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당혹스럽다. 김훈의 면모와 그의 글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하는 지기님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할지 난감하여 며칠을 묵혔다. 이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아집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점을 미리 말하고 싶다.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리뷰를 쓰지 않았던 걸로 보면 이 책은 내치지 못하는 맛이 있다는 말이 된다. 김훈은 묘한 이중성의 매력을 풍긴다. 이건 아니야 하다가 딱 그거야 라고 할 수도 있는, 미지의 영역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담이 너무 높다. 그의 글을 처음 만난 건 ‘자전거여행’이다. 그 후 현의노래, 개, 공차는 아이들, 강산무진을 읽었다. 그의 책을 모두 읽은 건 아니고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자주 쓰는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더듬고, 겹치고, 포개지며’, ‘크고 높은' 동어반복과 동의열거의 허무한 말들에 허망해지면서도(이런 식의 표현이 점점 식상해진다는 느낌 때문에), 문득 놀라운 사유의 발견으로 다시 서성이기를 반복하는 그런 것이었다.


<남한산성>도 그런 '답답함'으로 읽어내려가 '막막함'으로 책장을 덮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고 있지만 마치 작가 관찰자 시점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충실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현대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관념적 개입이 이야기로의 몰입을 방해한다. 소설로서만 읽히기를 바란다고 서문에 밝혔지만 그의 글은 소설로 읽힐 때 독자에게 제공해야할 것들에 그리 충실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체는 글쓴이의 개성이자 사고방식이므로 언외로 한다 해도 그가 소설 속에 매입해 둔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창조한 인물과 그들의 성격 그리고 그들이 엮어내는 사건과 그것의 의미를 두고 보면, 작가의 그 ‘서늘할 정도의 담담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다. 그의 트래드마크 같은 서술방식을 장점으로 살리자면 차라리 인조가 화자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심정적으로 가장 연민하는 사람들의 중심에 인조가 있기 때문이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47일간의 성 안 투항’에 대한 인조의 심경을 서늘하게 그려내면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칼의노래>나 <개>에서처럼.


인물들은 성안과 성밖으로 나뉜다. 성안에는 인조의 주변에 주전파와 주화파의 중심인물로 김상헌과 최명길을 간결하게 배치하고, 성밖에는 비실제인물로 뱃사공, 나루 그리고 서날쇠를 창조했다. 그리고 청군의 장수 용골대(마부대는 생략)와 정명수, 칸을 대립되는 쪽에 두었다. 작가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고 밝혔는데 주전파와 주화파로만 갈라서 말하자면 그 점은 인정되면서도, 무지한 백성보다는 치욕과 자존의 나눌 수 없는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임금과 벼슬아치들의 편에 서 있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그 점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그가 창조한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세습 관노 출신으로 천생(賤生)의 한을 품고 여진말과 몽고말을 익혀 용골대와 함께 온 정명수(실제인물이지만 그의 배경은 허구로 읽힘),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청병을 건너게 해준 뱃사공, 김상헌의 칼날에 사공인 아버지를 읽고 그림자처럼 성까지 들어온 열 살의 여자아이 나루(이듬해 이 아이는 초경을 하는데 옛날여자치고 꽤 숙성한 것 같다), 그리고 천하의 대장장이 서날쇠에 충분한 생명력이 불어넣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래도 정명수와 서날쇠는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인조에 대해서라면, '자전거여행2'에는 성으로 들어가는 임금의 말고삐 잡은 손을 놓고 도망가는 사람들 때문에 그 말고삐를 직접 잡아끌고 성으로 들어갔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소설에서도 그런 장면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방식을 읽고 싶었다. 임금의 굴욕을 단적으로 그린 장면에서는 전율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인조를 두고 옆으로 돌아서 오줌줄기를 휘갈기는 칸. 사신으로 온 정명수가 사대부 여자만을 맞아들이려하는데 속임을 당하자 벌거벗은 여자를 향해 냅다 발길질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제 하나의 틀이 된, 생경했던, 그의 문체에 가려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미덕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해 아쉬운 것이다. 이건 나의 글쓰기에서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오류라서 더욱 거슬렸는지 모른다. 원래 자신의 흠이 다른 사람에 투사되어 잘 보이듯이. ‘자전거여행 2’의 남한산성 편을 다시 읽었다.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그 글 속에는 47일간의 투항 여정이 인조의 심경에 가까이 가 있다.


그 책에서 '무위로 돌아간 모든 언어행위'에 대해 절박하게 사유했듯이 소설 <남한산성>에서의 배경에는 말들의 먼지가 뒤섞여 창궐하고 있다. 눈여겨 본 부분은 말에 대한 작가의 천착이다. 글에 대한 천착에도 버금간다. 성 안의 말(言)과 성 밖의 말(馬)을 동일선상의 상징으로 두고 단숨에 서술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9-10쪽)

 

주화파와 주전파의 말(言 혹은/그리고 馬)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성 안에 갇혀 굶주린다. ‘말먹이풀’ 장에서는 추위로 고통 받는 병사들을 위해 말먹이로 아궁이에 불을 떼고 있어 사람위에 말이 있지 못함을, ‘말먼지’ 장에서는 성의 안과 밖에서 말먼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인가, 말로 쌓은 성인가, 임금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봉우리’ 장에서는 ‘정처 없는 말’을 ‘말의 신기루’로 이름한다. ‘하나마나한’ 말의 본질은 공중누각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문장으로써(의도적일까) 말의 헛됨을 입증하는데, 가장 거슬렸던 문장이기도 하다.

-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72쪽)

이와 대조적으로 청나라 군대의 투항권유서는 '삼엄하고 정연한 현실주의적 어법으로 읽는 사람을 전율케'한다. - "너희가 살고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해서 황제의 명을 받으라. 너희가 죽고 싶거든 성문을 열고 나와 결전을 벌여 황천의 명을 받으라!" (자전거여행 2 중 191쪽)


주화/주전파의 모든 언어행위를 문장에 대한 혹은 말에 대한 칸의 생각과 나란히 두면 대조적이며 흥미롭다.

-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칸의 뜻에 따라 글을 짓는 일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284쪽)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에 스스로도 일침을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애정이 남아있는 작가에 대한 나의 바람이든지. 


말먼지가 뒤섞여 앞길을 막고 있는 성 안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작가는 눈을 둔다. ‘강산무진’에서도 그가 빚어내는 시간의 허무성에 진저리를 쳤는데 실제 공간적 의미인 '남한산성'에서도 시간은 차갑고 멀지만 소생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 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 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180쪽)

 

작가는 시간의 영속성과 소생능력으로서의 치유성을 길에 대입한다. 성 밖으로 난 길이다. 최명길이 쓴, 칸에게 보내는 투항문서를 두고 김상헌은 글이 아니라 이른다. 그때 최명길이 치고 나오는 말이 시원하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이에 김류가 말했다. - 명길이 제 문서를 길이라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과 같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315쪽) 

글로써 삶의 길을 낼 수 있다면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벅찬 바람과 함께 나의 속된 경지로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밟고 나아가야함은 다음 문장에서도 알 수 있는 작가의 오랜생각이다. - “건너뛰어서 가는 길이 이 세상의 길바닥 위에는 없는 것이다. 인조는 그 건너뛸 수 없는 길을, 적의 말을 타고 적의 군복을 입고, 인질로 보낼 세자와 중신들을 앞세우고 한 걸음씩 걸어서 갔다.” (‘자전거여행 2’의 187쪽)

 

‘남한산성의 西門은 처연하다’로 시작하는 ‘자전거여행’의 남한산성 편에서 인상적인 구절 중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에서는 너무 압축한듯 잘라놓은 장면들이 여기서 오히려 더 잘 묘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서문 아래의 그 가파른 길, 그것도 꽁꽁 얼어 미끄러운 그 길을 말을 타고 내려오며 앞으로 고꾸라질 지경으로 쏠렸을 테니 임금은 내려서 마차와 말을 번갈아 타고 혹은 걷기도 했을 참담한 장면 같은 것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었으면 다 읽고 나서 덜 허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문장은 각이 지고 관념적인 건조체이자 엄중하고 사유적인 문어체로 자리매김한 감이 있는데, 모호한 흡입력과 동시에 명확한 이물감을 떨쳐버릴 수 없으니, 묘하다.


말과 글, 시간 그리고 길!  그것들의 허무성, 영속성, 진실성이 소설 <남한산성>에 담겨있는 이야기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작가의 말 중)  소설 속 임금은 너무나 담담하게, 치욕의 시간을 감당하고 철수하는 청군과 칸을 배웅한다. 산성에 봄이 찾아오듯 백성들이 하나둘 성 안으로 들어오고 서날쇠는 봄에 씨 뿌릴 일과 아들과 나루의 훗날 혼사를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치욕의 결정적인 순간과 그 이후 임금의 심경에는 작가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폭풍이 할퀴고 간 후의 백성의 삶 또한 그리 담담하다니. 김훈식의 역설적 묘사다.


수채물감을 연하게 풀어 칠한 것 같은 표지의 진달래색이 이름 모를 연초록 풀포기와 함께 살아있다. 손끝에 묻어날 듯 명징한 진달래색이 그리 처연하게 보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해 주신 좋은 지기님에게 감사드린다. 그때의 생생한 기록을 보고 싶어 전에 읽었던 서해문집의 <산성일기>를 다시 찾아보기로 한다. 소설로만 읽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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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6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비로그인 2007-05-0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훈을 통 안좋아해서... 근데 김훈 싫다고 하면 따 되는 분위기 이해하시나요?
전 김훈에게서 풍기는 그 마초적 이미지, 남성적 문체가 싫어요.
포스트 이문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곧 정치판에 뛰어든다고 설칠 것 같은.
몇몇권의 책을 읽었지만, 개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순 자기 글 잘쓴다는 거 과시용인것만 같고... 제가 다 소양이 부족해서 그렇지만요. 근데 이런 생각은 저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몇몇분의 서재님들의 페이퍼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 킁-
리뷰 잘 읽었습니다 혜경님 :)

코멘트 수정했습니다. 뭐 속삭일 코멘트가 아닌거 같고 속삭이는 걸 싫어해서요 :)

프레이야 2007-05-02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저도 댓글 수정합니다. 그럼요, 그래야 체셔님이지요.
저도 그런 점이 식상해지고 있어요. 마초적 이미지, 이 소설에서도 그런 묘사가 많아요.
여성인 저로선 오싹할 정도로요. **은 재수없다,라고 쓴 어느분의 페이퍼가 문득 생각나서 웃음이 나네요. 소양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무한대 2007-05-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명수의 배경은 작가가 창조했을지 모르나 실제인물로 알고 있어요.

프레이야 2007-05-02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한대님, 정명수는 실제인물이군요. 감사합니다.
작자미상의 <산성일기>에도 김류의 첩과 딸이 청의 포로가 된 일로 김류가 정명수를 안고 귀에 대고 하는 말이 나오더군요. 모름지기 봐달라는 말이었지만 정명수는 답하지 않았고 그러자 김류가 안고 놓지 않으니 명수가 괴롭게 여겨 옷을 떨치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레이야 2007-05-02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서가님, 저도 그 역사적배경이 늘 흥미로웠고 그걸 소재로 작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질까 기대했어요. 오히려 기록을 먼저 읽는게 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는 방법일 것 같아요. 단조로운 구조로 생략된 것들이 많고 저로선 그의 문체를 모두 인정하고 들어가 읽는다해도 거슬리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어요. 그럼에도, 읽어보시면 괜찮을
듯 해요.

마노아 2007-05-03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더 '역사적인'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김훈은 가차 없이 잘라내던걸요. 저도 자전거 여행의 짧은 몇 페이지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몹시 매력적인 문체였는데 자꾸 보다 보니 식상해지니 거참...;;;

백년고독 2007-05-03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장바구니에 담아놨다가 배혜경님 리뷰보고 슬그머니 내려놓았죠.
후에 읽어봐야겠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프레이야 2007-05-03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역사적인 무언가,, 저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역시 편안하고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는 문체가 좋은 것인가 싶어요.

백년고독님, 슬그머니 ㅎㅎ 그러지않으셔도 되는데 저의 편협한 리뷰가 괜한 일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고흐의 그림이 제 서재에 뜨니까 참 좋아요.^^

잉크냄새 2007-05-0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경우에는 김훈의 문체가 어렵고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피할수 없는 매력이 있는것 같더군요. 저도 보관함에 있는데 얼른 읽어봐야겠네요.^^

오우아 2007-05-0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배혜경님 말씀대로 역사적 배경에서 건져올린 상상력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는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5-0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네 읽어보셔도 좋을 듯해요. 그냥 드리는 말씀인데요, 울옆지기는
완전 싫어하더군요. 처음엔 매력적인데 점차 그쪽으로 자리매김 되는 게 어째...
자리매김이라는 말, 사실 긍정적인 건 아니라고 여겨요.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오우아님, 사실 소설 읽는 맛은 상상력의 보고로 풍덩하는 맛인데, 여기저기서
작가의 동어반복적인 관념이 개입하다보니 '풍덩'이 잘 안 되는 게 흠이에요.
하지만 나름의 색채로,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짱꿀라 2007-05-0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산성. 저는 언제 읽을지 아직도 미지수 입니다. 먼저 옆지기 보고 읽으라고 했습니다. 우선 리뷰는 읽지 않고 제가 책을 전부 다 읽은 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선 한표는 던지고 갑니다. 읽지 않아도 혜경님은 역시 리뷰를 잘 쓰시니까요.

프레이야 2007-05-04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마지막단락의 두번째문장만은 보셨어야 합니다. ^^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시작하시기를... 그리고 내일부터는 가족들과 즐거운 주말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302moon 2007-05-0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발견하고 슬쩍 집어 들춰보다가, 도로 내려놓았던 기억이/

프레이야 2007-05-09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2moon님, 슬쩍 ㅎㅎ 다음에 도로 집어들어보셔도 괜찮을 듯...

사마천 2007-05-2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저는 워낙 광해군 파여서 인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전파들의 자존심 보다는 주화파의 현실감이 더 마음이 기우네요. 사공의 짓거리가 때로는 얄밉지만 어쩌라고요.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참 명지대 사학과 교수인 한명기의 <광해군>이 정말 걸작인데.... 한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프레이야 2007-05-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저도 광해군을 좋아합니다. 주화파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도 같네요.
사공의 말이 가장 진솔하게 느껴지더군요.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찾아서 읽어
봐야겠어요. 권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편안한 금요일 밤 ~

sokdagi 2007-08-0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만에 접속을 했다가 님의 서재에 들렀습니다. 이것저것 글을 읽다보니 자꾸만 컴터 화면으로 얼굴을 들이밀게 되네요. '김훈'이 전직 기자였던가요? 하여튼 그의 문체 자체가 꼼꼼한 듯 하긴 한데 저에겐 이 역시 갈수록 어려워지는 듯 합니다. 쉬운 것을 읽고 싶은 제 맘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 그래서 현의 노래를 끝으로 '김훈'의 작품은 늘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 것 같습니다. 자전거 여행에서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었는데. 연필 한 자루 품고 다니며 글을 쓴다는 작가의 해박함이 좋더라구요. 님의 상세한 평에 힘입어 보관함에 담아 둬야 할까봐요. 각오를 좀 하고 사야 될 듯 합니다. ㅎㅎ 그럼...

프레이야 2007-08-05 23:55   좋아요 0 | URL
술술 읽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점이라 말할 순 없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문장구조의 난해함이랄까.. 저도 자전거여행이
좋았어요.ㅎㅎ 꼼꼼한 문체란 님의 글에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가봐요. 아무튼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일이죠.
올만에 들려주셔서 너무나 반가워요, 속다기님!

leeza 2007-08-2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마음으로 읽는다는 게 느껴지네요. 좋은 리뷰 보고나니 다시 읽고 싶단 생각도 드네요ㅋ

프레이야 2007-08-22 21:56   좋아요 0 | URL
리뷰를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읽으시게요? 다시 읽으면 다른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저도.^^
 
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작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오르한 파묵. 그가 쓴 수상연설문을 읽고 나서 평소 '바늘로 우물을 파듯' 글을 쓴다는 터키의 한 작가에게 더욱 호감이 생겼다. 하나의 글로서도 완성미를 갖춘 긴 연설문의 제목은 ‘내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었다. 작가에게는 영감(靈感)의 보고이기도 했던 그 가방에 파묵은 자신의 수상에 대한 헌사를 드렸다. 수상한 사람의 글을 찾아 읽는 편이 아니지만 지적이며 인간적인 매력을 풍기는 이 작가의 작품을 몇 가지 골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마음 가는 제목으로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 ‘눈(2000)’ 그리고 1985년 작인 <하얀 성>을 맞이했다. 연대순으로 읽어보려고 했지만 <하얀 성>의 책표지가 먼저 마음을 끌었다. 소리를 삼켜버린, 백설로 덮인 것 같은 미지의 성 위로 침묵의 병사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고 탑의 꼭대기는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계단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저 아래로 계단 한 자락에는 병사 한 명이 일행과 떨어져 앉아있다. 성 아래의 어떤 풍경을 보며, 무슨 상념에 빠져있는 것일까.


흔히 파묵의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작가는 ‘아니다’라는 말로 일축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 언급할 때가 온 것 같다. 인간과 문화를 서로 구분하기 위해 행해졌으며, 앞으로도 행해질 분류 중 하나인 동서양 구별이 실제 얼마나 적합하냐는 것은 물론 <하얀 성>의 주제가 아니다.'라고 밝혀두었다.(p261) 하지만 하나의 작품은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해석할 수 있고 그 활동 자체가 독자의 즐거운 권리이기도 하다. 작가가 부인하는, 그러한 주제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는 표식이 작품 전반에 나타나 있다. 터키인과 이탈리아인의 두 인물을 오랜 세월 함께 지내게 한 구도가 먼저 그런 해석을 낳게 한다.


부분적으로 혹은 전반에 걸쳐 동서양의 종교, 문화, 학문을 넘어, 동양과 서양이라는 소우주 간의 대립과 교류, 화합이 취하고 나아가는 양상들을 조합해 볼 수 있다. 호자(터키인)와 나(베네치아인)는 일별로도 서로가 닮았음을 알지만 쉽게 마음을 트지 못하고 적대시하며 서로를 탐색하고 긴장한다.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심 상대를 이용하려는 마음도 버리지 못한다. 이들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그들의 지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쓰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사소하고 순연한 유년생활, 심층의 죄의식과 욕망, 꿈이 쏟아져 나오고 그속에는 과장과 환상이 섞여 존재한다. 작가는 이들의 오랜 동거와 몇 번의 이별이라는 긴긴 인연의 고리를 보여주며 이들은 결국 필연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말한다. 상대를 닮아가려는 건 몰락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시나브로 동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쪽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서양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작가의 긍정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동시에 동양에 대한 자부심을 비추어 봄직하다.


<하얀 성>이 이렇게 명료한 표피만을 드러내는 소설이라면 표지의 그림이 내뿜는 강력한 자성에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작품 전체에 보석처럼 박혀 빛을 발하고 있는 은유와 상징들 중 몇몇은 이해가 되지만 쉬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터키에 돌연히 번진 흑사병 같은 것이 그렇다. 인간이 품는 죽음과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빗대기 위한 소도구로 보인다. 짧지 않은 서문으로 시작하여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조하면서, 긴박한 분위기를 만들지도 않고 시종 차분한 어조로 끌고 간다. 이야기에 극적인 구조를 굳이 장치하려고 하지 않고 '나'와 호자, 파디샤가 만들어내는 삼각의 긴장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나’와 ‘호자’가 동일시되어 '나'와 '그'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으로 휘몰고 간다. ‘호두나무 높은 가지에 긴 끈으로 묶은 그네 하나가 희미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앞에서 펼쳐진 기나긴 이야기들의 파노라마를 얼른 감지되지 않는 율동감으로 그리게 되며 내 마음속에 그네 하나가 달강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 복선이 장치되어 있었지만,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읽는 내내 체감하지 못했다.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 이야기'! 소설의 끝에서 그들이 도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조용히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다’라는 후렴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괴로워하는 호자에게 주인공 ‘나’는 ‘나는 왜 나인가’를 자문하라고 충고하지만, 결국 작가는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지 않던가.  ‘나’라고 하는 자아 안에는 주체와 객체가 공존한다. 주체는 객체를 밀어내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면서 우호와 적대의 노선을 끝없이 교차하며 상생한다. 여기서 ‘호자(선생)’와 ‘나’는 하나의 자아인 ‘나’로 통합되면서 각각 주체이면서 객체로 변별되기도 한다. 그들은 역할을 수없이 바꾸어가며 하나의 ‘나’로 가기 위한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걸어간다. 모호하고 아득하기만 한 '정체성' 이라는 '하얀 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가 기다려왔던 고통의 시간은 그것을 찾기 위한 시간이나 다름없다. 즐거웠던 시간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 얼마나 암울하고 비굴했던 노예(‘나’는 터키 갤리선에 잡혀온 노예의 신분)의 나날이었나.


파디샤의 명령으로 병사들과 행군하는 숲에서 불현듯 ‘하얀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성을 보며 ‘그에게도 고요하고 조심스럽게 끝나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완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서술한다. 이들의 앞에 놓인 '새로운 인생'을 예감하는 이 대목에서 하얀 성을 묘사하고 있는 고고하고 아련한 색채에 취했다. 작가는 인간성의 기품을 믿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인생'은 다음 차례로 내가 읽을 파묵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당신이 어두운 숲속 구불거리는 길에서, 언덕이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 황급히 뛴다면 마치 그곳에 당신도 참가하기 원하는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p218)


대개의 우리처럼 주인공 ‘나’의 불운은, 그곳으로 가는 비탈길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자 하나이며, 고통과 평화와 어둠을 완벽하게 두루 갖춘 곳임을 깨닫는다. 우연의 경험이라 여겼던 일들이 필연임을, 그럼에도 그 성의 하얀 탑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중요한 것은,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이다. 드디어 자기합일의 경지에라도 오른 것일까. 하지만 쉽사리 이루어낼 수 있는 과제라면 화두도 아니었을 테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다소 절망적인 숙명으로 보인다.

 

-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p219)

문학에서 숲은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로 쓰인다. 숲의 탐색은 무의식의 탐색을 은유한다. 불온하고 은밀한 어둠의 숲을 뚫고 나오는 여정은 짧지도 순탄하지도 않다. 차가운 바람 속, 야생동물이 노리는 눈빛과 독버섯 가득한 유혹의 숲을 지나 부르튼 발을 질질 끌며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피로에 지친 두 눈 가득 여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그러니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완벽한 어둠과 동시에 완벽한 밝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은 삼각의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파디샤는 호자와 ‘나’를 조이고 당기는 역할을 한다. 그는 이들에게 있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면서 싸우는 형제에게 이건 네 것이고 이건 내 것이라고 구별 지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홉살에서 스무살이 넘기까지, 파디샤는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지략과 담대함을 갖추었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 또한 강한 인물로 나온다. ‘나’는 파디샤의 능력력을 간파했고 그와 같은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며 적어도 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다운 통찰력과 직관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호자도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지만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적대적이어서 파디샤에 대한 열패감을 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파디샤의 위엄이 두려워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만, 후반부에서 파디샤가 이들이 만든 부풀린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을 보고 나(호자와 동일체)는 실망감과 함께 분노감을 느낀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거리낌없이 쓰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이다. 이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이야기로 가득 찬 거대한 세상에서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빛이 된다는 진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우리의 인식을 뒤집어준다. 어느 날 호자와 ‘나’를 아는 다른 타인이 오고, 호자가 된 ‘나’, ‘나’가 된 호자는 하나이지만 둘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놀라며, 오히려 기뻐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도리어 감명을 준다. 그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같이 살았던 두 명이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닮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이 사람은 호자인 ‘그’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가 쓴 책을 읽으며 하얀 성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고 허공의 끝없는 부분, 존재하지 않는 초점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나’가 쓴 책을 즐겁게 읽으며 책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찾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집 뒤뜰이 보이는 그 창문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실패한 무기에 대한 무용담이나 학자연하는 거만한 태도, 명성과 부를 위한 위선적인 행동들이 아니라, 자기 취향대로 가꾼 뒤뜰,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점성술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수무책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p238) 일흔이 된 '나'는 이렇게 생의 마지막 고백을 한다.  ‘나’와 ‘그’는 동일자아다. 내 속에는 타인의 얼굴이 다분히 투영되고 그 속에도 여러 가지의 얼굴들이 괴물처럼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그 모습 속에 투사되는 갖가지 감정들은 불쾌하거나 유쾌한 종류로 이분되겠지만 그 뒤에 그늘처럼 드리워지는 건 늘 연민의 감정이다. 때로는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생이 지리멸렬하거나 생명의 연약함에 태생적인 열등감이 들 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곁에 있는 ‘그’를 쳐다보고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눈짓을 보내는 것이다.

-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p238)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행복은 높고 아득한 하얀 성에 있지 않고 바로 저 창문 밖, 살랑 바람 불어대는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이 시인했듯이 거울을 보는 행위가 상징하는, 두 가지 얼굴의 자아가 상충과 화해를 거듭하는 과정은 문학작품의 빈번한 소재가 되어왔지만 파묵은 그 위에 자신만의 고아한 색채를 입혔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행복에 관해서도 이 책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결론을 재현해 내고 있지만, 작가는 영민한 눈을 반짝이며 진실된 이야기꾼답게 낮고 맺힌 목소리로 조근조근 풀어놓고 있다. 호자의 말처럼 우리의 뇌가 쓰레기로 가득찬 서랍 같은 것일지라도 그의 서랍은 뭔가 다른 종류의 것으로 가득할 것만 같다. 이제 우리에게는 거울을 보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하는 의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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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2-1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어렵다는 소문이 들려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는데...^^; 역시 봐야겠어요.

소나무집 2007-02-1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저는 내가 누구인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프레이야 2007-02-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소나무집님/ 내가 누구인가는 풀리지 않는 해답이지만 그 해답을 찾아 고민하고
나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또 진실이겠지요.

짱꿀라 2007-02-1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소설의 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편의 철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이 너무 어려워요. 혜경님의 리뷰를 보니 완전히 소화하신 듯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2-1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제가 읽은 파묵의 첫작품인데 상당히 매료되었습니다. ^^

산도 2007-03-0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 성'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다음 작품에 손이 가질 않고 있네요. 어려웠던가... 어쩐지 내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어요. '호자와 '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리지르며 동화되어갔던 어두운 밤, 집 밖에서 창틀로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내가 훔쳐보는 것' 같은, 표현하자면 조금 오싹해지는 느낌.. ^^;

프레이야 2007-03-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이미지가 바뀐 것 같네요. 참 아름다운 밤하늘입니다. 그리고 반가워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오싹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미지로 남아있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래요^^

오우아 2007-04-1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려고 몇 번 망설였을 뿐 아직도... 멋진 리뷰....

프레이야 2007-04-1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아님, 감사합니다. ^^ 저의 글쓰기도 현재진행형이에요!

책속에 책 2007-05-0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저 이거 읽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오르한 파묵은 완전히 포기했는데, 배혜경님 리뷰 보니 다시 도전하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07-05-0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ydreamer님, 네 읽어보시면 괜찮을 거에요.^^ 저도 다른 오르한파묵 작품들을
사두고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얼른 읽고는 싶은데 또다른 책들이 쌓여있으니..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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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술술 읽히지 않았다. 배를 깔고 엎드리거나 갓 뽑은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작가에게 사죄하고 싶다. 지옥같은 내용을 서술하는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따라가면서,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하여 안정적인 마음을 취하고자 하는 작가의 극한의 고통이 어떤 것일지, 곳곳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넘어가야 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40여년에 걸쳐 증언의 글을 남겼다. 이 책은 그의 첫번째 증언록이다. 그는 1987년 4월 11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혹독한 ‘절멸의 수용소’에서도 하지 않았던 일을. ‘자살’은 사유가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적극적 방식이다. 수용소에서는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는 사유가 불가능했다. 그는 증언의 문학을 일관성 있게 발표하면서 우리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있는 파시즘을 경고하고, 아우슈비츠에 대한 모든 증언을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붉은 신호등으로 밝히고자 했다. 그가 자살을 하기 직전에 쓴 문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 <결론>에서 인용한 일부가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다.


- 점점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동시에 위기로 본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위기, 귀 기울여지지 않을 위기,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넘어서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p338)


아우슈비츠나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핍박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고 책도 있지만 프리모 레비의 기록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부록 1 ‘독자들에게 답한다’에서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사려 깊은 생각은 더욱 값지다. 독일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극도로 표출하지 않은 담담한 서술, 집단적 반란을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광적인 증오에 대한 근본적 이유, 그리고 작가가 생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요인들에 대한 답변 등이 역사적, 철학적 사유와 함께 녹아있다. 청소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인데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들이다.


증언과 기록의 글, <이것이 인간인가>가 오랜 세월동안 읽히며 감동의 물결을 밀고 오는 이유는 이 책이 단지 기록에서 끝나지 않고 문학적으로 승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1943년 12월 13일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폴란드 수용소로 걸어가는 길을 ‘여행’이라는 소제목으로 표현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꿈꾸고 그리워했던 것 중에 ‘먹는 것’과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거의 집단적인 꿈이었다. 탄탈로스의 신화처럼 영원한 기아와 갈증에 허덕이면서도 지난날을 소재로 혹은 돌아갈 집을 소재로 이야기들을 나눌 때면 암흑의 지하세계에서도 환영처럼 반짝 하는 햇살 한 줄기를 본 것인 양 행복해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이야기 속에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금기어 중에 '내일 아침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내일 아침'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이야기로서의 장점을 두루 지닌다. 사실적이면서도 적나라하지 않고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어조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있다. 당연히 1인칭시점의 서술이지만 인물들을 보는 눈에 상당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특히 작가가 주변을 보는 눈이나 인물들을 파고드는 눈은 과학자답게(실제로 화학자) 섬세하고 면밀하다. 결코 치우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천착을 놓지 않는다. 그가 절멸의 수용소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생의 값진 소득이라고 여길 수 있는 힘도 인간성에 대한 나름의 연구,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 기인한다. 인간성의 연약함, 인간이 열망하는 자유, 그래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은 일련의 일들을 증언하며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혀만을 휘두른 이야기라면 오랜 감동을 줄 수 없을 테다. 그는 인간성의 위대함만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인간성의 허약함'은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낳을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흘려듣지 말아야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징후들은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잔인한 얼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 얼굴은 실체가 없다. 이미지만으로도 괴력을 발휘하는 집단적, 총체적 두려움이다. 독일군이나 독일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왜 표현되지 않았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작가는 얼굴 없는 대상에 대고 어떻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가 라고 답변했다. 증오하지만 표적의 대상으로는 막연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이 갖는 공포심의 본질이 아니던가.


<이것이 인간인가>가 문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작품 전체에 장치되어 있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이다. 작가는 수용소로 가는 길, 일 년 남짓의 수용소 생활과 퇴각하는 열흘간의 이야기까지 흘러오면서 내내 ‘지옥’을 연상하였음이다. 총 17장의 이야기 중 ‘오디세우스의 노래’ 에서는 단테가 집중적으로 인용된다. 나는 이 장에서 다른 어떤 생생한 증언이나 기록에서보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은 슬픔의 극치를 느꼈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과 인간임을 포기할 수 없어 감당해야 했을 자멸감이 절정에 이르러, 직설적 어조보다 울림이 깊고 강했다.


...... 단테는 어떤 사람인가. <신곡>은 무엇인가. <신곡>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신선하고 낯선 감정이 생겨난다. ‘지옥’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거기서 어떤 벌을 받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이고 베아트리체는 신학이다.(p171)


동료, 피콜로에게 귀와 머리를 열어 잘 들어보라며, 날 위해 이해해 달라며, 읊는 아래의 노래는 프리모 레비의 참담한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자에게 전한다.


-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德)과 지(知)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마치 나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 구절을 들은 것 같았다. 날카로운 트럼펫 소리,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피콜로가 다시 들려달라고 간청한다. 피콜로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그는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나를 위한 일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p174)


그는 ‘익사한 자’가 아니라 ‘구조된 자’였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작가 자신의 대답은 이 책의 제목이 반문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직한 답변으로 들린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 이라고 스스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가 입은 트라우마는 40여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끝내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두 군데 오기와 한 군데 띄어쓰기 오류는 옥의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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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밑에 있는 책 참고 하시면 도움이 되실 같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신영복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준식선생님의 “옥중서한”
서경석선생님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프레이야 2007-02-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좋은 책과 추천도서 감사드려요.^^
권해주신 책들 중 세권은 담아두겠습니다. 한권은 있는 것이라...
특히 이 책을 읽고나서, 주기율표, 를 읽어보고 싶더군요.

스파피필름 2007-02-0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인듯 싶네요.. 보관함으로 쏙~ ^^

프레이야 2007-02-07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파피필름님/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달팽이 2007-02-07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감동적인 글입니다.
처음 리뷰를 올릴 때 시간이 없어 빨리 읽었는데...
레비의 자살로 끝난 그의 삶이 왜 수용소에서 그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수호의지의 은혜를 더 받지 못했는지 안타깝습니다.
사실 인간 내면에 존재한 악의 본성인 루시퍼는 인류역사와 더불어 그 얼굴만 달리했을 뿐 늘 우리 곁에서 존재했는데 말이죠..

푸하 2007-02-08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저도 조만간 보려는 책인데 그 때를 위해 아껴서 리뷰를 읽어야 겠습니다.

오우아 2007-02-0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비극은 눈물겨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좋은 리뷰 잘읽었습니다.

sokdagi 2007-02-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가슴 적시는 리뷰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 수 있는지 부럽기만 하네요.^^
님이 설명해 주신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까 봅니다.

프레이야 2007-02-08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고맙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악설이 좀더 맞는 것 같지요? ^^
푸하님/ 전 어떤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사람의 리뷰를 보지 않는 편입니다.
님도 아마 그러시는 게 좋을 듯해요. 그러실 것 같지만요. 님의 리뷰 기대해도
되지요?
오우아님/ 반갑습니다. 극도로 억누르고 있는 분노가 슬픔으로 뭉쳐있더군요.
이런 일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레비는 그걸 내다보기라도 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sokdagi님/ 에고, 감사합니다. 다시 보면 다시 북받칠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2-15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서가님의 깊은 사유도 기대됩니다. 읽어보시길 권해드리고 싶어요.^^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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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으로 김훈을 처음 만났다. ‘칼의 노래’는 왠지 내키지 않아 읽어보지 않았고 ‘현의 노래’로 그의 소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개'를 읽었다. ‘강산무진’에는 읽고 싶었던 ‘화장’과 ‘언니의 폐경’이 실려 있어 우선 반가웠다. 그 외에도 여섯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는데,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정서는 허무성이다. 내가 느낀 허무(虛無)는 덧없음이나 무상함의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 혹은 마음속이 비어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의 허무성이다.


‘현의 노래’에서 천착한 시간의 허무성이 ‘강산무진’의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서술과 묘사는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관념성 짙어 몸에 와 닿지 않는 그의 생경한 표현들이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현의 노래’보다 여기 여덟 편의 단편들은 좀 더 삶에 가까이 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러 군데 공중을 떠다니는 표현들이 걸리지만, 작중 주인공들의 나이와 직업, 비슷비슷하니 비루하고 통속적인 삶들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징그럽도록 세세한 묘사가 더욱 그러하다.


‘강산무진’ 속의 이야기들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연령대에 있느냐에 따라 느낌은 무척 달라질 것이다. 작품 속 인물 주된 연령은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오십대 중후반이다. 그만큼의 시간을 아직 살아내지 못한 독자라면 삶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회의적인 것인가,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흔 고개를 넘는 중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작중 인물들의 서늘하리만치 담담한 태도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네 삶이란 행, 불행이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되어 있지만 그것이 빚어내는 약간의 틈 속에서 한 숨을 쉬고 세상으로 난 또다른 길을 보며, 흘려보내야 할 것들에 더 이상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체득한다. 울며불며 매달리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어느 날은 가슴 터지도록 기뻐하는 등의 격렬함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단지 진정한 것들의 거죽이었던 셈이다.


시간은 많은 걸 가르쳐준다고 하던가. '시간'은 한때 정을 나누었던 여인과 그녀의 아이를 사납금을 못 채우더라도 공항까지 자신의 택시로 배웅하게 하고(배웅), 뇌종양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죽은 아내를 화장하면서 시원(始原)의 여인, 그 아름다움의 육체를 꿈꾸게도 한다(화장). 등대불빛으로 막막한 바다공간에 시간이란 지표를 부여하고(항로표지), AD 4세기의 철제도구들을 부식시켜 구멍을 내고, 여인의 골반뼈에 기원화(花)라는 공허한 이름을 부여하기도 한다. 게다가 시간은 사람을 머물러있고 싶은 과거 어느 시점으로 퇴행하게 하고(고향의 그림자), 사랑도 청춘도 스미듯 사라지는 노을처럼 혹은  물을 가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흔적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언니의 폐경). 시간은 또한, 속세로 더욱 묻히라고 말하고(머나먼 속세), 암진단을 받은 아버지에게 유산만을 바라는 아들에게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가면서도 강산무진도의 말없는 풍경들처럼 그렇게 담겨서 흘러가라 말한다(강산무진).


시간은 소멸해가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속성을 지닌다. 그 속에서 명멸하는 별들처럼, 흘러가는 물결처럼,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우리네 삶. 그것은 구체적이고 세속적이다. 섣불리 희망을 강요하지 않고 생명의 찬가를 부르며 들뜨지도 않는다. 타고 가던 배가 난파했다고 바다를 탓하고만 있을 수 없듯이, 냉엄하지만 분노할 수만은 없고 죽음을 곁에서 보고도 살기 위해 한 손으로는 밥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게 삶이다. 모든 건 예정된 것처럼 그다지 슬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견디고,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누구의 것이든 진정어린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살아내야 '허무'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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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7-01-1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서늘하리만치 담담한 태도. 김훈선생님께 받는 제시선을 정확히 짚어주신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배웅은 처음읽을때는 그냥 무심코 읽었는데. 왜 그부분.
사장님 어떻게 지내신지요.라고 묻는데 그래, 겨우 견뎌..라고 말할때..
눈길을 뗄수가 없었어요 맞어 생은 겨우 견디는것이구나.
빼도 박도 못해서 무작정 살아가는거... 아직 생을 절반도 못살아 본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가요.^^
(에궁.. 난 언제쯤 이런 내공이 나오는걸까 ㅠㅠ)

뽀송이 2007-01-1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리뷰를 읽고 있으니까...
저도 한번 읽어 보고 싶어요~^^
김훈의 <강산무진>이라...

프레이야 2007-01-1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님 덕분에 좋은 책 읽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정말 한참 더,, 저도 '시간' 이란 걸 배워나가야 하는 걸요.
작품 중 <뼈>에 나오는 그 패륜엽기행각의 오문수라는 작자, 전 그 인간에 그리
연민이 느껴지네요^^

뽀송이님, 뽀송뽀송 부르면 기분이 뽀송해지네요^^
네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기도 해요.
그속의 삶이 참 폐경기(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같은데,
어떻게 느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비로그인 2007-01-18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 김훈팬이 있어서 언젠가 꼭 읽어야지 했는데..이분 문장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프레이야 2007-01-1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님/ 이분 문장에 대해선 개성이니 뭐라고 말 하지 못하겠지만...
좋은 하루 보내세요^^

푸하 2007-01-2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드는 생각이 부유하는 문장을 써보고 싶네요. 허무를 드러내는 그런 문장들을...^^;

프레이야 2007-01-2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김훈의 문장이 그런 문장이지요.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개성이라 보여요.

2007-01-23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1-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선물 받았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어요. ^^

프레이야 2007-01-26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님/ 서사성은 역시 부족하지만 술술 읽힐 겁니다.
님의 멋진 리뷰 기대할게요^^

2007-03-28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까칠한’이라는 낱말이 유행어가 된 이유를 더듬어보았다. 시작은 연예인의 입에서 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 낱말에 공감을 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내면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든지, 타인들의 얄미운 속내를 꼭 집어내어 주는 말로 여겨서인가 싶다. 사람을 대상으로 ‘까칠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때면 내면의 결이 부드럽지 못하고 꼬여있어서 모든 대상을 사팔뜨기의 시선으로 보며 호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논쟁을 즐기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온화한 인상을 주지만 때로는 숨기고 있던 까칠한 일면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변인과 분쟁을 일삼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까칠한 ‘무엇’을 대패질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과레스키 가족의 까칠함은 보다 냉소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이다. 게다가 따뜻한 인간애를 깔고 있으니 적대적 감정이 일지 않는다. 원어(corrierino)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번역제목으로서는 반어적인 효과까지 노려 성공적인 것 같다. 이 책이 나온 때가 50년대이며 제 2차 세계대전 후 산재한 혼란을 겪었던 작가의 고국을 생각하면, 특수한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까칠한 가족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세기가 흘러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 삶의 본질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작가가 내세운 이야기의 매개물이 ‘가족’이라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데에도 있다.


하지만 과레스키를 비롯한 네 명의 평범한 가족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그리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과분한 일들은 알고 보면 사소하고, 따져보면 그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너무 사소하고 단순한 종류로 치부되어 지나치기 십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분명 남다르다. 민감하고 독특한 촉각을 지닌 듯, 그들이 일상의 사건들을 프리즘으로 하여 인식하는 부부, 자녀, 세대, 종교, 교육, 복지, 국가, 이념, 전쟁, 그리고 일상의 권태로움과 희망을 포함한 삶과 죽음의 보편적 밑그림은 섬세함과 예리함을 겸비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상황으로 바로 진입하여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고밀도 대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속속들이 묻어놓은 작가의 농익은 사유와 그것을 흥미롭게 표현해내는 대화술이 위트 있다. 은근슬쩍 치고 나오면서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신랄하고 때로는 관대하기도 하여, 그들이 톡톡 튀기며 나누는 까칠한 대화에 빨려든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과레스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른 가족들의 내면세계다. ‘에드가 앨런 포’의 꿈을 꾸며 상속놀이를 즐기는 아내 마르게리타, 아버지의 이마에 빨간 딱지를 붙이며(과레스키의 은밀하다할 수 있는 정치적 색깔로 보인다) 소유물로 낙인찍는 어린 딸 파시오나리아, 성 베드로 광장을 방문해서도 최근 만화 ‘도널드 덕’ 시리즈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아버지의 교육적 욕구는 무시하고 교과서에서 본 사진에만 충실하려는 아들 알베르티노. 각각의 인물 설정이 모두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50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시대착오적이지 않으니 묘하다.


이들 중에서도 파시오나리아는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과레스키의 딸이 이런 성향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녀의 까칠함은 전혀 미워할 수 없는 발칙함이다. 어느 날, 유산을 선불로 받겠다고, 개인적 파시오나리아가 아니라 파시오나리아와 알베르티노의 '대표' 자격으로 과레스키 앞에 등장한 파시오나리아와 아버지와의 승부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사람에게 선불을 주지 않아.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불행에 처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겠어.” 라고 논리적 반박을 하는 과레스키 앞에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맹랑한 아가씨 파시오나리아는 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은 두 미장이 보조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면...” 과레스키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 나는 그들을 도와주었고,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칙은 유지되었다.(p316) - 이쯤 되면 누구의 승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부녀간의 설전을 통해 실업자 문제를 진지하게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터지는 반전과 예상치 못하는 대화의 흐름만으로도 유쾌한 책이다.


마지막 에피소드, <특급열차 136호>는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까칠한 가족들 틈에서 조금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변주는 <춤추는 두 사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레스키 자신을 빗대어 등장시킨 특급열차 136호의 기관사는 권태로운 일상을 떠밀려 살고 있으면서도 탈선을 꿈꾸는, 그러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자아와 그에 대한 집착, 자가당착의 갈등으로 심각해 하는 모습은 <치촐라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에피소드 전체가 하나의 은유로 쓰이는데 마지막 글귀는 그 화강암 덩어리 같은 치촐라타(돼지고기 부스러기를 굳혀서 만든 이탈리아 음식의 일종)를 깨부수는 영웅을 떠올리며 당당하게 맺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 특유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글 쓰는 사람에게만 있을 텐가.

 

-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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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7-01-03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쓰려고 앉았는데요 와 님 정말 잘쓰셨네요. 확 쓰지말까 싶지만 그래도 써야겠죠? 정공법은 안되겠고...귀염성에 호소하는 리뷰를...^^

프레이야 2007-01-0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 셋째날 아침이에요. 여전히 복 많이 받으시는 한 해 되시기 바래요. 만두님 벤트엔 참가할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ㅜㅜ(뜬금없이...)
님의 리뷰는 비교될 수 없는 경지에요^^
과레스키 못지않은 웃음을 줄 님의 리뷰, 기대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