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아프리카>를 리뷰해주세요.
눈 오는 아프리카
권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권리,라는 작가를 처음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2004년에 <싸이코가 뜬다>로 한겨례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우선 두가지 제목만 봐도 제목을 좀 특이하게 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기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이다. 2000년부터 42개국 여행을 했으며 앞으로 북한을 가보고 싶다는 젊은 작가다. 이건 정말 대단하다. 난 꿈만 꾸고 있으니. 이 책은 저자가 352일 동안 39개국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써내려간 소설이다. 지도와 함께 세계 여러나라의 유명한 곳을 대리여행하는 재미는 솔솔하다. 그러나 여행안내서 같은 걸 기대하면 곤란하고(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저 소설의 배경으로서 역할한다. 한국에서 유럽, 남아메리카를 거쳐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의 여정이 이어지는데 그다지 소설적인 공간적배경으로 필연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토리의 전개에 반드시 그 공간이 유효적절하다기보다 그 공간에 스토리가 따라가는 인상이다. 그저 주인공 스무살 청년 고유석의 성장기로서의 긴 여정으로 보면 적당할 듯하다.   

저자가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는 후기에서 그는 여행관을 이렇게 적어둔다. - 여행은 제자리 버티기다. 없음에서 버티기, 외로움에서 버티기, 인생이라는 고통 속에서 버티기. 그에게 여행은 버티기 위한 삶으로, 그런 삶의 훈련으로서 한 몫 하는 것 같다. 여행이 그렇듯, 인생도 대개 있기보다는 없음, 충만감보다는 외로움이 자주 자아를 흔들어 놓는다. 그런 생각은 망상과 혼돈의 시기를 사는 유석에게 여행의 기회를 주게 된다. 유석은 저자 자신의 한 부분 또는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가볍고 유머러스한 서술로, 실제 여행을 하면서 겪었고 보았던 일들이 소설 속 에피소드로 재미있게 읽힐 수 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 그것이 사건과 인물의 성장에 모종의 역할을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너무 우연에 기대어 등장하는 건 아닌가싶다. 공간의 이동이 크고 잦고 뜬금없이 바뀌어버리는 통에 혼란스러운 면이 다소 있다. 

음모와 시기 질투, 아버지의 죽음과 그의 자화상에 얽힌 의문, 반전, 해결 등의 사건전개에 미술 예술론이 전개되는데, 이 부분은 좀 천천히 곱씹어 읽어볼 만하다. 이런 부분에선 진지한데 곧 가볍게 능청을 떨며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지 않은 서술을 이어간다. 저자가 이 소설 속에 담은 예술관에 좀더 귀기울여 보면 흥미롭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색다른 표현이 눈길을 끈다. 그야말로 '영감님이 오셨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까지 그가 바라는 건, '한 송이 할미꽃이 피어 있는 영감의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이 된 심정'에 도취되는 것이다. '그렇게 파낸 영감의 정수를 그의 영혼 안에 집어넣고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원래의 자리에서 기능하기를 바라고, 호기심과 욕심을 채울 때까지 그는 미친 속도로 영감의 무덤을 도굴'했다.(95쪽)  하지만 금세 유머러스한 문체로 가볍게 날려준다. - 그는 또한 '영감이 재채기를 하며 무덤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며 '변비 걸린 나,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영감님을 몸 밖으로 토해낼 때가 온다. 봉인되면 해제되는 날이 오듯이.'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끙끙의 시간을 오래도록 가졌다. (96쪽)  이런 식이다.  

눈 오는 아프리카!  이것이 상징하는 건 '영감은 어떻게 오는가?'라는 질문 자체다. 이 물음은 저자가 자신에게,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에게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모작에 재능이 있는 미술대학 재수생 유석은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사람들과 벌인 토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 같은 예술가의 내부에서는 그동안 단순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조합하고 재구성해서 영감을 탄생시키지. 영감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서 탄생되지. 전혀 논리적이지가 않아. 나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영감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술가의 내면에 떠올라서 예술가를 무한한 상상의 기쁨으로 충족시켜 주었다가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곤 하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어. (275쪽)

 
   

 

유석이 가장 사랑한다는 에곤실레의 <변용> 등 두루 등장하는 유명작품들, 화가로서 색을 보는 눈, 예술혼을 불러주는 자신의 마돈나, 예술작품 속의 긴장, 위작과 모작에 대한 이야기가 무겁지 않게 나온다. 특히 유석은 <변용>을 보며 인생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난 이 작품을 보지 못해 모르긴 해도 소설 속에 묘사를 해두었다. 유석은 이 그림을 보며 '예술을 한다는 건 중력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깨닫는다.  "절망으로 절망을 이기려는 사람이 자신 말고도 지구상 어딘가에 또 있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는 구절이 마음에 든다. 스무살 시절, 혼돈과 치기와 자기정체성의 모호함으로 고뇌했던 시간들!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그 시절의 정신세계를 떠올려 주는 구절들을 만날 수 있는 건 장점이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하고 기대 충분한 가능성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작품 전체를 이어가는 정신은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그리고 다시 들어가기'라는 신화에 가깝다. 어둡고 광막했던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 성장한 듯한 그는 자신 안의 어린아이 - 사소한 감정에 넘어지고 헤맨 아이, 최장거리를 날고 걷고 기어서 온 아이 - 를 떨쳐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는 초반에 최교수가 그에게 한 충고를 되돌려보면 두 가지 해답 중 전자를 실천한 것처럼 보인다. - "예술가가 그림자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태양의 바로 밑에 서거나 암흑 속에 자신을 가둬야 한다." (32쪽)  저자는 종결부분에서 여성성에 좀 더 기울어지는 듯하다. 고향에는 홀로 된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며 점심 준비에 바쁘다. 고향이자 어머니는 그를 키우고 나아가게 한 빛과 바다, 빗과 지팡이로 상징된다. 아이다운 영감의 소중함은 강조되고.  

 세계를 돌았지만 성장했다기보다 아이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 유석, 그건 역설적인 의미로 '영감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처럼 들린다. 여행은 돌아오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말은 흔한 말이지만 몇겹의 의미를 가진다. 여행을 삶으로 등치해두고 보면 그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 그것은 나그네의 여정을 떠난 자가 고향으로 돌아옴이고, 다시 아이로 돌아옴이다. 이 책 <눈 오는 아프리카>는 여행을 이렇게 말한다. 성장을 통해 아이다운 진정한 영감을 간직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얼굴로 '빈곤과 행복'이 공존하는 일상의 현실로 돌아옴이라고. 그저 하얀 캔버스일 뿐이었던 '눈 오는 아프리카'는 마음 속에 간직하는 동경의 이미지, 마음의 고향에 가깝다. 그 모든 경계와 습관, 익숙함과 나태함으로부터의 이탈이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일 것이다.       

   
 

어머니라는 빛을 통해 아버지라는 그림자를 지운다. 어머니라는 바다를 통해 아버지의 죄를 씻는다. 어머니라는 빗을 통해 아버지라는 동요를 잠재운다. 어머니라는 지팡이를 통해 아버지라는 미로를 헤쳐 나간다. 마침내 아이는 어머니라는 빛과 바다와 빗과 지팡이 없이도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한다. 색깔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는 영감을 이용해 소박함과 인정, 빈곤과 행복이 있는 곳으로 언젠가 들어갈 것이다. (4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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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며>를 리뷰해주세요.
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살아가다 뜻밖의 재난이 오면 먼저 '왜 하필 나한테?'라는 의문과 함께 그것을 부정하고픈 심정으로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이 책은 21세기의 흑사병이 될지도 모를 알츠하이머 병을 앓게 된 노모를 돌보는 일이 온전히 자신의 임무가 된 딸의 기록이다. 그녀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 일과 가정을 뒤로 하고 어머니의 곁을 지켜주며 7년을 보냈다. 그녀의 50대가 바쳐진 셈이다.  

저자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가 어머니와 나눈 7년간의 작별인사는 지적인 서술이 돋보이며 인간 내면에 대한 겸손한 관찰과 탐구를 바탕으로 한다. 고전과 책의 인용, 철학적 사유, 신화의 인용, 의학계 보고 등 자료를 찾은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녀의 기록은 상당히 침착하고 이지적이며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의학계의 진실, 노인보호요양소의 실태, 여러 의사들과의 면담(환자 보호자로서) 등 현실과 부딪히며 깨달은 점도 느낀대로 적어놓았다. 신파조로 흐르지도 않고 자신의 불행에 도취하여 동정을 얻으려 하지도 않는다. 냉정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정감과 온기를 주는 부분은 특히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대한 고찰을 하는 부분이다. 그 부분마저도 학계의 자료를 바탕으로 중심을 잃지 않고 서술하고 있지만 그녀가 느끼는 작가다운 은유적 언어와 독특한 감성은 이 책을 대단히 품격있게 만든다.  

그녀는 이 기록을 통해 끝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다. 그것은 7년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해왔던 질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재난을 극복하는 지혜로운 방법이기도 했다. '지혜'를 '옳음'의 의미로 끌어안는 저자는 상당히 지혜로와 보인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육신을 육신이게 하는 것은 영혼이라는 것. 삶의 상실감을 떠안고 살아오면서도 늘 사랑스러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어머니가 '영혼의 폐허더미' 속에 오두카니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옆에 앉아 꺼져가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중엔 자신의 시력에도 이상증세가 오면서 하나의 장애로 어머니의 병을 바라보게 된다. 인지능력을 잃게 되는 이 병은 고통조차 알 수 없을 테니 오히려 다른 장애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타인의 입이 틀렸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대화와 인지능력을 상실해가는 어머니에게서 그녀는 한 가지 확신을 하게 된다. 치매를 앓고 있어도 내면에 의미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적인 활동은 이제 완전히 정서에 의존하는 어머니. 말기로 갈수록 '어머니의 말은 논리로서 이해되기보다 오로지 메타포로만 이해되었다'고 한다. 작은 표정의 변화, 다른 중요한 몸짓들 마저도 하나의 상징이었고 그녀의 '자아'를 그 상징을 통해 보게 되었다는 기록에서 저자의 섬세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녀가 "정서"에 밀접하게 다가가 상대를 인정하는 요법에 공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인정요법의 목표는 '기억이란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전에 환자들이 정서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다. 그리스어 '파토스pathos'를 어근으로 만든 'depathia'(무정서증) 라는 단어를 어머니의 상태에 이름 붙였는데, 어머니의 정서는 치매나 우울증과는 다른 종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란다. 행복감이나 안도감 같은 건 전혀 없이 오로지 절망, 두려움, 분노 같은 어두운 정서만 보인 어머니의 정서를 이름한 것이다.

 

   
 

- 사람들은 원인을 잊으면 결과적인 고통도 없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서란 것은 노랫가락처럼 그 원천이 잊혀진 지 한참 후에도 머뭇거린다. 분노, 두려움, 후회는 뇌의 폐허더미에서 귀신처럼 서성거린다. 음악적인 비유를 하자면, 가사를 까먹은 지 한참 후에도 머리에 희미하게 달라붙어 있는 곡조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이란 것은 그것을 일으킨 사건이 사라진 다음에도 오랫동안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다. - 222쪽 

 
   

 

저자의 기록을 읽어가다보면 초반의 이지적, 객관적 성격이 점점 정서(감정)적, 주관적 성격으로 조금 더 기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그리스인들의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고대 히브리인의 언어에 매료된다. '히브리어에는 전반적으로 정서를 아우르는 말은 없지만 사랑, 증오, 욕망, 즐거움, 슬픔, 심지어는 전도서에 나오는 권태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 풍부했다.'(246쪽)  감정을 조절하는 뇌에 대한 연구기록을 찾고 폐허더미가 된 어머니의 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그 노력마저도 어머니의 두려움을 진정시키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안도감을 느끼려는 그녀의 노력은 가상하다는 말로 부족해 보인다. 

기록의 후반에서 내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생각이 있었다. 의무를 행하는 일에 대한 미덕과 의무를 행하는 일의 핵심은 비실용성과 비합리적인 행위에 있다는 저자의 글이다. 그것은 죽음을 보내는 일에 관해서도 비효율성, 비실용적인 것을 믿는 문제다. 그녀는 '단순히 편리한 것만 선택하는 일은 우리가 죽은 자에게 보여야 할 존중심을 감소시킨다. 그런 의식에는 노력이 들어가고, 시간이 소요되며, 우리 삶을 방해한다.'라고 적었다.(289쪽)  그녀는 화장이 좋겠다는 생각을 이제 바꾸게 되었다. 어쩌다 볼 수 있는 기나긴 장례행렬은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생각해 볼 시간과 기회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광경을 거의 볼 수 없다'며, 이런 사라짐이 우리를 더욱 빈곤하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합리성에 경도될 만한 서구 사고방식의 반대편에 있는 의견이다.

저자는 (끝내,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 어머니가 죽음을 향해 걸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에 스텝을 맞추며 함께 춤을 추었다. 이제 그녀는 죽음에 내어준 어머니를 회상하며 '우아한 문자 DNA'에 새겨져 흐르는 메세지로 생명과 사랑을 예찬한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하느님의 역사가 대부분 그렇듯, 사랑도 양날의 검이다. 우리 안에는 사랑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 사랑의 시작은 본능적인 일이겠지만 결국은 선택이다.(295쪽)'라고 말하는 저자는 종교적 신념 너머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인 것 같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인데 그 두려움(생후 6개월이 지나야 느낄 수 있다고 함)에 대한 두려움은 의도적으로 재난의 무작위성에 무지하게 만든다. 이오네스코의 '레퀴엠'이 죽음이 다가온 왕 - 이는 은유적 의미로 모든 사람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왕이니까. - 에게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라는 훈령이라면 이 책은 죽음의 폐허더미에 갇힌 왕과의 대화이고 춤이다. 허물어져가는 육신과 정신에 대한 애정 충만한 보고서로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물론 잠재적 재난자인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중요하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그렇지만 필연적으로 죽게 될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 기억을 혼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의무를 행하는 일은 기억을 맑게 유지시킨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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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6-23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대해서 아무생각없이 살아왔는데, 프레이야님 페이퍼를 보니 또 생각할 꺼리가 생겼습니다. 고추를 말리다가 장독대에서 떨어져 뇌가 으깨놓은 두부처럼 되어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도 나구요.

프레이야 2009-06-23 02:41   좋아요 0 | URL
아.. 반딧불이님 _()_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 아무 생각없이 살아갈 겁니다.
돌아갈 때 육신의 온전함에 대한 생각도 솔직히 써놓았더군요.ㅜㅜ

비로그인 2009-06-2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말할 수 없이 슬펐지요..
어렸을 적의 어머니와 돌아가실 때의 어머니가 너무 달랐습니다.
그점이 더 슬프더군요..


프레이야 2009-06-24 19:26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_()_
저도 어렸을 적 어머니와 지금의 고희가 된 어머니만 비교해도 참 다르다 싶거든요.
마음이 짠해지는, 그런 것이요. 아름다웠던 그 미모와 꿈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정미경의 소설 읽기는 겨우 두 번째다. 2002년도, 그녀의 비교적 초기작이라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데 세련되게 정제된 것보다 이런 느낌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그러나 거칠다는 느낌과는 다른 거침없다는 표현이 맞겠다.

 6편의 단편들 속 인물들은 삶의 주변부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상실감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보다 그 속에 미치도록 침잠해서 그걸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깊이 내려앉았다가 제대로 바닥을 치고 올라올 것 같은 희망을 넌지시 암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도덕적 결말을 강요하거나 삶은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두 시간이면 끝나는 영화’와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삶은 다르고 그래서 ‘방금 물이 빠진 갯벌 위에 선 것처럼 자꾸만 내 발바닥을 지그시 잡아당기는 어떤 힘에서 발을 빼내는’ 사람의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지켜봐주는 식이다. 인물들은 소리 없이 울고 있고 분노하고 있고 삶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데 그 울분에 응대해 주는 이런 방식이 독자에게 오히려 힘이 될 수도 있다. 그점에 끌린다. 그리고 위안 받는다. 이야기마다 허를 찌르는 반전과 신산한 삶을 쓴물이 올라오도록 씹는 문장들에 매료된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

 여름이면 아무 곳에나 피어나는 나리꽃 주황빛의 방만함처럼 추억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바로미터가 되어줄 수 있을까. 주인공은 그렇다고 대답할 듯하다. 그러나 그를 협박하러 온 해결사는 하찮은 진실 따위엔 눈감고 힘을 확인하고자 하는 자의 바람대로 해주어버리라고 말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잖아. 안 그래요?”(p36)  이 단편은 사진찍기와 찍히기의 관계처럼 나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실의 오도를  ‘길지도 않은 생에 피사체와 용도가 다른 사진들을 무수히 찍어온' 한 남자의 비루한 타협을 통해 보여준다.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볼 뿐 대상의 진실과 속울음에 가까이 가본 적이 없는 우리가 안아야할 슬픔이다. 나와 대상 사이에 그놈의 기물이 있기 때문일까. 추억도 사진도 기만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호텔 유로 1203}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p50) 이 문장에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비애가 묻어난다. 사랑에도 직업에도 물질적인 면에서도 박탈감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 라디오작가가 등장한다. 말을 더듬지 않아도 늘 더듬는 인상을 주는 남자를 떠올리는 여자는 그녀의 생이 그렇게 더듬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가 더욱 싫었던 것일까. 명품에 중독되어 숨을 쉬듯 도벽을 일삼고 밤 아홉시에 약속된 호텔을 찾아가는 그녀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에 코웃음 친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알고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녀, 세 번째 우려낸 차처럼 담백한 관계 같은 그 지점에서 멈추고 싶어 하는 그녀. 사람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아이러니한 초상에 욕망의 공허함이 배어있다. 스산하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2년 연애, 7년 결혼생활을 한 남자의 갑작스런 죽음 후 열정의 윤리로 살아온 그의 이면을 보게 된다면?  '전등사를 보지 못한 그날을 전등사 갔던 날로 이름 지었듯 뭔가가 빠져 있는 그대로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거지.' (p136)  배반감을 극복하고 그녀가 모자란 사랑을, 피투성이의 잔혹한 연인을, 받아들이는 결말을 통해 파도처럼 맨살을 난타하는 잔혹한 삶을 끌어안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라는 혼잣말은 삶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물어뜯으면서라도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삶에의 애착이다.

 최승자의 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가 떠올랐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오   (일부)

 여자는 살면서 일어날 수 있었던  ‘어떠한’ 일들에 하나하나 딜리트delete 키를 누르고 죽지 않을 정도의 가려움증까지 견뎌보려는 것이다. 긍정적 기운이 느껴지는 이야기이면서 신산한 바람이 동시에 느껴진다.

{성스러운 봄}

 어린 딸의 오랜 투병과 죽음으로 생의 노래를 잃고 우주의 빛을 잃고 가정의 단란함마저 잃은 남자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 그걸 또 늦게 깨닫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p168).' 우리가 힘겹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천상의 음률을 들을 수 있는 삶의 절정은 언제일까. 이미 지나갔을 수도 앞으로 올 수도 있겠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교과서적인 답을 해보지만  마음은 늘 모래를 씹는 듯 서걱거리고 마음속에 들어앉아있을 봄도 도무지 기지개를 켜지 않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난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유리잔처럼 깨어져 어지럽게 흩어진 생에 대해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그에겐 다행일 것이다. 봄이면 꽃망울이 터지듯 그렇게 진즉에 터뜨려야 할 것을.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 대과거의 내적 오버랩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의 영화로 탄생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소 여인}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라는 명제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 우리들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들에 미량으로 들어있는 비소, 정확히는 비소 화합물. 그것의 음험한 작용과 중독성을 빌어 생을 모질게 사랑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일몰의 광경을 담담히 지켜보듯 존재의 소멸을 지켜보며, 소멸해가는 존재가 자신의 보살핌에 감읍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비로소 생의 허기를 채웠던 여자. 그녀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고 품고 쓰다듬어주는 남자 또한 생의 회의나 존재감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개미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생의 만복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먹어도먹어도 끝없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지도 모른다. 단지 어제의 허기를 기억의 회로에서 지우면서 오늘을 맞이할 수밖에. 비소 여인처럼, 누가 나를 용서해주지?, 스스로에게 용서의 말을 뇌까리며.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영화 ‘말리와 나’속의 존 그로건은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다른 존재로서 가족을 재발견했다. 19년이라는 길거나 짧은 생을 통해 빛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단편에서는 어느 골목길의 ‘지독히 일상적인 삶의 풍경’을 영화를 공부하는 남자의 카메라를 통해 그린다. 인간 군상이 그리는 그 일상적이랄 수 있는 풍경이 과연 일상적일까. ‘하긴 누가 누구에게 이 생을 거짓 없이, 착각 없이, 헛된 사랑 없이, 백일몽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을까 (p232)' 일상을 견디는 힘은 비일상적인 걸 꿈꿀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싸구려 픽션보다 더한 굴곡을 이면에 감추고’ 빛이 감추어주는 이면의 것들에 눈감고 살아가기. 달처럼 우리 존재도 스스로는 빛날 수없는 것, 달이 둥글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때로 풍만한 만월이 되고 낙천적인 반달이 되고 예민한 그믐달도 되고 연약한 초승달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어 줄 수 있을까요?” 승우의 마지막 물음에 “모르겠어요”로 응대한 정은. 그녀가 질퍽하고 노곤한 갯벌에서 발을 빼고 한 편의 영화보다 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가볍지 않다.  그 어깨는 단단하고 때론 유연할 것이다. 정미경 소설이 그렇듯이. 그리고 그 속의 인물들처럼 생을 사랑하는 방법에 왕도는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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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9-02-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풍기는 강렬함에 압도당하는 분위기입니다. 삶, 사랑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깊이 생각할 수록 고뇌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소재들이기도 하죠.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이 싯구에서는 사랑의 간절함, 처절한 소유욕까지 느끼게 되는 데....저만의 생각일까요?

프레이야 2009-02-26 17:0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그 제목이 참 강렬하다 느꼈는데 읽고보니
그게 그것이더군요.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실감도 크다고 하더군요.^^

hnine 2009-02-2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도서관에 갈때마다 찾아보는 책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인데 아직도 기회가 안 닿았어요. 이 작가 팬들이 참 많더군요. 부군이 그림 그리시는 김 병총님 맞지요? 혜경님 리뷰 읽고나니 기필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이야 2009-02-28 22:02   좋아요 0 | URL
네, 김병종님요^^
저도 어느분의 강추로 구입해서 뒤늦게 읽게 되었어요.
정미경, 상당히 매력적이더군요.

맥거핀 2009-03-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글 남기고 가셨었는데, 제가 좀 게을러 이제서야 들러봅니다.^^
정미경 작가님은 예전 이상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나뉘어라>로 관심가졌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네요. 인간의 감정을 잘 드러내보였던 작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실 덧글 달 생각을 한 건 최승자 시인 시가 있어서요. 좋은 시지요.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났네요.

프레이야 2009-03-13 07:39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오셔서 반가워요.
영화 리뷰를 통해 알게 되어 기뻤는데요..^^
정미경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배신 - 21세기를 사는 지혜 인터뷰 특강 시리즈 5
김용철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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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세 번째 녹음도서 낭독용으로 고른 책이다. 도서관 녹음실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중에서 대개는 내가 고르고 간혹 회원(시각장애우)의 신청도서가 있는 경우는 그걸 우선으로 한다. 이 책은 ‘제5회 한겨레 인터뷰 특강-배신’을 모아놓은 것이다.

 사회자 오지혜 씨뿐만 아니라 여섯 명의 인터뷰이에 마음이 쏠렸다. 그녀의 연극은 한 편도 보지 못했고 영화 ‘잘 살아보세’에서 줄줄이 딸만 낳는 며느리로 아들을 원하는 시어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또 가졌지만 낙태를 위해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는 70년대 초반 충청도 시골여자, 또 다른 영화 ‘안녕, 형아’에서 소아혈액암을 앓고 있는 아들을 오래도록 간호하며 소리 내지 않고 울기 위해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우는 방법을 다른 엄마(배종옥)에게 가르쳐주며 담담한 미소를 짓는 어미로 만났다. 68년 생 그녀는 이 인터뷰 특강의 사회자로서 재치와 지성과 활달함을 겸비하여 특강내용과 청중의 질문에 초점을 잡아주고 흐름을 매끄럽게 하는 데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눈으로만 읽은 게 아니라 입으로 읽음으로써 마치 내가 인터뷰이 또는 인터뷰어, 청중이 되어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김용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진중권,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정재승, 전 대통령비서실 국민경제비서관 정태인, 서울대 법대교수 조국(작년 3월24일에서 4월8일까지 인터뷰 차례순). 책날개에 있는 저자 약력으로 읽은 간단한 프로필인데 이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프리즘을 통과하는 매력적인 이들의 유익한 특강과 청중들의 질문에 구체적이며 현명한 해답을 내려주는 내용들을 다 읽고 나면 시원함을 부르는 감동과 함께 두 가지의 질문이 남는다. 배신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렇다면 배신이 지혜가 되는 전복의 쾌감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이다.

 배신이란 무엇인가,는 정재승이 꼭 생각해보라고 한 질문이기도 하다. 배신이라고 하면 악덕에 해당되는 낱말이지만 이것을 미덕으로 발휘한 이들 여섯 명의 공통적인 주장은 단적으로 보다 큰 집단, (사사로운 조직이 아닌)공공의 이익과 정의를 위해서는 과감히 배신을 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대의를 위해 소수의 의견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뜻과는 전혀 다르다.

 책의 순서와는 달리 정혜신의 ‘배신의 정신분석’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행동의 동기를 이해하기보다 현상부터 보는 대부분의 우리는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는 일은 많아도 내가 배신을 행했다고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데에서 ‘유사배신’이란 말이 탄생한다. 배신의 고갱이는 '헛된 믿음'이지만 ‘기본적인 신뢰감’(basic-trust)이 훼손당하면서 존재 자체가 거부당할 때 우리는 배신감을 느끼고 그것은 성장 후에도 정신병적 증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 ‘배신감의 과잉상태’에 허덕이는 우리는 무엇이 진짜 배신인지 객관적인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길이다. 사랑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것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올바른 의미는 아니지만)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 김용철은 작년 4월 특검에게 배신당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배신의 대가는 오직 양심의 자유’라고 하며 이런 공식을 남겼다. “영향력과 권력의 크기는 대중과 최고권력자와의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한다.” (p34)  특강 뒤에 이어지는 청중의 질문과 답변에서 다른 인터뷰이들의 것보다 가장 직선적이고 우직함과 솔직함이 돋보였다. 이 특강의 주제 '배신'이 나오게 된 배경과도 가장 직접적으로 닿아있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주 배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진중권은 대중을 끊임없이 배신하며 대중에 영합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논객이되 입장을 바꾸지 않는 먹물이고 싶어 한다. 그가 경비행기 마니아인 줄은 처음 알았다. 니체가 이렇게 이야기했단다. “니체를 읽고 니체주의자가 되는 것은 니체주의가 아니다. 니체를 읽고 너 자신이 되어라.”(p149) 황우석 사태와 디워 사태 때의 이야기를 비롯해 그의 이야기는 명쾌하고 거침없이 달린다. 자기(올바른 논객)를 믿지 말라고, 언제 우리(대중)를 또 배신할지 모르니까.

 과학콘서트로 유명한 정재승은 배신은 동물의 본능이라며 배신의 다양한 유형을 설명한다.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에서부터 약속의 파기나 계약의 불이행, 감정적 부정(不貞), 얻은 만큼 돌려주지 않는 경우, 그리고 무임승차(free fide)까지. 이렇게 배신의 개념을 늘여놓고 보면 어느 누구도 배신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임승차는 그가 주로 연구하는 주제로,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TV시청료를 내지 않는 것에서부터 우리 모두가 공공재를 사용하기 위해 내고 있는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부정을 저지른 삼성이야말로 배신의 한 유형인 무임승차를 한 셈이라고 한다. 김용철은 침묵의 카르텔을 깬 배신자가 되겠지만 이런 배신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있는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내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보편적인) 집단에 대한 신뢰를 지키려는 노력은 인간 외에 그 어떤 동물 집단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p184) 그런점에서 올바른 배신은 가장 인간적인 행위로 보인다.

 정태인은 현 정권이 추진하는 경제의 배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귀에 쏙쏙 들어오는 식이다. 한미FTA가 다른 FTA와 다른 큰 특징은 네 가지 독소조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네거티브 리스트, 래칫(rachet)조항, 미래의 최혜국 정책, 투자자-국가제소권(ISD). 각각 간단히 요약하자면, 개방하지 않을 분야를 쓰는 것, 거꾸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 일본에 해 준만큼은 미국에 해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게 ISD(invertor-state dispute settlement)인데 정부의 정책이 기업의 이익을 ‘상당히’ 침해하면 쓸 수 있는 제도다. 미국기업이 행정소송을 했을 경우 어떻게 그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며 chilling effect를 든다. 우리 정부는 스스로 쫄아붙어서 알아서 제약하고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은사특권’(오지혜는 재미있게도 고추말리기 심리라고 했다)에 대한 기대로 ‘내가 이길 수 있다’라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의 믿음보다는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극복할 수 있다며 중립지대를 형성하여 어느 한 쪽의 패권을 견제하는 캐스팅보트(casting vote)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대학과 지식인들의 천박한 배신을 말하는 조국은 국민참여재판을 제안한 바 있다. 법은 무관심한 대중에 서비스하지 않는다고 하며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웹사이트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귀띔한다. 늘어나는 폴리페서(polifessor)들의 윤리와 책임의식,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왜곡된 의미로 선전된 진정한 법치의 정신을 말하는 그는 지식인은 자신의 존재기반, 계급기반, 생활환경과 자신을 떨어뜨려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내부를 성찰하고 그 밖에 공공의 이익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직시하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민주, 인권, 평등, 분배, 복지, 관용 등의 진보적 가치를 소중히 생각한다면 그 가치를 말하고 외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 영역에서 조그맣게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할 때 진보는 현실화 된다고 생각한다.”(p293)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이야기하며 인용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나톨 프랑스의 야유 섞인 말은 우리 사회 법률가들이 법의 정신을 배신하고 있는 데에 대한 일침이다. “법은 그 장엄한 평등 속에서,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부자에게도 다리 밑에서 자고 거리에서 구걸하고 빵을 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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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1-31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고마워요, 혜경님!

프레이야 2009-02-02 04:47   좋아요 0 | URL
만족하실거에요. 빌려 읽어도 좋을듯해요.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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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엄마가 된 건 스물여덟 살 때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 소꿉놀이 시절의 엄마역할 때부터였을까. 그때부터였다면 난 그때 엄마역할에 만족했었나? 분명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역할이나 굵은 목소리를 내는 아빠 역할을 더 하고 싶어했다. 몇 명이 어울려 놀 땐 역할을 바꾸기도 했지만, 혼자 소꿉놀이를 할 때면 자연스레 나는 엄마가 되어있었다. 그리 바라지도 않았던 역할인데도.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이기를 강요당한, 엄마가 필요했던, 영원히 딸이고 싶었던, 딸의 이야기다. 작품 속에는 박소녀를 비롯해 두 딸이 나온다. 그들 세 딸 안에 ‘엄마’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숨거나 드러난다. ‘엄마’들은 복합적으로 내 안에 살고 있는 세 가지 얼굴이기도 하다. 거부하고도 싶고 애틋한 연민이 일기도 하고 굳세게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책장을 다 덮고 나니 모순으로 상충하는 내안의 엄마, 를 부탁하고 싶다는 자조의 말이 슬몃 나오기도 했다.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진짜 이야기는 오래전 엄마가 어린 아이였을 적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스토리는 도시적인 생활을 해온 독자가 보기에는 현실감이 없을 정도다.(그럼에도 어디서나 본 듯한 소눈을 가진 여인으로 누구나에게 기억됨으로 보편성을 얻는다)그만큼 박소녀가 넘어온 생의 굴곡이 험난하고 그녀 삶은 가시울타리 안의 것처럼 보인다. 빠져나가려면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어서 차라리 돌아서 앉아 울음을 삼키는 게 나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로서 살아야하는 가시울타리 안의 삶을 슬픔과 절망만으로 덧칠하지 않았다. 독특하게도 화자를 달리하며 육성으로 들려주는 듯한 박소녀의 징글징글한 삶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환희와 자부심이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엄마'에게서 희망을 읽으라면 그런 곳에서 찾고 싶다.

 그녀의 삶은 두터운 한 권의 점자책이다. 점자도서관에서 점자책을 앞에 두고 느꼈던 일로 소설가 큰딸이 엄마를 알아가는,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엄마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대로 보고 역할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발목을 붙잡고 있진 않았는지. 엄마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한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보고 만진다 해도 해독이 되지 않는 점자책 앞에서 까막눈으로 살아온 딸의 회한이 낡은 필름처럼 이어진다. 글을 못 배운 인간 박소녀가 큰딸이 쓴 소설이 자랑스러워 그걸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어서라도 읽은 것,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불우아동에게 나눈 것, 생의 고비마다 정신적인 힘이 되어준 비밀 같은 사람에 대한 소중한 추억. 그런 것들을 다 열거하지 않더라도 이름처럼 ‘소녀’의 꿈을 안고 살았던 엄마도 외국의 낯선 풍광에 빠져보고 싶고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장미묵주를 그래서 상징적으로 갖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밝은 면을 보는 쪽은 딸보다 오히려 아들이었다. 엄마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삶을 그렇게 슬프게만 생각하는 건 우리의 죄의식이 갈구하는 하나의 자위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딸은 좀 다르다. 특히 작은딸은 아이를 셋이나 두고 전문직까지 있으면서 안팎으로 힘든 생활을 꾸려가면서 생각한다. ‘과연 엄마가 부엌에 들어가는 걸 진짜 좋아했을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어.’ 사회적 역할은 물론이고 아들과 딸이 당면한 소소한 문제들이 다르니 딸이 보는 엄마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애잔하다. 엄마라는 자리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덕목이 희생이나 인내, 자비 같은 것이라면 박소녀는 아주 적격의 엄마이지만, 그녀도 딸에게 소리치고 투정할 때는 엄마가 아닌 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성인이 된 딸은 엄마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큰딸에게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큰딸은 아직 진짜 엄마이진 않지만 늘 엄마가 안타까운 그래서 어쩌면 엄마 되기를 미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머나먼 땅, 피에타상 앞에서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하며 속죄라도 하려는 것일까. 이제는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진 엄마에 대한, 동시에 내재된 자신의 '엄마'에 대한 좀 더 홀가분한 주문 같기도 하다. 여동생은 엄마를 포기하지 말고 찾아달라고 언니에게 부탁했지만 언니는 오히려 엄마를 놓아주고 싶어한다. 엄마에게 무기한의 자유여행의 시간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으로 읽힌다.

 두 딸들과 아들에게 엄마 박소녀는 실종자로 남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몸을 숨긴 건 아닌지, 상상해보면 슬근슬근 웃음바람이 난다. 투명인간처럼 혹은 전지자처럼 보고 듣고 서술하며 자신의 모든 걸 토로하는 마지막 장에서 그녀는 오래전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 온정에 대한 갈망,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염없이 풀어낸다.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그 어조가 아련한 슬픔 위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하다. 그녀에게도 그녀처럼 품 넓은 ‘엄마’가 필요했음을, 뒤늦은 후회를 하는 남편과 아들은 딸보다 더디 아는 것 같다. 수많은 엄마와 그 속의 '엄마'는 오늘 하루도 잘 지내셨는지, '엄마'를 잃어버린 우리들 가슴에 '엄마'를 회복하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p262)

 작은딸이 큰딸인 언니에게 눈물로 쓴 편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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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8-12-3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저도 이 책을 눈물 찔끔거리며 읽었답니다.
친정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지라
작가 엄마의 이야기에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프레이야 2009-01-03 19:23   좋아요 0 | URL
신파조라는 말도 있지만 공통분모 같은 슬픔의 정서가 묻어나요.
그렇군요, 소나무집님.^^

순오기 2008-12-31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전에 읽었지만 리뷰를 쓸 수 없었던 책.
올해가 가기 전에 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
그댁의 엄마는 안녕하시겠죠.

프레이야 2009-01-03 19:24   좋아요 0 | URL
엄마는 안녕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요.
엄마로서 강건하기를..

BRINY 2008-12-3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이 왜 이 책 리뷰를 안쓰실까 궁금했더랬습니다.

프레이야 2009-01-03 19:24   좋아요 0 | URL
브리니님, 그랬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