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GoAhead & Co. 지음, 김한울 옮김 / 에이지21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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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빨간 하이힐구두가 도발적이다. 책 표지의 간단한 그림 못지않게 책의 제목 또한 그렇다. 특이하게도, 일본 최대의 인터넷사이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글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책 표지의 뒷면에는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고뇌하는 남자와 그를 지켜보는 네티즌들이 당신에게 <성숙한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라고 적혀있다.

성숙한 사랑.. 난 아직도 이 고지의 반의 반에도 와 있지 못하다. 며칠 째 '방식의 차이'란 말이 걸려 마음이 복잡하다. 세상 사는 모든 방식을 다 이해한다해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에 기준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상대의 것에 따라주어야하지 않을까.

여기 책 속의 남자는 결혼 17년째의 평범한 남편이다. 일 중독이 평범한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일을 가진 아내는 육아와 바깥 일 그리고 집안일로 조금씩 지쳐있는 상태인가보다. 무엇보다 일로 바쁜 남편과는 정다운 시간을 가진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져가는 여자다. 쓸쓸하고 외로웠을 거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을 테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문제는 서로가 조금도 그런 것에 대해 보살펴주는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소한 것으로 상처받고 슬퍼지는 순간들에 대하여 그때그때 내어놓고 서로의 입김으로 바람을 쐬어 말려주었어야하는 일이다.

드러내기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심, 질투, 요구, 사랑. 이 모든 감정의 가장 치졸해보이는 부분까지 드러내기란 감추기보다 오히려 힘이 든다. 하지만 드러내어야 상처로 곪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도 예전부터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차라리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상대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테다. 많은 네티즌들의 답변이 있지만 남자는 결국 자신 스스로 해답을 내린다. 아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이 흐르는 사이 여자의 표정에는 날 선 칼날이 사라졌다. 강한 척 거드름피우고 합리화하고 있기보다 솔직한 가슴을 보여주는 남편에게서 그 예전 사랑에 빠졌던 기억이 살아난다.

오랜 세월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십칠년 전에는 못했다. 좀 마음에 안 들어도 내 마음이 문제라고 자책하고 좋은 척 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나쁘다. 젖어서 냄새 나는 빨래는 햇볕에 널어 그때 그때 말려야한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가 시원하게 그 냄새를 날려보낼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에 대해 상대가 먼저 알아주는 사람도 있지만 마음의 눈길이 깊지 못하면 그 방식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속상해하지 말고 내가 먼저 말로 표현했어야했다. 그러지 못하고 지나온 세월동안 멀어지고 낯설어지고 몸 속으로 황량한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 책은 상처를 공공연히 내어건다는 의미에서 용기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란 그리 거창한 것에서라기보단 이렇게 통속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뭔가. 기본이 흔들리지 않아야 다른 것들도 튼실한 법. 눕혀져있는 빨간 구두가 우리의 감추어진 욕망만 같다. 그걸 신고 또각또각 걸어나가고 싶어지는, 어디론가.. <연애의 목적>이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겹쳐진다. 하얀 눈길 위를 걸어가던 홍의 빨간 외투랑 어딘지 비슷한 이미지는 또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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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1-1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나 좋습니다. 별세개짜리 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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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학생 때까지 우리집에는 강아지가 있었다. 나중엔 커서 개가 되었지만 말이다. 이름도 용모도 특이했다. 쫑이라 불리고 왼쪽 눈언저리와 왼쪽 귀에 커다란 검은 반점이 있는 점박이였다. 몸의 다른 부위는 온통 하얗고 복실거리는 촉감이 따스했다. 초승달처럼 치켜올라간 꼬리는 끝부분에서 넓게 퍼져있고 흑진주 같은 눈을 들여다보면 내 눈이 다 비칠 정도였다.

쫑은 잘 먹고 잘 자랐다. 덩치가 커지면서 털도 많이 빠지고 달거리도 하였다. 밥을 챙겨주는 일이며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 어머니의 몫이었는데 하루 일이 바쁘셨던 어머니는 쫑을 돌보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오니 어머니가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퍼드러지게 울고 계셨다. 쫑을 알루미늄 밥그릇을 씻고 또 씻으며 그러고 계셨다. 장날 개장수한테 쫑을 팔았다는 것이다. 나는 시위를 벗어난 활처럼 개시장 쪽으로 튀어나갔다. 누린내 나는 골목을 뒤지다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다. 닭장 같은 우리 안에서 쫑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발광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개장수에게 울며불며 매달려 쫑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머니는 쫑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달랐다. 살갑지도 않고 밥도 성의없이 주는 것 같아보였다. 개도 오래 같이 살면 한 식구가 되어 정을 떼기가 어렵다며 정을 함부로 주어선 안 되는 거라는 말만 흘리셨다. 그 후로 쫑은 3년 정도를 더 살다가 결국 어머니 손에 팔려가고 말았다. 그때도 나 모르게 일을 다 처리한 후였다.

'개'를 읽으며 내내 쫑이 생각났다. '보리'도 쫑처럼 이름이 정겹다. 쫑은 잡종개였지만 보리는 좋은 혈통의 진돗개다. 난 개의 차가우면서도 촉촉하고 까끌한 코끝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개의 발바닥은 갈라져있고 시커멓다. 푹신하면서도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거칠다. 쫑은 앞발을 내 손에 잘 얹고 악수하는 포즈를 취하곤 했는데 그때의 촉감이 살아나는 듯 하다.

개는 눈치를 잘 살핀다. 보리의 입을 빌자면 개는 사람의 눈치를 잘 살펴야한단다. 고양이도 그렇지만 개는 고양이보다 이기적이지 않다. 상대를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개는 선하고 대들 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주인에게 가든 현재의 주인이 최고의 주인이다. 비겁하다 할 수 있는 성품일까. 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훈의 '개'는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는 개의 마음의 눈을 따라간다. 비루하고 지난한 삶.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지금 이 땅을 굳세게 디디고 박차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리는 부질없이 하늘로 솟아올라 날아다니는 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이 쓸 것으로 챙겨두는 물고기 대가리를  한사코 쪼아대는 그들의 몰염치가 역겹다.

보리는 흰둥이의 존재, 악돌이의 존재마저 자신의 품으로 모두어 안는다. 어느 누구의 암컷이 아닌 암컷, 흰둥이는 보리에게 무구한 모성의 힘을 느끼게 한다. 자신보다 비열하고 저질스러운 악돌이도 보리에게 있어서는 대항해야할 대상이라기 보다 포용해야할 세상의 단편이다. 보리는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비롯되는 삶의 절망을 느끼고 세상 어느 곳으로도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와 동행한다. 아기의 똥을 먹고 사람의 냄새를 속속들이 맡는 그는 유난히 예민한 후각으로 세상을 알아간다. 부단히 몸으로 부딪혀 세상을 배우는 힘 못지 않게 그놈의 코가 제 능력을 다한다. 

나는 얼마나 몸으로 부딪혀 살아가는지, 대답할 자신이 없다. 관념이나 망상으로 그리는 것들은 모래 위에 세우는 탑일 테다. 또 얼마나 힘차게 내 발바닥을 딛고 살고 있는지, 얼마나 상대의 입장에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깊은지, 이 모든 과제를 오늘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세상에 훌륭하지 않은 개는 없지 않은가. 보리의 엄마가 약골의 형을 잡아 먹는 장면이 아른거린다. 결국 작가는 모성에의 열망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자, 세상을 지키는 힘이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바닥, 땅, 엄마 개, 주인할머니, 흰둥이... 그리고 쫑. 쫑은 새끼를 낳았는데 모두 다른 집에 줘버렸던 기억이 난다.

김훈의 다른 글과는 확연히 다른 문체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오는 장점이 있다. 현란한 수식어나 장황한 비유어보다 소박하니 짧고 단순하게 생각의 단위를 풀어내는 느낌이다. 개의 입을 빌어 쓴 이야기이니 그럼직하다. 글에 따라 다양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의 능력이 탐난다. 김세현의 삽화도 소박하고 조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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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0-1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는 낮에 읽었는데 추천은 지금해요
한동안 잠수타시더니 더 놀라게하십니다.
컹컹!!

프레이야 2005-10-14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컹컹...^^ ^^
 
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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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를 먼저 보았다. 두 주인공들의 역할이 기대보다 미미하여 감정이 몰입되지 않았다. 뭔가 부족한 느낌으로 영화관을 나서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무엇이 아쉬웠을까. 좀더 뜨거운 무엇, 좀더 섬세한 무엇, 좀더 거칠고 여과되지 않은 무엇을 은근히 기대했던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외출'은 이런 것들을 어느정도 충족해준다. 언어는 섬세하다. 표정이나 몸짓이 다 그려내지 못하는 미세한 것들을 언어가 그려내고 있다. 행간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것들이 느껴져 간간이 몸서리를 쳤다. 작가는 영화 속의 두 배우를 어느정도 생각하며 묘사하고 있다. 독자인 나도 그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다가오는 느낌은 달랐다. 배우들이 표현해주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잘 묻어났기 때문이다.

외출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누구든 일상속의 외출을 꿈꾸고 탈출을 꿈꾼다. 그것은 어쩌면 금기에의 도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달콤한 유혹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마음 먹고 있다가 예정된 시간에 찾아오는 것이라면 준비나마 할 수 있을텐데, 현실은 아주 무뚝뚝하고 세심하지도 못하다. 아무 곳에서 아무 때에 툭 불거져나와선 우리를 휩싸고 정신없이 돌아가게 하는 게 현실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의 연속임에도 우리는 잘 흡수하고 적응하고 따라간다. 특히 그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일 때,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는 법 또한 우연한 것에서 찾곤 한다.

서영과 인수가 고통의 다리를 건너는 법이란 지리하다. 목이 타는 자에게 물을 건네고 죽어가는 자를 지키는 병상 옆의 그사람에게 화분 한 개를 건네는 것이다. 기껏 밥을 먹자고 하고 상대의 발소리에 귀를 세우는 일만큼 답답하다. 하지만 그것은 눈뭉치를 만들어 주며 던지게 하고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꺼억꺼억 우는 사람 뒤에서 그 울음소리를 들어주는 일만큼이나  어렵지 않고 다정하다. 한쪽이 막혀 답답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방향의 출구가 보이는 법이다. 내가 받고 싶은 위로만큼 내가 건네는 것이다.

서영이 찾은 새로운 길과 인수가 되돌아간 수진과의 생활은 대조적이다. 서영은 자기 일도 가지고 죽은 남편에 대한 미련도 다 식어빠진 커피처럼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인수는 서영에의 그리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수진에게 헌신적인 생활을 한다. 나는 여기서 인수가 아니라 수진에게 연민을 느꼈다. 수진이 외출을 한 이유, 수진이 이혼을 요구한 이유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인수라는 남자는 분명 차가운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수진이 그런 보이지 않는 오만함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그들의 해묵은 사랑도 이런식의 태도 앞에선 무색해져갔을 테다.

서영과 인수의 고통은 그들이 다시 같은 길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종결되는 듯하다. 그들이 고통을 건너는 법을 보면 우리네 삶에서 건너야만 할 고통의 다리란, 참 어이없게도, 세월을 따라가다보면 다 건널 수 있도록 예정되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이 겪는 고통 또한 그다지 힘들어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게 치명적인 폭풍이 몰아치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그것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연한 것에서 찾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닿아있다면... 외출이든 정박이든, 고삐는 바로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척 할 수 없음이다.

서영과 인수가 선택한 그 방법이 밝아보여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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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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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폴오스터의 책 세권을 세트로 구매했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이다. 책이라기보다 무슨 사진첩, 아니 비밀 일기장 같기도 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정도의 하드커버가 그 옛날 살며시 펼쳐서 독백을 하곤 했던 일기장을 닮아있다.

이 책은 폴 오스터가 자신과 25년 이상을 동행한 타자기에 바치는 독백과도 같다. 글의 분량이 많지는 않다. 그저 이 책을 독특한 느낌으로 만드는 것은 샘 메서의 유화 그림이다. 살아움직이는 근육으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한 타자기의 그림이 각양각색의 색채와 율동으로 그려져있다. 물감을 덕지덕지 찍어 그리기도 하고 활자들이 날아가기도 한다. 폴 오스터의 캐리커쳐 또한 개성만점이다. 타자기 자체로도 도시의 어둡고 밝은 분위기가 교차하며 묻어난다.

이 작은 책을 보며 수동식 타자기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된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타자를 배우려고 타자학원에 갔다. 수동 타자기가 작은 교실의 책상에 한 대씩 놓여있고 나는 그중 한 곳에 앉아 그 타자기란 녀석과 첫대면을 했다. 무척 딱딱하고 둔탁한 느낌을 주며 무뚝뚝하게 버티고 있는 그 녀석은 어디 해볼테면 해 보라는 식으로 눈을 껌벅이며 있었다. 첫날 그 녀석을 치는데 손가락에 오는 감각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틱특틱틱..  이런 소리가 탁탁탁탁...  경쾌하고 리듬감있게 울리게 될 때까지 한 달 정도가 걸렸다. 쉬운 영문타자부터 학원에서 배우고 한글타자는 타자기를 집으로 대여해와서 혼자서 연습했다. 한여름에 그 무거운 녀석을 들고 버스를 타고 집까지 와서 한 달을 연습했다. 그리곤 돌려주었는데 돌려주는 날 다소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따로 연습할 타자기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진 않았나싶다. 그 해 여름날의 땀이 그 녀석에게 배어있었을테니 말이다. 

한 줄을 치고 나면 오른쪽에 있는 바를 돌려밀어서 행을 넘기고(철커덕~) 타닥타닥 또 글자를 친다. 요즘 문서작성의 글자체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때 그 타자기의 글자체는  홀로 매력이 있다. 가늘게 아래로 흐르는 직선의 느낌이 강하면서 어딘지 불균형의 인상을 준다. <타자기를 치켜세움>에서의 글자도 이 타자기체로 되어있다.  하얀종이를 옆에 쌓아두고 종이 한 장에 글자를 다 쳤으면 다른 종이를 끼워가며 글자를 치는 재미도 있다. 좌측 라인을 잘 맞추어 끼워야 비뚤게 나오지 않는다. 먹끈을 가는 것도 재미있다. 먹끈을 새로 갈고 나면 글자가 갑자기 진하게 보이며 선명하다. 잘못 끼워서인지 어떨땐 시커멓게 번지기도 한다.

대학 3학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은 논문을 쓴다며 우리집에 자기의 수동타자기를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꼬박 작업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아끼던 언더우드 수동타자기였다. 밤새 토닥토닥 두런거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예리하게 가르던, 그런 풋내 나는 열정의 시절이었다. 나도 그 타자기가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왠지 푸근하니 정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사람같이 말이다. 원래가 곰살스럽지 못한 나는 별로 애정의 손길을 주진 않았지만 결혼을 하고 몇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그 타자기를 계속 데리고 다녔다. 쓰진 않고 골동품처럼 방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어디 치웠는지 이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거의 일 년 동안 무심히 잊고 있었던 게다.

<타자기를 치켜세움>은 우리가 무언가 몰두하고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것에 대한 단상이다. 종류는 다소 다르지만 20년전 남편이나 내가 망망한 대해를 헤쳐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작업으로 대면했던 수동타자기에 대한 회상을 참으로 오랜만에 해 준 책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 사람은 오디오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해서 카메라에도 남다른 애착과 조예를 보인다. 그런 열정과 집요함, 물건에 담긴 혼과도 소통하는 영혼이 사람을 좀 달리 보이게 하는 요인이라면 나의 그런 대상은 무엇일까? 나의 동반자격인 그 무엇을 지금부터라도 찾는다면 그만큼 나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게다. 그 대상에 몰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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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7-0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가와 같이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느낌 하나만으로 그 책의 가격에 대한 불만을 지웠습니다.^^^^^^

2004-07-06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4-07-0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타자기라...미국인 회사에 근무하셨던 엄마가 어느날 낡은 언더우드 영문 타자기를 구해오셨구, 저는 그걸로 영문 자판을 익혔습니다. 얼마후, 훨씬 날렵하고 가벼운 한글 타자기도 사주셨구, 대학2학년 이후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지만, 지금도 낡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묵직한 터치감을 기억하고 있네요.

내가없는 이 안 2004-07-0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타자기를 쳐본 적이 있는데 아버지 걸 장난삼아 팅팅거린 게 다였지요. 그런데 전 타자기의 톡톡 소리가 경쾌해서 좋은 반면, 깨끗이 지워지지 않아서 영 불만스러웠어요. 자국이 남아서 바꾸기 전의 생각을 드러내는 게 못마땅했거든요...

박가분아저씨 2004-07-07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은 밤, 작업을 하다가
타자기에 관한 내 지난 추억을 생각하고...'스미스 코로나 '중고 타자기를 어렵게 사서 쓰던 순간들이 그리움처럼 문득 떠오르더군요.
지금도 타자기를 생각하면 ....목련꽃 지고 져서 꽃진 자리에 아무는 상채기처럼 문득 가슴이 메이는 군요.
봄밤이 아니라도.
 
쉽게 찾는 우리꽃 - 봄
김태정 지음 / 현암사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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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에서 펴낸 '쉽게 찾는' 시리즈 중 '우리 꽃' 편은 3권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봄, 또 하나는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한 데 묶었다. 이 책은 한 손에 꼭 쥐고 나들이 가기에 좋은 판형이라 맘에도 쏙 들어온다. 어른 옷의 호주머니나 아이들의 작은 가방에 쏙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산으로 들로, 또는 집 주변의 호젓한 산책길에, 연령 구분 없이 아이고 어른이고 쥐고 다니며 펴보기 좋은 크기와 모양이다. 

'걸어다니는 식물도감 김태정 선생님의 색깔별 야생화 사전'이라는 소제목처럼 이 책은 간단명료한 사전식이다. 긴 글이 아니라, 꽃마다 10여가지의 항목으로 짧고 분명한 기록을 해놓았다. 이를테면 속명, 분포지, 개화기, 꽃색, 결실기, 높이, 특징, 용도, 생육상 같은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명시해두었다.

특이한 점은 색깔별로 봄꽃을 모아놓은 것이다. 우리의 야생화는 어느 한 가지 색으로 말하기 곤란한 것들도 많아 애를 먹었다는 글과 함께, 크게 흰색, 노란색, 녹색, 붉은색으로 나누어 모아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 계열의 꽃은 붉은색으로 들어가 있다. 그 안에서 다시 꽃들을 나열하는 순서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찾으려면 조금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꽃과 잎의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클로즈업된 사진을 다시 두어 우리가 관찰한 것과 비교해볼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모두 210여종의 봄 야생화가 색깔별로 옹기종기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한 생명이 엄마의 태안에서 나오면서 탯줄과 결별하는 동시에 아기는 이름으로 불린다. 엄마가 그 작은 생명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동고동락했던 생명이 아기에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며 사랑과 관심이 끊이지 않음을 말한다. 수많은 야생화를 보고 또 스쳐지나가면서도 그에게 다가가 다정히 이름 불러주며 말을 걸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무관심이, 아니면 무심함이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리라. 내가 먼저 눈웃음 짓고 이름 불러줄 때 그가 사람이든, 야생화이든 나의 벗이 될 것이다. 내 사랑의 영역 안에 보금자리를 틀 것이다. 

이 봄꽃 사전으로 꽃이랑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들이 가기 전 먼저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표지에는 세밀화로 그린 꽃 한 줄기가 뿌리채 서 있는데, 붉은색 편에서 찾아보니 뻐꾹채라는 국화과의 꽃이었다. 이름도 하나하나 불러보면 어쩜 그리 정겹고 아름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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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2004-05-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의 책들과 한 권으로<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나무백과사전> 어떤 게 날까 고민하다 아직 구입을 못했습니다. 여러 권으로 나뉘긴 하지만 가지고 다니기도 편할 테고... 손에 쏙 들어오는 것이 더 나을까요..

프레이야 2004-05-1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은 못 보긴 했지만, 나무에 관한 사전이니, 우리꽃 시리즈와는 좀 다를 것 같은데요.
'쉽게 찾는 우리나무'도 있더군요. ^^

즐거운 편지 2004-05-1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풀백과사전>이네요.^^
그렇죠.. <쉽게 찾는 ~> 시리즈가 꽃, 나무, 나물... 거기에 또 세분화되고 그래서 나무나 꽃은 한 권으로 된 걸 구입해야할지.. 그러다 다른 책 구입에 밀리고 있답니다.^^


다연엉가 2004-05-1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찮더군요. 아담하여 가지고 다니기에도 안성마춤이고요. 전 내일 엄마들 10분이랑 들꽃여행을 가는데 이 책을 들고 갑니다. 다른 분들께도 추천하고요.
그런데 전 엉가처럼 이런 글이 안나와 항상 부러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