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할아버지와 집 없는 아이들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
나탈리 새비지 칼슨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박향주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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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책임이 전제하지 않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속박의 반대 개념으로 단지 자유가 존재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라는 것이 단지 이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구속도 책임도 싫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르망은 마음이 보일까봐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 걸고 사는 할아버지다. 그런 사람이, 다리 아래로 좇겨난 아빠없는 세 명의 아이들을 만나고 부터 조금씩 변하게 된다. 천사같은 아이들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들키고, 그 아이들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게된다. 차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면서 한 가족이 된다. 아이들의 자존심 강한 엄마도 아르망의 진심을 알고 가족으로서 그를 따뜻하게 대한다. 속박이 싫어 일거리도 마다하던 아르망은 건물 관리인을 자청하고 덤으로 집도 얻게된다. 약속대로 아이들에게 집을 선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르망이 스스로 얽어맨 책임의 사슬이 결코 구속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보이고, 또다른 마음을 받아들이고, 정을 베풀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는 것은, 모래알 속에 반짝이는 진주알처럼 귀한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함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의 아이들이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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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 과외 난 책읽기가 좋아
로리 뮈라이유 글, 올리비에 마툭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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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최윤정이 옮긴 글이라면 손이 가곤 한다. 프랑스어로 씌어진 좋은 책을 소개하려는 그의 열정이 늘 맘에 들기 때문이다. 그가 고른 책들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선하다. 뒤집기도 주특기로 돋보인다.

<놀기과외>는 제목에서 부터 어떤 이야기인가를 약간은 짐작해볼 수 있다. 과외에 찌들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를 꽉 차게 끌려다니는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을 대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똑똑한 아이 라디슬라스는 학교를 마치면 요일별로 빡빡한 과외수업과 현장학습 같은 것을 받느라 무척이나 바쁘다. 당연히 놀 시간이 없다. 친구랑 어울려 놀 줄을 모른다. 라디슬라스에게 놀기란 아주 생소한 과목이다. 그런 아이가 예기치 않은 일로 첼로 과외를 빠지게 되고 친구 앙뚜안의 집에서 '놀기'를 시작한다. 완벽한 라디슬라스도 못 하는 것이 있다. 그림그리기. 그림 과외를 핑계로 놀기 과외는 제대로 되어간다. 거짓말은 드러나지만, 라디슬라스의 아버지도 무엇이 정말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짜여진 틀 속에서 가두어 양육되는 데 너무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그 틀을 들어내어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발을 뗄 줄 모르는 아이가 될까 두려운 생각이 든다. 정말, 아이 제대로 키우기 힘이 든다. 순간 순간 결심과 후회가 번갈아 가면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오늘만 해도 아이를 대한 엄마로서의 나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속상하다. 어디까지 수용적이어야 하나? 아이만의 발상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리지는 않았는지? 아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주 하게되는 고민이다.

내일은 영어학원을 결석시키고 부산 동화읽는 모임에서 마련하는 도서관 행사에 아이를 데려갈 생각이다. 현덕의 작품세계로 나들이 간다. 아이도 아주 좋아라 했다. 그런데 이것도 내가 미리 짠 틀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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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 길벗어린이 문학
모리스 드뤼옹 지음, 자끌린 뒤엠 그림, 나선희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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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이야기가 현실의 구석구석 어두운 면에 닿아 어여쁜 꽃을 피우는 이 한편의 동화가 내 마음의 우울한 한 구석에도 화사한 꽃을 피웠다. 풀빛 엄지손가락을 가진 티스투는 과연 천사였을까?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티스투가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꽃을 피우면 해결되는, 어쩌면 간단한 모순덩어리였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감옥, 답답한 병실 그리고 가난이란 짐을 안고 사는 빈민촌, 이 모든 곳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 아주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티스투는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있는 동물들에게도 적합한 식물을 선사한다. 티스투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숨통을 틔운다.

전쟁을 아무도 다치지 않게 끝낸 것은 평화의 천사 티스투만이 할 수 있는 일일까? 그 모순과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어느 구석 지금껏 끊이지 않는 전쟁의 본모습은 의외로 단순하다.

전쟁이란 많은 것을 잃게 만드는, 가장 크고 무서운 무질서이며 '상대방의 설명을 듣고 의견을 말하다가 갑자기 퍽! 따귀를 맞는 것'이라고 티스투는 생각한다. 전쟁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티스투는 대포마다 꽃씨를 뿌리고 풀빛 엄지손가락을 대어 꽃을 피운다. 불바다를 이루어야 할 전쟁터는 온천지가 꽃 투성이가 되어 더이상 전쟁이란 지속될 수가 없다. 막연하지만, 전쟁에 대한 허상과 그 방안까지 그리고 있다.

사람보다는 꽃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무스타슈 아저씨와 마구간의 짐나스틱하고만 비밀을 나눈 티스투는 닮은 점이 있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같은 것이 작가에게는 있는 지도 모르겠다. 티스투가 세상에 남아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었을 수도 있을텐데, 왜 무스타슈 아저씨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을까?

짐나스틱을 통해 '티스투는 천사'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작지만 큰 일을 하고 간 티스투를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티스투가 세상에 남아있었다면, 모든 것에 빨리 적응하여 중요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현상으로 그쳐버릴 수도 있었을까? 티스투를 하늘로 올려보낸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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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 요켈과 율라와 예리코 일공일삼 3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에디스 쉰들러 그림, 김경연 옮김 / 비룡소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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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반은 여자, 반은 남자라고 공공연히 말하면서 그들이 가지는 것은 어쩌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을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남자와 여자라는 영원한 친구가 진정 아름다운 관계로 살아가려면 최소한 어떤 모습이라야할까 라는 물음에 쉬운 예를 보여주며 대답하는 이야기이다.

요켈과 율라. 이들은 서로 닮아있고 남과 같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비슷하다. 한 눈에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끌리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서로 다른 쪽 발이 짝짝이라 불편한 신발을 서로 바꾸어 신고 기뻐한다. 둘은 뭐든 서로 도와가며 해결하려들고 가진 것은 뭐든 나누어 갖는다. 사랑스런 개, 예리코와 햄스터, 요켈의 부모님까지도.

남자라서, 내지는 여자라서 라는 어투는 이야기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율라는 결코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달라고 요구'하고 '요구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왜 안 해 주느냐고 묻'는다. 순종과 인내만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답답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 율라는 신이 나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자신의 감정을 유쾌하게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절반은 서로의 것이다. 평등하게 나누어 가지는 것의 의미와 즐거움을 알고 있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도 이런 즐거움이 평생 따라다니기를 바란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고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의 영원한 친구이기를 바란다. 요켈에게 없는 것들을 율라에게서 얻을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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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일공일삼 6
페터 헤르틀링 지음, 페터 크노르 그림,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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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당해서 아름다운 할머니를 만났다. 늙음을 안타까와하며 노후를 의지할 자식에 연연해 할 수 없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니, 그런 형편이 되었다해도 결코 그런 나약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 것 같은, 칼레의 할머니이다.

67세에 부모잃은 손자를 혼자서 키워내야할 의무를 안게 되는 할머니의 이름은 에르나 비텔. 당당하게 문패를 만들어 붙여두는 할머니다. 어린 손자와는 사사건건 부딪히지만, 함께 광고용지를 돌리고 생활보조금을 억측스럽게 타내어 누구보다 씩씩하게 살아간다.

자기연민에 빠져 슬퍼할 겨를도 없고 생활고에 시달려 허덕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무기력한 신파조의 삶을 사는 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서 샘솟는 활기를 느꼈다. 신선한 삶의 그림이었다. 삶을 자신의 양어깨로 당당하게 떠받치고 사는 노인의 모습이야말로 어린 칼레를 성숙하게 하는 말없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강하기만 한 할머니가 2주간 병이 난다. 서로에게 놓인 60년이란 엄청난 세월의 강을 단숨에 뛰어넘어 이 두사람은 강한 끈으로 묶여있음을 발견한다. 혈육의 끈, 서로에 대한 사랑과책임감의 끈이다. '그저 지금처럼만 살게 되기를' 바라며, 할머니는 '칼레의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텐데' 라고 생각한다. '아무렴 날 위해서는 아니고말고', '어쨌든 손자를 위해서'라고 못박는다. 독자는 할머니의 속마음을 읽는 재미가 솔솔하며, 겉으로는 강해보이는 할머니의 약간의 갈등과 자책을 엿보며 할머니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다.

이 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생각도 에르나 비텔 할머니와 비슷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효자식이란 소리를 듣게될까? 그것 이전에, 자신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에 당당해 질 수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면, 소외니 외로움이니 따윈 먼거리의 얘기가 되지 않을까? 먼 훗날 할머니가 될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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