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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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된다고 했다. 지상의 길과 허공의 길은 양립하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늘 교차하며, 생기고, 변하고, 자란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렌즈가 단 하나뿐이라면 단조롭고 지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오목렌즈로 모아 프리즘을 통해 다양한 색채로 내어뿜는다. <첨탑>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런 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적지 않은 은유와 상징들을 포석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말 못할 이야기들이 우리들 숨어있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상에 난 길을 '언덕길'이라 한다면 허공에 난 길은 '첨탑'으로 비유된다. 여기서 나는 이문열의 <하늘길>이 생각났다. <첨탑>은 중세 어느 성당의 주임신부가 된 조슬린이 세운 '하늘길'이다. 도달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 '하늘'이 존재하지 않듯이, 탑의 꼭대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경계도 없고 '없음'만 있을 뿐이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하늘길이듯이, 사백 피트 탑의 꼭대기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놓는 과정만이 조슬린에게도 우리에게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애시당초 첨탑은 환상으로 이루어졌고, 역설적이게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성직자다운 품성을 타고 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조슬린(우리들 대부분이 이런 부류다)은 첨탑을 세우며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였던 젊은 날의 2년을 회상한다. 조슬린은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 날의 오만과 무모함, 열정과 욕망을 떠올리며 몸을 떨고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못하였지만 사람은 믿음으로 비합리적인 주문을 실행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 지상의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산다는 것은 수도 없이 죄를 짓는 일이다. 숨을 쉬고 내뱉고, 음식을 먹고 배설하고, 욕정을 품고, 사람을 부리고, 내 뜻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서는 목숨을 지탱할 수가 없다. 첨탑은 '돌묵시록'이라고 단언되는데, 이는 존재의 막다른 곳을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보인다. 첨탑은 그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껏 자만하기 위한 신기루 같은 것이다.

신기루란 실체가 있어야 생기는 법. 실체는 지상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조슬린의 성당이 자신의 존재이듯, 우리가 사는 집이나 일상적인 삶의 틀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안에서도 우리는 드높이 오르고 올라 어떠한 최고의 모형에 이르려한다. '첨탑'은 그 과정에 의미를 둔다면 나쁘지 않은 삶의 단계이자 과정이다. 그곳에 오르는 단계마다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진다. 첨탑은 '최고의 기도 모형'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갈망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꿈(환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는 존재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의무이자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첨탑을 세우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사랑을 기만하고, 우정을 금가게 하는 일은 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꽃들의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조슬린이든 우리들이든, 위(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혹은 하늘)만 쳐다보고 가다가 어느 날 저 아래에 움푹 패어있는 지하구덩이를 보게 되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암흑의 본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곤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곤 한다. 조슬린의 성당은 그와 한 몸이며 지하실은 조슬린의 음울한 내적 욕망을 드러내는 곳이다.

행동의 동기는 대개 사소한 것에 있다. 조슬린의 첨탑은 흠모했던 빨간머리 여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로 귀결된다. 그가 무모하리만치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이며 쌓아올리는 첨탑은 남성의 상징으로 우뚝 선다. 의식의 표면으로 불쑥불쑥 떠오르곤 하는 성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그는 꿈에서도 천사를 불러들여 사탄을 물리치려한다. 어떠한 고결한 명분도 한낱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불꽃보다는 위대하지 않은 걸까. 성직자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저 한 명의 남자에 불과한 조슬린은 가장 인간적인 고해를 마음속으로 행하며 지상을 떠난다. 자신의 비유를 못 알아 듣는 신부를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드디어 죽음으로서만 속죄할 수 있다.

<첨탑>은 중세라는 시대와 성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굳이 그런 배경을 의식하지 않고 읽어도 좋다. 주석이 친절하게 달려있어 역자후기 뒷장을 참고하면서 읽어내려가면 숨은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직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조슬린은 우리 시대 어느 누구와도 비슷한 속성을 지니는 사람이다. 굳이 성직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유는 좀더 절제된 인간본성을 어렵사리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나싶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점은 존재감의 부재에서 오는 인간본연의 갈등을 좀더 거슬러올라가 따져보기 위함이 아닐까. 신 중심의 암흑시대에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한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가 마음속에 세우고 있는 첨탑 하나가 있다면 훗날 어떤 의미로 남을지 생각해본다. 의미를 둔다면 단지, 균형과 조화를 미덕으로 하는 비례의 원칙이 중요하겠다.

마치 조슬린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격랑하듯 읽어가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문장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조슬린의 감정의 동요를 따라 때로는 단절되기도 하고 유유히 흐르는 척 가장하기도 하는, 대담한 문장 안에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는 것 같다. 마치 조슬린의 이성과 감정이 그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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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6-04-2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들이 정리가 되네요! ^^
 
키스의 재발견
애드리언 블루 지음, 이영아 옮김 / 예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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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는 법을 가르치는 과목이 대학에 등장하고(물론 외국의 경우이지만) 키스를 하는 여러가지 방법을 소재로 치약을 선전하는 광고가 나오는 요즘,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끈다. 원제는  으로, 번역제목보다 건조한 느낌이지만 더욱 간명하다. 이 책은 '에로틱한 접근에서 철학적인 고찰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것으로도 짐작이 되듯이 <키스의 재발견>은 키스에 대한 고찰의 여정을 상당히 넓게 그리고 있다.

저자의 키스에 대한 접근과 고찰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아 읽는이는 종횡무진 그녀의 생각을 따라가야 된다. 본능적인 행위로서 생물학적 근거를 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프로이트적인 심리학에의 접근에서 행동학자들이 말하는, 저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에 이르기까지 키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일단 유보하고 객관적인 자료들을 수없이 보여준다. 곳곳에 적당한 주석이 달리고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제목이 끊임없이 제시되는데 그것들의 배경이 되는 미시적 역사 또한 맛볼 수 있는 게 흥미롭다. 종교와 신화, 미술과 음악은 물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광범위하고 통시적으로 키스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성애적으로 노골적인 표현이 담긴 문학작품의 일부를 비롯하여 전율적인 인상을 남겼던 영화장면들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그 넘다듦이 거침없다. 어조는 상당히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차 있으며 때로는 냉소적이다. 독자는 많은 자료들을 읽으며 상상의 범위 안에서 키스라는 행위에 매혹될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허를 찌르는 한 마디, "키스라는 행위에서라기보다는 키스가 입고 있는 갑옷에서 우리는 흥분할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키스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때로는 내면의 계략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키스의 미덕은 상호성과 친밀감에 있다. 주면서 동시에 받는, 일방적이기보다는 쌍방의 가장 친밀한 행위로서, 키스는 그 의미가 있다. 키스가 일방적이지 않듯이 저자가 키스를 해석하는 방식도 한 방향이 아니다. 모성을 갈구하며 성애적인 의미가 함축된 키스의 행위가 배신과 모순과 간교함의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런 예로 유다가 예수에게 한 키스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면서, 유다는 예수의 희생양이기도 하며 예수를 유다의 배신에 공범자로 혐의를 둔다. 또한 흡혈귀의 키스 같은 혐오스러우면서도 짜릿한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악마적인 키스의 예도 든다. 키스가 정치적 음모를 숨기고 있는 경우도 있고 특혜를 얻고 싶은 마음의 사교적 술수일 때도 있다.

느긋하게 또는 숨가쁘게 키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베이스캠프에서 꽤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자는 이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키스의 미덕에 대해 강조한다. 키스를 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은 타인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기도 한'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키스는 둘이 나누어 가져야만 가치 있다"는 집시의 속담은 키스의 상호성을 강조함이다.

이런 점에서 '진짜 키스'는 가장 공평하고 비폭력적인 인간의 고귀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을 엿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남편에게 강제로 키스 당하고 강간을 당하듯 정사를 치르는 장면이 화면 가득 충분한 상상의 여지를 남길 때, 우리는 다시 피학적 본능으로서의 키스로 돌아가는 듯하다.

'키스'는 '음식'과 연관되는 말이었던 고대인간들의 사례와 우리가 품고 있는 관음증을 공식적으로 용인 받는 대중예술로서의 영화를 통해, 키스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저자는 키스가 은밀한 행위임을 탈피한지는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키스하는 방법이 대중매체광고에 등장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닌 것 같다. 키스는 우리의 은근한 욕망 - 친밀감에 대한 - 을 자극하고 만족감을 건네는 방식이며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다정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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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3-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제는 으로 ...
아, 갑자기 원제가 궁금해 집니다.ㅋㅋ

프레이야 2006-03-0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또 한 주 시작하네요. 원제가 빠졌네요..^^ On Kissing..

kleinsusun 2006-05-1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키스에 이렇게 철학적 고찰이 있군요.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언어. 멋진 표현이예요.^^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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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을 한 이후로 내게 주어진, 영원할 것만 같은 숙제는 종교문제이다. 종교가 없었던 친정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시부모님들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몇 해 전 세례까지 받았다. 하지만 늘 체증처럼 답답하고 어느 땐 지리하고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그래도 몇 해 전 교회를 다닐 때에는(물론 어른들 눈 때문이었지만) 교회의 어느 인자한 전도사님 덕택에 나는 찬송을 하며 흐느끼기도 하고 그분들의 기도를 받으며 솟구치는 눈물을 감출 수 없기도 했다. 지금은 이 책의 주인공 닉 코민스키처럼 책상자의 가장 아랫부분에 넣어둔 성경처럼 교회와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서술적도구는 '대화만이 진정한 소통을 이루게 한다'는 저자의 신념이 낳았다. 예수와 단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란 아무에게 올 수 없지만, 진정 갈망하고 고민한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진다. 이 대화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깊은 대화, 자신에 대한 폭넓은 성찰이기 때문이다.

풀코스로 나오는 고급레스토랑에서의 대화는 억양을 조절하게 만들어 격앙시키지 않고 감정에 흐르지 않게 한다. 다음 메뉴를 들고 서 있는 웨이터 때문에 적당한 지점에서 대화가 끊기기도 하며 대화의 호흡을 조절하게 하는 잇점이 있다. 사실 단 둘만의 대화에 긴장하고 어색해하며 상대적으로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만찬이란 고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마주보며 정곡을 찌르는 대화를 나눌 때 내 안의 감추어둔 상처와 상실감을 쳐다보는 일이 잠시 고통이더라도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닉은 조롱조로 예수를 호칭하며 냉소적인 말투로 대화를 시작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상대의 태도와 어조에 점차 자신의 중심을 찾고 좀더 솔직해진다. 여태 그러고 싶었던 상대를 갈구하고 있었음이 진실일테다. 닉의 이런 불안감을 상쇄해줄 만치 예수의 화법은 통쾌하며 확고하다. 상대로 하여금 신뢰하게 하고 동요하지 않게 한다.

예수는 닉을 정말 선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순수하고 착한(?) 우리는 그만큼 위악을 부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말에 의하면 신과 멀어져 자신 안에 깃들어있어야할 신의 성질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통해 나타나고 우리를 통해서만 사랑을 보여준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과 '영생'에 대한 이론도 예수의 입을 통해 쉽게 전달된다. 영생이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칭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의미가 있다함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순간부터 내 삶이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삶, 그것은 사랑의 삶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찔했다. 그럼 기독교도이면서도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는 부류는? 대답은,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자신의 선함을 믿어선 안되는 데 말이다. 이 책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를 비교설명하며 기독교적 입장에서 그 창시자나 계시의 진실성에 대하여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 점이 다소 거슬리지만 과학적인 사실과 더불어 우주관을 제시하며 논리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을 만하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가장 갈구하는 것은?, 이라는 예수의 질문에 닉은 머뭇거리며 마음에 없는 대답을 하고 예수는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단호히 받아넘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곁에서 위로와 사랑을 주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지금도 문 밖에 있는데, 들어오라고만 하면 내 영혼의 집안에 들어올 수 있을텐데, 우리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는 나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고서 그 존재를 밀어내고 있는 것의 정체를 생각해보게 한다.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듯 비근한 일례를 들어가며 그 사랑의 부피와 질감을 납득시킨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품고 지냈던 신에 대한 증오, 직장 내 비리에 대한 자신의 비겁함, 부딪히기만 하는 아내와의 뾰족한 관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일상의 지리함 그리고 어린시절 품었던 자유분방한 모험심의 퇴색. 삶의 이런 문제들을 이제부터 닉은 현명하게 해결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다음에 한번더 예수와의 저녁식사를 제안한 것으로 보아서 희망적이다.

비기독교인이라면 여기까지 빨려들듯 읽어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고 완전히 믿어지지 않는 점도 있을 것이다. 나같이 어설픈 신자는 물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오래 묵혀두었던 자신과의 대화! 닉처럼 나도 지금 멀리 하고 있으면서도 늘 잊지 못하고 마음 쓰이는 그 존재와 마주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몇 해 전 찬송가와 기도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멈출 줄 몰랐던 기억만큼은 아니어도, 가슴 가운데 묵혀두었던 자그만 덩어리가 불거져나오는 느낌이다.

에피타이저와 샐러드, 메인요리와 디저트 그리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 귀가를 하기 전, 닉은 예수와 악수를 나눈다. 닉이 멈칫하자 나도 긴장을 했다. 무언가 반전이 있다고 했는데 무엇일까. 그의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확연히 드러나는 고통의 흔적은 흔히 알고 있는 상식과 달라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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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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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스트레스 안 받고 내 주위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적혀있다. 이런 책에 거의 처음으로 손이 간 걸 보면 관계를 잘 꾸려가지 못하는 미숙한 나의 방식, 그 자체가 내겐 늘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었나보다. 간혹 관계를 잘 꾸려가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서도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로 고민하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렇다면 누구든 관계를 잘 만들고 유지하기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렵다는 말이다.

얼마 전 문학회의 홍보일을 맡은 관계로 전체공지를 한 일이 있는데, 내용인즉 정식으로 문학회의 회원으로 등록 되어 있진 않지만 간혹 참여하는 어느 선생님의 부친상에 대한 것이었다. 윗분의 명령?으로 나는 공지를 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윗분이 즉시 전화로 내게 하시는 말이(좀 화난 음성으로) 정식 회원도 아닌 사람의 일까지 이런 식으로 공지를 하면 회원들에게 부담만 주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납득이 되어 나는 즉시, 그분은 **문학회 회원은 아님을 밝히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만 문상을 가시라는 공지를 다시 하였다.

바쁜 와중에 왜 이리 복잡하게 일을 하게 되나 싶다가, 역시 관계 안에서는 말 한 마디, 글 한 줄도 오해의 소지가 되고 불화의 꼬투리가 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으로, 말 한 마디, 글 한 줄이 좋은 관계의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니 어찌 보면 희망적이지 않은가.

이 책은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이라는 부제도 달려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벗이라 생각한다면 관계가 참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소노는 1931년 도쿄생이다. 삶이 가져다준 지혜와 여유로  벗을 공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아 놓았다. 소노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소소하거나 다소 커다란 일들에서 벗을 공경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들을 솔직하게 옮겨놓았다고도 보인다.

책의 표지에 있는 사진에는 눈이 시원해지는 녹색 잎사귀들이 옹기종기 붙어 매달려있다. 이래저래 얽혀있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짐을 느낀다. 역시 나는 보는 것, 듣는 것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나약한 사람인가보다.

목차를 보면 모두 11장으로 나뉘는데 아무 곳에서부터 보아도 무방하겠다. '우리들 모두 있는 그대로 족하다'로 시작하여 끝에는 '사랑과 동떨어진 부모가 되지 않으려면'이라는 장으로 맺는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관계를 조금씩 넓혀가며 시댁어른, 남편, 부모님, 벗, 직장 사회생활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와의 편안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거창하지 않으며 짧고 인상적인 글로 보여준다. 모두 소노의 소설이나 칼럼 등 자신의 글에서 발췌한 부분으로 보인다. 

소노의 경우법은 스스로가 완전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나태하고 적당히 거절하고 적당히 무지하고 적당히 일하고, 남에게도 친절한 간섭은 삼가는 것이다. 소노의 사고방식은 틀에 매어있지 않고 전통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아 시원시원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은 '베품과 받음의 의미'이다. 예를 들면, 인과응보가 아니라서 인생은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준 만큼 받으려든다면 얼마나 불편한 관계가 될까. 그리고 '우정의 기본은 존경'이라고 이 장에서 말하고 있다. 

'증오로 구제받는 경우도 있다'라는 장에서는 인간은 평화만이 아니라 싸움도 좋아한다고 가식없이 말한다. 나와 상대의 부정적인 부분을 인정하라는 이야기이다. 살아가면서 '성실과 불성실의 배분'이 삶을 덜 피곤하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종교인다운 구절이 자주 나오는데, 여기서도 하나님은 흥미로운 분배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모든 재능을 때와 경우에 맞게 사용하고 계시니 말이다.  언제 어디서고 어느 상황에서든 성실하려고만 하면 쉽사리 피곤해질 것이고 상대에게도 짜증의 불똥이 튈 것이니 말이다. 

나이가 있어서인지 죽음과 장례에 대한 단상들도 자주 나온다. 장례식은 가족행사라고 하며 가정사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얼마전 내가 문상에 대한 공지를 하였던 일과 연관되어 기억된다(회원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윗분의 말씀..). 소노의 말처럼 세상사의 잣대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사는 것 또한 사람과의 관계를 편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죽은 다음에는 한 가닥 미련 없이 깨끗이 잊혀지는 게 좋다'며 '존재 남기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신선하다. 오랜 세월 이 세상에서 '소란을 피워왔으므로' 죽어서까지 존재를 과시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말이다. 세상 그 어느누구보다 절대자만이 알아주는 '나'이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글을 모두 읽어보면 저자는 명랑하고 따스한 사람이라 느껴진다. '진정한 예의는 진지함'이라고 생각하며 나와 상대 모두에게 너그러워질 것을 충고한다. 시무룩한 표정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말은 친정어머니에게 듣는 말처럼 자상하게 들린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아내로서 문학인으로서 또한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그저 우왕좌왕 살아오며 터득한 삶의 지혜들이 연륜과 함께 전해온다. 거드름 피우지 않고 솔직한 말투, 튀는 발상, 넉넉함이 배어있는 사고방식 그리고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다운 순진함이 여전이 묻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이 이래저래 얽혀들 때 목차에서 와닿는 소제목을 찾아 펼쳐보는 것으로도 스스로 위안이나 해답을 얻을 수 있겠다.

" 최악의 인간관계는 서로가 상대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가 자신의 관심에만 주목해야 한다고 느끼는 인간관계이다. 반대로 최고의 인간관계는 자신의 고통이나 슬픔은 되도록 혼자 조용히 견뎌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슬픔과 고통을 무언중에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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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1-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 설날 선물로 받은 것 같아요. 물만두님이 알려주셔서 알게 되었네요..

아영엄마 2006-01-30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당선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06-01-3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은 즐겁게 보내셨나요? 몸무게 다들 느셨을테죠. 아영엄마님도 ㅋㅋ
축하,, 감사드려요.

조선인 2006-01-3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 선물, 축하드려요. *^^*

글샘 2006-02-03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최악의 인간관계는 서로가 상대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가 자신의 관심에만 주목해야 한다고 느끼는 인간관계이다. 반대로 최고의 인간관계는 자신의 고통이나 슬픔은 되도록 혼자 조용히 견뎌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슬픔과 고통을 무언중에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이 말은 어디 적어 두고 싶은 말이네요.

프레이야 2006-02-0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글샘님 감사드려요^^ 오늘 날씨가 좀 맵네요. 감기조심하세요~~
 
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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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이 믿음직하면서 살갑다.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밖을 보는 통로는 '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안을 훔쳐보는 통로도 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도 문을 열어야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내 보인 '문'은 햇살이 은은하게 비쳐 온기를 담고 있다. 세상 밖과 안이 불투명하게 막혀있지 않고 잘 통할 것만 같이 열려있는 느낌이다. 비록 그 문이 닫혀있다해도 말이다. 그 문 옆에 앉아 책을 펼치면 속눈썹 위로 햇살이 아른거리며 기분 좋을 정도로 눈이 부시고 잠이 스르르 들 것만 같이 편안하다.

이런 분위기는 이 책의 책장을 다 덮을 때까지 이어진다. 굳이 예스러운 문체를 고집하지 않는 이야기방식도 그렇고 사라진 인물들을 살려내는 데 있어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또한 그러하다. 이는 무리없이 읽어내려가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특히 초반부)  다소 몽환적이다싶은 묘사가 이덕무란 인물을 현실비관적이거나 유약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서두의 이런 분위기는 점점 현실적이고 강인한 미래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덕무이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을 간서치라 하며 겸양한 태도를 보인다. 또한 자신이 책과 만나는 독특한 방식을 감동스럽게 풀어낸다. 가난한 살림에 할 수 있는 건 책 읽는 일밖에 없는 무능한 자신의 처지를 한스러워하며 책을 팔아 생계를 잇는 대목은 콧등이 찡하며, 한편 답답하다.

중간부분에서, 억눌린 한을 참된 벗들과의 교제를 통해 나누고 시대를 함께 아파한 그는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같은 마음의 벗들을 소개한다. 또한 홍대용과 박지원을 더 큰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케한 스승으로 소개한다. 모두 저자의 입을 통해 상상력에 힘입어 소개되는 형식이다. 실제 연도와 구체적인 일화, 살아있는 대화와 웃음을 통해 각 인물들의 사상과 업적, 이덕무와의 연관성이 소개된다. 간혹 중복되는 사항도 있어 조금 다듬었더라면 하는 곳이 살짝 보인다. 

인물들은 모두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책 밖으로 걸어나온다. 이렇게 과거의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는 순간의 설렘이 가장 큰 미덕이다.  이덕무가 오감을 통해 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나누었듯이,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대부분 실학자들)은 오감으로 느껴지는 개성적인 사람들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홍대용이다. 과학과 기술을 중히 여기고 혼천의를 만든 실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인물인데 완전히 생명력이 부여되어 튀어나왔다. 왕산악 뺨치는 수준급의 거문고 소리라니, 얼마나 멋스러운가. 그 시대에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자세한 관찰과 예리한 비판의 눈으로 물음표를 던지고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 이는 자기 개혁으로부터 세상의 개혁도 나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식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덕무가 벗과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넓혀가듯, 공간적으로도 작은 방 안에서 시작하여 백탑으로 중국으로, 다시 규장각으로  넓혀간다. 이들, 변혁의 의지를 품은 인물들의 배후에는 정조가 있다. 이들이 세상 속으로 나와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이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실현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며 정조의 개혁의지가 담겨있었던 화성 담의 매끈한 벽돌이 떠오른다. 이것을 실어나르기 위해서도 수레가 필요하다가 피력한 박제가가 거침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실현되지 못한 이상을 예견했을까. 이덕무가 책만 보는 바보라고 자칭한 이름에 세상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깔려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과거의 일과 과거의 인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조선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맺는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이지만 책 속 이야기 서술 속에서는 미래에 속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 이어져있는 시간이듯이 과거의 인물과 우리는 연결되어있다. 구세대는 신세대와 맺어져있고 옛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깊이 연관지어져 있다. 서로 나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나누지 않으면 이어질 수 있는 고리가 마련되지 않을 것 같다. 

버려졌던 발해의 역사를 오랜 세월 찾아 모으고 <발해고>를 쓴 유득공을 비롯하여 녹색눈의 호걸 박제가 등 막연했던 인물들이 성격을 띄고 살아나오니만큼,  읽고 나면 나이와 적서를 가리지 않고 진정한 벗을 삼은 이덕무의 지혜와 인품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실학자들과 그 시대의 못다 이룬 혁신에 대해 근거있는 상상력으로 쉽고 재미나게 풀어쓴 책이면서 지금 우리의 미래까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는  이 책에 나오는 인물과 책에 대해 가나다 순으로 간략히 정리를 해 놓아 참고하기에 괜찮다.  

옛 서화집을 넘기듯 오른쪽 책장의 우측에 세로로 그려져 있는 삽화에서 은은한 묵향이 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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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06-01-17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참 인상적입니다. 제목만 보고 스쳤던 책이었는데 한데 읽어보고 싶군요.

프레이야 2006-01-1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재미난 책입니다. 중상주의 실학자 이덕무로만 알고있었던 인물이 말을 걸더군요.

글샘 2006-01-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잘쓴 책이지요. 리뷰도 참 멋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