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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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엄마가 된 건 스물여덟 살 때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 소꿉놀이 시절의 엄마역할 때부터였을까. 그때부터였다면 난 그때 엄마역할에 만족했었나? 분명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역할이나 굵은 목소리를 내는 아빠 역할을 더 하고 싶어했다. 몇 명이 어울려 놀 땐 역할을 바꾸기도 했지만, 혼자 소꿉놀이를 할 때면 자연스레 나는 엄마가 되어있었다. 그리 바라지도 않았던 역할인데도.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이기를 강요당한, 엄마가 필요했던, 영원히 딸이고 싶었던, 딸의 이야기다. 작품 속에는 박소녀를 비롯해 두 딸이 나온다. 그들 세 딸 안에 ‘엄마’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숨거나 드러난다. ‘엄마’들은 복합적으로 내 안에 살고 있는 세 가지 얼굴이기도 하다. 거부하고도 싶고 애틋한 연민이 일기도 하고 굳세게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책장을 다 덮고 나니 모순으로 상충하는 내안의 엄마, 를 부탁하고 싶다는 자조의 말이 슬몃 나오기도 했다.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진짜 이야기는 오래전 엄마가 어린 아이였을 적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스토리는 도시적인 생활을 해온 독자가 보기에는 현실감이 없을 정도다.(그럼에도 어디서나 본 듯한 소눈을 가진 여인으로 누구나에게 기억됨으로 보편성을 얻는다)그만큼 박소녀가 넘어온 생의 굴곡이 험난하고 그녀 삶은 가시울타리 안의 것처럼 보인다. 빠져나가려면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어서 차라리 돌아서 앉아 울음을 삼키는 게 나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로서 살아야하는 가시울타리 안의 삶을 슬픔과 절망만으로 덧칠하지 않았다. 독특하게도 화자를 달리하며 육성으로 들려주는 듯한 박소녀의 징글징글한 삶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환희와 자부심이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엄마'에게서 희망을 읽으라면 그런 곳에서 찾고 싶다.

 그녀의 삶은 두터운 한 권의 점자책이다. 점자도서관에서 점자책을 앞에 두고 느꼈던 일로 소설가 큰딸이 엄마를 알아가는,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엄마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대로 보고 역할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발목을 붙잡고 있진 않았는지. 엄마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한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보고 만진다 해도 해독이 되지 않는 점자책 앞에서 까막눈으로 살아온 딸의 회한이 낡은 필름처럼 이어진다. 글을 못 배운 인간 박소녀가 큰딸이 쓴 소설이 자랑스러워 그걸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어서라도 읽은 것,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불우아동에게 나눈 것, 생의 고비마다 정신적인 힘이 되어준 비밀 같은 사람에 대한 소중한 추억. 그런 것들을 다 열거하지 않더라도 이름처럼 ‘소녀’의 꿈을 안고 살았던 엄마도 외국의 낯선 풍광에 빠져보고 싶고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장미묵주를 그래서 상징적으로 갖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밝은 면을 보는 쪽은 딸보다 오히려 아들이었다. 엄마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삶을 그렇게 슬프게만 생각하는 건 우리의 죄의식이 갈구하는 하나의 자위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딸은 좀 다르다. 특히 작은딸은 아이를 셋이나 두고 전문직까지 있으면서 안팎으로 힘든 생활을 꾸려가면서 생각한다. ‘과연 엄마가 부엌에 들어가는 걸 진짜 좋아했을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어.’ 사회적 역할은 물론이고 아들과 딸이 당면한 소소한 문제들이 다르니 딸이 보는 엄마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애잔하다. 엄마라는 자리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덕목이 희생이나 인내, 자비 같은 것이라면 박소녀는 아주 적격의 엄마이지만, 그녀도 딸에게 소리치고 투정할 때는 엄마가 아닌 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성인이 된 딸은 엄마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큰딸에게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큰딸은 아직 진짜 엄마이진 않지만 늘 엄마가 안타까운 그래서 어쩌면 엄마 되기를 미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머나먼 땅, 피에타상 앞에서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하며 속죄라도 하려는 것일까. 이제는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진 엄마에 대한, 동시에 내재된 자신의 '엄마'에 대한 좀 더 홀가분한 주문 같기도 하다. 여동생은 엄마를 포기하지 말고 찾아달라고 언니에게 부탁했지만 언니는 오히려 엄마를 놓아주고 싶어한다. 엄마에게 무기한의 자유여행의 시간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으로 읽힌다.

 두 딸들과 아들에게 엄마 박소녀는 실종자로 남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몸을 숨긴 건 아닌지, 상상해보면 슬근슬근 웃음바람이 난다. 투명인간처럼 혹은 전지자처럼 보고 듣고 서술하며 자신의 모든 걸 토로하는 마지막 장에서 그녀는 오래전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 온정에 대한 갈망,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염없이 풀어낸다.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그 어조가 아련한 슬픔 위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하다. 그녀에게도 그녀처럼 품 넓은 ‘엄마’가 필요했음을, 뒤늦은 후회를 하는 남편과 아들은 딸보다 더디 아는 것 같다. 수많은 엄마와 그 속의 '엄마'는 오늘 하루도 잘 지내셨는지, '엄마'를 잃어버린 우리들 가슴에 '엄마'를 회복하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p262)

 작은딸이 큰딸인 언니에게 눈물로 쓴 편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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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8-12-3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저도 이 책을 눈물 찔끔거리며 읽었답니다.
친정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지라
작가 엄마의 이야기에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프레이야 2009-01-03 19:23   좋아요 0 | URL
신파조라는 말도 있지만 공통분모 같은 슬픔의 정서가 묻어나요.
그렇군요, 소나무집님.^^

순오기 2008-12-31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전에 읽었지만 리뷰를 쓸 수 없었던 책.
올해가 가기 전에 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
그댁의 엄마는 안녕하시겠죠.

프레이야 2009-01-03 19:24   좋아요 0 | URL
엄마는 안녕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요.
엄마로서 강건하기를..

BRINY 2008-12-3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이 왜 이 책 리뷰를 안쓰실까 궁금했더랬습니다.

프레이야 2009-01-03 19:24   좋아요 0 | URL
브리니님, 그랬어요? ㅎㅎ
 
[식탁 위의 명상] 서평단 알림
식탁 위의 명상 - 내 안의 1%를 바꾼다
대안 지음 / 오래된미래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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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진부하게 들리는 이 문장은 중학교 교실 뒤 게시판에 걸려있었다. 99%의 노력이 중요할까 1%의 영감이 중요할까. 99도에서는 물이 끓지 못하고 나머지 1이 있어 100도에 이르러야 물이 끓을 수 있듯이, 1%의 소중함을 뒤집어 보이는 말이다. 에디슨의 천재적 자부심이 담긴, 이 오만하지만 결정적인 말이 좋다. 그것은 1%의 무엇이 없으면 우리가 지향하는 점에 이르기엔 근본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식탁 위의 명상>의 부제는 ‘내안의 1%를 바꾼다’이다. 먹을거리의 양적 풍요가 빚은 재앙을 우리 앞에 두고 사는 요즘 대안스님은 먹을거리 앞에서 명상을 하라고 나직이 권한다. 하나의 음식이 내게 오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넓게 읽으라한다. 그것은 공감적인 명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진정한 식도락가가 되라 한다. 혀의 지배자가 되어 “맛있다, 부드럽다”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릇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지각을 하라고 말한다. - 새로운 인류는 그릇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 요리를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어떻게 운반되어 왔는가, 음식의 산지는 어떠한 상황인가, 이런 것을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는 세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71쪽)

 주변에 아토피를 심하게 앓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저자는 60년대 먹을거리의 풍요가 가져온 결과라고 말한다. 특히 통칭하여 흰 설탕의 지나친 섭취를 드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음식섭취에 걸림돌이 되는 일례이다. ‘자연스러운 모든 것은 항상 만족을 준다(71쪽)’는 오쇼 라즈니쉬의 인용문처럼 우리의 혀를 유혹하는 모든 종류의 음식은 몸이 원해서라기보다는 혀가 원해서, 즉 마음이 미혹해진 결과로 본다. -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살해한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60쪽)

 저자는 산야초 건강법을 통해 몸과 마음을 수행하여 우주의 섭리를 인생에서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행공간을 운영하며 자기 수정을 원하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안정과 회복의 기쁨을 주고 있다고 한다. (금수암 홈페이지 www.guemsuam.or.kr) 나는 사찰음식에 크게 관심이 있다거나 명상음식이란 이름에 낯설어하지 않을 정도로 수양된 사람이 아니다. 이 책은 결국 절밥의 느림과 여유의 철학을 말하지만 굳이 절밥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네 식탁 전반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소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부분까지 그런 미덕으로 읽힌다. 내 마음을 읽고 정갈히 할 수 있기를 돕는 글귀들이 가득하다.

 1부 ‘음식이 맛있는 명상’의 첫 장 ‘자연과 오행밥상’은 이런 독자를 위해 오행원리를 음식과 사람과 우주의 원리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오행의 기운이 고루 든 음식을 먹어야 몸도 생각도 성한 기운과 균형 잡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다섯가지 색깔이 든 소박한 우리네 밥상과 잔치국수 한 그릇에도 담겨있는 기운이다. 불교용어들이 많이 나와 좀 어렵게 들릴 수 있는 대목이 좀 있지만 새겨들어둘 구절들이 많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닿은 게 있다. ‘먹는 것을 골고루 먹지 않으면 분별심만 기르게 된다. 좋은 건 너무 좋아하고 싫은 건 너무 싫어하는 습관에 익숙해진다. 오행을 갖추어 밥상을 차려야 평등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28쪽) 평등심! 분별심은 충분한 미덕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평등심을 앞질러 갈 때 초래되는 죄악은 적지 않다. 오행밥상이란 오행의 색깔을 다 함유하고 있는 식재료로 골고루 차린 건강한 밥상을 말하며 식감을 돋우기 위한 ‘컬러푸드’와는 구별된다. 즉 내몸의 기운을 평등하게 키우는 밥상이 오행밥상이다.

 2부에서는 구체적인 자연의 식재료와 소박한 음식을 소개하고 이들을 소울푸드라고 이름하며 집에서 만드는 법도 간단히 제시한다. 어려운 레시피의 요리는 아니지만 나같이 부엌에서 서성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게으른 주부는 손이 많이 가야할 것만 같아 머뭇거려진다. 저자는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은 제 손으로 만들어 먹어야 좋은 기운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식, 절식, 단식으로 마음의 살도 덜어내라고 한다. 또한 계절별로 좋은 자연의 음식재료를 상세히 소개하여 우리몸이 상생의 기운으로 조화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음식으로 낫지 못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말처럼 자연의 먹을거리는 모두 우리 몸과 기운을 같이 할 때 약이 된다. 많은 가축을 살해한 끝에 생긴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을 끊는 길은 우리의 태도, 음식에 대한 총체적인 태도에 있다 하겠다. 1%의 느린 개혁이 나로부터 일어나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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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식사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7-04 10:09 
    * 혜경님의 2008년 7월 3일자 <식탁위에 명상> 리뷰에서 발췌 '부엌에서 서성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게으른 주부는 손이 많이 가야할 것만 같아 머뭇거려진다.'
 
 
순오기 2008-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안녕?
이책 서평단 신청했다 미역국 먹었어요~ 아흐~ 님 리뷰 덕에 궁금증을 풀고 가요.]
그런데 3문단에 아토피를 60년대 먹을거리의 풍요로움이 가져온 결과라고 했는데...60년대 먹을거리의 풍요로움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돼요. 60년대가 아니고 80년대나 90년대가 아닌가요?

프레이야 2008-07-04 08:17   좋아요 0 | URL
그게요.. 질보다 양적인 풍요를 아이러니하게 말한 걸로 들렸어요.
우리세대가 그렇잖아요. 잘 먹었죠. 뭐든 몸에 좋다 나쁘다 가리지
않구요. 60년대면 저 어릴 적인데요, 70년대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웰빙이니 뭐니 몸에 좋은 것 따지게 된 건 그 이후지요.
그 세대가 자라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에게 병이 나타난 거죠.
전에 이 부분은 부산 번개에서 드팀전님도 잠시 꺼냈던 기억이 나요.
열정 넘치는 오기 언니, 잘 지내시죠? ^^ 늘 응원합니다.
일본 여행도 잘 다녀오세요. 후기 기대할게요^^

turnleft 2008-07-04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덥썩!! 오랜만의 혜경님 리뷰군요!!

아 정말, 요즘 같은 때는 가족들 먹거리 챙기시는 분들 고민이 정말 많을 것 같아요. 먹고 사는 문제로 이렇게 고민을 해야 한다니, 시간이 지나도 세상살이는 별로 발전하는 것 같지 않단 말이죠..

영화 '월리'에 보면 기계에 모든 것을 의존한 인간의 비참한(?) 미래가 나오거든요. 단지 먹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물'이 살아가는 패턴의 변화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콘크리트 벽 속에 갖혀서 온실 속 화초처럼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결국 인간은 병약해질 수 밖에 없겠죠. 먹는 것 포함,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하나 고민이 많은 요즘이랍니다.(총각이 왜 이런 고민을.. -_-)

프레이야 2008-07-05 17:11   좋아요 0 | URL
턴님, 반가워요.^^
월리,는 못 봤어요. 먹을거리를 통해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
근본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요즘이네요. 총각이 그런 고민을 하는 게
당연하죠. 요즘같으면 애 안 낳고 싶단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 같을
지경이에요.

마립간 2008-07-04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내용을 저의 서재에 옮깁니다.

프레이야 2008-07-05 17:11   좋아요 0 | URL
^^ 마립간님, 그 구절이 가장 와닿던가요.
ㅎㅎ 아무튼 감사합니다.

소나무집 2008-07-0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꼼꼼한 내용 설명...
저는 부처님 말씀이 많아서 1부에서는 책이 잘 안 읽히던 걸요.

프레이야 2008-07-05 17:12   좋아요 0 | URL
님의 리뷰도 잘 읽었어요. 1부에 부처님 말씀이 좀 많긴 하더군요.
실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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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1932년 황해도 신막에서 지주 집안(부끄러운 기억으로 담고 말은 잘 하지 않지만)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0년 6월, 해주사범고등학교 재학 중 졸업을 일주일 쯤 앞두고(그때 북한은 6월 말에 졸업식이 있었다고 함) 한국전쟁의 발발로 생의 방향이 뒤틀렸다. 인민군으로 끌려가기 싫어 2층 방 창문으로 뛰어내려 그길로 산으로 도피했다. 그것이 가족과의 생이별이자 영이별이 되었다. 무작정 남으로 향하여 피난길에 오른 그는 발바닥 껍질이 두어 번 훌러덩 벗겨질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동상은 물론이다. 지금도 그의 발은 유난히 두툼하고 거칠다. 문구칼로 자주 발바닥을 긁어낸다.

 

 

 낙동강변에 도착한 그는 주머니에 달랑 들어있던 파커 만년필을 팔아(북한돈은 쓸모가 없었으므로) 단팥죽 한 그릇을 사 먹고 남은 돈을 밑천으로 구포강둑에서 고구마도 팔고 대파도 팔았다. 그는 자수성가하여야 했기에 이산의 슬픔을 곱씹을 여력이 없었다. 일 년 365일 휴무일 한 번 없이 가게일을 하고 여흥이나 관광 같은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오로지 성실과 노력으로 살아왔고 (1931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서울대를 중단한 박완서 작가와는 달리) 문학상을 비롯해 상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의 취향은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는 오늘 일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다. 그저께 일요일 저녁, 맏딸이 친정식구들을 모두 초대해 아버지 생일상을 차렸다. “캬! 나이 참 어지간히 많이 먹었다. 그치?” 허허 웃는 홍조 띤 얼굴이 육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외출할 땐 선크림을 꼭 바르고 저녁엔 알로에 영양크림을 챙겨 바르는 등 피부관리를 철저히 하는 덕인지. 그의 유일한 오락거리로 기분을 띄워 드리자고 노래방으로 모두 갔다.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섭섭하셨을 게 뻔하다.


 

 그의 많은 이름 중 하나는 ‘나의 아버지’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노래방 가서 흥청망청 노래 부르고, 몰려다니며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따먹지 못하는 포도를 보고 분명 시고 맛없을 거라고 냉소하며 속으론 버럭거렸던 여우와 비슷하였다고 할까. 아버지가 노래방을 좋아하게 된 건 오래도록 생업으로 종사했던 가게를 그만둔 후 언제인가부터였다. 소프라노 음색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음치였다. 하지만 그저께 우리는 모두 놀라고 말았다. 음치 탈출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열 곡도 훨씬 넘게 부른 노래 모두 한 번도 책(!)을 보지 않고 손수 번호를 척척 눌렀던 아버지의 반짝이는 기억력 때문이었다. 얼마나 자주 가셨으면?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날도 ‘2348’을 바로 기억칩에 저장하시는 걸 보고 ‘무명의 노년 가수’에 탄복했다. 그건 좋은 기억력의 문제라기보다 의미화의 문제다. 뇌는 내게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을 기억하고 저장한다. 예전에 사전 책장을 뜯어먹듯이 영어단어를 달달 외웠다시던 아버지의 암기력은 인정한다고 해도, 이런 아버지는 분명 아이러니다.

 삶은 아이러니하다는 말은 흔하지만 살아갈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이러니하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모순덩어리들이 모순덩어리 같은 삶을 요리조리 굴리며 놀 줄 아는 나이가 노년의 여유랄까. 아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는 당장 죽을 듯이 눈물이 글썽해서 상심해하던 늙은 아버지에게 소박한 식사 한 끼 같이 하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여인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얼마나 짜릿하고 멋진가.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얼마 전 나는 남편으로부터 넌지시 그와 관련한 말을 듣고 아버지가 품고 사시는 젊음의 샘을 알아버린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술도 안 하고 별다른 취미도 없고 사회적으로 이뤄놓은 것도 없는, 뒤늦게 데뷔한 가난한 무명가수(!)가 무슨 낙이 있겠어.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어야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래야 살지. 그렇게 사는 거지.

 팔순을 앞둔 박완서의 최근 소설집을 읽으며 노을빛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사로운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애도 여느 누구의 생만큼이나 대하소설 감이지 않은가. 청소년문학은 청소년을 독자로 삼는 문학이라면 노년문학은 노년을 독자로 삼아야하지만 이 소설에 노년문학이라는 이름을 단다면 ‘박완서’라는 건재한 노년작가가 쓴 작품이란 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 소설집은 노년보다 오히려 청장년의 독자가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삶에 대한 이보다 더 예리한 통찰과 유쾌한 반어가 어디 있을까. 한평생 인간에 대한 몰이해와 허풍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틈에서, 등장인물들은 자기 생을 열렬히 사랑하며 폭발적인 젊음을 과시한다. 젊음이란 말이 적어도 ‘생의 열정과 환희를 놓치지 않는 영민함'에 있다면.

 작가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는 글이 독자를 위로하면 좋겠다는 말은 나에게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한 가지 더 있다.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생을 안아주는 법’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마음속에 영원한 그리움의 섬 하나 앉혀두기<그리움을 위하여>, 젊은 날의 외설스러운 순결주의 따윈 비웃어주기<그 남자네 집>, 위선도 용기도 자신 없지만 생의 소박하고도 느글느글한 것들을 짐승 같은 식욕으로 먹어치우며 순간순간 엑스터시 맛보기<마흔아홉 살>,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아주고 온몸의 갈라진 틈새에 고향냄새(광범위한 모성) 스며들게 하기<후남아, 밥 먹어라>, 대충주의나 책임회피성 두루뭉수리에서 벗어나 거저는 사절하고 책임감 갖기<거저나 마찬가지>, 알아듣기보다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운 새로운 사실들 앞에서 마음의 촛불 꺼지지 않게 하기 그리고 (비아냥거림 섞인 말이지만) 서로 불빛을 확인하는 거리에 사는 걸로 관계맺기에 만족하기<촛불 밝힌 식탁>, 생이 내리는 통증마저 내 존재감을 위한 것이라 여기고 오롯이 ‘나’로서 자신을 사랑하기<대범한 밥상>, 치욕을 견디는 더 큰 사랑으로 삶을 자유하기, ‘죽음’을 던져서 갱생하기<친절한 복희씨>, 그럼에도 낙천성을 잃지 않고 남이 내게 축복이 되듯 남에게 나도 축복이 되기<그래도 해피엔드>.

 

 

 김점선 화가가 그린 표지의 선물보따리를 풀면 소박해 뵈는 이야기 속에서 전개되는 의외성과 놀라운 반전,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 속도감 있게 내달린다. 전체적으로 한 문단의 길이가 꽤 긴 편이라 호흡을 길게 하여 죽죽 타고 읽어 내려가는 맛이 있다.

 이 소설집의 재미는 여기서만이 아니다. 청년 같은 노년의 그가 걸쭉한 입담으로 실컷 갖고 요리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 병폐와 사람들의 위선적인 시선을 꼬집는다. 황혼녘에 선 노인의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한 무지, 방만한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풍경, 여자들(고부 혹은 친구) 간의 이질감과 반목을 낳는 가부장적 사회의 잔재, 입양천국, 이기적 핵가족화, 노인의 성과 복지, 수치스러운 거지근성과 만연한 학벌주의. 그리고 말 한 마디의 축복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무례한 인간들의 악한 본성에 한 방 먹인다. 점잖게 한 방 맞으면 오히려 시원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박완서 작가와는 1년 차이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나의 아버지, 그리고 <친절한 복희씨>, 당신들이 있어서 나도 건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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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8-01-15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궁금했어요^^

비로그인 2008-01-1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부지.. 음.

멋진 리뷰입니다. 혜경님
추천!!! 하하


순오기 2008-01-16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감동이에요! 꾹~~~~~
이 책을 사기는 두권이나 샀는데, 나보다 세살 위 언니 두분(친언니와, 이웃 친정언니 같은 언니)의 생일 선물로 드려 아직 못 읽었어요.

프레이야 2008-01-16 21:36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읽어보심 무지하게 마음에 드실거에요.
전 박완서가 부러워요^^

향기 2008-01-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혜경님 ^ ^
오랜만에 들렀다 가요 ,
주말에 시험 끝나고 꼭 읽어봐야겠어용 ~

프레이야 2008-01-16 21:37   좋아요 0 | URL
향기 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주말에 시험 잘 보세요!! 서재에 올만에 가보니 신포도와 여우
이야기가 있더군요.^^

네꼬 2008-01-1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어야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래야 살지. 그렇게 사는 거지.


줄줄이 어쩌면 이렇게 정갈한 글인지.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혜경님글에, "오늘도 감동 먹고 갑니다" 2. 혜경님, 고맙습니다. 추천을 두 번 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08-01-16 21:38   좋아요 0 | URL
네꼬냥, 어여 오세요.^^ 히죽 웃고 있는 네꼬 얼굴 보면 얼마나
즐거운지요. 고맙습니다.^^
 
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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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삼관 매혈기’를 쓴 위화를 만났던 기억이 무척 인상적이었던지 저자는 ‘매혈기’라는 문구를 인용했다. 위화의 대답은 그의 진지함을 희석시키는 것이었지만 책은 다소 비장감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요즘 자주 비유되는 낱말에 ‘연애’라는 게 있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일 테다. 조금 식상하게도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영화를 만나는 일을 그것에 비유하고 있다.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이성보다 감정이 우선할 것 같은 ‘연애’에 지성이 우선할 것 같은 평론이 잘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읽어보면 그는 피를 팔고 다시 피를 수혈 받듯이 영화평론을 쓴다는 대목에서 지독한 ‘연애’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김영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나는 전혀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었다. 그의 글을 읽어본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평론가 매혈기,라는 제목으로 오른 리뷰에 호감이 가서 읽게 된 책이다. 게다가 내가 조금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의 글이라고 하니 군침이 돌았다.

 그가 영화와 연애를 한 시기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3부로 나뉜 내용 중 첫 번째 장은 주로 그의 연애사라고 보면 된다. 간명하고 힘찬 헤밍웨이의 문장을 좋아한다고 썼듯이 그의 글도 꽤 간결하고 담담한 편이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 제목은 모두 206편 정도가 된다. 내가 보았던 영화도 있지만 못 본 영화들이 물론 훨씬 많다. 그 중 관심이 가는 것들은 챙겨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넘기며 하나씩 메모를 해 보았는데 무협영화에서부터 우리나라 영화까지 무작위로 오고가며 영화와 감독,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간택을 받은 감독들이다. 그의 영화 애정사를 보면 역시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의 깊이와 집요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2부에서는 특정 감독과의 조우를 통해 느낀 바를 술회하고 그 감독의 개성적인 부분을 사랑하게 된 내력을 읽을 수 있다. 3부에서는 영화 연애사에 깊이와 통찰을 더해준 위대한 국내/국외 영화감독들에 대한 이야기와 유명한 영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소제목으로 그 감독들의 이름을 적어두었더라면 후일에 다시 찾아보기에 편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는 객관적인 평론이거나 직관적인 감성으로 종횡무애 하면서, 일면 재미있는 비화들도 엿들을 수 있다. 관심이 가는 영화들이 많았다.

 글은 술술 읽힌다. 어느 감독과 만났던 인상적인 기억들도 들을 수 있고 어느 영화에 얽힌 자신만의 기억과 생각의 변화들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내게 의미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것은 인간(영화 속 인물이거나 감독이거나)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게 한다는 것으로 귀결될 듯하다. 비현실적으로 어두컴컴한 극장을 나오는 순간 과연 인간은 나아지고 있는가. 욕망이 꿈틀대는 그 작은 의자 공간 속에 푹 파묻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은 어느 한 순간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적어도 인간적인 그 무엇에 기준 한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책에서 읽게 된 가장 인상 깊은 감독으로 허우샤오시엔과 아네스 바르다를 꼽고 싶다. 허우샤오시엔은 '영화가 생활을 카피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자신의 영화가 대만에서 인기가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훌륭하다, 관객의 입맛에 혹은 독자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아네스 바르다는 “나이를 먹으면서 어떤 가벼움이 온다. 누군가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거나 비평받는 걸 두려워하는 감정이 없어진다. 내가 아무리 초연하려 해도 노년은 이미 내게 다가왔다.”라고 말하며 “좋아, 이제부터 이삭 줍기를 하는 사람들을 찍으러 가자. 나의 무거움, 사회적 책무를 갖고 영화를 만드는 나의 무거움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삶과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하는 나의 가벼움의 산물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늙은 손을 직접 비추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찍은 할머니 예술가다. 평론가 김영진이 존경해마지 않는.

 평론은 예술 작품을 텍스트로 한다. 지상의 어느 평론가도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피를 뽑아 쓴다기보다, 작품의 피를 빨아먹고 또 새롭거나 조금은 다른 형의 피를 불어넣기도 하는 평론이란 작업에 얽힌, 그만큼 꼬장꼬장하면서도 겸손한 영화 평론가의 밀담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밀하지 않은 게 되어버렸지만 공유된 직관과 경험이 읽는 맛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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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0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 사 놓기만 하고 손 안 댔어요~~ 그래서 2008년은 일단 지름신을 묶어 두고 있어요. 님의 리뷰 읽으니 빨리 봐야할 것 같지만, 워낙 밀린게 많아서 언제 차례가 올지ㅠ
우리 같은 G조라서 너무 반가워요! ㅎㅎ 사실은 경쟁관계인데도 말이죠! ^^

프레이야 2008-01-04 13:4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도 벌써 지름신 강림하사 어제 한 박스 받았어요.
책 두권에 음반 둘, 채플린 전집 디비디로다가..
있는 거나 잘 읽고 봐도 될텐데 말에요.
우리 조 아자아자 잘 해보자구요^^ 님이랑 한 조라서 헤벌쭉이에요ㅎㅎ
 
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닐 게이먼 원작의 영화 ‘스타더스트’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베오울프’를 영화화 하려고 닐 게이먼이 시나리오를 썼고 다시 케이틀린 키어넌이라는 여류작가가 판타지소설로 쓴 작품이다. 영화는 보지 않았다. 상상력을 한계 지을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읽고 보니 내 생각이 맞았을 가능성이 크지 싶다.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을 따라 때론 은유적으로, 불처럼 명확하게 그려지는 장면들, 수사적인 풍경의 묘사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문장의 아름다움도 즐길만 하다.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검은 숲을 관통하는 것 같기도 한, 끔찍하고도 웅장한 상상의 연대기다.

 

 5-6세기 북유럽 신화이자 영문학의 고전 ‘베오울프’는 읽어보지 않았다. 이 한 편의 판타지소설로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단지 이 소설만으로 재해석되었을 부분들을 음미하는 맛도 괜찮다. 베오울프 라는 영웅이 한 인간으로서 겪는 고민과 갈등 그리고 인간적으로 사라져가는 죽음의 시간을 맞이하는 장면들이 웅대한 서사와 함께 감동적이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구도를 축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의 맥을 이으면서도 선과 악이 절대적으로 양분되지는 않는 섬세함을 보인다. 감추거나 드러내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 않는 상황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빚어지는 새 세상의 탄생은 인간의 부활을 너머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도 같다. 이 책 ‘베오울프’는 다분히 이교도적이며 동시에 기독교적이고, 또한 인간적이다.


 초반에 영웅 베오울프는 기도가 아니라 영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도도 해롭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운페르드에게 그는 '해롭지 않은 건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못 박는다. 오딘이나 로마인들의 예수 그리스도는 죄없는 백성들이 괴물에게 잡혀갈 때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분노한다. 베오울프는 오딘도 새로운 신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영웅심만 믿는 ‘인간’이다. 자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노래되어진 영웅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건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인간, 베오울프는 아름다운 마력을 지닌 물의 여인(이 책에서는 비중있는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이다)과 결탁한다.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녀와 합일하여 ‘용’을 잉태하게 한다. 흐로드가르 왕이 그렌델을 낳았듯이 인간의 죄악은 거듭된다. 용은 베오울프 자신이 만든 거대한 욕망이고 분신이다. 지독한 악마, 그렌델을 물리치고 더욱 악마적인 용을 태어나게 한 그는 30년 동안 누린 영예와 부와 명성이 자신의 영혼을 매춘한 대가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사이에, 이교도의 하나였던 기독교는 오딘의 제단을 잠식하고 드디어 새로운 세상, 라그나뢰크(신들의 운명, 우주 대부분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가 선포되었다. 베오울프가 왕비에게 하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정도로 그의 실재적인 힘이 상실되어 있다.

“...... 그가 이미 내 왕국의 절반 이상을 죄와 구원과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따위 말로 충분히 속였다고 생각하오. 안 되오. 나는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만약 이 삶 다음에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오딘의 궁전에 있는 내 자리를 명예롭고 만족스럽게 차지할 것이오.......” (p320)

 그러나 베오울프는 물러나야할 때를 안다. 흐로드가르 왕이 그랬듯이 그가 ‘사랑했거나 증오했던 모든 것들’을 등 뒤에 두고 떠난다. ‘왠지 모르게 사악하고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금관의 느낌은 이제 위글라프에게 전해진다.

 놀랍게도 위글라프는 더 이상 마녀라 불리는 물의 여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불린 최고의 영웅들의 노래로 불릴 수 있다는 말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진정 위글라프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대가와 공정한 선물에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기독교적으로 지향되는 인간으로 보인다. 이것은 베오울프의 장례식 장면의 묘사와 함께 의미심장하다.

- 위글라프는 빨간 겉옷을 입고 왕비 옆에 숨어 있는 비쩍 마른 기독교 신부를 보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규율을 지키는 그 아일랜드인은 이 행사에서 공식적인 역할을 맡지 못했다. 베오울프의 장례식은 이 이상한 새 종교가 우위를 점하면서 점점 이 땅에서 사라져자고 있는 옛 방식대로 명예롭게 치러질 터였다. 이 방식이 베오울프의 방식이었고 위글라프 왕의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p380)

또 한 번 놀라운 반전이 끝 부분에 기다린다. 운명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인간. 세계 운명의 실을 잣고 있는 세 자매들은 물의 여인을 비롯한 모든 불멸의 존재들이 끈질긴 인내심으로 기다리는, 인간의 다음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위글라프의 응대에 미소를 지으며 “그럴지도”라고 말한 물의 여인은 사멸하는 존재인 인간의 속성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멸함으로 욕망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성을!  기나긴 시간을 지나온 물의 여인 같은 불멸의 존재들은 '기다리는 놀이‘에 능숙할 수밖에.

 이것은 다시 ‘시간’과 ‘기독교’에 대한 통찰과 비판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산맥까지도 깎아내리는 것처럼,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인간들도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켜야 하는 법이다.’(p256) 

 일찌기 젊은 베오울프는 해변의 전투로 소란이 잠잠해진 후,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자신이 청결한 느낌이 받는데 여기서 그의 각성은 날카롭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오딘과 그의 형제들을 떠나, 살해된 로마인의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 없는 아버지를 섬기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택한 선택과 결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자유롭고 순결하고 깨끗해질 수 있다는 약속에 끌렸겠지.(p257)' 라고 한숨 쉰다.

 종교의 순결한 기능을 우리는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종교 자체가 하나의 감옥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시간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도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위그드라실(세계수,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로서 아홉 세계를 연결함) 아래서 바쁘게 베를 짜고 그 뿌리를 돌보는 우르드, 베르단디, 스쿨드의 손만 믿어서는 될까. 그들이 자아내는 하나하나 경이로운 실들을 보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자아내야하는 것들을 살피는, 좀더 적극적인 세계관을 권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결국 그것도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이 빚어내는 것일 테지만.

(덧; 책의 뒷편에 '용어해설'을 실어두어 낯선 이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부리님, 이 리뷰를 보시려나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어요. Buri부리는 북유럽 신화의 최초의 신이에요. 부르의 아버지이며 오딘의 할아버지더군요. 부리님 몰라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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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4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