지만 해도 로마에 다시 오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졌을 때, 그녀 안에 있었던 몸짓과행동, 낯설고 좋은 것들에 대한 기대가 투영된 무한하게 깊은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 - P316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palimpseste),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새로 쓰기 위하여 긁어서 지운 수사본이므로 완벽히 들어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거의 과학적인, 어쩌면 지식으로 쓸 수 있는 - 무엇에 대한 지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 도구를 본다. 1940년부터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설움에 죄책감마저 더해져 점점 더 그녀를 붙잡는다. 분명 프루스트의 영향이겠지만,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으므로, 그녀는 이 감각이 시작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 P272

영감을 받은 단어들이 마법을 부려 등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은 없으며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 그러므로 써야 할 그 책이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그녀는 이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절실하며,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라진 음식들이 가득 놓인 식탁보를 감싸는 빛을 포착하기를 원한다. 어린 시절 일요일의 이야기 속에 이미 존재했던, 경험한 것들 위에 금세 쌓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빛, 지나간 시간의 빛을 구원하기를.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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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4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장 사릉 💓 하는 <세월>


프레이야 2022-10-24 02:22   좋아요 0 | URL
🧡 🧡

파이버 2022-10-2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저도 읽고 싶은데 어떤 책 부터 읽어야할지 고민이에요ㅎㅎㅎ 유년 시절부터의 이야기라니 이 책 [세월]을 일단 보관함으로~

프레이야 2022-10-26 09:04   좋아요 1 | URL
첫 작품 “빈 옷장”부터 읽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파이버 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세월,은 전체를 담으니 그걸 먼저 보는 것도 좋다 싶고요. ^^

파이버 2022-10-26 13:51   좋아요 1 | URL
‘빈 옷장‘도 장바구니에 쏙 해야겠군요. 찾아보니 말씀대로 ‘빈 옷장‘이 데뷔작이네요!
 

책을 덮으며 스산한 우리네 생을 잔잔하게 덮쳐오는 파도에 눈물을 섞어 날려보낸다. 다른 사람의 인생도 하물며 내가 살아온 인생도 다 알 수 없는 것. 추측이 아닌, 단지 이해하고자 타인의 생에 한발씩 다가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이 벌거벗은 채 달려온다. 윌리엄처럼 캐서린처럼 루시처럼, 그들의 생처럼, 나! 아파요! 그리고 우리는 비슷하게 위로받는다.
이 책만으로도 읽는 데 무리는 없지만 루시 바턴의 생을 좀더 자세히 읽으려고 2017년에 문학동네에서 나오자마자 사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이제야 펼친다. 예전에 “다시, 올리브”를 읽다가 흥미를 좀 잃어 스트라우트의 책을 멈추었던 까닭이다. “오, 윌리엄!”에서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하려는 말은… 같다는 거야” 이런 구절을 자주 달아 읽기에 난 좀 거슬리네. 루시 바턴이 화자로 나오는데 그 인물의 언어습관으로 그리 쓴건지 스트라우트의 문체로 그리 쓴건지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 아마도 전자인 듯.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 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 P82

윌리엄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알았던 적이 없어."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음, 문을 열 때 당신 먼저 몸을 들이미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 돼."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충분히 긴 바지를 입는 것도 괜찮겠지. 당신 카키 바지가 너무 짧아서 그걸 보면 겁나게 우울해지거든. 맙소사, 윌리엄, 당신 얼간이처럼 보인다고." - P144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 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천천히―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 -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 P168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건-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 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 -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 P194

나는 알고 싶다.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캐서린, 늘 자기만의 특유한 향기를 발산했던.

요점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문화적인 빈 지점이 있다는 말이고,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 아니라 거대하고 텅 빈 캔버스에서, 그게 삶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그런 나를 세상으로 안내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안내될 수 있는 만큼, 그가 내게 그걸 해주었다. 그리고 캐서린도.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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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탄생


요새 오는 책들 귀퉁이가 자주 찌그러져 있다. 찢어지고 구겨진 것도 있다. 그냥 읽어도 되지만 새 책이니 새 책다운 모양새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다. 책 포장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이앞에도 세 권이나 그래서 교환 신청해 받았는데 이번 박스에서도 이 책 포함해 세 권이 그래서 교환신청 해두고 읽는다.

다음달에 있을 대장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넷이서 속닥하니 작은 자리를 마련했다. 케이크와 꽃과 와인에 세이로무시가 있는 조촐하고 맛난 저녁이었다. 식사 후 비건 베이커리 집의 쌀로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폭신폭신 느끼하지 않은 맛에 감탄사 연발.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우리는 각자 뽑아온 대장님의 글 중 한두 문단을 낭독했다. 나는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와 레이크 루이스를 배음으로 깔아드렸다. 지금 이 나이도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칠십 년을 넘기는 생은 또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다. 늙음을 피해갈 수 없는 대장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독자로서 우리는 어떤 문장을 재생하고 남기게 될까. 작품을 완성시키고 재생시키는 건 독자의 몫. 좋은 독자를 품는다는 건 작가로서 축복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중에 비행기를 탈 때마다 중요한 통장이나 열쇠 그런 것들을 남편이 아니라 딸아들에게 말해두고 떠난다고 한 분이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비행기 탈 때는 아들 딸 갈라서 엄마 아빠가 대동하고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는 사람도 있다고. 실제로 그렇게 사고가 나 죽은 이들도 있다고. 헉 나는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난 바로 9.11을 떠올렸고 세상의 일은 내 재간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라고 평소처럼 생각했다. 난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사는가 싶다가 방금 “오, 윌리엄!”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아래 밑줄긋기.
이거지! 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나 계획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인간이다. 방만한가,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걸까. 나는 그냥 불안해 하지도 애쓰지 않고 운명의 뜻대로 살 것이다. 그러고 싶다.

오, 윌리엄! 영문판 표지가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문학동네 번역본 받아보니, 표지 깔끔하다.

나는 윌리엄이 우리가 독일에 갔던 그해 여름에 내가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당시에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 나 자신을 충분히 잘 알았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윌리엄의 어머니는 바로 전해에 돌아가셨고, 우리 딸들은 각각 아홉 살, 열 살이었다. 딸들이 두 주 동안 여름 캠프를 떠나서 우리가 독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그때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나면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두려워서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나중에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차들이 우리 옆을 쌩쌩 달려가는 아우토반에서도 얼마든지 우리 둘 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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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2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인 출판 기념회에서 구라모토 피아노 선율에 맞춘 프레이야님 낭독^^
오😍프레이야님 ^^
오디오 플레이 올려주세요😻

프레이야 2022-10-22 20:57   좋아요 2 | URL
ㅎㅎ 그냥 속닥한 자리였어요.
오래 봐온 분들이라 오붓했어요. 저 낭독하다가 울컥해가지고 또 ㅎㅎ

stella.K 2022-10-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
엄창난 말이군요.

그런데 왜 대장님께선 마지막으로 책을 내시다는 겁니까?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입니다.
뭐 이런 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는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 작가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의 말이 옳다면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하여.ㅋ

프레이야 2022-10-22 20:58   좋아요 1 | URL
아뇨 ㅎㅎ 출판기념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굽요. 수필집 포함 저서가 아주 많습니다. 이번엔 미국 수필 번역집과 메타에세이 비평집 두 권요. 글이 수필이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분이시니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ㅎㅎ 열정이 엄청나신 분.

stella.K 2022-10-22 21:0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뜻이었군요. 근데 대장님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이리 말씀 하시니 궁금한데요? 어떤 책인가..?흠

프레이야 2022-10-22 21:04   좋아요 1 | URL
11월에 책 나오고 사정이 허하면 소개해 볼게요. 저녁이면 제법 추워요 스텔라 님 ^^

바람돌이 2022-10-22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이런 문장 보면 정말 프레이야님 작가 맞으심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까요? ㅠ.ㅠ
저도 그냥 운명의 뜻대로 사는 쪽입니다. 그걸 피하려고 한다고 피해질 거 같지도 않고요.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다른 비행기를 타고 하는 사람이 있나봐요. 신기하네요. ^^

프레이야 2022-10-23 00:21   좋아요 1 | URL
긴장되면서도 감동하시는 것 같아 찡했어요 ^^. 사는 일이 갈수록 두려움이 많아지지요. 저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많아서일까요. 저도 놀랐어요.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부부가 다른 비행기를 타려고 했다가 말았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문장을 보는 순간 어제 들은 그 얘기가 떠올라 더 놀랐네요 ㅎㅎ 날마다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어떤 것들! 새롭고도 낯익은.

페크pek0501 2022-10-23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 책이 난리?인지 저자를 보고 알았습니다.

프레이야 2022-10-23 20:18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렇지요 페크님!!
 

피에르 부르디외, 읽자.


1995년 자크 쉬락이 프랑스 대통령이 된 후의 일.

우리는 규칙과 요령 그리고 임시기관 같은 것들의 지지부진함을 안고, 대파업의 흩어진 시간을 되찾았다. 몸과 몸짓 속에는 신화적인 것이 있었고 지하철, 버스 없이 파리를 완강히 걷는 일은 기억의 행위였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목소리가 68년에서 95년을 리용역에 모았다. 우리는 다시 믿었다. <다른 세상>, <사회적인 유럽을 만들자는 새로운 말들이 사람들을 차분히 흥분시켰다.
그들은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말들을 반복하며 경탄했다. 과업은 행동보다는 말이었다. 쥐페는 정책을 철회했다. 크리스마스가 왔고 원래의 자신으로, 선물로 인내로 돌아가야 했다. 12월의 시위는 끝났고, 그것은 서사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밤중에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만 남았을 뿐 사람들은 그것이 세기의 마지막 대파업인지 깨어남의 시작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엘뤼아르의 시 구절,
온 세상에 / 몇몇뿐이었던 그들은 / 각자 혼자 믿었다네 / 갑자기 그들은 군중이 되었네를 떠올렸다. - P258

놀라운 일 없는 나날들에 두려움, 격분, 희열의 파도가 쳤다. 우리는 앞으로 10년 동안 수천 명을 죽이게 될 «광우병> 때문에 더 이상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난민들과 불법체류자들이 있는 교화의 문을 도끼로 부수던 장면은 분노를 샀다. 갑자기 불공정한 느낌과 감정의 폭발 혹은 의식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가 행진하게 만들었다. 10만 명의 시위자들이 외국인들의 추방을 용이하게 만드는 드브레 법률안에 맞서 배낭에 배지를 보란 듯이 달고, 검은 여행 가방과 «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행진했으며, 집에 돌아가서는 서랍 속에 기념으로 간직했다. - P259

국회를 해산하고자 하는 시락의 우스꽝스러운 욕망 덕분에 좌파가 선거에서 이겼고, 조스팡이 국무총리가 됐다. 그것은 96년 5월, 환멸을 느꼈던 밤의 만회였고 덜 나쁜 재정립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기초 의료 보험 혜택과 근로시간 주 35시간으로 자신의 시간을 가지며, 모두가 좋은 삶을 살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적합한, 자유와 평등과 관대함을 추구하는 조치들의 재건이었다. 우리는 우파 정부 아래에서 2000년을 넘기지 않게 됐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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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을 읽으면 부르디외도 읽어야 돼요? ㅠ.ㅠ

프레이야 2022-10-20 21:36   좋아요 0 | URL
안 읽어도 되겠지요. ㅎ 이름만 들어본 피에르 부르디외 딱 나와가지고요.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찾아보니 읽고 싶은 게 몇 권 눈에 들어와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팍 꽂혔습니다. ^^

서니데이 2022-10-2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5년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면, 많이 멀지는 않지만, 아주 가까운 것도 아닌 느낌 같네요.
아니 에르노의 책들은 색감이 좋은 책이 많은데, 이 책도 괜찮네요.
프레이야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20 23:1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되돌아보면 엊그제 같고요. 1984북스 책들 색감도 만듦새도 포근포근해요. 본문 글자체도 참 이뻐요.
굿나잇 서니데이 님. ^^

yamoo 2022-10-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 책들은 번역되너 나오는 족족 다 구매했습니다만...
읽은 작품은 별로 없어요. 번역들이 거의 개판이라...^^;;

프레이야 2022-10-21 13:51   좋아요 0 | URL
번역이 그러면 참 난감하네요.ㅠ
그중 그래도 추천할만한 책은 어떤건가요?
처음 읽는 사람에게요

yamoo 2022-10-21 17:36   좋아요 1 | URL
텔레비전에 대하여가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데...
번역이 걍~~
그래두 그나마 읽을 수는 있어요...^^;;

프레이야 2022-10-22 04:49   좋아요 0 | URL
네. 참고할게요 야무 님 ^^
 

프랑수아 모리악(1885.10.11. ~ 1970.9.1.)

“그의 소설에 드러난 깊은 정신적 통찰, 그리고 인간 삶의 드라마를 관통하는 예술적 강렬함”
- 1952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아니 에르노는 그해 4월이 싫었다. 보부아르와 장 주네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고(이 책엔 적혀 있지 않지만 보부아르의 성대한 장례가 치뤄진 다음날 장 주네는 마지막 원고 교정을 보러 파리에 와 있는 동안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두 달 후 희극배우 클로슈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1986년을 지나, 이맘 호메이니가 살만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일을 지나, 독일이 통일되자 프랑수아 모리악이 했던 말을 에르노는 소환한다. 그리고 세계 전쟁이 또 일어난다.

#
철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진 세계의 애매모호한 미분화는 특정 국가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모리악이 “나는 그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들이 둘이라는 사실이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독일이 통일됐다. 정치적인 종말론 루머가 퍼져 나갔다. “세계의 새로운 질서의 노래”가 공표됐다. 역사의 끝이 다가왔다. 민주주의는 지구 전체에 퍼질 것이다. 세계의 새로운 행보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까지 확실했던 적이 없었다. 폭염 한가운데 휴가의 무기력한 질서가 흔들렸다. 한 신문에 커다랗게 적힌 제목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차지했다”는 51년 전 같은 날짜에 실렸던, 종종 재현되는 것을 지켜봤던 또 다른 제목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다”를 떠올리게 했다. 전투를 준비하던 한 전사가 불과 며칠 만에 미국 뒤에 있던 서양 열광들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클레망소를 허풍 떨며 보여줬고 옛날 알제리 시절처럼 군인 소집을 고려했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떤 사건을 그리워했다는 듯이 전쟁을 필요로 했고 단지 TV 시청자일 뿐이었던 사건들을 부러워했다. 오래된 비극이 욕망과 다시 만났다. 역대 가장 머리가 희끗했던 미국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히틀러”와 싸우게 됐다.
- 226, 세월, 아니 에르노



보르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적이고 다감한 아버지와 종교심 풍부한 어머니 아래 자란 모리악. 전쟁 때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고 전후 카뮈와 의견 대립도 있었다. 테레즈 데케루, 오드리 도투 주연의 영화만 보고 안 읽었네.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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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세월>이 뭔가 제가 생각한 소설과는 다른 느낌인듯하지 말입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는데요. ㅎㅎ

프레이야 2022-10-20 21:34   좋아요 1 | URL
함축된 문장 행간에 많은 걸 내포하지 말입니다 ㅎㅎ 살아온 세월이 안팎으로 에르노를 관통한 느낌요.

mini74 2022-10-20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레즈 데케루 새파랑님 리뷰 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도 있군요 ~ 영화포스터 참 세련되고 예쁩니다 ~

프레이야 2022-10-20 21:35   좋아요 1 | URL
오드리 토투 넘 이쁘죵
표지 그림이 인형의집 표지그림과 같은 거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ㅎㅎ

coolcat329 2022-10-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세월>을 샀는데요...왜냐면 아니 에르노 책 중 가장 두껍더라구요. ㅋ
근데 발췌문 읽어보니 좀 어렵습니다. 😅
아니 에르노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세월을 첨부터 읽어도 될까 싶네요.

프레이야 2022-10-21 10:19   좋아요 0 | URL
1984북스 이쁘지요. 그중엔 세월이 제일 두껍네요 ㅎㅎ 오자 있어서 조금 실망이지만요. 처음 읽으시면 세월을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쿨캣 님. 에르노의 생을 다 훑고 갑니다. 다른 책들은 거기에 세부적으로 나뉘는 시기의 글이네요. 2008년인가? 나왔으니 그전의 일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어요. 에르노의 예리하고 거침없는 생각과 문장, 모르거나 반갑거나 그런 이름, 지명 등등 나오면 찾아보게 되어요. ^^ 저도 아직 모두를 읽진 못해서 한 권씩 읽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