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64
생 텍쥐페리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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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는 <야간비행>의 서문을 썼다. '인간의 허약함이니 불성실이니 방종함이니 하는 것들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인데다 오늘날의 문학이 너무나 잘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긴장된 의지력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자기 초월의 경지는 오늘날 우리가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식탁 위 불빛 과 밤하늘의 별빛 하나 중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일까. 개인의 행복이란 것이 얼마나 그 빛을 발하고 영속되는 것일까. 늙음과 죽음은 이런 모든 것을 한낱 먼지로 날려버릴 것인데. 어두운 밤의 너른 평원, 어느 농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빛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망이 되는지. 개인의 소소한 행복이 영원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려면 어떤 고차원적인 것에 종속되어야할까. 아니 고매한 그 무엇을 지향해야할까.

리비에르가 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나타나면 언제나 '나그네' 같다. 50줄에 들어선 그는 부하직원의 생사가 궁금해 찾아온 여인 앞에서 수많은 갈등을 하고 옷을 챙겨주는 아내에게 자신이 하는 일의 치열함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나쁨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점이 가져올 악을 미리 처벌한다.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을 위한 길을 닦아놓는 일에 매진한다. 구름의 미세한 물결을 읽으며 야간비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원의 길을 열어놓기 위함이다. 길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길을 다니기 마련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질 행복이라는 황금빛 성역에서 끄집어내어온 부하들을 단련하여 초월의 경지로 몰고가며 길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한다. 보다 영속적인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확신과 책임으로 가능한 일이다.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문학이 아니라 철저한 행동주의 문학이라는 평을 받는 생 떽쥐뻬리의 <야간비행>은 자신의 체험과 실제인물을 모델로 하였다. 사람들과 잘 사귀고 지내는 일에는 서툴렀다는 작가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몇 안 되는 인물이 디디에 도라인데, 그는 작가가 1929년 항공우편사에 근무할 당시 직장 상사이다. 작품에서의 그의 화신 리비에르는 '육신과 다름없이 덧없는 행복을 초월하고 보다 영속적인 존재가치를 인간에게 부여할 길은 없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소시민적 행복, 그런 종류의 행복은 그에게 겉치레로 보일 뿐이다.

'영원'의 문제에 매달리는 리비에르의 마음을 따라 페루의 고대 잉카족의 신전 돌기둥에 대한 단상이 마음에 안긴다.

> 사랑한다는 것,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 아닌가! 리비에르는 사랑하는 의무보다 더 큰 힘을 지닌 의무에 대해 숨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 애정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당신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

> 산 위에 똑바로 서 있는 돌기둥들. 그 돌기둥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경이적인 문명에서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잉카 문명의 지도자는 대체 어떤 무자비함, 아니 어떤 이상한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백성에게 산꼭대기에 신전을 쌓아올리라고 명하면서 그 문명의 영원성을 세우게 했을까? ...... 고대 민족의 지도자는 아마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막에 묻혀버릴 종족의 소멸에 대해서 동정심을 느꼈으리라.(89쪽)<

한낱 삶의 덧없음을 사회가, 집단이, 문명이 영원으로 이끌 수 있을까.  '나'는 우주의 원기를 받아 태어나지만 그것에 이름이 없다면 존재도 있기 전 소멸할 가능성이 있다. 그 생명에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나'는 집단의 일원이 되고 어느 문명의 일원이 된다. 동시에 소멸의 길로 가는 '나'의 삶의 덧없음을 사회가, 집단이, 문명이 영원으로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또한 소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개인을 좀더 고매한 문화적 행위로 이끄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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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4-2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경우든 야간비행은 추천대상입니다. 흐흐.
특히 배혜경님 글에는...

waho 2004-05-0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 쭉 읽다 보면 어쩜 책을 이리 많이 읽으시는지...리뷰도 잘 쓰시고..넘 부러워요.
야간 비행 아직 못 읽어 봤는데...읽어봐야 겠네요
 
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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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연상되는 것은, 잔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엄선한 말로 아이를 지혜롭게 길러내고 싶은 엄마교육서 같은 것쯤으로, 단선적인 생각이다. 원제는 How My Mother Raised 10 Kids 25 Words or Less 이다.

여기서 '25 Words or Less'는 각종 콘테스트에 출품했던 응모작의 문구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2차대전 후부터 추첨식콘테스트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 디파이언스라는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 살았던 이블린 라이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10남매 중 여섯번째로 태어난 저자는 여러사람이 제공해준 자료와 이야기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이블린 라이언은 술주정을 일삼는 남편의 말에 의하면 '징글맞게'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실망하고 있기보다는 금세 다른 일에 몰두하며 희망 쪽으로 해바라기를 하는 그녀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삶이 고달프다고 짜증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앞의 조그만 희망의 불씨를 기회로 잡아 남편을 비롯한 11명의 가족들을 행복의 용광로에 빠뜨릴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재기 넘치는 글로 온갖 콘테스트에 당선되어 받은 갖가지 상품과 상금이 그들 12명 가족을 그럭저럭 꾸려가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불굴의 의지'라는 뜻을 담고 있는 디파이언스에 그녀가 살았던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블린 라이언의 자존심과 용기는 가난한 이들 가족을 성공으로 이끄는 버팀목이자, 등불이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또 그것으로 생활비를 벌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금처럼 여기며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위해선 어떠한 희생도 치르겠다는 엄마의 태도 앞에, 나약한 심성으로 자신을 파괴의 길로 몰아갈 아이가 몇 있을까. 빈곤이 오히려 이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고 걱정을 함께 하며 나눌 줄 알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쓸쓸히 보내게 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받아둔 상품들로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는 엄마의 재치와 자애로움 앞에 어떤 아이가 자신의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술술술 실타래에서 풀리는 털실처럼, 이블린의 화려한 콘테스트 당선 경력과 함께 이들 가족의 다사다난,  엎치락뒤치락, 황당하게 울고 웃는 세월의 이야기들이 풀려나온다. 부럽게도, 이블린의 탁월한 유머감각은 타고났다. 25단어 이하로 운율을 맞추어 문구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이블린은 다리미판 옆에 공책을 항상 두고 머리속에 '번쩍'하는 것을 메모한다. 소란스럽고 팍팍한 일상의 모든 게 그녀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마법에 걸린다.

아이들 글쓰기 지도는 함께 공책에 댓구가 되는 시를 한 행씩 적으면서 했다. 엄마가 먼저 한 행을 적어놓으면 뱃시는 다음 행을 기가 차게 적어놓았다. 많은 수의 아이들 이름도 다 동원하고 middle name을 이리저리 바꾸어 써가면서 하나의 업체에 여러 편의 응모작을 보내기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어느 문구가 당선이 되었는지 모를 때도 있다.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 의외로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할 때도 이블린은 실망을 모른다. 무심하고 무능한 남편의 태도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녀의 손에서는 멋진 시로 태어난다. 번역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빠져버렸겠지만, 운율이나 댓구는 거의 감상하기 어려웠다.

다소 과대광고 같은 면도 있지만 고농축의 단어를 골라 이중의 의미까지 담은 압축된 문장을 만들어놓은 것들에서, 하나같이 그녀의 낙천적, 긍정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지만 모두 그럴까. 이블린은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지키고 키워주었고, 타고난 생동감과 유머감각으로 가족들이 슬픔에 짓이겨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들 가족이 그리는 아름다운 그림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따뜻하고 정겹다. 이들이 함께 그리는 그림은 어느 시골길을 가다 길섶에 오밀조밀 낮게 누워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 같다. 수수하고 향기마저 은은한데다 볼수록 정이 가는 그런 모습이다.

아버지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장성한 아이들의 영원한 우상, 이블린은 암으로 조용히 투병하다 세상을 뜬다. 그 1주일 전까지도 단어의 개수가 정확히 25개인 시를 쪽지에 적었다. 그녀의 '샘솟는 활기'와 변함없는 '유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차선의 운명을 최대한 크게 팔 벌려 끌어안고, 징징거리지 않으며, 여유있게 살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증표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러서 인사를 하지.

    그래야 나중에 천국 문 앞에 가서 섰을 때 

    하나님이 "거기 누구야?" 하지 않으실 거 아니니.>> 

운명을 믿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은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나 나쁘게는 최악이 온다. 하지만 그것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진지하되 너무 무겁지 않게, 발랄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강하되 너무 딱딱하지 않게,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지키고 그것으로 주위 사람을 전염시킨 이블린. 그녀를 말할 때 딸 뱃시는 '위대한 웃음을 지니신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며 '기록과 윤색과 임의 삭제로 점철된 평생'을 사신 어머니라고 했다. 마천루의 어느 광고회사에서 멋드러진 카피를 쓰거나 신문의 칼럼을 쓰는 커리어우먼으로 살 수도 있었을 이블린은 결혼 전 생긴 뱃속의 생명과 앞으로 이어지는 9명의 생명들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로 여겼다.  

아이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다 죽이고 살고 있다고 투덜대는 엄마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의 재능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학계의 명예를 얻고 지적허영을 채우기 위해 학위를 받고 하는 따위의 허울이 말해주는 게 아닐지 모른다. 자신의 보석같은 재능을,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누추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연마한 이블린을 오늘날 소박한 인물평전의 대열에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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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곤 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자녀 교육서 쯤으로, 님의 서평을 읽어 나가는 중엔 소설이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블린 라이언의 아들인 저자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쓴 에세이였군요.....
...정말 이블린 라이언의 평전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이야기같아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함을 강요받는 사회,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블린의 삶은 , 맞아요....뭔가를 건네주네요. ^^

프레이야 2004-04-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 아침에 주시는 커피 한 잔... 님의 커피잔만 보면 기분이 마구 좋아져요.
저자 테리 라이언은 딸이랍니다.^^ 한 사람의 엄마로, 아내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뭔가 멋진 주문을 걸고 오늘도 시작하렵니다.

2004-04-04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4-04-1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얘기, 몇년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다이제스트판을 본 적 있어요. 전 그렇게 좋은 인상만 받지는 않았어요. 여기 나오는 엄마는 그래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살아서 자식들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엄마가 결혼 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과 가정 양쪽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거든요.

프레이야 2004-04-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코멘트 반가워요. 실수(?)란 누구든 하며 사는게 아닐까요. 그 실수 자체가 저에겐 나쁜 인상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사랑의 결실을 실수라고 생각하기도 그렇고요. 오히려 그것에 대한(생명에 대한,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차선을 선택한 삶에 의미를 주는 것 같았어요.^^ 물론 딸이 글을 쓰는 과정과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미화된 부분도 많겠지요^^ 이런 이야기자리가 기쁘네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 최재천의 동물과 인간 이야기
최재천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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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복제기술에 대한 어느 종교학자와 최재천교수의 토론에 대한 긴 기사를 몇년 전 어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과학적인 분야에는 다소 관심이 덜 했던 나였지만 그 때 글을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논리를 펴며 상대를 흡인하는 능력이 보였다.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통해 저자의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다.

동물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저자는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줄곧 다루어왔고 앞으로 다룰 것도 '생명'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연에서 사는 목숨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문학도를 꿈꾸고 조각에 한 때 심취했다는 저자는 그런 풍부한 감성으로 동물을, 인간을 보려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자신이 자연과학도가 된 것은 어쩌면 잘 된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며, 자연에서 또는 동물들에게서 퍼 올리는 다양함으로 자신의 글쓰기 샘은 고갈되지 않을 것 같은 희망적인 예감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음이 싫지 않다. 

이 책은 몇년 간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했던 글을 모아서 나온 것이라 중복되는 내용이 보이고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글을 모아 둔 것도 약간은 억지스러운 부분이 보인다. 그리고 좀더 동물학적인 지식을 원한다면 실망스런 책이겠다. 서정적인 책의 제목으로만으로라도 그런 오류는 없어야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각 장을 이끄는 소제목을 보아도 이 책이 동물의 생태를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간중간에 실제 동물의 사진을 실지 않고 파스텔톤의 삽화를 실어놓은 점도 그런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고 저자의 단상이 감상적이거나 화려하거나 상념적인 문체로 나오는 건 아니다. 그다지 꾸미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편안하게 적어놓았다. 우리 사는 사회의 갖가지 불합리해 보이는 점들(이미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끼고 논란이 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해 실행을 앞둔 것까지)을 비롯해, 함께 사는 사회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 본성의 야비함, 어쩌면 고등동물을 자처하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못해 보이는 행태들을, 저자는 동물학자답게 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느껴온 것이다.

저자의 교육관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수학은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인문과학을 통틀어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역설하며, 동물도 수학을 한다라고 물음표를 던진다. 꼭같은 리포트를 제출하여 기만으로 편하게 점수를 따려 한 많은 수의 제자들을 한 명씩 만나 해주었다는 저자의 말은 가슴에 한참동안 남아있다. 기본을 가르치는 교육을 하자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반짝하는 명성으로 신지식인이 되는 오늘날의 교육과 망하기 일쑤인 벤처기업들은 기본부터 가르치는 동물들의 교육에서 느껴야할 점이 있다. 한 때 열린교육이라는 어설픈 이름 아래 기초를 가르치고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무시하여 얻은 결과를 이제 다시 바로잡으려 또다시 아이들을 닦달하고 있지 않나.

구급차 일일체험을 제안하는 대목도 신선한 발상이다.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차도를 꽉 매우고 한치의 양보도 찾아볼 수 없는 길거리풍경을 구급차 안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게 나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누구든 한번쯤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내다볼 필요가 있다'고 분개하여 말하는 저자는 분명 생명을 고귀함으로 여기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촘스키와의 만남에서 저자가 들은 말이다. 언어학계의 거장 촘스키박사는 동물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며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까치의 울음소리를 연구하는 저자는 까치에게도 독백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의 진위는 잘 모르겠지만 언어가 인간만의 특권일까,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저자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알아가며 인간에 대한 것을 생각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여겨진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인간도 하나의 아름다운 생명이라는 소중한 사랑의 메세지를 스스로 찾게해주는 저자의 글이 소박하고 따뜻하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점은 저자의 활짝 열린 눈과 가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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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 동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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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무 유명하여 제제는 이제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 책을 다시 번역하여 완역으로 재탄생시킨 박동원님은 에필로그에서, 처음엔 브라질의 문화를 모르고 글만 번역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인디오의 피가 흐르는 엄마와 포루투갈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제제는 지독한 가난과 무관심, 매서운 매 앞에서 세상을 향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가 뽀루뚜까를 만나 세상을 보는 사랑의 눈을 뜨게 된다. 

이 한편의 성장소설은 작가 바스콘셀로스의 자서전적 소설이며 제제는 작가의 어린시절 자화상과도 같다. 남다른 감수성과 상상력을 감안하더라도 좀 이르다싶은 나이에 너무 가혹하다할 정도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부화하는 제제가 어쩌면 우리 정서에는 이질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아적 기억은 아련하기 마련이고 성인이 된 작가는 그 기억의 줄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 부여하지 않았을까.

어찌보면 우리 정서에도 잘 부합하지 않고 주제도 평범하기까지 한 이 소설이 오래도록 읽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세 가지의 보편적인 정서에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정은 세상 모든 것과 세상 어느 사람과도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이다. 나를 그대로 이해해 주고 나의 눈높이에서 나를 보고 나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함께 하면 그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우정을 근본으로 한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지배적이던지 설교나 훈계를 늘어놓으려한다던지 자신의 입장에서만 주장하려한다면 우정은 성립되기 어렵다. 부모자식간이든, 사제지간이든, 나무든, 새든, 우정이 바탕에 깔린 감정만이 온당한 관계를 맺어준다.

제제는 어린 라임오렌지나무와도, 작은새와도, 아리오발도씨와도, 동식물과 연령을 초월하여 우정을 맺을 줄 안다. 아버지의 정에 굶주린 제제는 뽀루뚜까에게 아버지의 정을 애원하고 뽀루뚜까는 가식적이지 않은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제제를 품어준다. 제제는 뽀루뚜까와의 우정으로 세상은 사랑이 있는 살 만한 곳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우정은 우리를 성장케하는 참된 의미의 정서가 아닐까.

또 하나는, 성장에 필요한 통과의례는 비밀스럽다는 점이 매력이다. 기억의 내밀한 저장창고에 숨겨둔 몇가지의 일들을 어른이 된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만 통과하고 나면 눈부신 바깥세상이 나올 거라는 걸 어렴풋이 믿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저마다의 통과의례를 치른다. 제제는 뽀루뚜까와의 꿈같은 시간이 저만의 백일몽이란 걸 깨닫게 되지만, 꿈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몸 담아야하는데에 필요한 고통은 어느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비밀스럽기 때문에 책임 또한 자신의 몫이다.

내 영혼의 비밀스런 통과의례에 동참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기장, 엄마도 모르는 어느 친구, 일기장에도 쓰지 않고 가슴에만 새긴 어떤 일들?

마지막으로, 우리네 정서는 슬픔의 그것에 닿아있다는 점이다. 박동원님은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운다고 하면서, 제제의 슬픈 정서의 원류를 포루투갈인에게서 찾는다. 포루투갈 어느 해변 가파른 절벽에 제 몸을 부딪는 시퍼런 파도를 배경으로 파두를 소개한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때 내가 느꼈던 서늘하리만치 가슴을 때리는 그 사진의 슬픈 정서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도 무엇을 대하든 슬픔을 먼저 만나는 형이었다. 지금은 기쁨을 먼저 만나는 형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나에게도 슬픔의 근원모를 샘이 숨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제가 극단적인 애증을 보였던 아버지와 뽀루뚜까가 모두 포루투갈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한편의 성장소설이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알껍질 속의 세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은 모두 철이 들어야하나요?"라고 던지는 물음 속에 철이 들고 싶지 않았다고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기형도의 분석을 빌리면 이 책의 감동은 '철들기 전의 세계'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에 있다.

흐릿한 기억의 유년시절로 뒷걸음쳐 달아나고픈 욕망을 느낀 적이 있다면 제제의 혹은 바스콘셀로스의 그런 어리석어 보이는 물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말인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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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길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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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며 사는 내게, 이 사진에세이의 제목은 내 속에 들끓고 있는 무엇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블라인드 틈새로 내다보는 야경처럼 가려져 있는 듯한 표지 사진의 이미지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놀라운 건 이 사진들은 모두 고가의 카메라에 온갖 기교를 부려 렌즈에 담은 풍광이 아니라, 그때그때 구입한 일회용카메라로 담은 풍광이란 점이다.

일회성... 어쩜 그런 것이 청춘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외에도 이곳의 사진들을 보며 느껴지는 모든 건, 황량함, 무소속, 거친 갈망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화장실 벽 옆에서 벌이는 한판 '테크노음악과 먼지의 비현실적인 축제'같은 것이기도 하고 제몸을 가릴 줄 모르는 콘크리트건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담을 수 있는 문명과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 뜨거운 모래바람과 태양의 입맞춤이 있는 외곽과 무질서 속의 편안함의 세계다.

어린시절 즐겼던 꿈과 마법의 유희를 회상하며 즐거워하고, 눈에 튀어 들어온 자몽 알갱이의 신맛을 눈으로 맛보는 청춘의 상큼함이 길 위를 걸으며 '사는 게 그런 거야' 라는 말을 되뇐다. 그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우리는 출발할 때 이미 알고 있'다. 글을 쓴 청춘, 앙토넹 포토스키처럼 욕망으로 들끓던 청춘은 어느새 몸만 남았다. 무엇에도 그리 감정의 변화가 크게 일렁이지 않는다.

하지만 <청춘. 길>의 사진들은 가지 못하고 지나쳐온 청춘의 시간들에 있었던 또 다른 길을 갈망하게 한다. 사실 낯설다고 하는 느낌은 눈여겨 보지 않았고 마음에 담지 않았다는 얘기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주지 않은 눈길로 그것들은 한낱 박제가 되어버렸다. 이곳의 풍경은 살아있다. 검은 밤바다의 파도가 용트림이라도 하는 것 같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때때로 동물들의 가련한 삶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우리의 눈물을 다정한 그 무엇에 고정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렇고 흐릿한 배경에 가늘게 떨며 걸려있는 백열등은 청춘의 눈빛일까? 다정한 눈빛을 소유한 청년은 어느 노파에게 거금을 제물로 바치고 그 보다 20년 정도를 더 산 사진가는 어느 조촐한 공동묘지를 넓고넓게 담는다. 묘지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담하고 예쁘장하다. 청춘의 길 위에 묘지가 있음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청춘. 길>은 사진과 글이 꼭꼭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게 매력이다. 사진은 사진대로 흘러가고 글은 글대로 흘러간다. 책장의 양면 가득 펼쳐지는 사진들은 이전에 내가 내 마음의 렌즈에 담아보려 하지 않았던 풍경들이다. 이런 비주류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풍경을 건너고 있다. 베르나르 포콩은 사실 청춘의 길을 지나온 사람으로 풍경을 보는 눈에 이글거림을 숨기지도 않을 뿐더러 그윽하다. 발자국이 제멋대로 나 있고 가늘고 굵은 돌멩이가 박혀있는 텁텁한 흙바닥에 나란히 꽂혀있는 두 개의 시멘트조각. 모양도 제각각이며 거친 이 조각을 렌즈에 이토록 멋지게 담다니. 길은 달라도 모두 살아 꿈틀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커브길을 하나 돌고, 언덕이 바다를 향해 갑작스레 기울어지는 내리막길을 지나고 나면 시작된다.'

청춘의 사내는 어느새 중년의 아름다움을 예감하고 있는 걸까? 청춘은 상대적이다. 언제나 지나온 시절은 아쉬움이 남는 청춘의 길이다. 그 청춘의 아쉬운 한 자락을 부여잡고 오늘도 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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